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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인격출생과 인격중생의 비밀>의 줄거리: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태어남' '완전히 다시 태어남' '하늘로부터 태어남' 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와 관련하여 우리는 환골탈태나 변신을 생각합니다. 모두 뼈를 깎는 어려움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너무 간단하고 쉽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가장 과격한 변화를 초래합니다. 인격 출생과 중생의 비밀을 알아봅니다.
인격 출생과 인격 중생의 비밀
(요한복음 3:1~13)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인격 출생과 인격 중생의 비밀>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인격 출생과 인격 중생의 비밀”
인격은 어떻게 출생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출생한 인격이 다시 출생하는 중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우리는 사람의 몸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지를 압니다. 그런데 성인의 인격이 어떻게 출생하고 그 인격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본문을 보면 니고데모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절을 보면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지도자라 함은 곧 산헤드린공회원을 가리킵니다. 산헤드린공회는 70명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사회의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덕망 높은 선생의 위치에 있었던 니고데모조차 거듭남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니고데모에게 있어서 사람의 출생이란 엄마가 아기를 낳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은 육체가 아닌 인격입니다. 인격의 출생을 모르면 하나님 나라를 알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체코 출신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가 1915년에 독일어로 발표한 “변신”이라는 중편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불안한 꿈을 꾸다 깨어납니다. 그런데 일어나 보니 자신이 커다란 갑충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퀴벌레, 돈벌레, 지네 같이 껍질이 딱딱한 거대한 벌레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공은 아버지가 실직한 상태에서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갑충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만 그레고르는 더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가정의 경제가 궁핍해지기 시작하자 가족들은 갑충으로 변한 그레고르에게 적대감을 보이며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화가 나서 던진 사과에 맞아 생긴 상처가 악화되어 외롭게 죽어가게 됩니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사람이 갑충이 되는 과격한 변신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인격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 중 누구도 주인공을 이전의 인격과 동일하게 상대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족부양의 능력을 상실한 주인공이 가족들의 학대 속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모습은 현대인이 겪게 되는 부조리를 상징합니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람은 타인을 대할 때에 인격이 아닌 사회적 기능으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회적 기능이 아름답고 좋게 변하는 것을 가리켜 비유적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이란 사회적 기능이 나쁘게 변하는 “변신”도 아니며 좋게 변하는 “환골탈태”도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기존의 인격이 죽고 완전히 다른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은 “위로부터, 꼭대기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처음부터 다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사람의 몸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지를 압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인격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알아야 다시 태어나는 것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인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격 출생의 비밀은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전 설교에서 마음에 ‘나’라는 의식이 살아있는 상태가 인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을 빼놓고는 인격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인격이 어떻게 출생하고 움직이며 표현되는가를 알기 위해서 마음으로부터 시작해봅니다.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게 될 요한복음 17장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안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 즉 영은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하나님 크기의 공백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마음의 공백으로부터 나오는 움직임이 바로 인격의 시작입니다. 즉 인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공백에서는 채워지고자 하는 흡입력이 작용합니다. 마음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내가 가지면 마음을 채울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것들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선택과정이 주기도문 첫째 부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내용이 바로 마음 채움을 위하여 흡입력이 작동하며 하나님의 이름만을 선택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마음 채움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고 건강이나 장수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에서 좋게 여겨지는 대상을 선택하고 나면 실제로 그것을 얻고자 시도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게 됩니다. 또한 실제로 그것을 얻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움직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인격이 출생하는 과정입니다.
