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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창 이찬과 광산김씨부인의 한시 특강(21.11.12.예천군민회관)
이원걸(문학박사)
1. 조선조 안동 지방의 여성 한시 1) 정부인 안동 장씨 2) 조선 3대 기녀 시인 설죽 2. 국창 이찬에 대하여 1) 국창집 2) 이찬의 생애 3. 광산 김씨 부인의 한시 정감 1) 가문 내력 2) 미학적 접근 3) 가족 친지가 그립습니다 4) 고독한 이 마음 누가 알리 5) 그리운 당신이어라 4. 맺음말 |
1. 조선조 안동 지방의 여성 한시
조선조 여성들은 남성 위주의 질서 아래의 순응을 미덕으로 여겼다. 조선조 통치 이념으로 택된 유교적 이념인 충․효․열의 통념은 여성들의 삶에 있어서 많은 구제를 강요하였다. 이러한 규제에 따라 여성들의 인권은 자연히 남성 우월주의적 사고의 체제 아래 종속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사대부 집안 남성들에게 축첩제를 허용하면서도 사대부 집안 여성으로 과부가 된 경우, 개가를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자손에게 과거 응시를 제한한다고 《경국대전》에 명문화했다. 그러면서 열녀를 드높이는 정표 정책을 강화하는가 하면 여성들에게 공교육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 현상은 당대 우리 사회의 폐쇄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므로 조선조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으로 평가해 온 것이 종래의 관점이다. 이것은 결국 남성 위주로 짜인 차별적 가치관이 사회 전반에 침투가 된 결과이다. 갑오경장으로 인해 여성들에게도 개가가 허용되고 점차 인간적인 삶의 모색을 허용하는 것 같았지만 이는 아주 제한적이었다. 남성들의 삶에 비해 여성들의 입지는 여전히 위축되었던 것이 과거 우리 사회의 실상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여성들의 삶은 남성들의 그것에 못지않게 온당하게 재평가되어야 한다. 당대 여성들은 사대부 계층의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여성은 육아, 자녀 교육, 그 고된 가사 노동에 종일 시달려야 했기에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 부담은 남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렇지만 그들은 묵묵히 현실을 인고하며 남성을 내조하여 본연의 역할을 감당해 낼 수 있도록 헌신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인고하는 한국의 어머니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 조선조의 문화는 그런 배경을 토대로 그 성과를 이뤄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당대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중세에 있어서 문학 창작 활동은 대개가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었다. 여성들의 문학 창작 활동은 아주 미약했거나 제한적이었다. 이는 한국 전통 사회의 보편적 상황이었다. 그러나 간혹 여성들의 작품이 입으로 전해지거나 사대부 문집의 말미에 실렸거나 독자적으로 출간된 경우도 있었다. 설죽·매창·허난설헌의 작품들이 좋은 본보기이다. 이처럼 당대 여성들은 문학 작품 창작에 있어 매우 조심스럽고 절제를 했다.
이는 안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1) 이들 여성들의 한시 작품이 매우 극소할 뿐만 아니라 발굴조차 되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다가 최근 현재까지 발굴된 안동 여성들의 한시 작품을 모두 모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여 출판한 바 있다.2) 광산 김씨와 설죽의 시는 한국 문학 사상 최초로 소개되는 작품으로, 한국 여성 한시사에서 주목될 것으로 기대된다.
1) 정부인 안동 장씨
정부인 장씨 부인(1598-1680)은 1598년 11월 24일에 현 행정 구역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의 ‘춘파’라는 작은 마을에서 경당 장흥효와 안동 권씨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집안의 유풍에 따라 유교적 교양과 덕목을 갖추었고 글재주와 서예도 뛰어났다. 그녀는 영해의 재령 이씨 석계 이시명에게 시집을 가서 어진 어머니로 자녀 교육에 전념하여 7남 3녀를 훌륭히 성장시켰다. 특히, 7남은 모두 후일 영남학파의 큰 학자로 대성하여 이른바, ‘칠현자’로 칭송을 받았다.
정부인의 문학적 성취도를 평가할 수 있는 것으로, 현재 전하고 있는 시 8수에 유교적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애와 철학관 등이 선명히 제시되어 있다. 정부인이 12세에 창작한 〈경신음〉·〈성인음〉·〈소소음〉에 수신과 체득을 추구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정부인의 유가적 철학 사유 방식은 인간애의 곡진한 표현으로 확대되었다. 이웃집 아낙의 남정네가 먼 변방으로 수 자리를 살러 떠남에 따라 전개되는 한 가정의 극한 상황을 묘사한 〈학발시〉 3장에 애민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유가적 이념의 시적 형상화는 만년 작품인 〈증손신급〉·〈증손성급〉에 이르러 자손들에게 유교 덕목을 닦을 것을 당부하였다.3)
장씨 부인의 학덕은 후손들로 이어져 결국 경당의 학문이 밀암→갈암→대산․소산으로 이어져 영남 학맥을 계승케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시·서·화·자수 등에 능할 뿐만 아니라 호기롭고 굵직한 초서체를 구사했다. 동양 최초의 요리서인 《규곤시의방》도 편찬했다. 장씨 부인에게서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미덕을 지닌 어진 한국 어머니 형상이 발견된다.
2) 조선 3대 기녀 시인 설죽
설죽의 본명은 월연이며, 자호는 얼현·설창·취선·취죽 등이다. 그녀는 충재冲齋 권벌權橃(1487-1547)의 손자石泉 권래權來(1562-1617)의 시청비侍廳婢였는데, 여종의 신분으로 여성 정감이 담뿍 담긴 한시를 다수 창작했다. 설죽과 관련된 학적 관심은 홍만종洪萬宗의 《시회총림詩話叢林》 소재 《수촌만록水村漫錄》에 제기되어 왔지만,4) 그 당시까지도 설죽에 대한 실체는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다.5)
안동 권씨 문헌 가운데 당시 유곡삼절酉谷三絶로 불렸던 원유遠遊 권상원權尙遠(1571~?)의 시문집 《백운자시고白雲子詩稿》의 말미에 필사된 설죽의 시가 발견되었다.6) 여기에 오언절구 37수, 오언율시 5수, 칠언절구 122수, 칠언율시 2수 등 모두 166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역대 우리나라 여성 시인들이 남긴 한시의 분량에 비해 적은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 역대 여류 시인과 작품을 통산하면, 대략 200여 명의 여류 시인들이 2000 여수의 한시를 남겼다.7) 조선조 여류 한시로는 《허난설헌집許蘭雪軒集》·《매창집梅窓集》 등에 다수 전해지고 있다. 《대동시선大東詩選》이나 일반 사대부 문집 말미에 한두 편이 실려 근근이 전해지고 있다.
설죽은 여종 신분으로 사대부들이 수업하는 어깨 너머로 문장과 한시 기법을 터득하고 천부적 문학 역량과 여성의 감수성을 발휘하여 아름다운 한시를 창작했다. 설죽은 자신 앞에 놓인 숙명적 삶을 개척하고 문예적 소질을 발휘한 개명적 여성이었다. 그녀는 천부적 시인의 재질과 호방한 성격을 지녀서 여종의 예속적 삶을 거부하고 15세 무렵에 집을 뛰쳐나와 당대 명망이 있던 선비들과 어울려 경내 명산대천으로 노닐었다. 유연한 그녀의 삶의 방식은 조선 중종 때 황진이의 행적과 흡사하다. 이후 그녀는 당대 명망이 높았던 선비, 문인들과 시로 교유하며 호방한 삶을 이어 갔다.
설죽은 여성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던 시대에 천한 첩으로 생애를 살았기에 그녀의 시에는 그리움과 고독을 인고하는 아픔을 시로 승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즉, ‘임에 대한 그리움’, ‘이별의 정한 묘사’,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의 표현 등이 주조를 이룬다. 특히, 별한시別恨詩는 감정을 홀로 인고하는 전통적 한국 여성의 이미지를 답습하고 있다. 곧, 설죽은 절제된 언어를 구사하여 현실의 아픔을 초연히 극복해가려는 여성 이미지를 시에 그려내었다.
설죽 시의 전반적인 경향은 애수에 잠긴 여성의 형상이었다. 설죽은 주어진 삶을 인종하는 한국 여인의 이미지를 답습하고 있었다. 실제로 설죽의 삶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첩이란 존재가 당대 현실상 그다지 환대받지 못하는 신분이고 보면, 그녀의 삶이 고단했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이렇게 어려운 현실 여건이 그녀로 하여금 우수와 애환의 정서에 깊이 잠기게 했으며, 이러한 정서가 시에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이다.
그렇지만 설죽은 격한 감정을 절제하고 홀로 아픔을 감내하며 절제된 언어를 구사하여 여성 정감의 시를 창작했다. 그녀의 시를 통해서 별리와 고독의 아픔을 초극하고 이를 시로 승화한 여인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설죽의 시를 전반적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인고하는 한국 여성의 이미지인 바, 이는 한국 문학의 전통 정서와도 접맥된다고 생각된다.
여종 출신 기녀 시인 설죽의 행적을 통해, 일개 여종의 인격과 재능을 소중히 여겨 시적 재능과 예술적 감성 및 끼를 발휘하도록 배려해 준 충재 후손들의 인간미가 돋보인다. 여종 설죽에게 글재주가 있음을 알고는 시문 짓는 법을 가르친 일, 설죽이 혼사를 거부하고 가출한 비행을 용서해 주고, 예인의 기질을 발휘하도록 성로의 계실이 되도록 길을 열어준 점이나 설죽 사후, 시를 모아 후대에 남긴 일은 귀감이 된다.
설죽이 천재 시인으로 성장하게 뒷받침해 준 주인 석천 권래의 인간애와 예술 존중 정신은 감동적이다. 설죽은 권래의 시청비로, 석천 정사 서쪽에서 생장하여 16세 무렵에 석전 성로의 계실이 되어 10년 정도 그와 교유하였다. 석전 사후, 설죽은 20여 년간 전라도와 충청도 등지에서 시인이며 탁월한 기녀로 활동하였다.
기녀 시인의 역사를 보면, 삼국시대 이전에는 별로 알려진 이가 없다. 고려 때 우돌․동인홍이 있다. 조선조에 황진이․매창․승이교․일지홍이 유명하다. 새로 발굴한 자료에서 설죽을 황진이․매창과 동등한 기녀 시인으로 부각시키고 있어 주목된다. 때문에 그간의 설죽 연구 성과를 종합해 그의 실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설죽 관련 연구는 ‘해제’,8) ‘시 번역’,9) ‘시 분석’이 있다.10) 이어 그녀의 ‘생장 배경 및 관기로 지냈던 것 정도’로 파악되었다.11) 평소 설죽의 행적을 정리하면서 늘 그녀의 행적이 황진이와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했지만 제한된 자료로 그 이상 해명하지는 못했다.
최근 설죽 관련 문헌 조사와 현지답사를 하면서 새로운 자료를 확보함으로써 ‘설죽의 실체’를 파악하는 주요한 단서를 찾아내었다. 흥미로운 것은 봉화 지역에서 찾아낸 자료는 설죽이 ‘여종 출신의 시인’임을 강조한 반면,12) 새로 찾은 타 지역 자료에서는 설죽을 ‘황진이나 매창과 동등한 기녀 시인’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13) 특히, 구한말 시선집에는 설죽이 여종 출신으로, 특출한 시인 기녀였다고 분명하게 기록했다.14) 이는 설죽에 대한 평가를 집약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실제 설죽은 빼어난 미모․뭇 남성의 마음을 다루는 말솜씨․탁월한 시적 재능․돋보이는 가창력 등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는 신분상 여종이기에 계층 신분 격차가 분명했던 당대에 서녀 출신 황진이․매창처럼 소외된 계층이었다.
설죽은 시대적 신분 제약 때문에 탁월한 문예․예능적 재질을 발산할 길이 없었다. 이에 그녀는 타고난 신분 질서 체제로의 순순한 복종을 거부하고 문예와 미색을 마음껏 발휘하는 기녀의 삶을 선택했다. 그래서 설죽은 황진이·매창과 함께 조선조 걸출한 기녀 시인으로 명성을 남겼다.
그간의 연구 성과와 설죽의 행적을 추적하여 전라도․충청도․서울 등지를 답사한 결과와 전국 유명 도서관에서 발굴한 새 자료를 종합하여 기녀 시인 설죽의 실체를 찾고자 한다. 이를 위해 문헌 자료를 최대한 활용한다. 새로 찾은 자료는 설죽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문헌 자료에서는 당대 설죽이 훌륭한 기녀 시인으로 활약했던 점을 특기하고 있다. 설죽을 기녀로 강조한 자료를 보기로 한다.
