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 거주하며 시를 쓰고 있는, 2024년 동주해외작가특별상 수상자 김오 시인을 만나 간단히 시인의 근황을 들었다.
1. 시인의 근황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청과물 도매시장이 열리는 플래밍턴 마켓으로 갑니다. 레바니스나 이스라엘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오이를 사고, 중국인 쌤, 수, 리에게서 파, 시금치, 부추, 홍콩초이섬, 쑥갓, 청갓, 청경채 등을 사고, 베트남인, 타이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월남고추, 타이칠리를 사고, 데이빗에게서 밤과 대추를 사고, 벤한테 수박, 사과, 감자, 고구마, 당근, 파인애플, 바나나, 밤, 망고스틴, 아보카도, 옥수수를 사고 나면 커피 한잔을 꿀처럼 들이키는 7시입니다. 주차번호 49로 배달된 과일과 채소를 움직여 물건을 싣고 가게에 도착하면 아침 9시입니다. 한국 마트 직원들과 물건을 내리고 사장과 영수증을 정리해서 계산을 끝내면 11시입니다. 가끔 정산이 틀려 30분 더 애태우다 집에 오면 12시가 되곤 합니다. 씻고 밥 먹고 나서 1시간 반 정도 졸다 깨다 비몽사몽 머리를 흔들다가 3시 반에서 4시 반 사이에 이른 저녁을 먹습니다.
이제부터 3시간 반이 말짱한 정신으로 지내는 자유 시간입니다. 가끔 재미난 드라마도 보고 졸시를 쓰려고 안 나오는 피를 토하는 척도 합니다. 시 쓰는 일도 이렇듯 일상입니다. 한때 일상에서 미뤄 놓은 적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3번째 시집을 준비 중이라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올 내 시집 대부분의 시편은 이 시간에 태어난 작품들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6시 반쯤 재고 파악 메시지를 받아 내일 살 물건 주문을 넣고 나면 8시입니다.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 지난 25년간 규칙적인 내 일과입니다. 아주 간단한 삶입니다. 늘 하던 일을 하며 사는 것, 이것이 나의 근황이라면 근황입니다.
2. 김오 시인께 시란?
시는 생업과는 다른 또 다른 나의 삶이라는 생각입니다. 끊지 못해 같이 사는 무엇.
3. 시를 쓰게 된 동기와 자신의 시에 담고 싶은 정신이 있다면?
내겐 책 읽기를 좋아하는 것과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운동을 좋아한다고 다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 아니듯 책을 좋아한다고 다 시인이 되진 않은 것처럼 말이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교내 백일장이 열렸습니다. 우리에겐 세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쓰고 있는데 워낙 악필에 긴 글쓰기를 싫어하던 나는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때 할 수 없이 써냈던 짧은 글이 장원으로 뽑히면서 시라는 것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몇 년 후 김명인의 시집 『동두천』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발 딛고 사는 곳이 시가 된다는 것이 놀라웠지요.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게 된 동기라면 동기입니다.
4.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습니까?
어떤 시라는 목표는 없습니다. 사는 동안, 살아지는 동안 마음으로 다가오는 시가 있다면 그것이 어떤 시여도 좋습니다. 어차피 시에 목숨 건 것도 아니거니와 목숨을 걸었다 해도 각자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다를 것이고 저마다의 몫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어쩐지 시는 목숨 건 시인들의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긴 합니다.
5. 최근 가장 관심 있는 화두는 무엇인가요?(신작 시 두 편과 시작노트로 대신 합니다.)
