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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07
사도행전 15장 15-18절 [1장 9-10항]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구원을 위한 믿음과 믿음에 합당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 뜻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혹은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성경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자체적으로 똑같이 명백하지는 않습니다.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 있는가 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선명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대한 기본 지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본문을 이해하는 수준이 각 개인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할 필수적인 것들은 아주 분명하게 성경 곳곳에 제시되어 있고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운 사람들뿐 아니라, 못 배운 사람들도 일상적인 방편의 적합한 사용 안에서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할 필수적인 것들의 충분한 이해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다고 할 때 구약은 당시 하나님 백성의 자국어인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은 기록 시기에 여러 나라들에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직접적으로 영감이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각별한 보호와 섭리로 말미암아 모든 시대들 안에서 순수하게 지켜졌습니다. 비록 원본에 대해서는 남아 있지 않지만, 사본에서도 그 순수성이 지켜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의 모든 논쟁들이 있을 때 교회는 최종적으로 구약과 신약에 호소를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과 헬라어로 된 신약 성경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읽을 수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이 들어간 모든 나라의 민족 언어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성경에 대한 권리와 관심을 지닌 자들이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경을 읽고 살피도록 명령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신앙고백서는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목적을 세 가지로 말하는데,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안에 충만하게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받을만한 방식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성경의 인내와 위로를 통해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성경에 대한 마지막 부분으로 9항과 10항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9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해석의 무오한 규범은 성경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의 참되며 충만한 (하나 외에 여럿이 아닌) 의미에 대한 의문이 있을 때, 보다 명확히 말하는 다른 본문들에 의해 살펴지고 알려져야만 합니다(벧후1:20-21, 행15:15-16).
9항은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범은 성경 자체라는 내용입니다.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범이 성경 자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이 사람의 뜻이 아닌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벧후1:2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배우겠지만, 우리가 성경의 무오성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무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오류가 없다는 것은 그분이 완전하시다는 것입니다. 틀린 것이 없으며, 자신 안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구원을 위하여 말씀을 기록하게 하실 때 거기에 상반되거나, 여기서 했던 말씀과 저기서 했던 말씀이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 어려운 본문의 경우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다른 쉬운 본문으로 해석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해석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2항에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모든 성경이 신앙과 삶의 규범이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고백 자체가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범이 성경 자체임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든 삶이든 오직 성경으로부터만 논할 수 있다면 신앙에 대한 설명이든 삶에 대한 설명이든 결국 성경으로부터만 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신앙을 말하면서, 신앙에 합당한 삶을 말하면서 성경도 말하고, 성경이 아닌 다른 것도 말한다고 해 보십시오. 성경과 성경 아닌 다른 것이 일치한다면 그나마 감사한 일이겠지만, 성경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모든 것은 사실 일치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적인 예로 율법만 하더라도 명하고 금하는 것에 대하여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것까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성경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오직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모든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규범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66권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입니다. 그러하기에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범은 성경 자체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범이 성경 자체라고 할 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7항은 성경의 명료성과 관련해서 고백합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자체적으로 똑같이 명백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선명하지도 않습니다. 특히 성경 자체만으로 어려운 본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어려운 본문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일이 있다면 거기에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하심은 결코 새로운 계시가 아닙니다. 계시 된 말씀 외에 또 다른 계시를 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은 이미 주어진 계시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 16장 13절은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성령의 조명하심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할 때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신다고 말씀합니다. 들은 것을 말한다고 할 때 이미 기록된 성경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쉬운 본문만이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본문일 수 있지만, 성령 하나님은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다른 본문을 통해 어려운 본문의 내용을 조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연구하여 살폈다는 표현이 있기도 합니다. 지금 받은 계시가 이전에 있었던 계시의 말씀과 일치하는지 살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5항에서 고백한 것처럼 ‘모든 부분들의 일치’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5장도 마찬가지입니다. 1절을 보시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그러니까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따라 구원의 유무가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경우 할례가 당연한 것이었지만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시점에 있어 할례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는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을 위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게 되는데, 결론은 할례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11절을 보시면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그러면서 13절 이하 사도 야고보가 말하게 되는데, 14절부터 보시면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행15:14-18)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한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셨는데, 이 일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 야고보는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한다고 말하면서 아모스의 말씀을 인용하는데, 아모스 선지자 한 사람을 인용하지만 그가 한 말이 다른 선지자들과 일치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의 구원이 신약 시대에 일어나고 있지만, 그 일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어 온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구약의 어느 한 선지자만이 아니라 여러 선지자를 통해 일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은 옛 언약, 새 언약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다른 언약이 아닙니다. 