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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아모스 4장 6-13절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아모스 3장에 이어 아모스 4장도 ‘들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데, 그 대상은 사마리아 산에 있는 부유층, 상류층 여인들입니다.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 너희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어떻게 하는가? 남편을 사주해 자신들을 위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여인들만의 죄만을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시대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을 비롯하여 권력을 가진 자들, 부유한 자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아내들까지 함께 자기 쾌락과 만족을 위해 죄를 짓는데 앞장 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3장에서부터 궁들이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4장에서는 그렇게 성이 무너진 데를 통하여 앞으로 나아가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북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벧엘에 대하여도 벌하여 파괴할 것을 말씀하셨는데(암3:14), 그들의 죄는 종교적 행사 혹은 종교적인 열심이 없어서가 아니란 것을 4장 4절과 5절에서는 밝혀주십니다. 종교적 행사도 있고, 또 종교적 열심도 있지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순종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명하신 그대로를 드려야 하는데, 명하신 것을 변경해서 드리고 명하시지 않은 것을 드리더란 것입니다.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냉소적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것은 너희가 기뻐하는 것이지, 내가 기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너희가 드리는 종교적 행사, 너희가 드리는 종교적인 열심은 다 나의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 기쁨을 위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만족이요, 자기 쾌락을 위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분명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창조주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예배와 경배를 받으셔야 하는데, 지금 북이스라엘은 자기 만족과 자기 쾌락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아모스가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가 여로보암 2세 때입니다. 벧엘에 금송아지 신상을 만든 때는 여로보암 1세 때입니다. 여로보암 1세와 2세 사이의 시간은 100년이 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가 아닌, 명하시지 않은 예배, 명하신 바를 변경하여 드린 예배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오늘 본문에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그들을 징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왜 징계하십니까? 너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거기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는 이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는 다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6절, 8절, 9절, 10절, 11절.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겁니까? 이것으로 징계하고 저것으로 징계했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을 정도로 완악하고 강퍅하다는 것입니다.
한절씩 확인해보면, 먼저 6절입니다.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의 각 처소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절에서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라고 말씀하셨고, 5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범하되 죄에 죄를 더하는 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라는 것인데, 그러한 일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징계를 내리셨는가?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를 깨끗하게 하였다는 것은 이어지는 말씀처럼 너희 각 처소에서 양식이 떨어져 먹을 수 없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저들의 죄에 대하여 기근으로 징계하셨다는 것입니다. 풍년이 아니라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8장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이 말씀에 근거하면 양식이 없어 주리고, 물이 없어 갈한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말씀답게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북이스라엘의 상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벧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해마다 길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그들을 다스렸지만, 더 이상 이런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왕이 갖추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의 등사본을 가지고 있으면서 평생 그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신17:18). 읽고 하나님 경외를 배워 하나님의 뜻대로 그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신17:19).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중요한 것을 버린 저들에게 덜 중요한 것을 빼앗아 가십니다. 흉년을 통하여 먹을 것이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있지만 금송아지 신상을 만든 것 자체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저들을 다시금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기근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하나님 경외를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계속해서 7절과 8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게 하여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하게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는 가뭄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추수하기 위해서는 곡식들이 자라야 합니다.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합니다. 그 물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신명기 11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학자들에 의하면 이른 비를 통해 건조한 땅이 적셔져 경작할 땅을 부드럽게 만들고, 늦은 비를 통해 밀, 보리가 자라도록 돕는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이스라엘 지역에서 중요합니다. 그런데 추수하기 전에 내려야 할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밀과 보리 등 곡식들을 자라게 할 비가 내리지 않음으로 풍년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셨다고하는데, 이것은 가뭄이 하나님으로부터 된 일임을 더욱 분명히 밝히는 말씀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같은 나라 안에서 어느 지역에는 비가 내리는 반면, 어느 지역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번도 거의 전체가 눈에 덮였을 때 경상도만 예외인 위성사진을 누군가 보여준 적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자연현상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요 섭리자이십니다.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신 것, 그것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북이스라엘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연현상, 혹은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분명한 사실을 사사기 6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36절 이하 40절에 보면 기드온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어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게 되는 것을 보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그대로 됩니다. 기드온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반대로 양털은 마르고 주변 땅은 이슬이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그대로 됩니다. 넓은 지역이 아닙니다. 매우 좁은 장소고 이슬이 맺힌다면 다 맺혀야 하는데, 양털을 제외한 지역이 맺히고 또 양털에만 맺힌다는 것은 그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좀 더 넓게 말씀하고 있을 뿐입니다. 비가 내려야 할 때 내리지 않게 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나 자연현상 정도가 아니라, 자연까지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지금 북이스라엘은 이런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징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겁니다. 