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원 - 십자가를 내가 지고 - 1. 전쟁과 은사
1 나는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불교를 믿고 있었고, 또 대지주였다. 그래서 가난이 뭔지를 심각하게 느낄 수 없었고 배고픔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전쟁과 은사
2 그런데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 15일, 그때 국민학교 4학년으로서 불과 11세밖에 되지 않던 어린 소녀인 나에게는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큰 변화가 왔다.
3 정치체제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맞이한 자유는 혼란과 무질서를 이루었고 소위 공산주의자들인 남로당원들의 횡포와 그들이 일으키는 사회의 혼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4 우리 집이 부유했던 탓으로 남로당원들은 거의 매일같이 찾아와서 “너희들은 어떻게 하여 잘 먹고 잘 사느냐, 친일파가 아니냐” 하면서 기물을 파괴하고 가산을 빼앗아가며 식구들을 못살게 구는 것을 본 나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왜 가난한 자와 부자가 있게 되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5 그래서 집에 자주 오시는 스님에게 ‘사람은 날 때부터 가난한 자와 부자가 따로 있습니까, 공산주의는 무엇이고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질문을 거듭해 보았지만 나에게 확실한 대답은 안 해주고 ‘인간은 태초부터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빈 몸으로 태어난다……’라고만 말해 줄 뿐이었다.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 질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가 교회에 나가면 만인은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너의 고민도 해결된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6 그러던 어느 날 청파동 성결교회(현, 전본부교회 장소)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 목사님의 설교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길을 가게 만들었다. “2천 년이 되면 주님이 오십니다. 주님이 오시면 오랜 기간의 싸움은 끝나고 새 세계로 옮아갑니다. 우리는 희망을 품고 이 어렵고 지루한 어둠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양심적이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주님을 만날 것이며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불심판을 받습니다”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
7 나는 그 자리에서 계산하여 보니 내가 양심적으로 살면 65세가 될 때 주님을 만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어린 마음에 맹세를 하였으며 이런 것들이 신앙의 동기가 되었던 것 같다.
8 그 당시 나는 천여 평이 넘는 넓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부친은 대한민국 건국 사업에 힘을 기울이고 계셨다. 그 큰집은 초대 내무부 장관 김효석씨에게 내어주시고 우리는 그때 국무총리였던 이범석 장군이 살던 묵정동 집으로 이사 갔다. 이집 역시 대지 400평에 건물도 좋았고 뒤에는 300평의 채전이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5.30 선거에 출마하신 부친이 차점으로 낙선된 얼마 후 북괴의 남침을 당하였던 것이다.
9 그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날은 보슬비가 뿌리는 일요일로 기억된다. 이모 댁(지금의 세종호텔자리)에 놀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수레를 타고 돼지와 개를 몰고 오는 사람들, 등에 어린아이를 업고 머리에 짐을 이고 여러 형태로 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북괴가 남침하여 피난 오는 길이라면서, 거리는 온통 수라장과 같았다. 나는 황급히 집으로 달려왔다.
10 라디오에서는 염려 말라고 하였지만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피난 준비를 하는 것 같았고, 우리 집에는 아버지 친구분들이 트럭을 몰고 와서 피난 가자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효자이신 아버지께서는 며칠 후면 조부님 소기(小朞)라고 피난 가는 것을 포기하셨다. 염려 말라고 한 이승만 대통령의 말을 믿었던 것이다.
11 드디어 1950년 6월 28일 새벽, 포성이 진동하게 되자 불안과 공포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우리들 7남매와 부모님 그리고 거느리던 많은 식객 식구들과 함께 서빙고에 가서 한강을 건너가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도강하기 위해 배에 매달린 사람들도 있었고 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터에 뒤따라 인민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12 따발총 끝에 붉은 헝겊을 감은 군인들이 서울에 침입한 것이다. 할 수 없이 우리 가족들은 묵정동 집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니 이미 따발총을 멘 북괴 인민군들이 우리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 집이기 때문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주인 앞으로 나오시오, 모두 한 줄로 서서 손들어! 총살이다” 하면서 총알을 재는 것이었다.
13 그러다 한참 무엇인가 생각한 인민군 장교가 “부인 나오시오” 하는 말을 듣고 우리 모친은 아버지 앞으로 나가 서셨다. 인민군 장교가 “할 말이 있는가, 할 말이 있으면 하라”라고 하니 어머니께서는 “우리는 대한민국 백성으로서 대한민국을 위하여 충성을 다 했을 뿐이오, 죽이려면 죽이시오” 하시며 열변을 토하니 그 인민군 장교는 “잘 알았소, 김일성 어버이를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해 주시오!” 하면서 총을 거두는 것이었다. 그때 인민군들은 마구 재물을 실어가면서 모든 방에다 딱지를 붙여 놓고 아무것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14 우리나라를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놓은 6.25의 전쟁은 죄 없는 선량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가난에 지쳐 쓰러지기도 했다. 왜 이유 없이 죽어가야 하는가 전쟁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나는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가 있다가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15 나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우리의 살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고심했다. 그래서 할 말이 있다고 외치는 함석헌 선생의 강의에 심취되기도 하고, 수많은 부흥회에 참석, 성령의 은혜가 나에게 강림해 주기를 기도했다. ‘어떻게 하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지만 별다른 결론을 거두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
16 그러던 중 휴전이 되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3년여의 전쟁은 나로 하여금 하나의 결심을 하게 하였다.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자’라는 것이었다. 나보다 못한 자를 위해서 살자는 신념이었다. 그래서 이화여대 법정대 법과를 지망하게 된 것이다. 이화여대가 감리교 계통의 대학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것을 배울 수가 있었다.
17 1954년 9월 30일에 나는 경이로운 꿈을 꾸었다. 잠이 들어 있는지 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계시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 꿈은 성경에 있는 창세기의 미지의 사실, 혹은 의문을 품었던 사실들이 스크린에 상영되듯 환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18 꿈에서 깨어난 뒤 다시 환상을 통해서 앞으로의 세계는 이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는 아버지의 시대다. 아버지를 찾아라, 네 생명의 아버지를 찾아라’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