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석간고택은 19세기 후반에 학문소인 정사를 가옥 내에 별동으로 지은 흔치 않은 예로 정침은 생활기본시설을 설치하기 위하여 일부 변용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건립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침은 건립 당시보다 앞선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설가 이문열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으로 지역의 역사문화환경적인 측면에서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석간고택 그 옆에 유우당이 있다
유우당은 3 1 운동 때 유림의 대표로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한 이돈호가 주남리에서 이곳으로 옮겼는데 그 조카 이병각이 조지훈, 오일도, 조세림 등과 더불어 항일 애국시 활동을 하던 곳이다
이병각은 1918년 안동보통학교에 입학, 1924년 서울로 상경하여 중동학교로 진학했으나 1929년 광주학생사건에 연루 퇴학당했다. 1930년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청년운동, 민중운동을 했다.
이병각은 카프가 해체된 시기인 1935∼36년부터 문단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른 죽음으로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평론, 산문, 시에 이르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였지만 카프 해체 이후 10여 년으로 그치고 있다.
영양군 석보면 원리(두들마을)에서 태어난 이병각은 신석초의 회상에 따르면 〈헌헌장부〉였고,〈시학의 추억〉 속에서 중요한 멤버로 기억된다. 『시학』이 5호로 종간될 때까지 매호에 작품을 싣고 있다.
김영식에 따르면 이육사는 이병각 부부가 폐병을 앓자 옆에서 간호했으며 이로인해 이육사의 건강도 더욱 나빠졌다고 한다. 또한 김유정, 김해강, 김기림, 김소엽 등 작가의 작품론을 썼고, 김유정의 죽음을 애도하는 「여름 제물(祭物)」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했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유학 중에서 검거되어 조선으로 송환되어 체포되기도 한다.
이후 조선일보사 기자가 되었고 1935년 이후부터 잡지, 신문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1941년 후두결핵으로 요절하게 되어 작품활동의 기간은 몇 년이 되지 않는다.
유우당에서 위로 올라가면 이문열을 홍보하기 위해 복원했다는 집터가 나오는데 최근에 불이 나 폐허가 된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문열은 6·25전쟁 때 공산주의자인 아버지 원철이 월북한 이후 어머니 조남현과 5남매가 경상북도 안동 등지를 돌아다니며 어렵게 살았다. 1965년 안동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다가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1970년 중퇴하고 사법고시에 전념했으나 실패, 1973년 결혼과 동시에 입대했다.
1977년 대구에 있는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입선된 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 塞下曲〉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해 〈사람의 아들〉(세계의 문학, 1979. 6)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어 〈황제를 위하여〉(문예중앙, 1980. 9)·〈우리 기쁜 젊은 날〉(세계의 문학, 1981. 6)·〈금시조 金翅鳥〉(현대문학, 1981. 12)·〈익명의 섬〉(세계의 문학, 1982. 3)·〈영웅시대〉(세계의 문학, 1982. 9~1984. 6)·〈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세계의 문학, 1987. 6)·〈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의 문제작들을 발표했다.
소설집으로 〈사람의 아들〉(1979)·〈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1980)·〈어둠의 그늘〉(1982)·〈레테의 연가〉(1983)·〈구로 아리랑〉(1987)·〈변경〉(3권, 1989)·〈귀두산에는 낙타가 산다〉(1989) 등이 있다. 1990년 프랑스에서 〈금시조〉·〈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1982년 동인문학상, 1983년 대한민국문학상, 1987년 이상문학상 등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 그가 문학에서 남긴 가치관과 동떨어진 삶을 일부분 살아 비판을 받기도 한다
마을 위쪽으론 도토리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병자호란 당시 도토리죽으로 정부인 장씨가 빈민을 구휼했다는데 그 정신과 상통하여 조성되었단다
공원에서 내려오면 도사고택과 주곡고택이 나타난다
이 건물은 조선중기 유학자인 이도(李櫂)의 주손댁(胄孫宅)이다.
이도는 재령이씨 영해파 입향조인 이애(李璦)의 5대손으로 영해의 인량리에서 태어났으나 조선 숙종 원년(1675)에 주사동(做士洞)으로 우거(寓居)하였다.
주곡고택은 선생이 주사동으로 우거할 때 지어진 것이며, 순조 30년(1830) 후손들에 의해 현위치로 이건되었다.
고택은 두들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광려산(廣麗山)을 배산하여 아늑한 산자락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정침은 정면4간 측면 4간 반 규모의 구자형(口字形)건물로 뜰집에 가까운 형상을 취하고 있다.
감실방(監室房)에는 감실아래에 두꺼운 널판을 설치하였는데 이 널판은 제사를 지낼 때는 앞으로 빼낼 수 있게 한 특이한 구조이며, 부엌에 묻어놓은 물두멍 등은 당시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주곡고택을 끝으로 두들마을 탐방을 마무리짓고 안동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