그러나 알지 못했습니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8절은 이런 가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얼마나 가뭄이 심한지 두 세 성읍 사람이 물이 있는 어떤 성읍 소식을 듣고 비틀거리면서 갔지만 결코 만족할 만큼 마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전체로 볼 때 가뭄이 들었지만, 그나마 7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성읍에는 비를 내리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 비를 내리거나 내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알리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가뭄을 허락하시는 가운데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신 겁니다. 그래서 어떤 성읍에는 비를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성읍 사람들이 와서 마실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모습으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뭄으로 어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저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완악하고 강퍅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또 다른 징계를 말씀합니다. “내가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팥중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6절이 기근이고, 7절과 8절이 가뭄이라면 여기서는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을 하나님께서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곡식을 마르게 하시는가? 구체적인 방법이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다는 것이고, 또 팥중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깜부기는 곰팡이 병으로 농업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왜 곡식이 말랐는가? 하나님께서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팥중이로 많은 동산과 그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였다고 하는데, 메뚜기과의 곤충입니다. 그러니까 메뚜기 재앙으로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곡식을 마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과 관련해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메뚜기 재앙이 있었는데, 여덟 번째 재앙입니다. 출애굽기 10장에 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12절부터 보시면 이런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 땅 위에 네 손을 내밀어 메뚜기를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여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모든 채소를 먹게 하라 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이 되매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 들인지라 메뚜기가 애굽 온 땅에 이르러 그 사방에 내리매 그 피해가 심하니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었으며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온 땅에서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출10:12-15)
북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모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 열 가지 재앙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셨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깜부기 재앙으로 곡식이 마를 때 알아야 했습니다. 아니 처음에는 몰라도 거기서 좀 더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게 될 때, 다시 말해 메뚜기 재앙으로 곡식들을 마치 마른 것처럼 되었을 때 이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고,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 저들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10절에서는 전염병과 칼로 너희를 쳤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 전염병 보내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영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메뚜기 재앙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실 때 전염병으로도 애굽을 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 중에 전염병을 보내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여섯 번째 재앙인 돌림병에 대한 것인데, 출애굽기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면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에게 더하리니 심한 돌림병이 있을 것이며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출9:1-4) 특히 여기서 심한 돌림병이 애굽 가운데는 나타나지만, 이스라엘 가운데는 나타나지 않게 하신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말한 역사가 이미 출애굽 역사 가운데서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애굽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이고, 그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들의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본문은 애굽에게 내리신 재앙을 누가 받습니까? 출애굽 당시 구원의 대상이었던 북이스라엘이 받고 있습니다. 그 말은 무엇입니까? ‘애굽에게 한 것처럼’이라고 말할 때 지금 너희의 상태는 애굽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여 나오게 하신 것은 더 이상 애굽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구별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노예로 살면서 그들과 다를 바 없이 살던 그들을 구원하신 것은 더 이상 그들 아래에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이 아니라, 그들과는 다른 자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북이스라엘의 모습은 어떠한가? 애굽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출애굽 당시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그 밑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금송아지의 형상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애굽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이 지금 북이스라엘의 가장 종교 중심지인 벧엘에 세워져 100년 이상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렀던 겁니다. 애굽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1장과 2장의 내용으로 하자면 너희는 더욱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한 것처럼 전염병으로 너희는 치셨다는 것입니다.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다,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였다, 너희 진영이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다는 것은 다른 나라가 전쟁을 일으켜 비참하게 된 상황을 묘사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죽었는지 북이스라엘 진영이 악취로 코를 찌를 정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할 때 기근으로, 가뭄으로, 소위 자연재해와 같은 현상으로도 저들을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 주변에 있는 나라를 일으켜 하나님의 백성인 자들을 치게 하십니다. 사사기를 보시면 늘 이런 역사의 반복으로 있습니다. 왕정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그들이 자신의 역사를 주목한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나라를 일으켜 자신을 치신 것이 하나님의 징계인 것을 모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모를 정도로 무지하였습니다. 모를 정도로 하나님께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난 시간의 내용으로 하자면 종교적인 행사도 있었고 종교적인 열심도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 기쁨이 아니라 내 기쁨을 위해 하나님을 끌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제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11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인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결국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너희 가운데 있는 성읍을 무너뜨리겠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징계를 하시고, 또 징계를 하시고, 또 징계를 하셨지만,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를 완전히 진멸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중에 있는 성읍을 무너뜨리겠다.
