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코스 : 반구정 – 율곡습지공원
경기 둘레길 7코스를 걷고자 다시 반구정에 이르렀다. 반구정은 조선의 청백리이신 방촌 황희 선생께서 관직을 사양하고 천수를 다할 때 까지 갈매기와 벗하며 말년을 보낸 곳이다.
그가 비록 고려의 유민으로 조선의 개국에 참여하여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는 정신을 지키지는 않았을지라도 세종을 보좌하여 각종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여 태평성대를 이루게한 공로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반구정을 떠나려니 왠지 허전한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반구정을 떠나면서 반구정의 주인 황희 정승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청렴이란 두 글자의 의미를 새겨본다.
미음이 깨끗하고 헛된 욕심이 없다는 뜻을 지킨 청렴淸廉은 20대 초반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비록 공직자는 아니었을지라도 내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몸소 실천하고자 했던 덕목이었다.
그리하여 젊은 시절 금전의 유혹을 물리치며 의롭지 않은 일에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자 스스로를 경계하며 깨끗한 삶을 실천하고자 하였지만 ‘ 저 사람은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이라 아직 사회생활을 모르는 사람’이란 비난만을 들어야 했다.
어떤 이는 아내와 자식을 위해 무릎을 굽히고 살아야 한다고 충고 아닌 충고를 받았을 때는 아내와 자식을 위해서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소신을 버리지 않았고 네가 과연 큰돈 앞에서도 거절할 수가 있을까 ? 라고 비난도 받았지만,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묵묵히 실천하였다.
이제 60대 중반이 되어 40년 직장 생활의 결과가 한 가정의 기본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가난만이 내 가슴에 안겼지만, 결코 지난날의 삶이 자랑스러울 수는 있어도 결코 후회로 다가오지는 않으니 보통사람의 덕목은 어기지 않고 지켰다고 할 것이다.
청렴은 청빈淸貧이 아니다. 내 삶의 목표를 비방했던 그 사람들이 만약에 또다시 청렴을 추구하였지만 돌아온 것은 청빈이라면 후회하지 않을까 ?라고 또다시 화살을 쏟는다면 성인 공자님의 말씀을 힘차게 들려줄 것이다. “ 가난은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다. 다만 그 가난을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가난을 떳떳이 누릴 것이다.”
청렴 앞에 내 삶을 잠시 반추해 보고 율곡 습지 공원으로 향했다. 반구정을 출발하려는데 관광버스에서 많은 사람이 내리고 있었다. 코리아 둘레길의 하나인 경기 둘레길 7코스를 걷고자 찾아온 강남 신사 산악회 회원들이다.
비록 함께 가며 걷지 않을지라도 우리 국토를 걷는데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대하니 반가웠다. 남, 여 중, 장년층의 많은 사람이 오랜만에 좁은 도로에 꽉 들어찬 것 같다. 하나같이 씩씩하고 환한 모습에 경기 둘레길을 걸으러 왔나요 라고 물으니 손을 휘저으며 코리아 둘레길을 걸어요 라고 대답한다.
우리 땅을 걷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길을 걷는 사람이 걸어가는 길에 자부심이 없으면 걸을 수 없다. 그 길에 대해 자부심이 강할 때 발걸음도 가볍고 걸을수록 흥이나지만 자부심이 없으면 발목만 아파 다시는 걷지 않게 된다.
40명 정도의 많은 사람이 도로를 점령하니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저속 운행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오늘은 유난히도 대형트럭의 운행이 많아 트럭이 지나갈 때는 어김없이 멈춰서 자동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는데 몇 번을 반복하니 짜증이 난다.
짜증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기에 애써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가는데 임진각으로 향하는 철로가 있었다. 단선 철로에는 건널목도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고 철로는 녹이 슬었다.
녹슨 철로는 바로 경의선 철도였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신의주까지 쏜살같이 내달려야 할 철로가 녹이 슨 채로 방치(?)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경의선이라면 내일의 경의선은 힘차게 신의주를 향하여 내달려야 할 것이다.
