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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병자를 고치심(산상수훈 결론)
(24.3.24)
<마7:28~8:4>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오늘로 산상수훈 35번째 설교인데 산상수훈을 마치고 차주부터는 요한복음을 시작.., 산상수훈 처음 시작할 때 말씀을 드렸지만 산상수훈의 내용이 성경 전체를 요약한 압축 파일과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성경 전체는 무엇을 말하는가? 구원은 사람의 율법 행함의 의로 되는 게 아니라 IX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믿음의 의로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창세전부터 ㅎ님이 작정하신 ㅎ님의 의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주님이 산상수훈의 설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알면 성경 전체를 관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산상수훈이 성경의 핵심이고 엑기스와 같은 부분이라서 이것을 진리의 관점에서 잘 배우고 깨달으면, IX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은혜로 주신 구원이 감사하고 감격에 넘쳐서 ㅎ님을 향해 찬양하게 될 테지만, 반대로 이 산상수훈을 잘못 알면 인간 자기가 철저하게 말씀을 지켜서 ㅎ님께 인정받으려고 다시금 율법의 의를 더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그런 사람의 대표격인 자가 간디와 슈바이쳐 같은 사람들이다.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을 벗어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고 오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고,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이러한 말씀을 액면대로 보고 그대로 실행에 옮겨서 실생활에 적용하여 살았던 자가 간디요 슈바이쳐 박사였다. 간디(산상수훈에서 힌트를 얻어 비폭력을 표방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어 인도를 영국에서 해방시킨 정치인), 슈바이쳐는 박사자격증이 5개, 이것을 다 버리고 산상수훈을 실천하려고 온 평생 아프리카에 가서 헌신하면서 살았던 자이다.
이들의 문제가 뭐겠는가? 자신의 의로 당대 유명한 자가 되어 위인전에 나오는 자들이 되었지만 IX를 믿는데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게 문제다. 이들은 예수를 인류를 선도한 휴머니스트요 선한 선생으로 봤지, 메시야로 여기지 못했다. 이렇게 자기 의로 충만한 자들은 예수가 필요 없다. 자기 의로 ㅎ님께 인정받아 구원을 이룰 줄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의 노선을 따라 온 평생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고 살다가 결국 자기 죄를 해결 받지 못하고 지옥간 자들의 대표일 뿐이다. 결국 이들은 산상훈의 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행위의 늪에 빠져 사망의 문, 넓은 길로 간 것이다.
따라서 말씀을 볼 때에 문자로 볼 것이냐 영으로 볼 것이냐가, 사망이냐 생명이냐를 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3장에서 ‘의문(문자적 율법말씀)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좀 전에 예를 든 몇 가지 것들(속옷..겉옷/오리..십리../오른 빰..왼편도..)등은 우리 보고 지키라는 말이 아니다. 아니 이것을 과연 지킬 수가 있겠는가?
물론 한 두 번은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속으로는 분노가 차오르는데 ㅎ님의 명령이니까 그리고 구원도 받아야 하니까 억지로 한다는 것은 하는 게 아니다. 속임수다. 내가 나도 속이고 상대방도 속이고 주변도 속이는 외식이다. 이건 흘러나오는 사랑의 발현이 아니라 죽기 싫어서 하는 억지춘향일 뿐이다. 억지로 하는 것을 율법 행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기에는 자유함이 없다. 이들은 예수를 유격훈련장의 조교로 생각해서 그대로 답습하려고 했다. 이게 율법주의, 유대주의, 경건주의, 성화주의, 인보주의요 사람의 의의 본거지들이다.