얼현은 안동 권모의 여종이다. 재주와 미색이 있고 시에 능했다. 자호를 취죽이라고 했다. 그녀가 지은 「추사」 시에, “물빛 같은 하늘에 달도 푸른데, 나뭇잎 바스락거리고 살며시 서리 내려요. 열두 난간 누대에서 홀로 잠을 청하니, 공연 히 병풍 속의 원앙이 부러워요.” 라고 하였고, 「방석전고거」에서는 “일찍이 십 년 동안 석전과 노닐면서, 양자강 어귀에 서 취한 게 몇 번이던가. 오늘 홀로 임 떠난 곳을 찾으니, 가을 강가에 흰 개구리밥 붉은 여뀌만 가득하여라.” 라고 했다. 두 작품은 모두 『기아』에 실렸는데, 「추사시」 작가를 ‘기생 취선’이라고 기록했기에 우선 무명씨로 기록한다. 세상에 취죽 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애석하다.15)
얼현은 안동 권모의 여종으로, 재주와 미색을 겸했으며 시에도 능했고 자호를 ‘취죽’이라 했다. 이 자료에서는 「추사시」와 「방석전고거」 두 수의 시를 소개했다. 그런데 이 두 수의 시는 『기아』에 실렸다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추사시」의 작가를 ‘기생 취선’이라고 기록했다고 전한다. 수촌水村 임방任埅(1640-1724)은 당시까지 설죽의 행적을 자세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취죽이 기녀 설죽이라는 점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 「추사시」 작가를 무명씨로 처리하면서, 취죽의 이름을 알 수 없어 애석하다고 했다. 이를 통해, 취죽이 기녀로 활약한 사실이 당대에 널리 유포되었던 사실이 입증된다. 이 근거는 다음에서 확정된다.
“봄단장 서둘러 끝내고 거문고 튕기니, 주렴에 붉은 햇살 가벼이 차오르네. 밤안개 짙은 끝에 아침 이슬 흠뻑 내려, 동 쪽 담장 아래 해당화 울고 있어요.” 취선은 기녀로, 호는 설죽이다.16)
『대동시선』에는 설죽의 「춘장」 시를 실었다. 설죽의 시 가운데 여타 시선집에 가장 빈번하게 실린 것이 「춘장」이다. 그리고 이 시의 작가를 기녀 설죽이라고 간명하게 기록해 두었다. 이어 이수광의 기록을 보기로 한다.
기녀 취선의 호는 설죽인데, 시에 이르기를, “봄 단장 서둘러 끝내고 거문고 튕기니, 주렴에 붉은 햇살 가벼이 차오르 네. 밤안개 짙은 끝에 아침 이슬 흠뻑 내려, 동쪽 담장 아래 해당화 울고 있어요.”라고 했다. 또 다른 시에서, “물빛 같은 하늘에 달도 푸른데, 나뭇잎 바스락거리고 살며시 서리 내려요. 열두 난간 누대에서 홀로 잠을 청하자니, 공연히 병풍 속 의 원앙이 부러워요.”라고 하였다.17)
이수광은 ‘기녀 설죽’이라고 또렷하게 기록했다. 이어 그녀의 시 「춘장」과 「추사」 두 수의 시를 실어두었다. 이로써 설죽이 기녀로 활동한 것이 입증되었다. 다음 두 자료에서는 설죽을 황진이에 버금가는 조선조 걸출한 기녀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고려 때 용성의 창기 우돌과 팽원의 창기 동인홍은 모두 시를 잘 지었지만 시가 전해지지 않는다. 본조의 송도 기생 황진은 절색에 시도 잘하여 스스로 이르기를, “화담 선생과 박연폭포가 나와 함께 송도의 삼절이다.”라고 하였다. 그녀 가 하루는 땅거미가 질 때 비를 피하려 어느 선비의 집을 찾아 들었더니, 그 선비가 환히 밝은 등불 밑에서 그녀의 너 무도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속으로 도깨비나 여우의 넋이 아닌가 하고 단정히 앉아 『옥추경』18) 을 계속 외웠다. 황진이는 그를 힐끗 돌아보고 속으로 웃었다. 닭이 울고 비가 개자 황진이 그 선비를 조롱하여, “그대 또한 귀가 있으니 이 세상에 천하 명기 황진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거요. 내가 바로 그 황진이라오.”하고는 뿌리치고 일어나니, 그 선비는 그제야 뉘우치고 한탄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 추향과 취선翠仙이라는 기생도 모두 시를 잘하였다. 취선의 호는 설죽雪竹이 다. 그녀의 「백마강회고」 시에, “저물녘에 고란사에 닿아, 서풍에 홀로 누대에 오르네. 용은 간 데 없고 강은 만고에 흐르고, 꽃은 지고 없는데 달은 천추에 비치네.”하였고, 「춘장」 시에서는, “봄 단장 서둘러 끝내고 거문고 튕기니, 주렴에 붉은 햇살 가볍게 차오르네. 밤안개 짙은 끝에 아침 이슬 흠뻑 내려, 동쪽 담장 아래 해당화 울고 있어요.”라고 하였 다.19)
고려 때부터 본조에 이르기까지 간혹 시기詩妓로 명성이 있던 이들을 간략히 기록하여 옛 사람들이 시를 채집하여 잃어 버리게 않게 했던 뜻에 부친다. 송계 권응인의 『패관잡기』에 우리나라 여성의 시를 거론하면, 삼국 시대에는 알려진 이가 없다. 고려 때에 이르러 용성의 창기 우돌, 팽원의 창기 동인홍이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하지만 전해지는 작품은 없 다.20) 그리고 송경 삼절로 유명했던 황진, 부안 기생 매창ㆍ계생ㆍ추향, 호서 기생 설죽雪竹․취선翠仙, 진주 기생 승이교, 부안 기생 복낭, 성천 기생 일지홍 등은 모두 시에 능하기로 유명하다. 기생이면서 시에 능했기에 간략히 언급해 둔다.21)
위의 자료는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와 그의 손자 이규경李圭景(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내용이다. 이규경은 조부 이덕무가 언급한 내용을 백과사전식 변증문 형식의 글에서 명확하게 밝혔다. 이규경은 조부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정밀한 고정考訂과 변증辨證으로 조선 후기 실학의 영역을 넓혀 ‘백과전서파’로도 불린다.22) 따라서 그의 변증은 매우 신빙성을 지닌다.
이를 종합하면, 우리나라 기녀 시인으로 삼국시대까지는 유명한 이가 전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고려 때 용성 창기 우돌․팽원 창기 동인홍이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최자의 『보한집』에 이들의 시가 전한다. 먼저, 용성의 관기였던 우돌을 보면, 송학사 국섬에게 준 시에, “일찍이 그대 마음 굳은 줄 알았는데, 나 역시 같이 잘 맘이 애당초 없었지요. 바라건대 하룻밤을 시를 술 마시며, 풍월 읊고 좋은 인연 함께 해주어요.”라고 하였다.23) 팽원 기녀 동인홍의 시에, “기생과 양가집 규수, 그 마음 다를 게 있나요. 가련한 송백 같은 굳은 절개로, 두 마음 먹지 않기를 맹세하여요.”라고 하였다.24)
이덕무는 여기서 황진이 관련 일화를 넣었다.25) 그와 아둔한 선비의 에피소드를 삽화하였다. 황진이는 송도삼절로 미색과 시에 능한 기녀였다. 비를 피해 선비 집에 들어가 밤을 지새웠지만 선비는 그녀를 요물로 생각했다. 새벽이 되어, 날이 밝아 황진이가 정체를 알리자 선비는 후회했다는 것이다. 미색을 겸비한 황진이와 대조된 촌뜨기 백면서생의 대면에서 황진의 미색 탓에 선비는 그녀를 요물을 대하듯 멀리하였다. 그만큼 황진의 인기가 독보적이었다는 것을 반증한 일화이다. 다음 호를 ‘추향’이라고도 하는 매창梅窓 이계생李季生은 조선 선조 때의 기생으로 본명은 향금, 자는 매창이다.26)
위 문헌 자료 《청장관전서》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설죽을 황진이․매창에 이어 조선조 걸출한 기녀 시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설죽을 호서 지방의 특출한 기녀 시인으로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설죽은 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매창과 더불어 조선조 3대 기녀 시인으로 인정된다고 한 것이다. 즉, 한국을 대표하는 기녀 시인으로, 황진이와 매창을 거론했는데, 설죽이 3순위에 있다. 그만큼 설죽의 시가 뛰어났으며, 행적 역시 황진이를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조 뛰어난 기녀 시인으로 추천한 것이다. 이는 이덕무는 설죽을 조선 3대 기녀 시인으로 추천함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이어 그의 손자 이규경에게도 이 논리가 그대로 전승되어 변증 과정을 거쳐 확정되었다.
그러므로 설죽은 역대 문헌에서 확증하고 있는 것처럼, 조선조 3대 기녀 여류 시인으로 평가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본다. 황진이의 한시가 8수, 매창의 한시가 58수가 현전하는데 비해 설죽의 한시는 167수나 전해진다. 신분상 여종이면서 기녀 시인으로 활약한 이는 그 유례가 없다. 그런 점에서 설죽은 황진이와 매창이 조선을 대표하는 기녀 시인으로 주목을 받는 만큼 설죽도 그에 버금간다고 이덕무와 이규경은 문헌을 통해 입증하고 있다. 이 외의 문헌을 통해서도 설죽은 충청도․전라도․한양 등지에서 활동한 기녀 시인인 점이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특히, 설죽의 기구한 삶의 행태는 황진이의 행적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런 점에서 설죽의 행적을 이들과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다. 도리어 신분상 여종으로 이처럼 문학적 성취가 큰 점을 감안한다면, 설죽은 한국문학사상 유례가 없는 여류 시인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은 문예적 성과나 행적을 볼 때, 여느 기녀 시인에 비해 전혀 뒤질 바 없다.
그러므로 설죽은 황진이․매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선조 3대 기녀 시인으로 판명된다. 그동안 황진이와 매창에 대한 연구 성과와 다채로운 문화 행사를 통해 황진이․매창의 기녀 시인으로 크게 부각된 것처럼 설죽도 후속 연구와 다방면의 문화컨텐츠 개발과 스토리텔링을 거쳐 문학적 위상이 제고되리라 기대한다.
2. 국창 이찬에 대하여
1) 이찬의 생애와 활동
이찬李燦(1575-1654)의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중명仲明이다. 자라나서 외삼촌인 서애 류성룡에게 수업을 받았다. 서애를 통해 자연스럽게 퇴계 학맥을 이었다. 처남 수암 류진과 함께 공부하며 실력을 쌓아 장래가 촉망된다는 기대를 받았다.27) 19세에는 설월당 김부륜의 사위가 되었다.28) 당시 김부륜은 퇴계의 학문 전통을 이어받아 일대에서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다.29) 이찬은 김부륜을 통해 퇴계의 학문 전통을 계승했다. 매부인 계암 김령과 학문을 익혔다.30)
그런데 장가를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이 세상을 떠났고 말았다. 원인은 당시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다. 이찬도 감염이 되어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가 겨우 살아났다. 그 이듬해에 부친도 전염병으로 별세하는 등 연이은 불행을 당했다. 모친의 별세와 자신의 감염 및 부친의 별세 등 연이은 시련은 그에게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경세의 큰 뜻을 품고 있었지만 큰 불행을 당하고 나서 과거 공부를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유교 경전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폭넓게 읽으면서 외사촌 류진과 교류하면서 퇴계학맥을 계승에 전념하였다. 정경세‧이윤우‧정윤목 등과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유하고 마음씨가 고왔다. 화려하고 잡된 세속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임종 때까지 유교 경전과 역사를 탐구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였기에 의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독학으로 의학을 공부하여 의학 분야에서 일가견을 지녔다. 세인들은 그를 보고 ‘명의’라고 칭찬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전염병에 걸렸을 때 천 리 길도 멀다 하지 않고 가서 약재를 구해 왔다. 그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병에 걸려 그를 찾아오면 누구에게나 정성을 다해 치료하여 많은 칭송을 들었다. 인술을 베풀어 많은 칭송을 받았다.31)
인조가 병환에 걸렸을 때 어의들도 고치지 못했다. 이찬은 궁궐에 가서 인조의 병환을 진단하고 쾌유시켰다. 이 덕분에 저자는 당대 최고의 명의라는 공인받았다. 왕의 특명으로 태자의 건강을 보필하는 동궁익위사사어가 되었다 이후, 종부시주부 ‧공조좌랑·군위현감 등을 역임했다.32)
그러나 그는 신병을 핑계로 모든 관직에서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다시 왕의 특명으로 공조정랑과 금산현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병을 핑계로 물러나 귀향하여 지내다가 향년 80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을에 삼강서원이 세워졌을 때, 포은 정몽주·퇴계 이황·서애 류성룡을 배향했다. 이찬은 이 서원을 창건할 때부터 간여하여 완공하게 했다. 특히 서애의 《징비록》이 산일되어 수습이 되지 못했던 점을 안타깝게 여겨 이를 수집하여 완본을 만드는데 전심전력하였다.33) 그는 인품이 온화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자신을 통제할 때는 매우 엄격하였다. 그는 류성룡의 생질인 동시에 김부륜의 사위로서 퇴계 학맥을 이은 선비 학자였다.
