문선명 평전
제1장 탄생은 깨달음을 위한 것이었다
4. 기도중에 계시를 받다
산과 들, 냇가에 뛰어다니기만 하던 문선명은 10살(1930년) 때 드디어 동네 글방(서당)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루에 책 한 장만 마스터하면 됐기 때문에 후다닥 외우고는 훈장님 앞에서 검사를 받았다. 논어, 맹자를 시작으로 한자를 배웠는데 글씨를 곧잘 썼다. 지금 통일교회와 기관 곳곳에 문선명의 한문 휘호가 여럿 남아 있는데 -보통사람이 그것을 평하기는 어렵지만- 기백이 넘치는 글씨임은 분명하다.
한문과 고전을 배우기는 했어도 문선명은 서당이 아니라 신식학교를 다니고 싶어 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삼촌, 사촌동생을 설득해서 소학교로 가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소학교 입학이 아니라 중도 편입이었기 때문에 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그를 위해 우선 원봉학원에 들어가 편입 공부를 했다.(圓峰学院은 기록이 명확하지 않는데 1927년 7월9일 [동아일보]에 평안남도에 있는 개량 사숙(私塾)으로 표기되어 있다). 1935년(15세)에 편입시험을 치고 드디어 오산학교에 들어갔다. 남들보다 늦었지만 공부를 잘해서 5학년으로 월반했다. 오산학교는 집에서 20리나 떨어져 있었으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확한 시간에 걸어 다녔다.
오산학교는 독립운동가 이승훈(李昇薫, 1864~1930) 선생이 세운 민족 학교라 일본말을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문선명의 생각은 달랐다. 지피지기(知彼知己), 적을 알아야 나를 알고, 그래야만 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편입시험을 쳐서 정주공립보통학교 4학년으로 옮겼다. 그때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학구열이 대단해서 1~4학년 교과서를 보름 만에 다 외웠다 한다. 자서전에 따르면, 또 졸업할 때 정주읍의 유지들이 모인 앞에서 연설도 했다 한다. 그때 감사하다는 축사를 한 것이 아니라 전혀 예상 밖의 말을 했다.
"일본인들은 하루빨리 보따리를 싸서 일본으로 돌아가십시오. 이 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대손손 살아가야 할 조상의 유업입니다!"
이 말이 문제가 되어 일본 경찰에게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었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려 할 때 경찰서장이 도장을 찍어주지 않아 상당히 애를 먹었다. 결국 경찰서장과 담판을 지은 다음에야 간신히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원하던 신학문을 배우고, 일본어도 배울 수 있어 학문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었지만 집안 형편은 그리 좋지 못했다. 16살 무렵 13남매 중 5명의 동생이 한 해에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 정확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는데 전염병으로 추정된다. 한꺼번에 자식 다섯을 잃은 부모의 상심이 매우 컸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끔찍한 일은 마을 곳곳에서 계속 일어났다. 멀쩡하던 소가 갑자기 죽고, 말도 죽고, 하룻밤에 돼지가 7마리나 죽는 일도 벌어졌다.
일본의 압정은 점점 악랄해졌는데 그 무렵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동맹조약을 체결했고, 일제는 독일과 방공협정을 맺었다. 손기성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정간 처분을 받았고 여러 명이 구속되었다. 그러한 민족의 비참한 처지를 보면서 커져갔다.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고 사람들을 먹을 것이 없어 풀이나 나무껍질을 뜯어다가 끓여먹었다. 바다 건너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와 동갑인 중학생이 자살을 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번민에 빠져들었다. '그 소년은 왜 목숨을 끊었을까, 어린 나이에 무엇이 그리도 괴로웠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의문을 품다가 결국 눈물을 쏟아냈지만 답을 찾지는 못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교회에도 열심히 나갔던 문선명은 설교에서 그 답을 찾으려 했다. '왜 착한 사람에게 슬픈 일이 생기는지, 왜 자살을 하는지,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지, 알고자 했다. 그러나 교회에서 듣는 설교만으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을 시원하게 풀 수 없었다. 마음이 답답해진 그는 기도에 몰두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영혼의 세계는 과연 있는가? 하나님은 확실히 존재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정말 전능한 분인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셨다면 이 세상의 고통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인가? 왜 인간은 서로를 미워하며 싸우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인가?'
이는 심각하고 본질적인 질문이었으나 그 누구도 대답해줄 수 없었기에 오로지 기도만 했다. 사춘기에는 누구나 그런 의문을 한번씩은 갖게 된다. 탐구 끝에 나름대로 자신만의 답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답을 모른 채 어른이 되기도 한다. 문선명은 즉각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기도를 하는 동안에는 고통도 슬픔도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자 기도 시간이 점점 길어졌고 급기야 밤을 새우는 날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16살(1936년)의 부활절 전날 밤에 마을 뒤에 있는 묘두산( 猫頭山)에 올라 밤새 기도를 했다. 눈물을 흘리며 삶과 사람, 죽음, 세상의 참의미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기도로 꼬박 밤을 새운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이 그 앞에 나타나셨다. "고통받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고 계시니라. 지상에서 하늘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맡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한다.
그날 그는 슬픈 얼굴의 예수님을 확실히 보았으며 음성도 분명히 들었다고 고백했다.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고 그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두려움과 감격이 한꺼번에 엄습했다 한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한없이 울었다 한다.
여기에 대해 증명할 방법은 없다. 어떤 사람의 앞에 죽은 사람이 나타나 무언가를 계시하는 것은 입증이 불가능하다. 꿈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현실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말을 믿고 행동을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은 사람도 많다. 믿음이 강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과연 소년 문선명 앞에 나타난 사람이 예수인지 아닌지는 규명이 어렵지만 그날 이후 문선명의 삶이 완전히 바뀐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진리의 말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언제든지 정성과 마음을 다해 그 목적지를 찾아가야 합니다. 이 길에는 집념이 필요합니다. 타고난 고집불통인 나는 본래부터 집념덩어리였습니다. 타고난 성질 그대로 집념을 갖고 고난을 극복해가며 내게 주어진 길을 갔습니다. 흔들릴 때마다 나를 단단히 붙잡아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었다'는 엄중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뿐인 청춘을 바쳐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때로는 피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문선명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결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기꺼이 바치기로 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아주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