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를 하나님께 전도받은 자>의 줄거리:
인류 역사상 첫번째로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도하시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당일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까지 이루어질 예수 전도 사건의 본질적 내막을 초장에 밝히신 셈이지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십니까? 누구에게 전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사람입니까?
예수를 하나님께 전도 받은 자
(누가복음 2:8~20)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를 하나님께 전도 받은 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를 하나님께 전도 받은 자’
제목으로부터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나님께 예수를 전도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예수님에 대한 전도는 다른 방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전도한다는 표현이 무척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을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도 구원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선물이 아니라면 구원은 선물이 아닌 믿음을 비용으로 하는 대가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늘을 팔아먹는 장사꾼들에게 속아서 예수 이름을 전도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이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장사꾼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거저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외상으로 떠넘깁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뒤로부터 평생을 예배당 조직을 위한 봉사와 충성과 헌신과 헌금을 요청받습니다. 말할 수 없이 엄청난 대가를 믿음의 비용으로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작 세상에 나와서는 예수님과 동행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영적인 힘이 예배당 안에서 모두 소진되어서 여력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 즉 하늘을 팔아먹는 장사꾼들에게 전도를 받은 결과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도 받았다면 믿음을 온전히 선물로 받게 됩니다. 외상값을 갚는 듯 봉사와 충성과 헌신과 헌금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전도 받은 사람에게서도 봉사와 충성과 헌신과 헌금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받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더 큰 축복을 받기 위해 조건적이고 율법적으로 행하는 일이 아닙니다.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신하고 헌금 많이 하면 이런 저런 복을 받을 것이라는 소리는 모두 장사꾼들의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발적인 봉사가 즐겁고 헌신이 보람차고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전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하나님께 전도 받은 사람이 있고 예수를 사람에게 전도 받은 사람이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은 사람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될지라도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에서 예수님을 온 마음을 다해 붙잡아야 할 그리스도로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16장 16~17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베드로의 자발적인 깨달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에 “네가 모시는 예수야말로 나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 예수가 너와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이다!”라고 가르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 전도를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44~45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님께로 올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전도하실 때에 우리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인시켜주시기 위해 사용하는 표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을 통해 접하게 되는 외양간과 여물통입니다. 12절에는 목자들이 베들레헴 마을 안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로써 태어나신 아기를 찾을 때에 확인해야 할 표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유는 외양간에 있는 가축들이 밥을 먹는 여물통입니다.
이 사건은 목자라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전도하신 사건입니다. 누가복음의 내용은 단순히 예수님 탄생에 얽혀있는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신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전도하신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천명하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충만함을 통하여 앞으로도 예수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전도되어 가리라는 것을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도하실 때에는 반드시 외양간과 여물통을 표시로 삼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외양간과 여물통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낮아지셨음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낮아지신 것이 아니라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높으심을 드러내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백만 원이라는 돈이 생겼습니다. 재산을 다 모아봐야 천만 원도 없는 사람에게 백만 원은 엄청나게 큰돈입니다. 그러나 재산이 몇 조나 되는 재벌총수들에게 백만 원은 고급스러운 식사자리의 포도주 한 병 가격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부자란 백만 원이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백만 원이 없어도 지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이와 마찬가지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외양간과 여물통이 상징하는 환경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세상의 조건이 필요 없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외양간과 여물통은 예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상징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신 것은 맞습니다. 예언서에서도 예수님께서 낮아지시고 비천한 상황에 처해지실 것이며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실 것임이 나타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예수님을 대하는 세상의 기준과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는 세상에서 낮아지시고 비천하게 여겨지시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도 이루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높은 분이고 대단하시기에 이 지구 전체로부터 미움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평강을 누리실 수 있으셨으며 자기의 길을 오롯이 가실 수 있으셨을까요? 이를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자는 “무욕이 대욕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 세상의 가치가 필요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너무나 크고 높으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예수 전도의 최종목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도 받은 사람이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불구하고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가졌기에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마음에 하나님도 갖고 돈도 갖고 건강도 갖는 중에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서 돈도 갖고 건강도 갖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갖고 있다는 것은 마음에 품어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내가 소유하고 있어도 마음에서 기쁨과 만족에 대해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마음에서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어져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만을 가짐으로써 진정으로 기쁘고 만족하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예수 전도의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표를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외양간과 여물통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가치가 전무한 곳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영생하는 곳으로 이해합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기쁨과 만족과 평강 가운데 산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영생에 세상의 가치들 즉 돈이나 건강이나 장수 혹은 외모나 학벌이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은 어렵잖게 이해되실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가 아무것도 없이 하나님으로만 영원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누리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이러한 영생에 대해서는 믿고자 하면서도 이 땅에서는 세상의 가치가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댑니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의 자존심을 긁어대는 일은 세상에 달리 없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추구할 바에는 차라리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루어야 할 일은 세상에서 잘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이룬 일이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처럼 세상에 대해 조금도 아쉬움이 없는 상태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직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외양간과 여물통을 표시로 삼아 우리에게 전도하십니다.