2) 국창집
이 문집은 그의 후손 이준구李駿九가 편집했다. 서두에는 이만인李晩寅의 서문과 「국창선생세계도菊窓先生世系圖」가 실려 있다.
권1에는 「추회秋懷」를 비롯한 시 44편과 37편의 만사가 실려 있다. 권1의 시는 석별의 정을 표현하거나 지인들과 나눈 화답시가 많다. 만사는 교분이 있던 이윤우‧정윤목‧김윤목 등 벗을 위해 지은 것을 비롯하여 집안 친인척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것도 있다.
권2에는 9편의 편지글(金溪巖·韓山斗·金耀亨)과 5편의 제문(洪叔京·曺護軍·鄭仁輔·全性之·伯兄梅園公)이 실려 있다. 편지 글은 김령‧한산두 등 지인들과 주고받은 것이다. 내용은 지인들의 건강을 염려하고 치료법을 처방해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애집』 출간 과정에서 주고받은 글로 채워져 있고 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도 있다.
권3에는 행장 1편(權璉夏撰)과 묘갈명 1편(李敏求撰), 국창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만사 83편이 실려 있다. 행장과 묘갈명‧만사에 저자의 가계와 학맥 및 의사로서의 탁월한 이력과 관력을 담고 있다.
권4에는 국창이 류성룡과 김령에게 받은 편지 11편과 다른 이가 국창을 위해 지은 제문 17편 및 발문 1편이 실려 있다. 타인의 편지를 모아놓은 것과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3. 광산 김씨 부인의 한시 정감
1) 가문 내력
우리나라 중세에 있어 문학 창작 활동은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었다. 여성들의 문학 창작 활동은 아주 미약했거나 제한적이었다. 이는 한국 전통 사회의 보편적 상황이었다. 그러나 간혹 여성들의 작품이 입으로 전해지거나 사대부 문집의 말미에 실린 경우도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이처럼 당대 여성들은 문학 작품 창작에서 매우 조심스럽고 절제를 해야만 했다. 조선시대 일반 사대부 집안 여성의 경우, 아무리 뛰어난 시문을 짓더라도 후대에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인색했던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여성들의 작품이 후대에 전해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당시 여성이 남긴 글이 후대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 다행히 문집으로 전해지는 것은 아주 드문데, 우리나라 여성 시인 허난설헌의 시는 단독 문집으로 전해지고 있다. 허난설헌의 시는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그렇지만 대부분 여성 시인의 시는 구전되거나 한두 구절이 남성 사대부 문집 말미에 전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당대 여성들은 사회 전반에 걸쳐 제약된 삶을 살았다.
이는 안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안동 여성들의 한시 작품이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학계에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광산 김씨 문중 여성 시인이 남긴 한시 48수가 발굴되었다. 광산 김씨의 시는 한국 문학 사상 최초로 소개되는 작품으로, 한국 여성 한시사에서 주목될 것으로 기대된다.34) 광산 김씨 부인의 시는 남편 이찬의 문집 말미에 기록되어 후인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부인에 대한 자료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부인의 행적에 대해서는 주변 인물의 탐색을 거쳐 조명해 볼 수밖에 없다.
김씨 부인의 부친은 설월당 김부륜(1531-1598)이다. 그는 퇴계의 문인으로, 1555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2년에 집경전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85년에 전라도 동복현감으로 부임하여 향교를 다시 세우고 봉급을 털어 유교 경전을 구입하여 유학의 진흥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그는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재산을 털어 향병을 지원하였고, 학봉 김성일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김씨 부인의 남동생인 계암 김령은 서애 류성룡의 문인이다. 계암은 1613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를 제수받았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귀향하여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학문과 지조가 뛰어났으며 후일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이러한 집안의 유풍을 광산 김씨 부인이 계승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이런 면모가 그녀의 시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그녀는 총명함이 뛰어나 문사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행실로 선망을 받았다. 부인의 시는 남편인 이찬(1575-1654)의 문집 《국창집》의 말미에 실려 있다.
이제 구체적으로 부인이 남긴 시를 분석하기로 한다. 부인이 남긴 작품의 대부분이 신변에 관한 것이다. 부인은 매우 감성적이었다. 전체의 시에 슬픔과 고독의 정서가 담겨 있다. 그렇지만 절제된 감정의 표현과 가족과 친지에 대한 진지한 사랑의 표현 등은 매우 감동을 전해 준다.
2) 한시 개요
김씨 부인의 한시는 5언절구 43수, 5언6구 1수, 7언절구 4수로 총24제 48수이다.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連番 | 詩題 | 型式 | 비고 |
1 | 寄舍弟司諫子峻 | 5언절구 | |
2 | 寄遠(一) | 5언절구 | |
3 | 寄遠(二) | 5언절구 | |
4 | 寄遠(三) | 5언절구 | |
5 | 寄遠(四) | 5언절구 | |
6 | 寄遠(五) | 5언절구 | |
7 | 寄遠(六) | 5언절구 | |
8 | 寄遠(一) | 5언절구 | |
9 | 寄遠(二) | 5언절구 | |
10 | 寄全甥僑 | 5언절구 | |
11 | 次金陵東軒韻 | 5언절구 | |
12 | 次李白三五七言韻兼寄子峻 | 5언6행 | |
13 | 兼 | 5언절구 | |
14 | 春日寄舍弟司馬 | 5언절구 | |
15 | 金山官齋春夜又用前韻 | 5언절구 | |
16 | 哭姪(一) | 5언절구 | |
17 | 哭姪(二) | 5언절구 | |
18 | 哭姪(三) | 7언절구 | |
19 | 寄呈案下(在金山時)(一) | 5언절구 | |
20 | 寄呈案下(在金山時)(二) | 5언절구 | |
21 | 送全甥 | 5언절구 | |
22 | 寄司諫(一) | 5언절구 | |
23 | 寄司諫(二) | 5언절구 | |
24 | 寄遠(一) | 5언절구 | |
25 | 寄遠(二) | 5언절구 | |
26 | 寄遠(三) | 5언절구 | |
27 | 寄遠(四) | 5언절구 | |
28 | 寄遠(五) | 5언절구 | |
29 | 悅親戚(一) | 5언절구 | |
30 | 悅親戚(二) | 5언절구 | |
31 | 送別(一) | 5언절구 | |
32 | 送別(二) | 5언절구 | |
33 | 感吟 | 5언절구 | |
34 | 敬次案下韻 | 5언절구 | |
35 | 病中(一) | 5언절구 | |
36 | 病中(二) | 5언절구 | |
37 | 寄遠(一) | 5언절구 | |
38 | 寄遠(二) | 5언절구 | |
38 | 寄遠(三) | 5언절구 | |
40 | 寄遠(四) | 5언절구 | |
41 | 次案下韻 | 7언절구 | |
42 | 病中 | 7언절구 | |
43 | 寄遠(一) | 7언절구 | |
44 | 寄遠(二) | 5언절구 | |
45 | 唯我嫡從之行…忘拙敢呈(一) | 5언절구 | |
46 | 唯我嫡從之行…忘拙敢呈(二) | 5언절구 | |
47 | 唯我嫡從之行…忘拙敢呈(三) | 5언절구 | |
48 | 唯我嫡從之行…忘拙敢呈(四) | 5언절구 | |
총 | 24제 48수 | 5절 43수 5절육 1수 7절 4수 |
부인의 한시는 남편의 문집 《국창집》 말미에 실려 있고 이어 발문이 있다.
나는 이군이 국창 선생집의 발문을 써달라고 요청한 것을 소중히 생각한다. 게다가 부인 김씨는 설월당의 따님으로 선생의 좋은 배필이시다. 부인의 시 40여 수를 선생의 문집 말미에 부록으로 실었다. 부인의 시는 음조音調가 따뜻하고 부드럽고[溫柔] 격률格律이 맑고 어여쁘다[淸婉].35) 고상한 뜻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윽하고 깊은 의미[幽遠]를 담고 있다.36) 일상의 언어로 표현했지만 자연스러운 묘미[自然之妙]를 갖추었으니 이는 예나 지금이나 흔하지 않은 경우이다.37)
내가 일찍이 난설헌 허씨의 시를 읽어 보고는 단번에 이는 신선이 되어 노닐고 허황한 곳을 찾아다니는 부류의 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때문에 난우蘭嵎 주지번朱之蕃이 “쌍으로 이루어진 날아다니는 구슬[雙成飛瓊]‘이라는 비평의 시이다.
내가 이로 인해 김씨 부인의 시를 허난설헌의 시와 비교해 보기로 했다.
난설헌의 시는 ’단사‘와 ’금동광에서 빛이 나는 물질[丹砂空靑]’과 ‘쇠 기름’과 ‘물이 푸른 것[金膏水碧고]’과 같아 실제로 물외의 것으로 구하기 어려운 것[物外難得]이다. 김씨 부인의 시는 인삼·복령·영지·차조[蔘苓芝朮]과 같아서 세상의 쓰임에 적용되는 것이다. 이는 난설헌의 시보다 더 우수한 점이다.38)
이군은 부인의 시가 민멸되어 급기야 없어지고 말 것을 염려했다. 특히 〈아우를 그리워함〉(憶弟)의 몇 수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39) 〈멀리 부친 시〉(奇遠) 몇 수에는 적절한 교훈과 은미한 정을 표현하였으니 조용하면서도 애절하여[從容惻怛] 예전의 어진 부인들의 시와 비교해 봐도 손색이 없다.40) 부인의 시는 많은 이들에게 무궁한 감동을 주고 마음을 울릴 것을 확신하며 후대에 길이 전해지길 바란다.41)
향리의 후생은 이로 인해 설월당 가문의 따뜻한 교양과 국창 노인 내외의 화목함을 살펴볼 수 있으니 세상 사람들을 바른 길로 교화시키는데 작은 도움이 될 것이다. 단몽端蒙(卯月) 협흡協洽(未) 해당海棠 교지령嬌芝岺 거사居士 황난선黃蘭善 삼가 쓰다.42)
황난선은 김씨부인이 설월당 김부륜의 따님으로 태어나 가정에서 어진 여성 교육을 잘 받아서 훌륭한 인품과 학덕을 갖추었음을 강조하였다. 부인의 시를 남편 문집 말미에 가지런히 정리하여 실어놓은 광산김씨 문중의 배려에도 깊은 존경을 표하였다.
부인의 시에 대한 평어는 ‘온유溫柔’와 ‘청완淸婉’으로 요약된다. 평이한 일상어로 진솔한 여인의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기에 ‘그윽하고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자연스러운 묘미’를 지녔다고 하였다.
허구적이고 추상적인 시어의 나열이나 허구 세계를 동경하는 표현은 전혀 없고 현실 일상에서 느끼는 인간의 성정을 진솔하게 표현해냄으로써 모든 작품에 따뜻한 인간미가 담겨 있다. 그러기 때문에 부인의 시는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가족의 소중함과 여인의 내밀한 정감을 느끼는 명작으로 길이 전해질 것을 확신했다. 이제 부인의 한시를 통해 인간애를 살펴보기로 한다.
3) 가족 친척이 그립습니다
부인의 시에는 가족과 친척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작품이 매우 많다. 이는 그만큼 부인이 가족과 친족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가족과 혈육에 깊은 애정을 가졌다.
청명절에 널 떠나보내니
문밖엔 살구꽃 활짝 피었구나.
오늘 아침 이렇게 슬프지만
후일 다시 돌아올 날 있으리.