특히 하나님인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10절에서 ‘애굽에서 한 것처럼’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너희가 애굽과 같은 뿐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 시대 때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한 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심으로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멸하셨습니다(창19:24-25). 바로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 죄가 지금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출애굽 시키고, 또 너희만을 알았다고 말씀하는 것은 너희를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지금 너희는 애굽과 같은 뿐만 아니라 이미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는 것입니다. 아니 너희는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죄의 심각성 때문에 징계하지 않을 수 없어서 아비처럼 너희는 징계하였지만 너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또 다시 징계하고, 또 징계하여 내가 너희를 향하여 오래 참고 있으며, 그렇게 하심으로 너희를 향한 긍휼을 나타내고 있지만,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소돔과 고모라를 완전히 멸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너희를 치실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는 주변 나라일 수도 있고, 아모스 1장 1절에서 말하고 있는 지진일 수도 있습니다. 다수는 11절의 내용이 지진으로 이해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변 나라이든, 지진이든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일 뿐이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몽둥이로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내는 도구일 뿐입니다(사10:5). 결국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6절 이하 11절까지 이미 되었던 일로서 말씀하고 있지만 단지 과거에 있었던 일로만 여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11절과 같은 역사는 아직까지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11절의 내용은 과거형으로 말씀하고 있지만 사실은 앞으로 될 일에 대한 확증과 같은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진멸한 것처럼 너희도 진멸하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너희가 수없이 많은 징계에도 불구하고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얼마나 완악하고 강퍅한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시고 보내셔도 그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으며, 재앙으로도 징계하시지만 그런 징계조차 무색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적인 행사가 없는 게 아닙니다. 종교적인 열심이 없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부르고, 종교적 열심도 있고, 종교적 행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데 있어서는 철저히 거부합니다.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지만 거부합니다. 실제로 아모스 7장에 가면 당시 벧엘의 제사장인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이렇게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암7:12-13) 거짓 제사장을 통하여 거짓 예배는 드리지만, 참된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늘 그래왔습니다. 그래서 징계를 내리십니다. 하지만 그런 징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은 아닌가 돌아봐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저들의 예배가 합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 부분적으로 합법적인 것도 불법이 섞이면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합법적인 것을 조금씩 변경하여 행한다 해도 그것은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무엇만이 합법적이냐?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물론 완전함으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온통 점과 흠, 얼룩 투성이인데, 누가 하나님 앞에 완전함으로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으신다면 그것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의 점과 흠, 얼룩을 괜찮다고 여기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주일은 어떻게 보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읽어드리면 이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말씀으로 읽으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출애굽기 20장이 창조를 근거로 말하고 있지만, 동일한 말씀을 하는 신명기 5장에서는 출애굽의 역사, 다시 말해 구원을 근거로 말씀합니다. 핵심은 안식일을 반드시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은 이 날을 다른 날과는 구별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다른 날, 다시 말해 엿새 동안에는 힘써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일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식일만큼은 나를 위한 날이 아니라 여호와의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합니까? 6일 동안 하던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하던 일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왜 멈추라고 하십니까? 그 날은 다른 일에 힘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내 아들과 딸, 당시로 하자면 종들, 심지어 가축과 손님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것은 무엇인가로 나아가기 전부터 우리는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주일이지만, 주의 날이요 하나님의 날이지만, 세상의 일을 가지고 와서 섞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것들로 섞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것 외에는 6일 동안의 삶과 얼마나 구별됩니까? 이 부분은 저 역시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여러분이 푯대로 삼아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의 완전함에 얼마나 더 가까워지고 있는가?