그러나 산상수훈에서 말씀하는 것들은 ‘너희는 못하니까 손들고 항복하라’는 말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너희가 이런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그 발상이 말도 안되는 언감생심이라는 것이다. 우리보고 행하라는 게 아니라 주께서 다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든 걸 내려놓고 대신 IX께서 의의 행실을 다 이루셔서 그 의를 값없이 넘겨줄 테니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것이 복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팔복이 열거된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무슨 말이었지요? 기억나시나요? (죄로 죽은 자신이야말로 무능하고 무기력해서 ㅎ님의 말씀을 도저히 지키지 못함을 아는 상태가 심령이 가난함인데 이것을 아는 자가 복있는 자라는 말이었다.)
이렇게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낫팅!) 것을 인지하면 다음에 터져 나오는 탄식이 ‘ㅎ님 나 어떡하면 살 수 있나요? ㅎ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하고 무릎 끓게 되는 상태가 바로 애통하는 자이다. 그렇게 상한심령으로 자기부인의 탄식이 일어나면 마음이 겸비해져서 온유케 되는 것이고, ㅎ님의 긍휼을 입게 되기에 남을 긍휼히 여기며 화평의 삶을 살게 되는 이러한 8복에 대해, 산상수훈의 결과를 먼저 앞에 언급하고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자신의 죄를 보게 하여 시선을 ㅎ님의 의이신 IX를 바라보게 한다.
오늘 본문 다시 보자. 28~29절(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말씀이 당시 무리들의 선생이었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차원이 달랐다는 말이다. 서기관은 지금으로 말하면 신학교 교수들이다. 성경에 대해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자들을 상징한다.
이들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요약하자면, 종교적 율법행위를 열심히 해야 구원받지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라는 모세의 율법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가령, 대표적인 종교 의식인 구제하라, 기도하라, 금식하라는 것들로서 (이거하라, 저거하라, 하라, 하라) 너무도 뻔한 옥죄는 말들뿐으로, 그 말대로 하자니 버겁기만 하고 안하자니 두려워서 항상 무거운 마음으로 살았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남에게 보이려고 외식하는 구제는 삼가고 굳이 하려면 은밀히 할 것이고, 기도 역시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서 할 것이며. 금식 역시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마라. 또한 원수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알고 있는데, 너희는 원수를 갚지 말고 사랑하라는 등, 완전히 다른 차원의 말씀을 하시니까 서기관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권위를 느끼게 되었다는 말이다(놀랍고 생소함..아! 이게 뭐지? 그간의 빡빡한 율법 행함에서 놓임 받는 여유와 자유함이 풍겨지는 말씀에 이끌리게 되더라는 말임)
결국 서기관 바리새인은, 사람 너희가 스스로 구원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한눈팔지 말고 열심과 정성을 다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고, 예수님은 너희의 그런 종교 행위로 별의별 짓을 다해도 구원과는 상관없는 죽은 행위이니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은혜로 구원을 베푸시는 ㅎ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이렇게 인간의 행함에 가치를 두는 빗나간 신앙을 가르치는 자들이 거짓선지자들이고 그런 신앙을 옳다고 여기며 따르는 자들이 넓은 문이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들이다.
반면에 팔복에서 언급된 것처럼 자기부인이 일어나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오직 IX를 바라보는 자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요, 좁은 문을 들어가는 자요, 반석 위에 집짓는 자들인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인지하고 구원자이신 IX를 믿게 되는 것을 (지난주에 나눈) 24절에서 말씀하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에 부합하는 자이다. 즉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죄로 죽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임을 깨닫고 IX의 십자가 복음을 붙잡는 것이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 전체가 하시는 말씀은 너희가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니, 죄사함을 주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믿으라는 말씀을 하신다. (다시 말) 성경의 주제는 예수가 성취하신 십자가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도 직접적으로 여러 번 이 말씀을 하셨다.
요5.39절(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20:30~31> 읽고, 30절(요한복음에서 빠뜨린 내용들->요21:25절 넘쳐남) 31절(많은 표적 중에 선별 발췌해서 기록한 것은 IX가 메시야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여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함임), ->성경의 주인공은 구세주이신 IX이시라는 말임
<눅24:44~49> 읽고, 신약성경 뿐 아니라 구약 성경도=>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들임...