送爾淸明節 開門杏花開
今朝無限意 後日更歸來43)
조카를 떠나보내는 이별 정서를 담았다. 살구꽃이 곱게 핀 청명절에 조카를 멀리 떠나보내니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다시 만날 기약 없는 이별이기에 아쉬움만 가득하다. 전반부 시의 봄날 화사한 분위기는 후반부에 이르러 이별 정서를 더 강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아우가 신변상 위험에 이르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길 빌면서 스스로 위안 삼는다. 조카가 굳이 돌아오리라는 여운을 남김으로써 아우의 안녕과 재회를 소망하였다. 누이로서 아우의 신변상 안전과 무사를 기원하는 깊은 인간애가 깃든 작품이다.
오랫동안 조카를 만나지 못했으니
주림과 추위에 참 고생 많았네.
늘 근심스레 홀로 서서
오늘이 오길 기다렸다네.
不見全甥久 飢寒眞可哀
無聊愁獨立 苦待今日來44)
생질 전교에게 보낸 시이다. 오랫동안 조카를 만나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 오늘에야 조카의 안부를 담은 소식이 전해졌다. 조카의 객지 생활 형편이 서찰에 담겨 있다. 한 줄씩 읽어내려가는 부인의 마음은 안쓰럽다. 이어 조카에게 시를 적어 보내기로 했다. 객지에서 지내는 조카에 대한 염려와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을 적었다. 제대로 음식을 들지도 못했을 것이고 추위로 인해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라며 염려하였다. 그러한 마음을 전할 길 없어 인편을 통해 마음을 시로 담아 보냈다.
친척들 만난 지 오래되었고
고향 그리워 온갖 생각나네.
다행히 오늘에야 만나서
정담을 나누다 삼경이 되었네.
不見親戚久 思鄕萬感生
幸逢今日會 情話到三更45)
친척들과 오랜만에 만난 감회를 서술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 정담을 나누다 보니 삼경이 되었다. 당시 시집간 부인들이 시댁을 위한 봉사에 전념했던 탓에 서로 떨어져 사는 친정 식구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때마다 고향 생각이 간절했다. 시집을 간 여성의 경우, 시집오기 전 친정에서의 정다웠던 시절이 회상되기 마련이다. 시집살이의 분주함 속에 친정 식구들을 만나거나 친정을 다녀오는 일도 그리 수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친정 식구들을 만나는 것은 친정에서 특별한 길흉사가 있는 경우에 가능했을 것이다. 위의 시에는 무슨 일로 인한 것인지는 파악할 수가 없지만, 부인이 오랜만에 친정 친지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친지들과 서로 만나 기쁜 나머지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새벽이 되고 말았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정담 속에 정은 깊어간다.
금릉 땅에서 쓸쓸히 지내는데
대나무엔 온갖 새 지저귀네.
갑자기 이별하고 나서
몸져누워 홀로 슬퍼한다네.
廖寂金陵日 脩篁百鳥聲
無端忽爲別 臥病獨傷情46)
친척을 만나 기뻐하며 지은 시이다. 만난 기쁨도 잠시이고 헤어지면 이처럼 잔잔한 그리움은 물결이 되어 부인의 가슴에 밀려온다. 남편의 임지인 김천에서 지은 작품이다. 대나무 숲에서 울음 우는 새들의 정겨움도 부인에게는 즐겁게 다가오지 않았다. 방문한 친척이 떠나자 몸져누운 채 슬퍼하며 고독한 마음을 시에 담았다. 이별의 정한과 여성 정감이 짙게 깔린 작품이다.
조카 편에 보낸 편지에
꼭 찾아온다고 하더니만
겨울 다하도록 오지 않으니
이별 회포는 언제 풀리오.
數紙姪兒書 丁寧訪我來
冬深猶不到 離抱幾時開47)
조카의 편지글을 통해 찾아온다는 약속을 받고 방문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겨울이 다 가도록 오지 않아 애석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먼저 이 시를 지어 전함으로써 그러한 마음을 풀어낸다. 떨어져 지내는 허전함을 달랠 회포를 풀어내기 어려워 이처럼 시 한 수에 마음을 담아 보낸다.
동서로 떨어져 산 지 여러 해
백발이 되어 뵈었습니다.
등불 돋우며 기뻐 잠 못 이루고
눈물 마르자 다시 눈물 납니다.
幾歲東西隔 相逢白髮生
挑燈憙不寐 漏盡已殘更48)
친척들 가운데 대개가 세상을 떠났지만 오직 대부인만 나이 팔십에 가깝도록 건강하신데, 보내 주신 여러 편의 시와 서화가 장년시 작품과 다를 바 없고, 의미 역시 맑고 고와서 받들어 두세 번 읽어 보았더니, 감격과 기쁨이 어우러져서 삼가 차운하여 올린 첫 번째 시이다.
대부인의 시와 서화를 보고 감격하며 그 시에 차운한 작품이다. 사대부 집안 여성의 품위와 격조를 느낄 수 있다. 떨어져 살며 오랫동안 헤어져 지내다가 대부인이 보낸 작품을 대하고 보니 깊은 감동이 전해진다. 지난 세월을 반추하니 숱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등불을 돋우며 보내신 작품을 읽고 또 읽었다. 행간에 담긴 대부인의 정감이 담긴 작품을 되새기며 감동되어 눈물샘이 자극되었다. 눈물이 마르자 다시 복합적 감정이 일어나 눈물샘이 또 터진다. 사대부 집안 여성의 품위 있는 문학 정감과 예술성을 느낄 수 있다.
전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저도 몰래 이별 슬픔이 일어나요.
오막집 처마엔 달이 오르고
닭 울어 오경임을 알려요.
告歸回首處 離恨黯然生
廬浦茅簷月 村鷄報五更49)
두 번째 시이다. 대부인을 배웅하고 뒤돌아서는 길은 이처럼 허전하다. 이별의 슬픔이 다시 밀려온다. 오두막에 둥근 달이 오르고 오경 무렵에 닭이 울기까지 밤을 지새우는 서경과 서정이 잘 배합된 작품이다. 달빛과 닭울음은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의 적절한 배치로 작품의 미학도 우수하다.다. 오두막집에 달이 오르고 시골집의 닭이 우는 정경을 연상케 하는 회화성도 돋보인다.
시에 깊은 한을 담으셨구요
편지글엔 이별의 정을 보내셨군요.
조심조심 다 읽기도 전에
제 마음이 울적해져요.
短篇深寄恨 尺素遠含情
長跪讀未已 我心還不平50)
세 번째 시이다. 대부인의 작품에 대한 총평이다. 정한을 담뿍 담은 시와 이별의 정한으로 메워진 편지글을 대하니 부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리움이 일어난다. 대부인의 작품을 조심스레 다 읽기도 전에 자신의 마음이 울컥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부인의 내밀한 여성 정감과 다정다감한 면모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동기들 서로 떨어져 살아
평생의 한은 끝이 없어라.
두 고을을 산수가 막고 있어
외로운 기러기 대오 잃은 신세일세.
同氣各分散 平生恨無窮
兩鄕山水隔 孤雁不成行51)
아우에게 보낸 두 번째 시이다. 사간은 동생인 계암 김령을 말한다.52) 김령은 임란이 발발하자 17세의 나이로 류성룡의 막하로 자진해 종군했다. 당시 명나라의 총병사 오유충과 유격장 노득공 두 사람으로부터 칭송을 받을 만큼 학식이 뛰어났다. 1612년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주서에 이르렀다.
하지만 광해군의 난정을 비관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두문불출 독서로 나날을 보냈다. 그 뒤, 인조가 장령·보덕·헌납·사간 등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매번 나가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병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가산을 모두 털어 의병들의 군량미로 충당했으며,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비분강개한 시 몇 편을 남겼다. 벼슬에서 물러나 처음에는 제자들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 마음을 달래며 여생을 보냈다.
위의 시에서 부인은 동기들 멀리 떨어져 살기에 자주 만나거나 소식을 전하지 못해 퍽 한스럽다. 산과 강물이 남매를 떨어져 살게 하여 이처럼 서로 그리워하며 세월을 보낸다. 자신은 길 잃은 외로운 기러기 형상으로 남아 있다. 혈육을 그리워하는 만나지 못한 채 지내는 신세를 같이 날아가다가 대열을 벗어난 기러기에 빗대어 표현했다.
이별한 지 오래되어
서쪽으로 떠난 지 석 달 되었네.
휘영청 밝은 달밤에
고향의 누이 근심스레 기다리네.
相別日已遠 西行過九旬
應知明月夜 愁待故鄕人53)
멀리서 부친 첫 번째 시이다. 부인의 시를 수록한 〈발문〉에서 ‘〈멀리 부친 시〉 몇 수에는 적절한 교훈과 은미한 정을 표현하였으니 조용하면서도 애절하여 예전의 어진 부인들의 시와 비교해 봐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54) 떠난 지 석 달이 되도록 소식이 없어 아쉽고 허전한 마음만 간절하였다.
이 시도 아우 계암의 안부를 염려하며 지은 것으로 보인다. 밝은 저 달을 바라보면서 아우가 무사하길 빌면서 고향으로 소식을 전해 주길 기다린다. 하늘에 떠오른 달은 이쪽과 저쪽을 그리워하게 해주는 매개이다. 근심스레 객지로 나간 혈육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정감을 담았다.
동생을 못 만난 지 오래되었더니
구름 바라보니 그리움 일어나네.
일흔 나이에 소식 끊긴 채
슬프게도 밤중에 달만 밝아라.
不見舍弟久 看雲更感情
入稀消息斷 悄悵夜月明55)
아우에게 보낸 첫 번째 시이다. 부인은 아우를 만난 지 오래되어 그리움이 쌓인 채 살아가던 중에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애써 억눌려두었던 아우를 향한 그리움이 일시에 터져 나오고 말았다. 아우에 대한 그리움은 곧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부인의 시를 수록한 발문에서 ‘특히 〈아우를 그리워함〉 몇 수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했다.56) 일흔이 된 나이의 부인에게 아우의 소식을 자주 접하지 못한 게 파도처럼 큰 슬픔이 되어 밀려온다. 그러한 그리움은 다시 밤으로 연결되어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바라보니 더욱 깊어간다. 혈육을 그리워하는 인간미가 절실하게 우러나온다.
아우를 만나질 못해
좋은 봄날 이렇게 근심스럽네.
소식 끊긴 근래엔
대오 잃은 기러기 울음만 들리네.
不見司馬弟 佳辰轉多情
近來消息絶 愁聽斷雁聲57)
봄철에 아우 김령에게 보낸 시이다. 봄이 찾아와 화사하게 꽃 피는 시절이기에 모두 즐겁다고 한다. 하지만 부인은 아우를 만나지 못한 탓에 내내 근심스럽다. 아우와 소식이 끊긴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하늘에서 대오를 잃고 혼자 울며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면서 감정을 이입했다. 함께 날아가다가 무리를 이탈해 버리고 홀로 슬피 우는 기러기는 부인의 신세와 같다.
내 중풍이 들어
수족을 움직일 수 없단다.
낮에야 억지로 앉아 있지만
밤이 되면 통증이 심하단다.
원기가 날마다 시들어가니
죽을 날이 멀지 않았나 보다.
실오라기 같은 이 목숨 다하기 전에
사복 동생을 만나고 싶구나.
동생은 오랫동안 오질 않아
병든 심정 가눌 길 없어라.
我得痛風疾 手麻不能屈
晝雖勉强坐 夜則疼痛極
元氣日日銷 死亡知無日
一縷命未盡 唯願見司僕
司僕久不來 病懷徒鬱鬱58)
아우 김령에게 보낸 시이다. 부인은 중풍이 들어 수족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 육신이 이처럼 쇠약해지고 병마도 찾아왔기에 객지에서 있는 아우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혈육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사무치기에 시를 통해 누이의 마음을 전했다. 목숨이 다하기 전에 아우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기약이 없기에 외롭고 슬프기만 하다. 하지만 아우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한 일에 종사하기에 내왕이 자유롭지 못하다. 부인은 그러한 아우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노심초사하고 있다.
가을밤 달빛 맑은데
밝은 뜰엔 낙엽이 지네.
대숲엔 새들이 깃들고
갑자기 작년 생각 간절하여라.
친척들 나를 위로하지만
거듭 당한 슬픔을 어찌 알리.
