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74-175문
고린도전서 11장 31절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71문에서 173문까지 성찬에 나오기 전 자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와 관련 있습니다. 171문이 직접적으로 이에 대하여 묻고 답한다면, 172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합당한 준비가 되었는지 의심하는 자가 성찬에 나올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이어 173문은 믿음을 고백하며 성찬에 나오길 바라는 자들에게 성찬이 금해질 수 있는가에 대하여 묻고 답합니다.
보통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합당한 준비가 되었는지 의심한다고 하면 성찬에 나아올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결코 성찬에 나아올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반면 스스로 믿음을 고백하고 성찬에 나오길 바란다고 해서 모두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좋지 않은 소문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 자들에게 성찬에 나아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치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찬에 나오기 전 어떻게 자신들을 준비해야 하는가 할 때 성경은 자신을 돌아보도록 가르칩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성찬에 나오기 전 자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다루고 난 뒤, 대요리문답은 성찬을 실행할 때 성찬을 받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과 성찬을 받은 후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에 대하여 묻고 답합니다. 그리고 성례와 관련된 마지막 내용으로 세례와 성찬의 일치와 차이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먼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74문입니다.
제174문 : 성찬 실행 때 성찬을 받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성찬이 실행되는 동안 성찬을 받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거룩한 모든 존중과 주의로 그 규례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레10:3, 히12:28, 시5:7, 고전11:17,26,27), 성실히 성례 요소들과 행위들을 준수하고(출24:8, 마26:28), 주의 몸을 조심스럽게 분별하고(고전11:29), 넘치는 애정으로 그의 죽으심과 고난을 묵상하고(눅22:19), 그로 인해 자신들을 분발시켜 자신들이 받은 은혜들을 [다음과 같이] 강건하게 단련시키는 것입니다(고전11:26, 10:3-5,11,14). 자신을 살핌으로(고전11:31), 죄를 슬퍼함으로(슥12:10);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진지하게 배고파하고 목말라함으로(계22:17), 믿음으로 그를 먹음으로(요6:35) 그의 충만함을 받음으로(요1:16), 그의 공로들을 의뢰함으로(빌3:9), 그의 사랑을 즐거워함으로(시63:4,5, 대하30:21), 그의 은혜를 감사함으로(시22:26);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렘50:5, 시50:5) 모든 성도들을 향한 사랑을 새롭게 함으로(행2:42) [단련시킵니다].
성찬이 실행되는 동안 성찬을 받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 첫 번째는 거룩한 모든 존중과 주의로 그 규례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는 떡을 먹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를 마실 때 존중함이 없고 주의함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례 자체는 아닐지라도 구약 시대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한 일이 있었는데, 불이 여호와 앞에 나와 그들을 삼켜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레10:1-2). 즉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존중하지도 않았고, 주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대요리문답이 인용하고 있는 레위기 10장 3절인데,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명하신 것을 통하여 자신의 거룩함과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존중하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신 그대로를 행하는 데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가볍게 여기고 자기 방식대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판을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면서 자신의 거룩함을,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던 겁니다. 결국 대요리문답이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예배의 요소로서 성례를 행할 때 경솔하거나 자기 생각대로 행할 것이 아니라, 거룩한 존중과 주의를 가지고 이루어져야 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대요리문답이 인용하고 나머지 구절들을 보면, 히브리서 12장 28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시편 5편 7절입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이런 점에서 성찬이 실행되는 동안 성찬을 받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거룩한 모든 존중과 주의로 주께서 제정하신 규례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7절은 이렇게 주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두 번째는 성실히 성례 요소들과 행위들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요소들과 행위들 가운데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미들을 생각하면서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를 들어 출애굽기 24장 8절에서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고 할 때 백성들이 모세가 행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약의 성례인 성찬에서 성찬이 실행되고 있는데도 성실하게 성례의 요소들을 주목하지 않고, 또 성례의 행위들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조금 전에 언급한 고린도전서 11장 27절의 말씀을 따라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일 뿐입니다. 당연히 그것 자체가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실히 성례 요소들과 행위들을 준수해야 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보스와 윌리암슨이 쓴 대요리문답 강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찬은 그 상징적 요소와 행위를 통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과 구원의 길이다. 성례가 우리 마음과 지성에 전달하고자 하는 완전한 의미를 수여받기 위해서는 그 규례의 모든 세부사항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성례는 그것 자체가 표현하는 진리를 믿음으로 이해하고 성령의 적용하심으로 우리 마음과 생활에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성례의 각 요소와 행위는 진리의 여러 국면들을 설명해 준다.”(J.G.보스 & G.I.윌리암슨의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강해 참고).