하나님께로 돌아선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벗어난 모든 부분을 말씀에 합당한 자리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더한 것이 있다면 더한 그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씀에서 무엇을 뺀 것이 있다면 뺀 것을 다시금 제 자리를 찾게 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면 내가 나를 본성적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참되게 나올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입니다. 북이스라엘 안에는 이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징계인지를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징계입니다. 그래서 한 번의 징계에 또 다른 징계를 더하시는 것이고, 또 돌아오지 않으면 또 다른 징계를 더하시는 것입니다. 징계에 징계를 더한다고 할 때 “하나님이 너무 잔인한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완악하고 강퍅한지를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돌이키지 않아서이지, 하나님이 억센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자신을 닮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열심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선한 아버지의 마음, 오로지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한다는 것은 기근이나 가뭄 등 여러 가지 재해를 통해 너희는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고 말씀하시고 난 뒤 다시금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까지 이런 일이 있었지만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하기까지 행한 것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반드시 행하겠다, 여러 번의 징계를 통해서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 형벌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칼빈은 두 가지 해석을 소개하는데, 하나는 역설적인 의미입니다. 앞선 내용이 하나님의 징계와 결국 심판으로 귀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조롱하듯 하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보다는 회개하기를 촉구하며 그들 앞에서 희망의 여지를 남겨 놓은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다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아모스 5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내가 너희에게 행한 징계를 통하여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 일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나를 만나기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너는 멸망 받아야 마땅하고, 하나님도 그의 자비의 문을 굳게 닫으신 것처럼 보이며, 사방이 절망으로 둘러싸인 것 같지만, 너는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13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장엄하게 찬양합니다.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 어떤 분은 산들은 보이는 것이고 바람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으로 설명합니다. 칼빈은 ‘바람’이라는 단어가 사람의 영혼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바람을 영혼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즉 산들을 지으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영혼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며, 나아가 자기의 뜻을 사람에게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뜻을 보이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나타내는가? 북이스라엘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말씀합니다. 밝아오는 아침을 어둡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자들에게 두려움을 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땅의 높은 데를 밟는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산들을 지으신 분이 높은 산들을 발로 밟을 수 있을 만큼 크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다 비유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인데,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밝히십니다.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 다스리기에 앞서 다스릴 수 있는 만물을 친히 창조하신 하나님, 하나님만이 모든 피조물이 있기 전에 스스로 계신 분이셨는데, 그분의 위엄과 능력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십니까?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라는 것이고, 돌이키지 않고 있는 그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 앞에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정해졌고, 그 사실을 알리시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가 있는 것처럼 돌이키지 않는 저들 가운데 돌이키게 될 자들을 염두 해 두시고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 시대로 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지막 날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전에 개인적인 종말, 즉 죽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도 하지만, 전인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 심판을 위하여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자신의 위엄과 능력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아무도 그분의 위엄과 능력을 보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는 말씀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 준비란 부패한 우리가 죄와 상관없이 살 수는 없지만, 회개함으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목적을 위해 징계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징계를 통하여 자녀답게 만드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우리를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도록 만들어 가야 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 아무리 애써도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해 질 수 없기 때문에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그 길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죄에 대한 징계 속에서 완전하신 하나님과 같이 완전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도록 우리는 더욱 말씀에 붙들어 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하여 지금도 말씀과 함께 징계의 도구들을 드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