秋夜淸月色 明庭中落葉
下竹裏棲鳥 驚忽憶去年
親戚話令人 不覺重傷情59)
이백의 삼오칠언 운에 차운하여 아들 준에게 보낸 시이다. 가을밤 달빛 밝은데 낙엽이 지는 애잔한 시절이 되고 보니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이 집약되었다. 대숲에 새가 집을 찾아드는 광경을 지켜보고 나서 모성이 발동되었다. 당시 집안에 연이은 불행이 있었던 것 같다. 친척들이 부인을 위로하기는 하지만 부인의 내면에 자리한 깊은 슬픔을 헤아려 모두 위로할 수는 없었다.
상봉한 지 보름도 안 되었건만
부음이 이를 줄이야.
죽은 뒤의 일 적막하니
생각할수록 더욱 슬퍼지네.
相見未半月 豈知訃音來
身後事寂寞 思之尤可哀60)
조카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첫 번째 시이다. 부인은 조카의 부음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서로 만난 지 보름이 지나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들은 애상을 담았다. 조카가 죽은 이후 집안의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니 심장을 도려내듯이 극렬한 통증을 느낀다. 가족과 친척에 대한 부인의 깊은 인간애가 우러나오는 작품이다.
지난해 두 조카 잃고서
올해도 조카 하나 잃었네.
통곡하며 하느님께 묻나니
어찌 이리도 무정하시오.
去年哭二姪 今年哭一姪
痛哭問天公 無情何此極61)
지난해에 두 조카를 잃고 또 조카를 잃은 절박한 심정으로 통곡한다. 어디에도 하소연할 길이 없어 하늘에 원망을 던져보았다. 무정한 하늘이 어찌 이렇게 조카들을 연이어 데려가는가에 대해 반문하였다. 신세 한탄과 가족을 잃은 애통한 심정이 곡진히 표현되었다.
팔 년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아득히 동쪽 구름 바람 보니 생각이 끊길 듯.
고향 집 정원의 고운 나무 꺾였다 하니
통곡하며 마음이 찢어질 듯하여라.
八年不得歸故鄕 悵望東雲思欲絶
聞道中庭玉樹摧 令人痛哭心腸裂62)
조카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세 번째 시이다. 부인은 팔 년째 친정으로 가지 못한 채 계속 전해오는 슬픈 소식을 접한 채 넋을 잃고 동녘 하늘 멀리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향수와 슬픔에 젖어든다. 고향 집 정원의 고운 나무는 친정 댁 조카들을 의미한다. 통곡하는 부인의 마음은 천 갈래나 만 갈래 찢어진다.
가족과 친척을 향한 유별난 애정을 담은 작품을 통해 측은지심의 발로와 인간 성정의 진솔함을 느낄 수 있다. 격한 감정을 절제하여 정제되고 품위 있는 표현에서 김씨 부인의 여성 어조 한시 미학을 엿볼 수 있다.
4) 고독한 이 마음 누가 알리
부인의 시에는 여성으로 느끼는 고독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 많다. 이러한 고독 정서 표출의 원인은 개인 신변 문제나 가정의 크고 작은 일에서 비롯되었다. 격한 감정의 표현을 지양하고 차분하고 지적인 표현으로 깊은 의미를 전달하였다.
닭 울기 기다려도 닭은 울지 않고
잠을 청해도 잠을 이루지 못해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이
모두 내 마음을 어지럽히네.
待鷄鷄不唱 要眠眠未成
家間多少事 一時集心情63)
멀리서 부친 네 번째 시이다. 긴 밤을 새운 채 새벽을 기다린다. 적막을 깨고 닭이 울기 직전이다. 집안의 여러 가지 복잡한 일 때문에 상념이 일어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집안의 잇따른 불행으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은 이후 이러한 불면의 고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안 대소사로 인한 근심을 담은 시이다. 마음을 써야 할 가족과 친지를 위한 연민의 정서가 시의 행간에 가득 담겨 있다. 여러 복잡한 일로 번민과 안쓰러운 마음이 뒤섞여 부인은 밤 내내 힘들었다. 가족과 친척들의 안녕과 행복을 바라는 인간애가 드러난 작품이다.
동짓달 차고도 긴 밤
쓸쓸히 상념이 일어나
돌아가고픈 맘 간절하건만
하늘에 둥근 달만 밝아라.
歲暮寒宵永 廖廖萬感生
遙知歸思切 正是月輪明64)
고독의 정서는 동짓달 긴 밤처럼 길다. 긴 밤을 지새우는 가운데 내면에 고독한 심정이 표출된다. 차갑고 긴 밤에 느끼는 고독감은 가슴마저 시리다. 당시 부인은 객지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편 이찬이 외직으로 나간 점을 미루어 남편의 부임지에서 지은 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차가운 겨울의 긴 밤에 객지에서 느끼는 고독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늘에 떠오른 둥근 달만이 긴 밤에 홀로 지내는 부인의 심정을 알아준다. 외로운 달은 부인의 고독한 형상을 의미한다. 하늘에 떠오른 달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달랜다.
깊은 방에 누운 지 오래되어
정신과 기력이 점점 쇠약해지네.
평생의 고생을 어찌 다 말하랴
실오라기 같은 목숨 참으로 가련하여라.
臥病深房日已久 精神氣力漸消然
平生辛苦寧容說 命在今朝更可憐65)
병으로 누워 지내며 병약한 형상을 표현한 두 번째 작품이다. 정신도 기력도 점차 쇠약해질 뿐이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인생을 회고하였다. 작은 목숨을 부지해 온 지난 세월이 참으로 가련하다고 독백하였다. 병을 얻고 나서 느끼는 고독의 정서를 반영한 작품이다.
깊은 방에 누운 지 오래되었다는 표현을 통해, 부인의 병이 꽤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깊어 가는 병과 함께 정신과 기력이 쇠해짐은 당연한 일이다. 병이 깊어 가면서 지난 세월에 대한 감회가 떠오르고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목숨을 이어가는 신세가 가련하다.
생이별로 괴로이 살다가
몇 번이나 상봉했던가.
소나무 대나무 여전히 무성하겠지만
고향에 돌아갈 날 아득하여라.
生別展轉苦 相逢在幾時
松竹猶存盛 歸去來何遲66)
멀리 보낸 두 번째 시이다. 생이별로 괴롭게 살다가 서로 만나 지가 몇 번 되지 않았다. 이와 상반되게 고향의 뜨락엔 소나무와 대나무가 위용을 자랑하듯 잘 자라고 있을 것이다. 서로 떨어져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원망스럽다. 고향 집 뜰에서 무성히 자랄 소나무와 대나무가 부럽다. 향수와 가족 그리움을 담은 작품이다.
긴 밤 내내 잠 못 이루고
슬픈 이별의 정만 깊어라.
아련히 병들고 늙은 몸
객지에서 꿈마저 이룰 수 없네.
長夜無眠苦 悄然遠別情
遙憐抱病老 旅枕夢難成67)
멀리 보낸 첫 번째 시이다. 향수를 반영한 작품이다. 객지에서 느끼는 고독한 서정이 담겨 있다. 긴 밤 내내 잠을 이룰 수 없어 몸을 뒤척인다. 이별의 정한이 깊어 잠을 청할 수 없고 몸도 늙고 병마저 찾아와 불면의 밤을 보내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만사는 이미 이룰 게 없어
일생이 참으로 가련하여라.
그 누가 천 리 길 이별하고서
이렇게 늘그막을 맞을 줄이야.
萬事已無與 一生眞可憐
誰知千里別 値此欲暮年68)
멀리 보낸 두 번째 시이다. 남편을 그리워하는 사모의 정이 확대된 표현이다. 세상만사 이룬 게 없고 가련한 생을 돌아보니 가련하다. 천 리 길 멀리 남편과 이별한 채 지내는 고독한 여성 이미지를 표현했다. 이별한 채 세월이 흘러 이제는 늘그막에 이르렀다는 표현으로 마무리하면서 신세 한탄으로 마무리했다.
금릉 땅에 어여쁜 건 없지만
창밖의 대나무 어여뻐라.
먼 하늘가 석양이 되면
뭇 새들 다투어 둥지 찾아오네.
金陵無所戀 所戀窓外竹
遙知日暮時 衆鳥爭投宿69)
금릉 동헌에서 차운한 시이다. 금릉은 현재 김천의 옛 지명으로, 당시 행정 구역은 금산군이었다. 부인의 남편 이찬이 이곳에서 군수로 재직할 때 지은 작품이다. 금릉 땅에 특별히 아름다운 것은 없지만 안채 창밖에 자란 대나무가 싱싱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고 했다. 푸른 대숲은 보는 이의 시야를 신선하게 해준다. 석양이 하늘가에 물들면 둥지를 떠나 종일 분주하게 지냈던 새들이 귀소본능을 따라 둥지로 찾아든다. 푸른 대나무와 석양의 붉은 색감이 시야를 선명하게 한다. 새들이 퍼득이며 둥지를 향해 날아드는 순간도 포착했다.
만나자고 거듭 약속해 놓구선
어이하여 이렇게 오질 않는단 말인가.
배꽃은 뜰 가득히 지고
봄날 몇 마리 새만 슬피 울어라.
有約重相見 如何久不來
梨花滿庭落 春鳥數聲哀70)
거듭 만나자고 약속을 했지만 그리운 이는 오지 않는다. 못 올 형편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에 대한 안부가 걱정되고 소식도 궁금하다. 무심한 봄은 속절없이 지나간다. 뜨락에 배꽃이 지고 새가 우는 광경을 지켜보니 이내 서글퍼진다. 배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평화로운 봄이 와도 부인의 고독함을 달랠 수 없다.
봄밤에 잠 못 이루는데
대나무에 바람 불어 새가 놀라네.
이 쓸쓸함을 누구에게 말하리오.
빈 관사에서 홀로 잠드네.
春夜無眠苦 鳥驚風動竹
寂寞愁誰語 空齋人獨宿71)
봄날 밤 남편의 임지를 따라 김천 관사에서 지낼 때 지은 작품이다. 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데 스산한 바람이 대나무에 불어 잠자던 새도 놀라 울었다. 빈 관사에서 홀로 잠을 청하는 부인의 고독한 심리 정서가 담겨 있다. 허전하고 채울 수 없는 고독함을 하소연할 데 없어 시에 담아두었다.
이별 수심 누구에게 말하랴
길이 멀어 소식 닿기 어려워라.
좋은 시절 얼마던가.
서쪽으로 구름과 산이 막혀 있어라.
別後愁誰語 路遠音信難
好還知何日 西望隔雲山72)
멀리서 부친 다섯 번째 시이다. 이별의 근심을 털어놓을 데가 없다. 길도 멀어 서로의 소식도 전하기 어렵다. 이렇게 멀리 서로 떨어진 채 그리워하다가 세월만 쉬이 지나간다는 탄식이 묻어나온다. 구름과 산이 이들을 막고 있기에 그리워는 하지만 쉽게 만나질 못한다는 아쉬움을 담았다.
친척도 아우도 떠나
이슬 같은 이 내 생애
멀고 먼 길을 따라
오가는 사람 저렇게 만건만.
無親又無弟 孤露感餘生
冉冉征道裏 往來人幾更73)
이슬의 생태를 시에 담았다. 잎에 맺힌 이슬이 잎에 오래 머물 수 없다. 오랫동안 함께 머물 수 없는 상황을 자신의 신세와 빗대어 표현하였다. 친척도 세상을 떠났고 아우도 세상을 저버린 슬픔이 풀잎 위의 이슬처럼 가련한 형상으로 남는다. 그리운 친척과 혈육을 그리는 정이 다시금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멀고 먼 길로 오가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지만 부인은 혈육을 잃어버리고 이슬처럼 고독하게 남았다.
창가엔 이른 봄
뜰의 나무엔 온갖 새 지저귀네.
만물이 모두 생기 돌건만
나 홀로 병든 신세일세.
開窓春色早 庭樹百鳥聲
節物皆得意 我獨病傷情74)
병을 앓는 중에 지은 첫 번째 작품이다. 창밖에는 이른 봄이 왔고 뜨락에는 갖가지 꽃이 피고 온 산천과 대지에 생기가 돌아도 부인은 병약하여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다. 화사한 봄날이 되어도 부인의 육신에 병이 찾아와 다스릴 길이 없다. 외로운 신세를 털어놓지 못하고 홀로 인고하는 형상이다.
긴 밤 신음으로 괴로웠는데
사람들은 웃고 떠드네.
병든 몸 만사가 귀찮으니
서러운 마음 가눌 길 없어라.