이처럼 인격은 마음 채움을 위하여 좋음의 대상을 선택하게 되고 그로부터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기 시작함으로써 출생하게 됩니다. 몸을 낳은 것은 부모님이지만 인격을 낳는 것은 마음 채움을 위하여 좋다고 선택한 대상입니다. 즉, 믿음의 대상이 인격을 살아 움직이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위로부터, 꼭대기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처음부터 다시”에 해당하는 거듭남이란 마음 채움의 대상으로 가장 좋은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 하나님을 갖고 싶은 마음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사람들은 마음 채움의 대상으로 세상의 것들을 선택합니다. 예를 들어 마음 채움의 대상으로 돈을 선택하였다면 돈을 얻기 위하여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돈으로부터 인격이 나타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 채움의 대상으로 자녀의 형통을 선택하였다면 자녀의 형통으로부터 모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게 되고 자녀로부터 태어난 인격으로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을 낳아주는 어머니는 바로 마음의 채움을 위하여 좋다고 여겨 선택한 대상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를 만나자마자 거듭남을 언급하십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올 때 궁금했던 것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다만 니고데모가 바랐던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메시아 왕국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전체가 가지고 있던 민족적 기대와 열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람을 가지고 있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하나님의 내적인 관계에 관심을 두었다면 좋았겠지만 니고데모의 관심은 메시아 왕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실지 궁금하여 찾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속이 아니고 겉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왔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하신 하나님 나라는 로마 식민지에서 독립하지 않아도, 재정상태가 나아지지 않아도, 건강상태가 나아지지 않아도 거듭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 천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니고데모의 관심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나타나서 로마로부터 독립이 이루어지고 정치적으로 타민족을 무찌르며 다윗의 전성기가 재현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나기만 하면 몸이 처한 상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더라도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아는 사람의 출생은 오직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는 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란츠 카프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상태가 바로 이러합니다. 몸은 갑충으로 바뀌었음에도 인격이 그대로입니다. 니고데모는 소설에서처럼 몸과 몸이 만나는 세상의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이란 이와는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이 아닌 속, 즉 몸이 아닌 인격이 다시 태어나야 함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니고데모와 같이 인격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기에 앞서 마음과 인격의 관계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영이며 마음은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격의 핵심 부분입니다. 마음은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하여 좋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선택된 가장 좋고 우선적인 것으로부터 인격은 출생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본문 13절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풀어보자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 중에서 예수님 이외는 하늘에 있어본 적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예수님만이 하늘에 있었던 적이 있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나 에녹은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지만 이 땅에 태어난 사람 중에서 하늘에 있었던 사람은 예수님 이외에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도 인간이셨기에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 채움을 위하여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인간들의 차이점입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천국은 마음이 가서 닿고 붙잡는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현실이란 마음이 닿아있는 사실입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세상에는 수많은 사실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실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가서 닿는 사실만이 현실이 됩니다. 채움을 기대하고 믿기 때문에 마음이 가서 닿게 됩니다. 이 땅에 사시면서도 마음은 하늘에 가서 닿고 계셨던 예수님께는 천국이 현실이었습니다. 천국도 사실이고 이 땅도 사실이지만 예수님께서 현실로 선택하셨던 것은 세상이 아닌 천국입니다. 마음 채움이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닿아 계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볼 때는 꼭대기로부터 태어난 인격으로 살고 계셨던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가장 쉽고 간단하지만 가장 과격한 변화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몸이 나쁜 상태로 변한 것이고, 환골탈태는 몸이 좋은 상태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변화는 아닐지라도 우리는 몸의 작은 변화를 기대하며 다이어트라도 하려고 하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거듭남은 인격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인격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으면 마음이 가서 닿는 사실을 바꿀 수 있습니다. 공백의 마음은 가서 닿는 대상으로부터 채움을 얻고자 합니다. 이 채움을 얻고자 하는 대상을 바꾸면 거듭남은 곧바로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이 가서 닿는 대상으로부터 인격은 출생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서 닿는 것은 좋아서 닿는 것이고 마음이 채워질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서 닿는 대상은 인격의 어머니이자 인격의 자궁입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자궁이 바뀌면 됩니다. 이제까지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인격을 품는 자궁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인격의 어머니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건강, 돈, 승진 등을 비롯한 좋다고 여겨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인격의 자궁이고 인격의 어머니였습니다. 마음이 세상 것들에 가서 닿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실제로 얻고자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고, 좋고 나쁨을 느끼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의지가 작용하면서 인격이 출생합니다.
