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글쓰기
영혼을 채우는 맛, 통영나물
향기 이영란
냉장고에 사둔 콩나물, 무, 호박, 당근이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상해서 버린 콩나물이 생각나서 저것까지 버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콩나물을 씻어서 냄비에 안쳤다. 또 저렇게 크게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흙에서 어떤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 가늠이 안 되는 무를 반으로 잘라 채 썰었다. 부드러운 씨가 들어앉은 둥근 호박도 반이면 족할 양이었다. 길쭉한 호박이 아니면 가지런하게 채 썰기가 좀 어렵긴 하지만 그런대로 모양이 나왔다. 당근 썰기는 자신 있다. 어슷하게 썰어서 곱게 채 친 음식을 보면, 음식은 예술이고 정성이란 말이 실감난다. 음식은 만든 사람의 마음가짐이 오롯이 보이는 결과물이다. 대충의 마음가짐으로 절대 깊은 맛을 낼 수 없는 것이 음식이다. 무나물은 볶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고, 호박나물은 너무 무르게 볶으면 익어터진 무화과처럼 맥 빠진 맛이 나서 적당한 식감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당근은 기름을 두르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볶았다. 시간과 공이 들어가긴 했지만, 찌든 생활 속에서 짬을 내어 겨우겨우 만드는 나물은 결국 표시가 나고 말았지만, 아들과 나는 대강의 나물 모양만 갖춰도 언감생심하고 먹을 일이었다.
퇴근을 하고 서둘러서 저녁을 먹고, 한 시간 정도 산책 겸 운동을 하고 집안 정리를 하고, 책을 보고 몇 글자 끄적거리는 빽빽한 루틴을 지켜 내고 있었다. 반복되는 장소와 시간 속에서 시간은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는 속도로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일머리가 빠르지도 손이 빠르지도 않은 나는 느릿하게 정해진 일들을 하기 위해 움직여야만 한 가지씩 넘어갔다. 그러고도 순위에서는 밀려났지만, 시간을 다투는 일들이 줄을 서 있었다. 주말이 아니면 반찬을 장만할 여유가 생기지 않는데, 견고하게 둘러쳐진 울타리를 잠시 풀고 있는 점점 신선함을 잃어가고 있는 재료들로 나물을 만들었다. 그날 밤 나는 몇 글자 읽고 끄적이는 것을 열외시켰다. 냉동실의 오징어와 홍합, 두부를 넣고 탕국을 끓였다.
흔하디 흔한 재료를 다듬고 볶아서 큰 통에 담아서 뜨거운 탕국을 부으면 따뜻하고 푸짐한 한 끼 식사가 된다. 영혼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나는 육지에서 자란 귀하지 않은 채소들과 바다의 조개, 오징어, 문어를 넣어 끓인 국이 만들어 내는 기막힌 조화를 생각한다. 혼자서는 결코 낼 수 없는 슴슴하고 구수하고 맑은 맛을 보면 바다가 육지였던 곳, 육지가 바다였던 곳들, 자신의 오랜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는 모습일까.
언젠가 만나지 않을까 하는 그리움으로 남은 나의 벗들과도 그렇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명절 때 친정엄마가 마련하는 나물은 내가 어설프게 해 먹는 것에 비해 그 가지 수가 몇 배에 달한다. 배추나 시금치와 같은 푸른 잎 채소, 가지, 호박, 박, 콩나물, 숙주나물, 무, 톳, 미역, 고사리, 도라지, 토란대 등 10여 가지를 훌쩍 넘긴다. 엄마의 관심과 에너지는 자식과 손자들이 먹을 일들에 온통 쏟고 있는 것이다. 진한 쌀뜨물로 탕국을 끓이면 그 부드러운 맛은 입 안에서부터 몸 속의 각 세포로 직행하는 느낌이다. 탕국과 우리 몸의 피가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거기에다 조금 꾸덕하게 마른 생선찜과 김치 한 가지만 있으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없는 한 끼 밥상이 된다. 엄마가 내 놓는 마른 생선도 돔, 말린 물메기, 말린 대구, 가오리, 민어조기, 대구아재비, 가자미 등 (설날과 추석은 각각 밥상에 오르는 생선의 종류가 다르다) 대여섯 가지는 되는데, 자식과 손자들을 보는 기쁨에 들뜬 엄마의 목소리와 호들갑을 양념으로 얹어 먹는 나물밥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
시댁인 하동에서 먹는 나물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싱싱한 채소와 바다의 해초를 주로 쓰는 이쪽 지방과는 다르게 고사리, 토란대, 말린 도라지 등 오랫동안 먹을 수 있도록 쪄서 말린 것들이 많다. 나는 밥상에 오르기까지 물에 불리고, 삶고 또 아린 맛을 빼기 위해 들인 어머님의 시간들이 애닯기도 할 뿐더러 산과 들에서 내어준 무궁한 먹거리들이 고마워서 통영에서 먹던 나물과는 다른 방식의 경이를 느꼈다. 다만 한 그릇씩 담아 밥을 함께 말아 먹는 통영식과는 달리, 다른 반찬 중의 하나처럼 밥상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밍밍한 탕국도 들어간 해산물에 비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통영에서는 당당히 주인대접을 받건만, 들인 시간과 공에 비해 궁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냄비에 가득가득한 나물을 언제 다 먹을지 아득한 일이었다. 나이를 먹어 시어른들에 대한 불편함과 어려움이 닳아가자 나는 찬장에서 제일 큰 국대접을 꺼내어 각자가 먹을 나물을 푸짐하게 담고 탕국을 자작하게 부었다. 아들 삼형제가 각자의 식솔을 거느리고 모인 인원은 12명이다. 12개의 국 그릇에 담긴 마른 나물로 채워진 탕국은 각자가 해결해야 할 삶의 책임을 뜻하기도 했다.
제사나 명절에야 구색을 갖춘 나물을 먹는다. 평소에 해 먹으면 그 맛이 잘 안 난다. 양가를 찾아 부모형제를 만나는 일에 번거로움이 없지는 않지만, 그 번거로움이 없다면 세상의 엄마만이 만들 수 있는 영혼을 가득 채우는 나물밥을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물밥을 먹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