永夜呻吟苦 傍人笑語聲
病臥人事絶 傷恨不勝情75)
질병을 앓는 동안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만큼 고통이 뒤따랐다. 모인 사람들이 웃고 떠들지만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병에 지친 상태이다. 그래서 서럽고 아픈 마음을 억제할 수 없다. 부인의 내밀한 통증을 치료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깊은 인간애와 깊은 사려를 누구도 헤아리지 못하기에 혼자서 감내한다.
동짓달 차고도 긴 밤
쓸쓸히 상념이 일어나
돌아가고픈 맘 간절하건만
하늘에 둥근 달만 밝아라.
歲暮寒宵永 廖廖萬感生
遙知歸思切 正是月輪明76)
멀리서 부친 두 번째 시이다. 일 년 중 가장 긴 밤인 동짓달이다. 겨울밤 기온이 저하되고 온갖 번뇌가 일어 불면의 밤을 맞는다. 귀향하고픈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몸이어서 더 괴롭다. 고향을 그리워하게 해주는 달빛만 고요히 비친다. 평온한 달빛이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며 다소의 안정을 찾게 해준다. 하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 병이 잦다지만
공연히 먼 이별 근심한다네.
어느 날 돌아갈거나
구구히 머물 수 없구나.
世上人多疾 空勞遠別愁
乞歸知何日 區區莫更留77)
멀리서 부친 세 번째 시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질병이 찾아와 고민이다. 게다가 이별의 근심까지 더했다. 돌아갈 길을 기대하며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다고 하였다.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길을 떠나고 싶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는데
가을철이 되어 서신이 왔군요.
이 번뇌의 마음은
일곱 가닥 슬픔을 낳겠네요.
光陰川共逝 書信鴈俱來
持此惱心曲 感懷生七哀78)
강물처럼 세월이 흘러 가을이 되어서야 소식이 전해졌다. 번뇌로 가득한 이 마음은 무한한 슬픔이 밀려온다고 했다.
5) 그리운 당신이어라
부인의 시에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여성 정감으로 집약한 것이 많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서로 헤어진 지 얼마인지
석 달이 지났네요.
성에는 차가운 해 저무니
행여 용궁의 그분이 오시려나.
相別問幾許 今已過九旬
城中寒日暮 應對竺山人79)
멀리 보낸 첫 번째 시이다. 헤어진 지 어언 석 달이 지났다. 겨울 찬 바람이 부는 시절에 예천 용궁에서 기다리던 그분이 오시려나 하는 조바심으로 지내고 있는 고독한 심상을 담았다. 그리워하는 임의 방문을 조심스레 고대하는 여성 이미지가 잘 드러나 있다.
산과 들에 얼음과 눈이 덮였고
찬바람 창을 뚫고 불어오네.
쓸쓸히 홀로 지내는 몸
이 마음 누구에게 털어놓을까.
氷雪滿山野 寒風透窓來
寥寥愁獨處 懷抱向誰開80)
멀리 보낸 세 번째 시이다. 온 산천을 하얀 눈이 뒤덮었다. 얼음도 꽁꽁 얼어붙은 찬 겨울을 보내는 여인의 마음은 더 시리다. 찬 바람이 창에 몰아쳐서 그녀를 슬프게 하였다. 홀로 지내는 여인의 외로움과 임에 대한 그리운 정감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그 고독한 심정은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하고 혼자 삭히며 감내해야 한다. 인고하며 삭히는 한국 전통 여성 이미지가 담겨 있다.
궁하고 홀로 된 게 명에 달렸고
헤어져 이별함도 인연에 달린 것
먼 곳의 외로운 신세
차가운 달만 창을 밝게 비추네.
窮獨寧無命 暌離亦有緣
那堪憶遠處 寒月照窓明81)
멀리 보낸 다섯 번째 시이다. 궁벽하고 홀로 지내는 게 모두 타고난 운명이라고 하며 스스로 위로한다. 헤어지거나 이별을 겪는 것 역시 타고난 운명의 장난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견디기 힘든 현실의 고독을 외롭게 혼자 이겨내며 살아가야 하는 신세이다. 그녀의 신세처럼 외로이 밤하늘에 떠있는 달만이 그녀의 심정을 알아주는 듯하다. 달님에게 임을 향한 여인의 사랑이 담긴 밀어를 던져보낸다.
홀로 지내는 건 운명이니
병든 몸으로 이별하였어요.
임 그리워 잠 못 이룬 밤
오경에 달빛 환합니다.
窮獨元有命 沈痾別離生
思人夜耿耿 淸月五更明82)
이별의 아픔이 드러난다. 남편과의 이별을 운명으로 돌리기도 하였지만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부인은 당시 병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이별의 아픔마저 겹쳐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밤이 되면 멀리 계신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증폭된다. 오경이 되도록 잠을 이룰 수 없는데 환한 달이 임을 그리는 여인의 마음을 알아주듯 비춰 주며 위안해 준다.
매사에 즐거운 일 없고
일생이 참으로 가련하구나.
서울과 고향은 천 리 길
홀로 한하며 잠 못 이루네.
萬事無歡況 一生眞可憐
京鄕千里隔 窮獨恨不眠83)
멀리서 부친 두 번째 시이다. 부인은 내면 가득한 그리움과 고독한 서정을 품고 살았다. 한양과 안동 고을은 쉽사리 안부를 전하지 못했고 내왕도 쉽지 않았기에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지울 수 없다. 홀로 외로움을 달래며 지내는 고독한 서정 자아의 형상화를 통해 임에 대한 그리움을 애절히 표현하였다. 먼 곳에서 남편의 안녕을 기원하며 보고픈 속마음을 펼쳐내었다.
바람 불고 쓸쓸히 날 저무는데
저의 그리움만 쌓여요.
한양의 서신은 이르지 않고
하늘 멀리 기러기 울음도 끊겼어요.
風色蕭蕭暮 幽人正含情
洛中書不到 天外雁無聲84)
멀리 보낸 여섯 번째 시이다. 고독한 심상이 시의 전체를 지배한다. 멀리 한양에 계신 남편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심정이 반영되어 있다. 석양 무렵에 바람이 불고 하루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더욱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기다리던 한양 고을 임의 소식은 오지 않고 그나마 위안을 삼던 기러기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임의 소식 부재는 기러기 울음 단절로 연결된다. 무리 지어 멀리 행복하게 날아가는 기러기를 부러워하며 기러기 울음이 끊긴 뒤 외로움을 삭힌다.
텅 빈 관사에 황혼이 깃들고
대숲엔 뭇 새 지저귀겠네.
기약 없이 멀리 이별한 신세
슬픈 마음 가눌 길 없어요.
空館黃昏近 修篁百鳥聲
無端成遠別 悵望不勝情85)
남편이 금산군수로 재직할 때 보낸 첫 번째 시이다. 적적한 관사에 황혼이 깃들고 대숲에는 새들이 지저귀며 둥지를 찾아들겠다는 상상을 했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는 남편과의 이별을 아쉽게 여기며 그리운 마음이 깊어 슬픔이 밀려온다고 했다. 슬프고 외로워도 남들에게 속내를 쉽게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가슴앓이하는 한국 전통 여성 이미지가 담겼다.
꿈에 한 곳에서 만났지만
꿈 깨니 각각 떨어져 있어요.
제가 얼마나 살랴마는
세월은 유유히 흘러가요.
夢中會一處 覺後在他州
吾生能有幾 徂歲復悠悠86)
남편이 금산군수로 재직할 때 보낸 두 번째 시이다. 남편을 그리워한 나머지 꿈에서 그를 만났다. 정다운 남편과의 재회도 금방이었고 다시 꿈을 깨고 보니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 없다.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현실은 그녀를 구슬프게 하였다. 부부로서 함께 지내지 못하고 떨어져 살다가 생애를 보낸다는 이별의 정한을 여성 어조로 섬세히 표현했다.
날 저문 초당에 우두커니 서서
이별과 슬픔을 견디기 어려워요.
산길이 이렇게 어둑하니
떠나는 분 앞길이 걱정스러워요.
獨立秋堂暮 那堪送別情
應知山路黑 歸客意難平87)
이별하면서 지은 첫 번째 작품이다. 날이 저무는데 임을 떠나보내는 여인의 심정을 진솔하게 썼다. 점차 어둠이 짙게 깔리는 초당에 남은 여성의 고독한 이미지와 이별의 정한을 복합해서 그려내었다. 어둑해진 산길을 가는 임에 대한 염려를 담았다.
벽엔 등불 깜빡이는데
이 몸은 잠 못 이루네.
눈보라 몰아치는 밤
말 타고 가시는 길 험하리.
背壁燈明滅 幽人正未眠
此時風雪亂 馬上行路難88)
멀리 부친 네 번째 시이다. 눈 내리는 밤에 먼 길로 떠난 보낸 임의 안부를 염려하였다. 강추위가 엄습하였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길이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여성 이미지를 형상하였다.
천 리 이별 길에
가시는 길 험난해요.
집안 대소사 염려 마시고
부디 몸조심하셔요.
無端千里別 況値行路難
莫念家間事 惟須愼險難89)
임지로 떠나는 남편에게 드린 시이다. 이별의 정표로 마음을 전한 작품이다. 먼 부임지로 떠나가는 남편의 무운장구를 빌며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은 염려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부디 몸조심하며 주어진 직임에 충실해 주시길 당부하였다.
오늘 아침 길 재촉 마오.
후일을 기약하기 어렵다네.
이별은 사람 마음 녹이니
죽는 것 마냥 슬퍼요.
莫促今朝去 難期後日來
銷魂唯是別 垂死更堪哀90)
이별하면서 지은 두 번째 작품이다. 소녀와 같은 고독한 심정을 담았다. 임을 떠나보내기 싫어 투정도 부리고 싶었다. 다시 만날 후일을 기약하기 어렵기에 임을 애써 붙잡고 싶었다. 이별의 심정은 죽는 것 이상 아프다고 고백하였다.
이별의 심정이 매우 절실하게 묘사되었다. 이별을 서두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왜냐하면 이별이란 후일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러기에 이별은 사람 마음을 녹이는 것이어서 죽는 것처럼 슬프다고 표현함으로써 임과의 이별 아픔이 이처럼 절실하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부인의 여성 정감적 표현이 아주 잘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인은 연약한 여성으로 그 이별의 아픔을 홀로 삭일 수는 없었다.
어디선가 날아든 서찰
뜯어보고 길이 감격하였어요.
임 그리운 이 마음
오늘도 가시질 않네요.
書札自何處 開緘感歎長
相思無限意 此日更難忘91)
멀리 부친 첫 번째 시이다.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남편의 서찰이 당도하였다. 다정한 남편의 아내를 위로하며 보고픈 정을 표현한 서신을 받고 부인은 감격하며 기뻤다. 온종일 남편 생각뿐이다. 그리웠던 임에 대한 억눌렸던 정념이 서찰을 받은 오늘 더욱 억누를 수 없다.
긴 밤 홀로 시를 읊노라니
북풍 불자 제 마음도 설레어요.
적적한 방에서 잠 못 이루는데
벽 위 등불만 이불을 비춰요.
長夜漫漫費獨吟 北天風色更關心
洞房廖寂難成夢 壁上殘燈照布衾92)
남편이 보낸 시에 차운한 작품이다. 길고 긴 밤에 시를 읊노라니 마음이 설렌다. 북풍이 거세게 불자, 더욱 심란해진다. 적적한 빈방에서 홀로 잠들자니 벽 위의 등잔불만 그녀를 벗해 준다. 적막한 밤이 흐르고 북풍한설에 독수공방 여인의 정한을 담았다.
고독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어 시를 읊는다. 그런데 애써 갈무리하였던 임에 대한 그리움을 북풍이 일깨우고 말았다. 이는 결국 설레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적적한 방에서 잠을 이룰 수 없는 것으로 확대된다. 그런 가운데 외로운 등불이 고독한 여인과 벗해 준다.
부부 인연 굳게 맺었으나
갑자기 이별하니 둘 다 가련하네요.
추운 날 객지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적막한 빈방의 첩도 잠 못 이룹니다.
生來人間赤繩纏 一朝相別兩可憐
天寒旅舍何如在 寂寞空閨獨不眠93)
먼 곳에 계신 남편에게 보낸 시이다. 부부의 인연을 맺고 단란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이별하니 모두 가련해졌다고 했다. 추운 날 객지에서 무탈한지 걱정이 되어 여인은 잠을 못 이루며 지새운다. 여성의 이별 정한을 섬세하고 진솔하게 그려내었다. 이별 정서를 반영한 시다.