성경은 Sign이다(세메이온, 표적임)=> 요약: 구세주 예수를 바라보라 임(히12:1절/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믿음의 주체적 대상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임). 그런데 성경을 보고 자신의 행함에 방점을 두는 자들은 신앙의 방향이 어긋난 자들이다. (마치 저 보름달을 보라 하면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쳐다보는 것과 같은 경우)
이처럼 예수의 십자가를 제켜두고 자기 행함에 가치와 의미를 두는 빗나간 신앙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간디, 슈바이쳐, 마더 테레사, 바리새인들처럼 일견 훌륭해 보이나, 이들이 바로 모래 위에 집짓는 자들이다(그날에 주여주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나이다~하면서 자신들이 쌓아올린 높은 바벨탑을 자랑하겠지만, 주님으로부터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 불못에 들어가라’는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온 평생 신앙생활을 하며 헌신봉사를 했어도 성경에서 예수를 발견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성경은 다 예수에 대한 모형이고 그림자이다. 방금도 읽어 봤지만 신약뿐 아니라 구약의 모든 율법과 절기와 성막의 제사 제도와 그 안의 모든 기물들도 하나같이 예수를 증거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신비하신 ㅎ님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알면 알수록 그저 감탄만 나오게 된다.
가령 구약에 7대 절기가 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맥추절, 나팔절, 속제일,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다 IX에 대해 증거하는 절기들임.=>앞의 3절기는 십자가 죽음, 장사, 부활을 비유, 맥추절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상징함(여기까지는 역사에서 단번 성취), 다음 절기는 역사 속에서 반복됨. 오순절 성령 받으면 뭘해요? 복음전파(이게 나팔절임)..행2장 사도들..‘너희가 죽인 예수를 ㅎ님이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으니 믿고 구원 받아라’, 외침(나팔 붐), 그러면 듣고 회개하면 그 사람에게 속죄일이 성취되는 것임.
요4장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 복음의 나팔 부시니 6번 남편 바꿔치기한 죄인이 구원받고 자신도 전하러 뛰어나감...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 하심/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그랬더니 동네 여인들도 다 믿고 또 다시 전하게 됨(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은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생명의 확장운동임)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추수 때가 넉 달이 지나야 한다고 알고 있지?(제자들은 물리적 추수만 알고 있기에 하신 말씀). 아니야, 지금이 추수 때야 밭이 희어져 추수 때가 되었단다. 하심. 이는 영적인 추수를 말하심(곧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다 추수 꾼이 된다는 암시의 말씀이었던 것임)
추수란 알곡을 거둬들이는 것인데, ㅎ님의 때가 찬 백성들(죄인들이) 즐비하게 있으니까 나가서 복음으로 구원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그 복음을 듣고 자신이 죄인임을 회개하여 주를 영접하면 그 자체가 속죄일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 받은 성도는 이 세상을 행인과 나그네로 살게 되는 것이니 그게 바로 초막절이 성취되는 일이다. 이 초막절을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부른다.
초막절에 대해 좀 더 부연 설명을 하자. 왜냐면 이 절기에 대한 오해 때문에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목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초막절 역시 IX에 대한 예표이며 그림자다. 초막절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의 장막을 입고 오신 것을 나타내는 절기이다. 즉 초막을 입으실 필요가 없으시며 본체가 ㅎ님이신 예수께서 육체인 초막을 입으셨기에 이것을 기념하는 것이 초막절인 것이다.(성경은 모든 육체는 풀이라고 증거 함)
왜 풀로 만든 장막에 거한 것을 기념하라고 하셨을까? 그 이유를 살펴보자.