경의선을 타고 황해도 구월산과 평양의 대동강을 걸어갈 날을 막연히 그려볼 때 어느덧 농로에 진입하였다. 배춧잎, 깻잎이 길가에 심어져 농촌임을 말없이 들려주는데 광활하게 펼쳐진 드넓은 평야 저 끝에 가물가물 파평산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언제 보아도 풍요로운 가을의 들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넉넉한 마음이 무엇인지 절로 깨닫는다. 비록 내가 심은 벼는 아니지만 내가 가꾸고 일구어 놓은 것처럼 뿌듯한 마음이 솟구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휴전선이 가까운 최북단의 들녘은 평화스럽기만 한데 우리가 자유스럽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여기까지이고 북쪽으로 더 이상 올라가 걸을 수 없으니 우리 국토를 우리 발로 걸을 수 없는 한을 누가 알까?
임진각의 녹슨 기차가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고 외치는 그 소리의 의미를 이제야 알아 듣고 ’ 우리는 걷고 싶다. 우리 국토‘를 외치며 걸어갈 때 탱크 저지선이 길가에 설치되어 있어 긴장감을 주었다.
평화와 긴장이 공존하는 길을 걸어 장산 전망대에 이르렀다. 장산 전망대는 경기 둘레길의 숨은 비경이다. 산 아래에는 임진강이 두 갈래로 흐르고 있어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섬을 이루고 있는 곳을 사람들은 초평도라고 불렀다.
임진강 한가운데 한가롭게 떠 있는 섬, 초평도草坪島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평평하다 하여 ’풀들섬‘이라 불렀는데 어느 때부터 한자어로 표기하여 초평도라 하였다. 사람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아 식생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다소 멀리 바라보이는 경관이 매우 뛰어났다.
장산 전망대에서의 압권은 임진강 너머 경기 오악의 하나로 일컬은 개성 송악산을 조망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힘차게 일자로 뻗어간 송악산의 기세는 바로 고려의 기상이요 우리의 얼이 아닐 수 없다.
어디 송악산뿐이랴! 낯익은 산은 아니지만, 북녘의 장군봉, 천덕산, 덕물산, 진봉산과 대성동 마을과 기정동 마을도 조망할 수 있다. 갈 수 없기에 더욱 가고 싶은 곳,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정녕코 꿈일까!
한국전쟁 때 북한의 주민들이 남쪽으로 피난하면서 어머님 3일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집을 떠났다는데 총성은 멈췄지만 군사 분계선이 그어지어 3일의 약속이란 이산의 한을 안은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갈망하는 북녘땅 걷기가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장산 전망대에는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고 뒤늦게 도착한 강남 신사 산악회의 인솔자는 차 안에서 장산 전망대를 소개하는 것을 잊었는데 모두 어떻게 알고 잘 찾아왔네 ! 라고 외친다.
숨은 비경을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사람들은 절로 알게 된다. 마치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길이 생긴다는 옛말처럼 경기 둘레길 7코스를 걸으면서 숨은 비경인 장산 전망대를 어찌 그냥 치나 칠 수 있겠는가?
장산 전망대는 길가에서 300m 외진 곳으로 들어가야 하므로 왕복 600m를 보너스로 걸어가야 하지만 그 누가 이 아름다운 곳을 외면하겠는가 ? 오지 않으면 서운한 곳 장산 전망대에서 화석정으로 향했다.
장산 전망대에 오를 때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왔기에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 되었고 흙길이 되어 경쾌하게 걸어갈 수 있었다. 흙길로 계속되기를 바라는 욕심을 깨우치려는지 어느새 아스팔트 길로 바뀌며 임진리에 이르렀다.
