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았니?
2024. 11. 향기 영란
샘
저너무속이안총안요
너무아파요
찐짜에요
저
엄마한테
전화좀할게요
11월 5일 화요일, 오전 8시 47분 우리 반 아이가 학교 화장실에서 내게 보낸 카톡이다. 8시 47분이라는 시간은 1교시 시작 전이고, 나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이걸 받은 나는 ‘아~ 또 시작이네’라는 마음이다.
‘남기야, 선생님이 남자 화장실로 가기는 곤란하니까, 심하게 아프지 않으면 나와서 선생님하고 직접 이야기할까?’
아침부터 표출할 수 없는 피로감이 밀려온다. 요즘처럼 학예회, 졸업앨범 제작, 중학교 진학 등 여러 업무가 뒤섞여 있고, 하루하루 방심하지 않고 해야만 하는 일들이 쌓여 있다. 나는 불면증으로 며칠 째 곤욕을 치르고 있다. 나는 무거운 금덩이를 주머니에 잔뜩 넣고 걷다가 제 풀에 지쳐 다 버리고 가는 나그네처럼 대부분의 일들을 감당해 내지 못한 채 지내고 있다. 출근하면서 감당해야 할 일들조차 버거운 상태다.
화장실에서 나와서 골마루 쪽에서 함께 섰다.
“어디가 안 좋은 거니?”
“배도 아프고 머리도 너무 아파요”
“남기아,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니?”
“그런 거 아니예요. 진짜로 속이 안 좋아요. 엄마도 알아요.”
“그럼 학교를 안 와야지, 이렇게 오자마자 아프다고 하면 어떡하니?”
이럴 땐 선생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없다. 꾀병이라 단정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방금 학교 간 아이가 저렇게 다시 전화를 걸어서 다시 집에 가겠다는 말을 거의 하루 걸러서 한다면 우리가 그 아이의 엄마라면 어떤 심정일까?
그 아이가 보낸 지난 월요일 하루이다. 아침 활동 시간에 화장실에서 핸드폰을 들고 있으면서 보이스톡을 넣고 카톡을 보냈다.
‘저 오늘 너무 힘들고 참아야되긴 해야되는건 맟는데 근데 몸이 안따르고 너무힘들어요. 어떡해야돼요? 너무몸이 쑤셔요. 이건 찐짜로어떡해야돠요 그리고 약간 모라해야지 고통쓰러요’
그렇게 힘들면 엄마에게 전화하라고 했더니, 또 엄마는 학교에 있으라고 했단다. 그렇게 1,2교시는 책상에 엎드려서 내내 잤다. 약을 먹는 아이이고 최근에 약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30분 쉬는 시간에 조금 차근차근 물어보니, 5학년 중에 한 명이 아침에 자기가 불렀는데 자기 말을 씹었다고, 애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만만하게 본단다. 늘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건 아니라는 말을 또 그렇게 해 주었다.
3교시 수학 수업에는 기초학력 전담 강사 분의 도움으로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 분이 들어오시면 나는 안심이 된다. 점심시간 신나게 놀고 들어와서 5교시 우쿨렐레 시간에는 내내 엎드려 잤다. 음악이나 노래에 관심이 없다. 전혀. 애석한 일이다. 사회시간에는 필기를 하면서 수업에 참여했다.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하루에 분노를 표출하는 횟수가 평균 두어번 정도이다. 오늘은 학예회 연습 곡으로 <나는 문제 없어>를 신나게 부르고 있었다. 남기가 노래를 부르지 않고, 계속 장난을 치며 방해를 하자 다른 친구 몇몇이 남기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뜻의 비속어를 썼다. 남기는 분노의 화신이 되어 상대 아이에게 욕을 퍼부었다. 우리는 <나는 문제 없어>노래를 계속 불렀다. 학예회가 막바지에 접어들어 나의 초조함은 아이들에게 전이되었고, 우리들의 문제 없음 속에서 남기의 분노는 끓고 있었다.
다시 쉬는 시간이 되었다. 나 역시 불량한 컨디션 속에서 진행되는 상담의 질은 썩 바람직하지 않지만, 남기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그의 분노에 대한 존중이었다.
“다른 학교 가고 싶어요. 전부다 저 무시하고, 저보고 짜져 있으라 하고.... 어어엉엉~”
나는 아침 활동 시간에 해야 할 과제를 챙기고, 책상 안과 사물함을 정리하도록 했다. 모두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저 변함없는 레파토리에 나는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거는 시비는 장난이고, 그것에 반응하는 친구의 그것은 폭력이라고 여기는 것이 정당하냐, 아침에 교실에 들어와서 할 일을 챙기고, 수업에 참여하면 친구가 너를 무시하겠느냐, 쉬는 시간에는 절대 아프지 않는 네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등의 남기가 나에게, 주변의 친구들에게 그동안 심어준 내용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모든 사람이 공감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남기도 물론 공감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 글은 내가 남기를 공감할 수 없는 강력한 이유가 되지 않겠소? 하고 나를 제발 공감해 달라는 용도의 목적을 띄기도 했지만, 그러나 나는 남기를 공감할 수 있는 작은 희망을 놓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남기의 저 진실하지 않은 말들이 발생한 가정이라는 공간과 가족의 사랑에 대해, 내가 알지 못하는 정보에 대한 물음표에 대한 궁금점을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닐까.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는 장담을 무참히 내려놓게 만드는 저 강력한 상대에 나는 무력하긴 하나, 마음이 많이 아픈 아이, 기분이 심하게 조울을 오가는 아이, 손이 많이 가는 아이로 남겨두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에 덧붙여 나는 내가 너무 힘겹지 않도록 나를 살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