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우리 집은 교회와 친숙한 관계가 되었다. 교회에서는 심방을 올 때마다 아버지에게 전도를 했지만,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곧 나가지요. 그러나 지금은 바빠서 못갑니다”라고 핑계를 대셨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때는 아버지가 자수성가를 하여 재산을 늘리는 데 한참 재미가 붙었을 시기였기 때문이다.
어느 해 가을, 하루는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아래 마을에서 불이 났다고 야단이다. 우르르 몰려가 보니 누군가의 집에서 검붉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집은 우리 집이었다. 두려운 마음과 떨리는 다리로 뛰어 가보니 우리 집 바깥마당에 추수를 끝내고 쌓아 놓은 짚더미가 이미 다 불에 탔고, 계속해서 본 건물로 타들어가는 것이었다. 안마당에는 노적가리인 벼떼우적(타작한 벼를 저장하기 위해 짚으로 엮어 만든 벼곳간) 다섯 채와 콩 떼우적 두 채까지, 모든 것을 재로 만들며 타들어갔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을 잡을 길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구경만 할 뿐이었다. 집 뒤에 있는 대밭에 불이 옮겨 붙을 때는 대가 타들어가며 탕탕 연달아 터지는 소리가 마치 전장을 방불케 했다. 치솟는 검붉은 불길을 바라보면서, 나는 무엇인가 커다란 어둠의 세력을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였지만 인간의 나약함과 허무함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쾌 부유한 편이었다. 이런 우리 집의 부유함이 이웃의 시기를 불러일으키기라도 했던가. 우리 집을 몽땅 날려 버린 불은 바로 아랫집에 살던 여덟 살 어린아이가 방화한 것으로 밝혀졌다. 어떤 의도에서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가족은 그 일로 양화면 주재소에 연행되었던 것 같다. 그리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던 그 아이 집에 배상을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버지는 불운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으셨다.
화재로 인해 받은 충격과 상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일로 전의를 상실하고 있는 아버지는 농사일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이웃에 사는 면장 부친인 김주사의 권면으로 상업계로 진출하셨다. 그 뒤 아버지는 뛰어난 상술을 가지고 많은 부를 축적하셨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김 아무개는 물묻은 바가지에 깨가 붙듯 돈을 번다”는 소문을 낼 정도였다. 실제로 어머니도 그 당시를 그렇게 회고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5일장이 열리던 갓개(지금의 笠浦), 임천, 한산, 홍산 등에 점포를 내고, 점원을 두어 어물을 취급하는 도소매상을 경영하셨다. 어머니는 작은 아버지 영만(永萬) 삼촌과 두 명의 머슴을 데리고 농사일을 해나감으로,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점점 부를 쌓아 나갔다.
그러나 운명의 날은 다가왔다. 정초 장을 보기 위해 아버지는 군산에서 물건을 떼러 금성구지라는 뱃턱에서 배를 한 척 대고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다 아버지는 뱃턱 술집에 마련된 투전방 노름꾼들의 유혹에 빠져 밤낮 닷새 동안 노름을 하게 되었다. 당시 “삼동투전방”은 악명이 높았다. 들리는 소문대로, 하룻밤 사이에도 부자가 한 둘씩 없어진다고 말할 정도였다. 있는 재산을 다 탕진하고 부족하여 남의 돈까지 끌어가면서도 도박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아버지는 마침내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다섯 장 가게에 쌓일 물건 값과 빌린 타인의 돈을 노름으로 모두 날린 것이다. 정월 명절을 보기 위해 평소보다 몇 갑절 물건을 많이 구입하려고 마련한 목돈을 잃게 되자 아버지는 크게 상심하셨다. 아버지의 한숨 소리는 천장이 울릴 정도로 깊었다. 너무 억울한 나머지 화병에 걸려 위급하게 되었다. 머지않아 김씨는 화병으로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동네와 다섯 개의 장바닥에 파다했다고 한다. 이런 소문을 들은 채권자들이 떼로 몰려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어려움은 더욱 컸다. 더 이상 재기하기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노동을 싫어하는 백수건달이 도박장을 조성하면 남의 돈을 탐하는 자들이 결국 그런 자리에 빠지는 것이다. 도박에 빠지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패가망신한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