남편이 객지로 떠남을 전송하며 지은 시이다. 부부로 인연을 맺고 오래오래 함께 지낼 것이라는 생각만 하였더니 갑자기 이별을 당한 터에 그리움이 겹쳐진다. 객지로 떠나가신 임에 대한 그리움은 임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전환되어 표현된다. 부인은 엄동설한에 혹시 남편이 객지에서 어려움이나 당하지 않는지 못내 염려하였다. 그래서 부인은 고향에서 그러한 염려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한다.
4. 맺음말
조선 시대 여성의 경우, 뛰어난 시문을 창작하였을지라도 후대에 전해지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여류 한시 작가는 200명이며 남긴 작품 수는 약 2000여 수에 이른다. 이러한 작품은 구전되거나 남성의 문집 말미에 한두 구절이 전해져 오늘까지 전해졌다.
안동 지방에서 현재까지 파악되는 여성 한시 작가로는 정부인 안동 장씨, 설죽, 광산 김씨 부인이다. 그리고 이 세 분이 남긴 한시를 보면, 정부인 장씨가 8수, 설죽이 167수, 광산 김씨부인이 48수를 남겼다.
이들의 작품 수를 합산하면, 모두 223수이다. 이는 한국 여류 한시의 전체 분량에 비해 매우 많은 분량이다. 그리고 작품에 담긴 품격과 정감의 표현 역시 여타 여류 시인들의 작품과 비교해봐도 작품 미학상 전혀 손색없이 우수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세 분이 사대부 집안 출신의 여성이었고, 설죽은 여종의 신분이었다. 그렇지만 시에 반영된 여성의 정감은 신분을 초월하여 동일하게 표현되었다. 이는 인간 본연의 진솔한 감정은 인간을 굴레 지우는 신분이나 제도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광산 김씨 부인의 시는 남편 이찬의 문집 말미에 기록되어 후인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인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살필 수 없지만 시에 반영된 여성 정감을 통해 부인의 형상을 조명해 볼 수 있었다. 부인은 신라 왕조의 후예로, 원래 전라도 광산의 토성으로 고려 후기에 중앙으로 진출하여 벼슬길에 오르면서 명문으로 발전한 서울에 기반을 둔 가문이었는데, 그 한 파가 안동으로 옮겨왔다.
부인은 설월당 김부륜의 따님이며 계암 김령의 누님이다. 그녀는 문사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행실로 선망을 받았다. 그녀의 남편은 서애 류성룡의 생질이며 문인이었던 국창 이찬이었다. 이찬은 의술을 익혀 어의도 못 고치는 상감의 병환을 완치하여 음직으로 종부시주부․공조좌랑․군위현감 등을 역임했다.
부인의 시 분석을 통해 아픔과 고독을 내면으로 삭혀 인고하는 여성 형상이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가족과 친지에 대한 애정의 반영 및 고독한 여성 정감의 표현, 그리고 남편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 등이 주조를 이루었다. 그리고 부인의 시에 유가적 가문의 여성 시인다운 품위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 역시 특징적 국면이다.
그리고 그녀가 친척 여성들 사이에 시문을 주고받은 점으로 미루어 광산김씨 집안 여성들이 상당한 수준의 시문을 즐겨 구사했음도 익히 알게 된다. 부인의 시에서 전형적인 사대부가 여성 시인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학계에 최초로 소개되는 것으로, 한국 여류 한시사에서 큰 의의를 지닐 것으로 전망된다.
아울러 예천 지역에서 광산김씨 부인의 한시 유산을 활용하기 위한 후속 문화 진흥 방안을 제언한다. 지역 사회 문화 인물의 발굴과 융성을 위한 후속 작업은 후손과 해당 지역 사회 단체의 몫이다. 용궁면 무이리 출신 명의로 인술을 실천한 국창 이찬의 행적과 김씨 부인의 한시 유산을 병행해서 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국창 내외의 따뜻한 인간애와 가족 사랑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94) 세상을 따뜻하게 해준다. 두 분의 인간에 대한 애정은 시대를 초월하여 아름다운 행적으로 남아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박애와 인간 존중의 정신을 읽어낼 수 있다. 부인의 한시 유산 발굴과 번역이 이루어졌다. 이어 학술 발표를 비롯한 예술제·문화 활동 등을 통해 부인이 남긴 문학적 성취와 따뜻한 인간애 정신이 더욱 값지게 빛나길 기대한다.
1) 문학 공원 조성(참고 : 매창공원)
2) 한시 시비 건립(참고 : 허난설헌 문학관·박경리 문학관)
3) 문학관 건립(참고 : 허난설헌 문학관·최명희 문학관)
4) 한시 특강(세미나)
5) 실경 뮤지컬(드라마·특집방송·공연·예술제)
6) 소설(전기문·소설·만화·동화·애니매이션)
7) 광산김씨부인로(참고 : 난설헌로)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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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걸/경북 안동 출생으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 박사과정에서 한국한문학을 전공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아 안동대학교 국학부 강사를 역임했다. 논저로 『안동 여류 한시』(이회문화사. 2002), 『역주 파수추』(이회문화사. 2004), 『김종직의 풍교 시문학 연구』(도서출판 박이정. 2004), 『조선 후기 야담의 풍경』(도서출판 파미르. 2006), 『안동 여인, 한시를 짓다』(도서출판 파미르. 2006), 『매화나무 가지에 둥근 달이 오르네』(도서출판 파미르. 2006), 『조선조 3대 여류 시인 설죽』(도서출판 판. 2014), 『조선조 3대 기녀 시인 설죽』(도서출판 성심. 2020), 『국역 경옥선생유집』(도서출판 성심. 2007, 『국역 백운자유고』(공)(도서출판 성심. 2013), 『국역 수서 선생 문집』(도서출판 성심. 2021), 『안동 영호루』(민속원. 2021)외 논문 90여 편이 있다.
1) 본고에서 ‘조선조 안동의 여류 한시’ 개념은 당시 안동대도호부 개념을 적용한 것으로, 현 행정 구역상 ‘안동’(정부인장 씨)·‘봉화’(설죽)·‘예천’(광산김씨부인)의 한시를 통틀어서 다루기로 한다.
2) 이원걸, 《안동 여인, 한시를 짓다》, 도서출판 파미르, 2006.
3) 이원걸, 〈정부인 안동 장씨의 한시〉, 《안동》 제77집, 2001.
4) 이는 水村 任埅(1640~1724)이 편찬한 시비평집이다. 그의 자는 大仲이며, 호는 水村이다. 그의 본관은 豊川이며, 尤庵 宋時烈과 同春堂 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숙종조에 辛壬士禍에 연루되어 평안도 咸從에 유배된 적이 있다. 그후, 金川으로 移配 도중 죽었다. 저서로 『水村集』이 있으며, 야담집 『天倪錄』도 남겼다.
5) 『詩話叢林』, 『水村謾錄』, 亞世亞文化社, 1973, p.446. 「孼玄卽安東權某之婢也. 有才色能詩, 自號翠竹. 其秋思詩曰, 洞 天如水月蒼蒼, 樹葉蕭蕭夜有霜. 十二湘簾人獨宿, 玉屛還羨畵鴛鴦. 訪石田故居詩曰, 十年曾伴石田遊, 楊子江頭醉幾留. 今日獨尋人去後, 白蘋紅蓼滿汀秋. 此兩作, 俱在箕雅, 而秋思誤屬妓翠仙, 故居誤屬無名氏, 世不傳翠竹名, 可惜」. 그리고 이와 유사한 내용이 편자 미상으로, 총 290화가 수록된 야담집 『海東奇異』에도 실려 있다(『韓國文獻說話全集』5, 『海東 奇異』, 東國大學校 韓國文學硏究所編, 1981, p.298, 「孼玄卽, 安東權某之婢也. 有才色能詩, 自號翠竹. 其秋思詩曰, 洞 天如水月蒼蒼, 樹葉蕭蕭夜有霜. 十二湘簾人獨宿, 玉屛還羨畵鴛鴦. 訪石田故居詩曰, 十年曾伴石田遊, 楊子江頭醉幾留. 今日獨尋人去後, 白蘋紅蓼滿汀秋. 此兩作, 俱在箕雅, 而秋思誤屬妓翠仙, 故居誤屬無名氏, 世不傳翠竹名, 可惜」. 이는 위 「수촌만록」의 내용을 발췌해 놓은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설죽의 존재를 더욱 확고히 해주는 증빙 자료가 된 다. 이는 이어서 소개될 『白雲子詩稿』 말미에 수록된 「雪竹遺事」를 참조하면, 「翠仙, 一名月蓮, 石泉先祖侍廳婢也. 才 調伶俐而超逸…自號雪窓, 又曰雪竹」라는 기록에서 해명된다. 그리고 『白雲子詩稿』에 실린 「秋思詩」와 「訪石田故居」를 보면, 「秋宵思」(洞天如水月蒼蒼, 木葉蕭蕭夜有霜. 十二曲欄人獨宿, 玉屛空羨畵鴛鴦)․「西湖憶成石田」(十年閑伴石田遊, 楊 子江頭醉幾留. 今日獨尋人去後, 白蘋香蓼滿汀□)인데, 시제와 시어가 약간씩 출입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 아 임방이 찾고자 했던 시인 여종은 설죽이 분명하다.
6) 권상원의 자는 遠遊, 호는 白雲이다. 『白雲子詩稿』의 「白雲子傳」․「遺事」를 참조하면, 그는 『史記』를 탐독하였으며, 疎庵 任叔英(1576-1623)을 사사했다. 淸陰 金尙憲(1570~1652)이 그의 시를 보고 칭찬하였으며, 그를 추천하여 조정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청나라 사신들이 당도하자, 金瑬(1571-1648)가 賓相이 되어 그를 불러 椵島까지 다녀왔다. 당시, 그 가 교유했던 인물 가운데 澤堂 李植(1584-1647), 玄谷 鄭百昌(1588-1635)이 절친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로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여생을 마쳤다. 『澤堂集』에는 택당이 그에게 준 시 「權進士遠遊尙遠持梁子漸別詩來 求和余病不能構思別占小律以送之」(午夢兼愁亂, 春光與病闌. 君來無語別, 老去和詩難. 嶺路花全爛, 鄕園雨正乾. 家人應 倒屣, 好作上庠間)와 「權生榮歸寄安東洪使君」(好在福州使, 須看權學官. 一鳴成進士, 千里展親歡. 酒可供盈甔, 餐應擧數 盤. 兼將老妓女, 對舞任蹣跚)의 두 수가 실려 있다. 『澤堂集』, 『韓國文集叢刊』(88), p.67.
7) 허경진, 「여류 한시선」, 『한국의 한시』(39), 평민사, 1993, p.133.
8) 임종희, 〈설죽시 해제〉, 《안동한문학》 제6집, 안동한문학회, 2006.
9) 이원걸, 《안동 여류 한시》, 이회문화사, 2002·이원걸, 《안동 여인, 한시를 짓다》, 도서출판 파미르, 2006.
10) 이원걸, 〈여종 설죽의 정감 어린 시〉, 《한문학보》 제3집, 우리한문학회, 2008.
11) 이원걸, 〈여종, 설죽의 생애와 시〉, 《안동학연구》 제12집, 한국국학진흥원, 2013.
12) 『白雲子詩稿』(石泉先祖侍廳婢), 『玉馬誌』․『奉化郡誌』(石泉權來侍廳婢).
13) 『芝峰類說』(賤娼翠仙號雪竹)․『靑莊館全書』(詩妓)․『五洲衍文長箋散稿』(湖西妓雪竹翠仙).
14) 『大東詩選』(翠仙娼女號雪竹)․『海東詩選』(翠竹權家婢․翠仙湖西妓).
15) 『水村謾錄』(任埅). “孼玄卽安東權某之婢也. 有才色能詩, 自號翠竹. 其秋思詩曰, 洞天如水月蒼蒼, 樹葉蕭蕭夜有霜. 十二 湘簾人獨宿, 玉屛還羨畵鴛鴦. 訪石田故居詩曰, 十年曾伴石田遊, 楊子江頭醉幾留. 今日獨尋人去後, 白蘋紅蓼滿汀秋. 此 兩作, 俱在箕雅, 而秋思誤屬妓翠仙, 故居誤屬無名氏, 世不傳翠竹名,可惜.”
16) 『大東詩選』(閔百順), 「春粧」. “春粧催罷倚焦桐, 珠箔輕盈日上紅. 春霧夜多朝露重, 海棠花泣小墻東. 翠仙, 娼女, 號雪竹.”