본문의 장면을 보면 또 다시 기가 막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도하시는데 세상기준에서는 비천하기 이를 데 없는 외양간과 여물통을 표시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목자들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목축업은 굉장히 중요한 산업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축업이 가지는 중요성에 비해 목자는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였던 요셉이 목수라는 일을 하면서 하층민이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부로써 하층민이었던 것처럼 양떼를 돌보는 목자들도 하층민이었습니다. 그나마 예루살렘에 양을 공급하던 목자들은 제사장과 결탁한 장사꾼들로써 부를 얻을 기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골이었던 베들레헴 변두리에서 밤에 양을 치던 목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요한 세상사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참여하고자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관심이 없는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층민인 목자 몇 사람에게 아기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십니다. 9절을 보면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곁에 천사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광경은 시내산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출애굽기 19장 18절을 보면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또 변화산 사건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변화산 사건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을 보고 이 세상에서 모든 좋은 것을 까마득히 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일상이 뒤집어지는 사건이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영광 가운데 나타나셨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서 목자들의 마음에서 1등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한 목자들은 더 이상 양떼를 신경 쓸 수 없었고 가족들을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또 13~14절을 보면 이에 더하여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목자 몇 명이 있는 자리에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인류역사상 다시없을 천국의 뮤지컬을 연 셈입니다. 이 정도의 이벤트라면 로마 황제로부터 원로원의 회원들을 모아놓고 이루어지는 편이 어울렸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 혹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율법사들과 같은 사회지도층이 모인 자리에서 일어나는 편이 어울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큰 이벤트일수록 VIP들이 참여하는 것이 세상의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이벤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층민 목자들 몇 명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봅니다. 2017년 12월 16일에 기네스북에 등재되기 위해서 8,399명이 고척 스카이돔에 모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슨 곡이든 연주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오케스트라 단원 8,399명을 모아놓고 세계 최대의 연주회를 열었던 것입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기네스북측에서 감독관들을 대거 파견하였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 100명마다 한 명의 감독관이 붙어서 제대로 연주를 하는지 확인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연주를 보기 위해 모인 청중들은 몇 백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 광경이 마치 본문의 광경을 연상케 합니다. 목자 몇 명을 위해서 천군천사가 동원되고 하나님이 영광중에 나타나십니다. 외양간과 여물통을 표시로 삼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도하기 위함입니다. 목자들은 아기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전도 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로 나와 경배하게 됩니다. 우리로써는 대체 이해가 안 되는 광경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사람들을 좋아하셔서 부르셨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이유에서 목자들이 선택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벤트에 참석할 VIP로써 그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때에도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죄인들의 친구이셨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라보며 세상에 발을 딛고 있는 우리들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실제로 하늘에서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됩니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도하기 위해 이토록 엄청난 하나님의 이벤트가 준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 몇 명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기 위해 이러한 놀라운 열정을 보이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한 열정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아닌 하늘을 기준으로 VIP를 가리십니다. 하늘의 VIP가 아닌 자들에게 아들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도하지 않으십니다. 하늘 기준으로 VIP들에게만 예수를 전도하십니다. 천사들이 볼 때에 최고의 가치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 자신을 가치의 기준으로 볼 때에 이 세상의 가치들은 배설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의 VIP들은 이 세상의 가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전혀 별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 기준에서 볼 때에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VIP 유망주입니다. 세상에서는 돈을 많이 번 사람이 부자입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유망주로 여깁니다. 이 세상에서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된 사람들을 성공한 정치가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유망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VIP 유망주는 어떤 사람일까요? 하늘에서 통용되는 가치를 가장 많이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유망주로 여겨질 것입니다. 이 세상 가치에 물들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 취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갖기에 편하고 유리한 위치에 있는 유망주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도하실 때에 외양간과 여물통을 표시로 삼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땅이 아닌 하늘에서 정말 큰 자가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나 소원할 만한 것들이 마음에 가까이 와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하나님이라는 가치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늘의 유망주 대열에서 탈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전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사회지도층에 속하고 싶고 엘리트 계층에 속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에게 전도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전도를 받았다면 절대 이 세상의 사람들이 달려가는 가치를 향해 함께 달려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전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를 향해 가려는 원죄적 속성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을 생활화하게 됩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 전도를 받은 사람은 지구가 필요 없습니다. 행복과 만족과 기쁨과 영원한 평강을 위해서 지구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고 살아있는 몸을 필요로 여기지 않습니다. 몸이 당장 죽어도 마음의 기쁨과 만족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누구나 육체를 입고 살고 있으며 원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사람에게 전도를 받은 자는 세상 것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전도를 받은 자는 세상 가치에 시선이 향할 때마다 깜짝 놀라며 십자가에서 죽기를 반복합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로만 기쁨과 만족을 얻기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하늘의 VIP로 삼으시고 유망주로 여기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너무나 별 볼일 없고 비천한 처지에 처해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세상 가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위치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세상에서 눈을 돌리고자 하는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천군천사를 동원한 이벤트를 여시는 심정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외양간과 여물통의 표시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생활화하게 하심을 살이 떨리도록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놀라운 은총을 깨달은 자로써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전념하게 하시고, 지구 위의 어떤 일도 평강과 영원한 기쁨을 위해서는 필요 없음을 드러내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