(레23:41~43) 너희는 절기를 지킬찌니 대대로 영원한 규례라,,,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에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한다. 즉,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를 유념해야 한다..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려고 아들이신 예수를 육신의 장막(초막)에 거하게 하셨다는 말씀이시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에 포커스가 아니라, IX의 성육신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성도들을 애굽 땅(죄악된 세상)의 죄로 인한 죽음에서 건져내시려고 예수를 초막에 거하게 하셨다는 말씀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려 예수를 육신의 초막을 입게 하셨다. 즉, 초막절은 예수님이 육신의 장막(초막)을 입으신 것을 대대로 기념하는 절기인 것이다.
시편도 그리스도께서 초막을 입으셨다고 기록했다. (시27:5) 여호와께서 환난날(십자가 고난)에 나를 그 초막 속에 은밀히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반석(바위)이신 예수님을 육신의 초막 속에 은밀히 숨기셨다는 말씀이다. 또 계시록 21장 3절에도 "하나님의 장막(초막 Tent)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라고 증거한다.
모세가 지은 성막도 광야(세상)에서 초막을 입으시고 성전되신 예수님을 예표한다. 모세는 성막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식양(출25:9 히8:5)에 따라 성막을 지었다고 한다. 모세는 하늘에서 성전이신 예수님을 보고 그 식양대로 광야의 성막을 지은 것이다. 즉, 모세가 지은 광야의 성막은 예수께서 육신(초막)을 성전 삼으시고 거하시는 것을 상징하고 예표하는 성막이다.
히브리서도 육신의 장막을 입으신 예수님이 참 장막(참 성전)이며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신 것이라고 증거하고(히8:2), 모세가 지은 성막은 하늘의 성전인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증거한다.(히8:5) 이에 대해 예수께서도 당신의 육체(초막)를 성전이라고 친히 증거하셨다.(요2:21)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리라(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말씀)
그렇다면 ㅎ님께서는 왜 예수를 육신의 장막(초막)에 거하게 하셨을까? 육신의 피를 흘리게 하시려는 것이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려야 죄를 속하기 때문이다.(레17:11) 즉, 피를 흘리셔서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시려 육신의 장막을 입으셨다.
이것을 기념하는 것이 초막절이다. 단순히 인간들이 초막에 거한 것을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고까지 하셨을까? 결코 아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이시라 (빌2:6) 초막을 입을 필요가 없으신 예수께서 초막(장막)을 입으셨기에 대대로 영원히 기념하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래서 초막절을 장막절이라 부른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를 애굽이라는 죄악된 세상에서 유월시키기 위해 육체(초막)에 거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애굽 땅(죄악 세상)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레23:42)고 하시며 기념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처럼 초막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는 승천하신 후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또 다시 우리의 초막에 거하신다.
즉 초막절은 그리스도께서 초막을 입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며 또한 예수께서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의 초막에 거하시는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다.(마28:20), 이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 성령에 대해 "그리스도의 영(롬8:9), 예수의 영(행16:7), 아들의 영(갈4:6) 주의 영(고후3:17), 이라고 말하며 성령이 곧 예수님이라고 말했다. 즉,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의 초막에 거하신다. 바울도 우리의 초막에 거하시는 성령에 대해 "우리가 이 보배를 질 그릇에 가졌으니"(고후4:7) 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초막절에 믿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요7:37-39)> 명절(초막절) 끝날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말씀하신 것이라.
이처럼 초막절은 성령께서 초막에 임하실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스가랴 선지자도
초막절에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성령)을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슥14:17-18) 고 말하며, 초막절은 성령께서 우리의 초막에 임하실 것을 증거했다. 위의 "비"는 성령을 뜻한다. 이처럼 초막절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절기이다. 즉 예수께서 우리를 멸망의 죽음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피 흘리시고 죽으시려고 육신의 초막에 거하신 것을 기억하는 절기인 것이다.