바람개비
가을이 너무 시퍼런 날
금이 가는 하늘이 보일 때가 있다
새들이 날아오르지 못하는 날이다
빛이 무너진 자들의 록우드
사월의 한 낮
묘비 화병에 처억 걸터앉은 바람개비
바람을 쏘고 있으시다
파리한 영혼을 제 살에 걸어
공중에 점을 찍는 중이시다
상한 마음들 쓰다듬으시다
바람개비 꼭지를 찔러대는 염원을 뽑아
쏘아 올리시자
하늘이 비틀리며 푸른빛 투두둑 터지는 4월
그 틈으로 얼른 몸을 밀어 넣고 싶은 무덤들이
바람개비 따라 좌우로 뼈마디 뒤트느라
요란해지는 록우드 공동묘지
나비 한 마리 날아들지 못하는 록우드
나비 한 마리 날아오르지 못하는 팽목항
사월이 오면 청명한 하늘
쨍쨍 까맣게 푸른 가을이 저렇게 깨지는 것을
4월이 쏘아 올린 영혼이 하늘을 깨고 있는 것이 보인다
시작 노트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은 해에 석 달 사이로 돌아가셨다. 두 분은 록우드 공동묘지에 나란히 묻히셨다.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던 해 4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흐른 작년 4월, 유난히 시퍼렇던 가을날에 자주 찾지 못했던 두 분 묘지를 찾았다. 세상의 빛을 놓아버린 누군가에게 아직은 누구를 놓지 못한 누군가가 꽂아두고 간 바람개비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지에서 졸던 낮은 바람들도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일어났고 어디선가 쨍쨍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점점 차가워지는 날씨에, 곤충들도 사라져가는 날씨에 나비 한 마리 묘지 위를 날고 있었다. 나비 날개 끝으로 시드니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세월호가 떠올랐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10년이나 지난 노랑나비들이.
비밀을
당신의 오래된 비밀을 말해
사랑인지
사랑인지
사랑이었는지
그 어려운 길을 굳이 열어 놓은
비밀을
오늘 비 오는 것이
당신의 눈짓인지
오늘 눈 내리는 것이
당신의 비밀스러운 신호인지
사람들의 세상에 태어난
당신의 높으신 뜻으로 비밀을 알리는
아픔을 이겨낸
아니 이겨낼 비밀인지 말해
아픔인지
슬픔인지
슬퍼할 슬픔이 남아 있기는 한지
이 길 끝에 정말 있을 비밀을
시작노트
에덴은 우리의 잃어버린 동산. 그때 쫓겨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하기만 했을까? 벗은 줄도 모르고 동물처럼 사육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와의 손이 사과를 따지 않았다면, 아담에게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동물처럼 부끄러움을 모르고, 짐승의 삶인 줄도 모르고 잘 가꾸어진 에덴 우리안에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우리 바깥에서 사람이 되어 살고 있다. 비록 춥고 배고프고 고단하지만 사람으로……. 어떤 계획이 우리를 내몬 것인지. 두 번째 아담의 피를 사람에게 책임 전가하면서까지 내몬 우리 주인의 계획된 비밀을 알고 싶을 때가 있다.
5. 프로필
김오(金唔) 시인
경기도 동두천 출생
1987년 9월 시드니로 이주
1993년 호주동아일보 신년문예 시 당선
1994년 『시힘』 동인지에 세 편의 시를 실으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캥거루의 집』 『 플래밍턴 고등어』
이메일 sooro56@yahoo.co.kr
김오 시인을 두고 ‘삶의 터전을 시로 그려낸 사람’이라고 했던 동주해외특별상 추천사 제목은 절묘하다. 그의 시는 분명히 이민자 시인의 전형적인 정서를 장착하고 있다. 그것은 향수이기도 하고 자기 존재 부정이기도 하다. 시니컬하게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벽 시장에 발을 딛고 사는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 붙여준 ‘뚝심’과 ‘고집’이라는 수식어도 여전히 잘 어울린다. 모국어로 쓰는 이민자문학은 스스로 세우지 않으면 무너질 것들로 이루어진 경계에 선 사람들의 고백이다. 이제 김오 시인의 시는 모양을 갖춘 자기만의 시 세계가 단단히 세워진 듯하다. 시류와 시풍을 타지 않고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이기에 그의 시가 이민자로 살아가며 흘린 ‘모국어의 눈물’로 아름답게 승화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