17) 『芝峰類說』(李晬光). “賤娼翠仙, 號雪竹, 有詩曰, 春粧催罷倚焦桐, 珠箔輕盈日上紅. 春霧夜多朝露重, 海棠花泣小墻東.又 洞天如水月蒼蒼, 木葉蕭蕭夜有霜. 十二曲欄人獨宿, 玉屛空羨畵鴛鴦.”
18) 『玉樞經』 : 道家 經文의 하나로, 소경이 외어 읊는다.
19) 『靑莊館全書』(李德懋). “高麗有龍城娼于咄․彭原娼動人紅, 能賦詩而不傳. 本朝松都妓黃眞, 艶色工詩, 自言花潭先生及朴 淵瀑布與我, 爲松都三絶. 甞避雨, 黃昏入士人家, 士人於燈影旖旎之中, 見其妖冶, 心知爲鬼魅狐精, 端坐誦玉樞經不絶 口. 眞眄睞匿笑, 鷄鳴雨止, 眞嘲士人曰, 君亦有耳, 天壤間聞有名妓黃眞者乎, 卽我是也, 因拂衣而起. 士人悔恨不可及. 又有秋香․翠仙妓, 亦皆工詩. 翠仙號雪竹, 「白馬江懷古」詩云, 晩泊皐蘭寺, 西風獨倚樓. 龍亡江萬古, 花落月千秋. 「春粧」 詩, 春粧催罷倚焦桐, 珠箔輕盈日上紅. 香露夜多朝露重, 海棠花泣小墻東.”
20) 勝二喬와 一枝紅의 代表的 詩이다. 勝二喬(「秋夜有感」 : 江陽館裏西風起, 後山欲醉前江淸. 紗窓月白百蟲咽, 孤枕衾寒夢 不成․「秋夜有感」 : 西風吹衣裳, 衰容傷日月. 蓮堂秋雨疎, 露枝寒蟬咽. 霜鴈墮飛聲, 寂寞過山城. 思君孤夢罷, 秋月照窓 明), 一枝紅(「上泰川洪衙內詩」 : 駐馬仙樓下, 慇懃問後期. 離筵樽酒盡, 花落鳥啼時).
21) 『五洲衍文長箋散稿』下(李圭景), 卷43, 「華東妓源辨證說」. “自高麗至我朝, 或有詩妓之可稱者略錄之, 以寓古人采風不遺之 義. 權松溪應仁稗官雜記, 東詩, 三國無聞, 高麗只有龍城娼于咄․彭原娼動人紅, 解賦詩云而無傳. 松京三絶黃眞․扶按女 妓梅窓桂生秋香, 湖西妓雪竹翠仙, 晉州妓勝二喬, 扶按妓福嫏, 成川妓一枝紅, 皆能詩有名, 而娼妓而能詩, 絶異故略及之”
22) 그의 조부 이덕무는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박학강기博學强記하여 고금의 제자백가와 기문이서奇文異書에 통달했다. 아 울러 문장에서도 새로운 조류를 일으켜 명성을 떨친 실학자였다. 그의 부친 이광규는 할아버지의 유고를 편집했으며 검 서관으로 규장각에 봉직했다. 이규경은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를 이어 받았다. 특히 조부의 학문과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진대晉代의 박물학자 장무선張茂先과 송대宋代의 학자 이석李石의 저서에 관심을 가져 박물학 을 좋아했다. 청년 시절에 천문·역법·역사·제도·종교·의생활 등 제분야에 걸친 자료를 수집, 그 근원을 고증·정리하여 체계 를 세우는 데 주력했다. 1832년에 병으로 요양 중에 예전에 써둔 원고를 정리하기로 결심해 1839년에 『오주서종五洲書 種』 '금석'金石과 '옥석'玉石 부분을 완성했다. 이어 1839년에 '군사기술' 부분을 완성했다. 그 후, 그는 우리나라 및 중 국, 그외 고금사물古今事物을 대소와 아속雅俗의 구별 없이 의의가 있거나 고증의 필요가 있는 것을 모두 정리한 『오주 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저술했다. 이외에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그가 명문가에 서 태어났지만 신분상 서손庶孫으로,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23) 『補閑集』. “廣平腸鐵早知堅, 我本無心共枕眠. 但願一宵詩酒席, 助吟風月共芳緣.”
24) 『補閑集』, 「自敍」. “娼女與良家, 其心間幾何. 可憐柏舟節, 自誓矢靡他.”
25) 황진이(1520-1560) : 송도의 명기로 황진사의 서녀이다. 그녀는 첩의 딸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 내는 봉건 윤리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희망하였다. 당시 신분으로서는 이렇게 사는 것이 불가능했다. 오직 한 길 기생의 인생을 사는 것뿐이다. 황진이는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활달한 성격․청아한 소리․예술과 문예적 재능 으로 인해 명기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녀와 관련된 일화가 야담 등에 많이 전해진다. 30년 면벽하여 수도하던 지족선사 를 파계시킨 일, 서경덕을 시험했다가 그의 학문과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스승으로 사모한 일화, 종실 벽계수가 황진이 와 사귀고자 시도했던 일화나 소세양이 그녀와 30일 동안 동거한 일화, 이사종이 6년 동안 계약 결혼한 이야기 등은 유 명하다. 황진이는 이같이 호방한 풍류의 삶을 살다가 사십 전후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황진이에 대한 로맨스는 죽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평안도사로 부임해 가던 임제는 그녀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며 시조를 지었다가 파직을 당했다.
26) 매창((1573-1610) : 부안현의 아전인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부친에게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혀 기생 이 되었다. 그녀는 황진이와 쌍벽을 이룬 기녀 시인이었지만 37세에 요절했다. 사후, 부안 고을 아전들이 1668년에 고 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던 시 58편을 목판에 새겨 『매창집』으로 간행하였다. 매창은 사대부와 교유했지만 유독 친하게 지낸 이는 류희경(劉希慶 : 1545-1636)과 허균(許筠 : 1569-1618), 이귀(李貴 : 1557-1633)였다. 유희경은 매창에게 10 여 편의 시를 써 주었다. 허균은 매창이 죽자, 〈애계랑〉 시를 지었다. 매창은 가무와 거문고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 었다.
27) 《菊窓集》(坤), 〈行狀〉, “旣上學, 受業于舅氏西厓先生之門, 特加愛重, 目之以千里駒. 與內弟修巖公袗, 共爲刮磨.”
28) 《菊窓集》(坤), 〈行狀〉, “十九受室于宣城, 卽雪月堂金公富倫之門.”
29) 《菊窓集》(坤), 〈行狀〉, “金公, 聞陶山指訣, 爲一代所推.”
30) 《菊窓集》(坤), 〈行狀〉, “公承受有方. 與婦弟溪巖金公坽, 互相資益.”
31) 《菊窓集》(坤), 〈行狀〉, “旣康濟一身, 而人之有痼瘵奇疾者, 皆望其仁焉, 一世以希文之志稱頌焉.”
32) 《菊窓集》(坤), 〈行狀〉, “時太學士李公敏朮, 提調藥院, 一見公深加敬重曰, 今日時見南士中林泉藏器之君子. 卽拜東宮羽衛 司司御, 連授宗簿主簿工曹佐郎. 旋授軍威縣監. 數月以治績聞. 以病免歸. 其後復見召, 拜工曹正郎, 又出爲金山郡守.”
33) 《菊窓集》(坤), 〈行狀〉, “懲毖錄, 時柳先生當亂拱御之策, 而中又散佚, 篇第未成. 公極意蒐輯, 成完本, 此皆效力於師門也.”
34) 이원걸, 《안동 여인, 한시를 짓다》, 도서출판 파미르, 2006.
35) 《菊窓集》(乾), 〈令人光州金氏詩稿跋〉. “有詩四十餘首, 附見於先生集末. 音調溫柔, 格律淸婉,”
36) 《菊窓集》(乾), 〈令人光州金氏詩稿跋〉. “淺近而有幽遠之趣.”
37) 《菊窓集》(乾), 〈令人光州金氏詩稿跋〉. “平常而見自然之妙, 蓋古今所罕也.”
38) 《菊窓集》(乾), 〈令人光州金氏詩稿跋〉. “令人詩, 如蔘芝朮, 適於世用, 其不更勝於蘭雪一著也歟.”
39) 《菊窓集》(乾), 〈令人光州金氏詩稿跋〉. “其憶弟數篇, 深致淇泉之思.”
40) 《菊窓集》(乾), 〈令人光州金氏詩稿跋〉. “寄遠諸章, 微寓鷄鳴之警. 從容惻怛, 方諸古賢媛, 無遜也.”
41) 《菊窓集》(乾), 〈令人光州金氏詩稿跋〉. “斯可以流芳澤於無窮矣. 何疑乎永傳也.”
42) 《菊窓集》(乾), 〈令人光州金氏詩稿跋〉.
43) 〈送全甥〉.
44) 〈寄全甥僑〉.
45) 〈悅親戚〉(1).
46) 〈悅親戚〉(2).
47) 〈寄遠〉(2).
48) 〈唯我嫡從之行 皆已捐世 獨大夫人 年近八耋 尙此康寧 寄來篇什 措語筆畵 無異壯年 而意亦淸婉 奉讀再三 感憙交集 敬 次其韻 忘拙敢呈〉(1).
49) 〈唯我嫡從之行 皆已捐世 獨大夫人 年近八耋 尙此康寧 寄來篇什 措語筆畵 無異壯年 而意亦淸婉 奉讀再三 感憙交集 敬 次其韻 忘拙敢呈〉(2).
50) 〈唯我嫡從之行 皆已捐世 獨大夫人 年近八耋 尙此康寧 寄來篇什 措語筆畵 無異壯年 而意亦淸婉 奉讀再三 感憙交集 敬 次其韻 忘拙敢呈〉(3).
51) 〈寄司諫〉(2).
52) 김령(金坽 : 1577-1641) :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으로 예안 출신이다. 김효로(金孝盧) 의 증손으로, 조부는 김유(金綏), 부친은 현감 김부륜(金富倫), 모친은 평산 신씨로 부호군(副護軍) 신수민(申壽民)의 따 님이다. 1689년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 《계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53) 〈寄遠〉(1).
54) 《菊窓集》(乾), 〈令人光州金氏詩稿跋〉. “寄遠諸章, 微寓鷄鳴之警. 從容惻怛, 方諸古賢媛, 無遜也.”
55) 〈寄司諫〉(1).
56) 《菊窓集》(乾), 〈令人光州金氏詩稿跋〉. “其憶弟數篇, 深致淇泉之思.”
57) 〈春日寄舍弟司馬〉.
58) 〈寄舍弟司諫子峻〉.
59) 〈次李白三五七言韻兼寄子峻〉.
60) 〈哭姪〉(1).
61) 〈哭姪〉(2).
62) 〈哭姪〉(3).
63) 〈寄遠〉(4).
64) 〈寄遠〉(2).
65) 〈病中〉.
66) 〈寄遠〉(2).
67) 〈寄遠〉(1).
68) 〈寄遠〉(2).
69) 〈次金陵東軒韻〉.
70) 〈兼〉.
71) 〈金山官齋春夜又用前韻〉.
72) 〈寄遠〉(5).
73) 〈感吟〉.
74) 〈病中〉(1).
75) 〈病中〉(2).
76) 〈寄遠〉(2).
77) 〈寄遠〉(3).
78) 〈唯我嫡從之行 皆已捐世 獨大夫人 年近八耋 尙此康寧 寄來篇什 措語筆畵 無異壯年 而意亦淸婉 奉讀再三 感憙交集 敬 次其韻 忘拙敢呈〉(四).
79) 〈寄遠〉(1).
80) 〈寄遠〉(3).
81) 〈寄遠〉(5).
82) 〈寄遠〉(3).
83) 〈寄遠〉(2).
84) 〈寄遠〉(6).
85) 〈寄呈案下(在金山時〉(1).
86) 〈寄呈案下(在金山時〉(2).
87) 〈送別〉(1).
88) 〈寄遠〉(4).
89) 〈敬次案下韻〉.
90) 〈送別〉(2).
91) 〈寄遠〉(1).
92) 〈次案下韻〉.
93) 〈寄遠〉(1).
94) 《菊窓集》(乾), 〈令人光州金氏詩稿跋〉. “鄕里後生, 庶幾因此而窺雪月堂庭蕙之滋養·菊窓翁床琴之偕調焉, 則亦不爲無所補 於世敎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