또한 성령으로 거듭나서 IX와 한 영이 되었기에, 추수된 알곡이라는 의미에서 수장절이라고도 부른다. ㅎ님의 창고에 들여진 알곡이다. 죽어서 무덤에 있던 자가 복음을 듣고 살아나서 영생을 가진 자가 되었다. 그래서 이 살아남을 계20장에서는 ‘첫째부활’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둘째 부활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둘째부활은 주님의 재림의 날에 주님의 몸처럼 신령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한 몸의 부활이기에 몸의 구속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문자적인 천년왕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주님의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면 그 필요성이 무엇이겠는가? 여러 가지로 논리적 모순이 존재한다. 가령, 주님의 재림으로 성도가 신령한 몸으로 변했는데 무엇 때문에 물질적 세계에서 땅의 음식을 먹어가며 살겠는가? 영과 육이 혼합된 세계가 과연 ㅎ님이 경륜적으로 펼치실 필요가 있는 기한일까? 그리고 천년이 끝나면 다시 사단을 풀어 백성들을 미혹케해서 남은 자만 구원한다니 이 또한 말도 안되는 발상이다. (억지로 천년왕국을 인정하자니 성경 해석이 다시 육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쯤해두고..
7절기 뿐 아니다. 성막의 5대 제사도(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다 IX의 모형이고, 성막의 모든 기물들(번제단-십자가, 물두멍-성령의 물, 떡상, 7금촛대, 금향단)도 IX모형이다.모두 다 IX를 상징하고 비유한다.
<골2:12~15절>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믿음이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함께 살리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연합된 자들을 무엇으로 유혹합니까?
<16~23절>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하라, 마라)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거짓 선지자들이 무엇으로 미혹하는지 상세하게 밝히고 있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며 승리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와 금욕주의이다. 율법주의란 먹고 마시는 음식규례와 월삭과 안식일과 같은 날과 절기들이다. 이런 것들은 IX의 그림자인데도 붙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꾸며낸 겸손(성경책 끼고, 우와를 가장한 목소리, 지나친 웃음과 친절..), 천사숭배, 무언가 봄?(꿈, 음성, 환상) 것을 의지하여 과장하는 신비주의와 자기 몸을 괴롭게 하는 금욕주의(금식, 새벽예배, 철야 등) 몸을 괴롭게 하는 길로 가야 좁은 문 좁은 길이며 생명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성을 믿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다. 차주가 부활절인가요? 지금은 사순절이겠군요. 이 절기로 이익 보는 자들이 누구?..
지금 기독교의 부활절은 고대 북유럽의 여신 이스터를 기념하는 날인데, 이게 부활절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사단의 전략일 뿐(삶은 계란도 거기서 유래..) 주님의 부활과 계란이 무슨 연관?(없음) 중요한 것은 모든 절기는 IX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하셨고, 그 성령을 받은 우리가 부활체로 살아가고 있으니 내 안에서 부활생명이 살아 역동되기에 날마다 부활을 누리며 감사로 사는 것이 진정한 부활절로 지키는 것이다.
<마8:1~4>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입증)하라 하시니라.
이 부분이 산상수훈의 결론이다. 산상수훈 마5장 처음이 어떻게 시작?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께서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5장~7장까지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고 이제 산에서 내려오시는 것이다.) 산은 하늘, 천국복음의 상징이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가 바로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것으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다시 말) 산상수훈이 말씀하시는 바가 뭐다? 너희는 모두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기에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야. 그러니 그런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두 손 들고 항복하여 회개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내가 너희 죄를 사하여 구원해 줄게~ 이 말씀이다.
그랬더니 정말 자신이 문둥이라는 것을 발견한 자가 주님께 나아와서 절하며 자신을 깨끗케 해 달라고 소원하는 장면이다. 물론 진짜 문둥이를 고치셨다. 그러나 이게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너희가 모두 영적인 문둥이들인데 어쩔 테냐? 누가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을 수 있겠니? 구원자인 ㅎ님의 아들 나 예수에게로 나아오라는 사인(표적)인 것이다.