임진리는 관광지가 되어 식당이 즐비하였다. 여행이 관광과 식도락에 있다면 당연히 식도락을 즐기며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명소를 관광하겠지만 우리는 우리 땅을 걸어가고 도보 여행가가 되어 음식의 맛보다는 땅의 향기에 마음을 두고 있기에 임진리에 서려 있는 역사적 설화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리의 명소는 임진나루이다. 임진나루는 서울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의주대로 중심 길목이 되는 중요한 나루로써 임진왜란 때는 조선 14대 국왕 선조가 의주로 몽진 갈 때 임진나루를 건넜고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이 강을 건너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 임진강을 건너 몽진하였다. 이때의 조선왕조실록은 선조가 임진나루를 건너 몽진하는 광경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상이 시신侍臣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 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도 없었다.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동파東坡까지 닿았다. 상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도 철거시키도록 명했다. 이는 적병이 그것을 뗏목으로 이용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백관들은 굶주리고 지쳐 촌가에 흩어져 잤는데 강을 건너니 못한 사람이 반을 넘었다.”<선조 25년 1592년. 4월 30일>
국가를 보위하지 못하고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트리고서도 왕가의 보전이란 미명하에 몽진하면서 백성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배를 가라앉히는 임금을 국왕으로 모셔야 할까?
맹자는 “인仁을 해친 사람을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헤친 자를 잔 殘이라 하며 이러한 잔적한 사람을 일부一夫라고 하고 일부인 주紂를 시해하였다는 들었지만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선조는 마땅히 백성의 칼날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
지금은 다가설 수 없는 임진나루를 멀리서 바라보니 잔잔한 물결만이 끝없이 펼쳐 아늑한 풍광만을 연출할 뿐 아무런 대답이 없다. 임진강의 화두는 무엇일까? 고난의 역사를 그렇게 경험하고도 무엇이 부족하여 또다시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가 총칼을 겨누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임진나루의 가까운 거리에 화석정이 있다.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의 유학자인 길재(吉再)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그 후 폐허 되었다가 중수하였다.
율곡 선생은 국사의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여생을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면서 시와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 유림이 성금을 모아 복원한 것이다.
화석정에는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이라 일컬어지는 조선의 제일가는 천재 율곡 선생께서 8세에 지었다는 한시를 새겨 놓았다.
花石亭 - 八歲賦詩
林亭秋已晩 숲 속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騷客意無窮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聲斷暮雲中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화석정 주차장에서 점심상을 차리니 어떤 아주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아래에 내려가면 율곡식당이 있는데 아주 음식을 맛나게 잘하는 곳이니 그곳에서 식사를 하시지 길가에서 식사하시느냐고 하신다.
가는 길이 바쁜 사람이 이것저것 다 찾아다니며 할 것 다 하면 언제 우리의 목적지까지 이를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가다가 못가면 그만두는 그런 도보 여행가가 아니다. 우리 땅을 걷는다는 명제 아래 경기 둘레길 60코스를 걸어가는 것이다.
60코스가 끝나면 또 다른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우리는 우리의 걸음을 늦출 수는 없다. 먹고 마시는 쾌락에 빠져 우리의 걸음을 다른 곳으로 향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우리의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는 부지런히 걸어가고 그 목적지에 이르러서 그 고장의 맛 기행에 젖어 우리의 걸음에 더욱 즐거움을 가미하는 것이다. 율곡 습지 공원에 이르니 코스모스 축제가 한창이었다.
연못에는 분수가 솟구치고 넓은 광장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하였다. 축제장에는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온다. 우리의 7코스 걷기를 축하해 줌인가? 왁자지껄 이는 사람의 소리가 진동하는 곳에서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니 오늘 걸어온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 일시 : 2022년 9월 25일 일요일 맑음
● 동행 : 박찬일 사장님. 김헌영 총무님
● 동선
- 08시25분 : 반구정
- 09시25분 : 경의선 철로
- 10시40분 : 장산 전망대
- 11시45분 : 임진나루
- 11시50분 : 화석정
- 12시00분 : 점심
- 12시40분 : 율곡습지공원
● 총거리 및 소요시간
- 총거리 : 13km
- 소요시간 : 4시간 1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