같은 언약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 마지막(5) 항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실체에 있어서 다른 두 개의 은혜언약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륜들 아래 하나이며 동일한 은혜언약이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분명한 내용처럼 보이는 구절을 더욱 분명한 내용으로 말하고 있는 구절로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만이 아니라 신약과 신약 안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 대하여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벧후3:16)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알기 어려운 내용도 있지만 그 모든 편지도 자신이 쓰고 있는 이 일에 대하여 동일하게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고 할 때 ‘전 성경’(Tota Scriptura)의 이해 안에서 ‘오직 성경’이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그리고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은 내용을 배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런 내용들은 성경 해석의 결과물로 주어진 것들입니다. 다시 말해 전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오직 성경, 즉 성경에 있는 한 부분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지, 성경해석의 무오한 규범은 성경 자체라는 고백을 무익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한편 가톨릭은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범이 성경 자체가 아니라 가톨릭교회에 있다고 보면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해석의 무오한 규범은 성경이라고 할 때 교회 없이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6항에서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및 인간의 구원과 믿음과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 뜻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성경으로부터 유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7항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자체적으로 똑같이 명백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선명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할 필수적인 것들은 아주 분명하게 성경 곳곳에 제시되어 있고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5항의 고백도 경시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교회의 증거에 의해 성경의 높고 존귀한 가치로 이끌려지고 인도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가톨릭이 말하는 것처럼 교회 없이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교회의 증거를 통해 성경의 높고 존귀한 가치로 이끌려지고 인도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말씀 사역자를 두셔서 좀 더 전문적으로 말씀을 섬기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말씀 사역자를 두셔서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증거 하게 하시지만, 모든 성도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사도행전 17장 11절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합니까?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의 설명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그러나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의 나음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서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만, 거기서 멈춘 것이 아니라 그 설교가 성경의 말씀과 일치하는지 늘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오직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가 있는 줄 알고 성경만을 의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목사의 설교가 성경과 일치한다면 그것으로 유익을 받아야 합니다. 5항의 고백처럼 교회의 증거에 의해 성경의 높고 존귀한 가치로 이끌려지고 인도되어 그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의 설교, 교회의 증거가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목사의 설교이기 때문에, 교회의 증거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고로 9항에서 어떤 성경의 참되며 충만한 하나 외에 여럿이 아닌 의미로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중세 교회는 성경의 모든 본문마다 네 가지 의미들을 찾아내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사중 해석 방법이라고 하는데, 문자적 의미, 풍유적 의미, 도덕적(교훈적) 의미, 종말론적(천상적) 의미가 그것입니다. 딕스혼 부부의 공저인 「믿음의 고백」이라는 책에 보면 때로는 이 사중적 해석이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책임 있게 성경을 대하도록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부 본문들에 담긴 역사적 의미는 다른 구절들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고, 동일한 본문이 도덕적인 함의들을 동시에 내포할 수도 있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강림이나 천상과의 연결 고리를 동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오병이어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다. 일단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사중적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문자적 의미는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최소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사건이라는 것, 이것이 문자적 의미입니다. 둘째, 풍유적 의미는 떡과 물고기가 예수님 자신과 그의 말씀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셋째, 도덕적 의미는 예수님의 자비와 연민, 그리고 사람들에게 필요를 채워주려는 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릴 때 큰 기적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이웃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적 의미는 이 사건이 천국과 최후의 영적 실체를 상징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풍요로움과 만족을 예표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풍족하게 채우실 것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영원한 잔치와 그곳에서의 충만한 기쁨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오병이어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의 예를 들었지만 모든 부분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받아들일만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특히 풍유적 의미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내용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6장에서 그 사실을 매우 길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본문을 이런 식으로 풀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딕스혼 부부의 책에서는 그리 유능하지 못한 이들이 이 사중적 해석을 사용한 결과, 이 해석 방식이 유용하지 않음을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서부터 해석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해석을 성경에 넣어서 읽는 일이 있기도 했으며, 실로 괴이한 해석들까지도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이 사중적 해석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더불어 사람들은 본문의 문자적 의미와 그 의미의 통일성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혁자들은 문학적 분류 혹은 장르에 따라, 각 구절마다 일차적으로 단 하나의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만을 부여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회의 회원들은 모든 본문의 해석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하나 외에 여럿이 아닌 의미’라고 할 때 오직 하나의 의미만 있다고 생각했는가? 비교적 건전한 중세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종교개혁 및 후기 종교개혁 신학자들은 성경의 한 구절이 그 구절 너머의 어떤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모든 부분이 다른 부분들과 서로 대화한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하기에 성경해석의 무오한 규범은 성경 자체라고 고백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성경의 참되며 충만한 의미에 대한 의문이 있을 때, 보다 명확히 말하는 다른 본문들에 의해 살펴지고 알려져야만 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대한 마지막 항목으로 종교의 모든 논쟁들의 최종적 권위를 가진 최고의 심판자이신 성령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10항입니다.