문둥병을 천벌이라 한다. 사람의 연골이 떨어져 나가서 손가락 발가락이 다 떨어져 나가고, 입술과 코날과 눈꺼풀이 다 녹아 없어지는 병이라서 마치 해골같이 이빨이 다 드러나고 콧 구멍이 뻥 뜷린 채 노출되며 눈알만 동그랗게 보이니 그야말로 해골을 연상시키는 처참한 질병이다. 이렇게 살과 연골조직이 문드러지는 병이라서 문둥병이라고 한다. 요즘은 나병(한센병)이라고 순환된 표현을 한다.
그리고 문둥병의 특징은 통증이 없다. 그러기에 여기저기 살이 녹아내리고 마디마디가 떨어져 나가도 고통을 못 느낀다. 그러면서 일찍 죽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게 더 고통스럽다. 게다가 전염성이 있기에 환자는 격리된다. 가족과 사회와 격리되어서 외딴 곳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목숨은 붙어 있어도 송장보다 못한 처지이다. 죽고 싶어도 죽지도 못하는 처참한 몰골을 끌어안고 명대로 살아가야 하는 문둥병은 아마도 가장 무서운 질병일 것이다.
이처럼 죽음을 방불케하는 문둥병은 죄와 흡사한 유사성을 가진다. 문둥병이 통증이 없듯이 죄 역시 죄에 대한 감각이 죽어 있어 거리낌이 없다. 자신이 지옥 갈 죄인임을 아는 자가 있을까? 성령으로 조명해 주기 전에는 그 누구도 자신이 죄의 저주로 지옥에 마땅한 자라고 아는 자는 없다. 날마다 사망의 종국을 향해 죽어가고 있지만 이를 모르기에 세상의 것을 더 붙잡기 위해 희희낙락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으니 개탄스럽지 아니한가?
전염성 역시 같다. 문둥병자에게 접촉하면 같이 부정해진다. 죄도 마찬가지다. 남의 죄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 모방범죄로 퍼져 나간다. 죄인이 죄를 짓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죄인은 더 크고 깊은 죄로 빠져 들 때 일종의 쾌감을 느낀다. 죄인은 죄를 먹고 마시고 호흡한다. 이게 죄인의 특징이다. 그래서 문둥이처럼 입술과 코와 눈이 문드러지듯이 죄인의 눈코입도 죄의 통로가 되기에 함부로 보고 듣고 나불대서는 위험해진다.(마음의 할례필요)
암튼, 이런 태생적 죄인이 주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더니 자신이 바로 죄로 죽은 자임을 깨닫고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께 엎드리며 죄사함을 요청 드리는 것을 빗대서 문둥이를 치유하는 사건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문둥이는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한다.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주여 저를 고쳐주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했을까?
자신이 너무도 엄중한 죄인이라서 감히 그런 요구도 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야말로 죄사함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 중의 괴수요 지옥가기에 딱 맞는 자라고 여기기에, 그저 주님의 선처만 바랄 뿐이다, 그래서 ‘주께서 원하시면 저는 낫을 수 있다’는 말만 했다. 이게 바로 성령을 받아 자기부인이 일어난 죄인된 자의 모습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요, 애통하는 자요, 온유한 자이다. 내 주장, 내 원함이 끝난 자의 모형을 보여준다.
이런 자에게 주님은 자비의 손길을 내밀어 그를 만진다. 그래서 문둥이의 부정을 당신 예수께서 빨아들이시고, 문둥이에게는 치료하는 광선이 입혀진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사 십자가에서 죄의 심판을 받고 죽으시고, 우리에게는 그 의를 전가시켜 영생의 존재가 되게 하셨다. 전적으로 ㅎ님의 택하심의 사랑과 IX의 십자가 희생의 피 공로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가 된 것이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아멘)
문둥병 같이 처참한 죄의 저주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예수님 자신이 대신 십자가 지옥 형벌을 감당하신 그 망극하신 은혜를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 은혜만을 세세토록 높이고, 영원 무궁히 감사 찬양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주일설교 녹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