마음에 좋다고 여기는 대상이 없으면 사람의 인격은 활성화될 수 없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격적 재료인 마음이라든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능력만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실제로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살아 움직이는 인격으로 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 채움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선택하여 붙잡고 닿게 되면 이제부터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며 인격이 활성화됩니다.
이러한 인격의 출생과정을 염두에 두면 13절의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서 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첫 번째로 해서 거듭나게 되는 사람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 당시에는 제자들도 거듭난 상태가 아니었기에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앞날을 내다보시며 거듭난 사람들 전체를 언급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기를 바라시면서 인격의 어머니이자 인격의 자궁으로 제시하신 것이 하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 세상 것들을 인격의 어머니이자 인격의 자궁으로 삼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몸의 오감을 통하여 세상을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마음을 붙임으로써 인격이 태어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인격은 모두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뀌어야 할 것은 마음 채움의 대상입니다. 인격의 재료가 되는 마음이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인격의 재료인 마음을 채우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게 하는 내용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대상으로 하늘을 제시하십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늘에 마음을 붙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대상들은 몸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기에 마음을 붙이는 것도 쉽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천국은 몸의 오감으로는 느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에 닿게 할 수 있을까요? 이에 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인격을 태어나게 하는 자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게 됩니다. 몸을 통해 인격의 자궁으로 세상을 접할 수 있었다면, 성령을 통해서는 인격이 출생하는 자궁으로 하늘과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 하늘이 실재함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늘의 실재를 믿게 됩니다. 하늘의 실재에 마음이 닿기를 원하여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성령이 오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닿도록 역사하실 것이고 하늘로부터 인격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꼭대기에 계신 하나님을 갖고 싶은 마음에 의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며 활성화되는 인격으로 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로 인해 학자들이 고민을 많이 합니다만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물은 세례 요한의 물세례 의미를 염두에 두면 됩니다. 물세례는 나의 몸이 물에 빠져 죽듯이 인격이 통째로 물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자각입니다. 이 자각이 있어야 인격의 중생 즉 거듭남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이 세상의 것들을 인격의 자궁으로 삼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의 삶을 경험할 수 없다면 죽어서도 천국에는 갈 수 없습니다.
물은 이 세상 것으로 마음을 채우겠다고 달라붙어서 세상을 현실로 느끼는 인격이 통째로 죽어야 한다는 자각입니다. 이 자각이 있으면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어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을 하면 성령이 오셔서 육체의 오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천국에 나의 마음이 가서 닿도록 해주십니다. 마음이 천국에 계신 하나님께 닿을 때 하나님을 가지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게 되고 그로부터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나타나 움직이며 이 땅을 살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삶이 거듭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꼭대기로부터 태어나야 합니다.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은 마음 채움을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대통령이라는 자궁으로부터 태어난 인격을 갖게 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사람은 부자라는 자궁으로부터 태어난 인격을 갖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높아지고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보다 가장 높은 꼭대기인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대통령이나 임금 정도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는 꼭대기로 마음이 닿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태어난 인격으로 거듭난 사람들로 살아갈 때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살을 5kg 빼는 일조차 쉽지 않기에 환골탈태가 어렵고 삶의 변신을 꾀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격이 거듭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나의 인격이 이 세상 것을 자궁으로 삼아 출생하였다는 것을 알면 거듭남을 바랄 수 있습니다. 내가 고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재벌가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어머니로 해서 태어난 인격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장 높고 가장 좋고 가장 많음이 실재인 천국이 바로 너희 집이라고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현실감을 바꾸어야 합니다. 마음이 접촉하는 대상을 천국에 계신 아버지로 바꿈으로써 완전히 다른 인격으로 태어나면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은 하나님 나라가 된다고 알려주십니다. 로마의 식민지하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질 수 있고, 형편이 어떻더라도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몸이라는 껍데기 속에 들어있는 인격의 중생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에는 쉬운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쉽지 않은 일들을 헤쳐나가며 마음의 만족을 찾으려는 우리가 온전히 죽어야 함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가장 쉽게 예수님 안에서 천국을 나의 인격의 자궁으로 삼고 꼭대기로부터 다시 태어난 인격으로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