최고의 심판자는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외에 다른 자일 수 없습니다(마22:29,31, 엡2:20, 행28:25). 그로 말미암아 종교의 모든 논쟁들이 결정되고, 종교회의들의 모든 결정들, 고대 저자들의 견해들, 인간의 교리들, 사적인 영들이 검증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판단을 의존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강조하지만 성령 하나님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시는 분이십니다(5항). 10항에서 최고의 심판자는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외에 다른 자일 수 없다는 고백은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과 상관없이 역사하실 수 있고, 또 그런 역사 속에서 새로운 계시를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자들을 거절한 것입니다. 실제로 신앙고백 자체에서도 ‘사적인 영들’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사적인 영들 혹은 사사로운 영감을 주장하는 일부 신자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일부 신자는 성령이 특별히 자신에게 나타나 가르침을 주었다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이런 주장에 대해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조).
여러분, 사람들이 진리의 길에서 이탈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사두개인에게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하면 누구도 예외 없이 진리의 길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서 세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입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서는 최고의 심판자는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외에 다른 자일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종교의 모든 논쟁들이 결정되고, 종교회의들의 모든 결정들, 고대 저자들의 견해들, 인간의 교리들, 시적인 영들이 검증된다고 고백합니다. 성령 하나님에 의해 참과 거짓이 결정되고, 검증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인데, 성령 하나님을 최고의 심판자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병훈 교수의 글을 참조해서 말씀을 드리면(http://repress.kr/19663/),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교회 회의가 어떠한 교리적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이 성경의 올바르며 해석에 따라 분명한 교훈에 일치하여 내려지게 되면 그것은 바로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으로 고백을 하고 그 결정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의 올바른 해석에 기초한 명백한 교훈이 성령 하나님의 인도로 볼 수 있는 까닭은 4항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믿고 순종해야 할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진리 자체이시며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의 결정이 이루어질 때, 그것이 성경의 객관적 교훈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동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내적인 설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7항에서 고백한 것처럼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할 필수적인 것들을 아주 분명하게 성경 곳곳에 제시되어 있고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배운 사람만이 아니라 못 배운 사람들도 일상적인 방편의 적합한 사용 안에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방편의 적합한 사용이라고 할 때 성경을 읽고 듣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내적 조명이 없다면 그런 방편들도 사실은 무용지물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교회가 어떤 결정을 할 때 성경을 따른 것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성령의 내적 조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례로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5장을 다시 보시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주장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할 때 이방인의 구원과 관련하여 구약까지도 인용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결정을 하는데, 19절과 2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그런데 이런 결정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21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심지어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28절에서는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라고까지 말하게 됩니다. 구약 성경을 따라 예루살렘 공회가 결정한 것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일이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된 것을 교회에게 지키라고 권하는데, 사도행전 16장 4절입니다.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런 점에서 신앙고백서는 최고의 심판자는 성령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외에 다른 자일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판단을 의존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 성경이지만,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 없이는 성경이 유일한 규범의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대한 마지막 고백에서 최고의 심판자는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을 말한다고 해서 ‘성경과 상관없이’가 아니라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신앙고백서 제1장 성경에 대한 고백을 통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정리해야 하는데, 성경이 왜 필요한가? 성경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은 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66권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오직 66권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66권만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계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66권으로 된 이 성경만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고백합니다.
더불어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충만한 이해와 확신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역사로부터 온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과 함께 일하십니다. 성경을 존중하는 것은 이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사랑하며,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할 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여 우리를 더욱 복되고 풍성한 길로 인도하시게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