세 번째는 주의 몸을 조심스럽게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례 요소들과 행위들을 준수하면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 주의 몸을 분별해야 하는데, 떡을 먹으면서 떡으로만 이해한다면 혹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포도주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주의 몸을 분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먹는 것은 떡이요 마시는 것은 포도주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임을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먹고 마셔야 합니다.
네 번째는 넘치는 애정으로 그의 죽으심과 고난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주의 몸을 조심스럽게 분별할 때 우리는 거기서 그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왜 그가 고난을 받으셔야 했습니까? 왜 그가 고난을 받으시면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당하셔야 했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성찬이라고 할 때 우리는 성찬이 실행되는 동안 넘치는 애정으로 그의 죽으심과 고난을 묵상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그로 인해 자신들을 분발시켜 자신들이 받은 은혜들을 강건하게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 때 성경은 늘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하여 묵상한다면, 묵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로 인해 자신들을 분발시키되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들을 더욱 강건하게 단련시키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 성찬이 실행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는 것으로 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베푸신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어디로 이끌고자 하는지를 확인하고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다섯 번째와 관련해서 그 방법을 제시하는데, 가장 먼저 자신을 살핌으로 단련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고린도전서 11장 31절에 보면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라고 말씀합니다. 30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는데, 성찬 멸시의 결과 고린도 지역의 교회 안에는 약한 자가 생기고, 병든 자가 생기며, 그리하여 주 안에서 잠 자는 자, 다시 말해 죽는 자도 생겼다고 말씀합니다. 간단히 말해 성찬 멸시의 결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일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31절인데,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 다시 말해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찬에 앞두고도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하지만, 성찬을 실행 할 때도 우리 자신을 살피면서 성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받은 은혜들을 강건하게 단련시켜야 합니다.
자신을 살핀다고 할 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으로 살펴야 하는가? 자신의 죄를 슬퍼해야 합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가 해결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구별해야 할 내용이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었지만, 그 완성은 우리가 육신의 몸을 벗어버릴 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부패함을 지니고 있어서 늘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한다면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자신의 죄를 슬퍼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이유를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살필 때 무엇보다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슬퍼해야 합니다.
이렇게 죄를 슬퍼한다면 죄에서 돌아서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해야 합니다. 그럼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찬을 통해 표현하자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진지하게 배고파하고 목말라함으로, 믿음으로 그를 먹음으로 그의 충만함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의 공로들을 의뢰하는 것이고, 그의 사랑을 즐거워하는 것이고, 그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모든 성도들을 향한 사랑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들을 분발시켜 자신들이 받은 은혜들을 강건하게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75문입니다.
제175문 : 성찬을 받은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답 : 성찬을 받은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는 성찬 실행 중에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했으며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시28:7, 85:8, 고전11:17,30,31). 만일 그들이 다시 소생케 되고 위로를 갖게 되었다면, 그 이유로 하나님을 송축했는지(대하30:21-23,25,26, 행2:42,46,47), 소생과 위로가 지속되도록 간구했는지(시36:10, 아3:4, 대상29:18),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경성했는지(고전10:3-5,12), 자신들의 서원을 갚았는지(시50:14), 성찬에 자주 참여토록 스스로 독려했는지(고전11:25,26, 행2:42,46)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현재 유익을 갖지 못했다면, 자신들의 성찬 준비와 성찬 때 태도를 보다 더 정확하게 다시 살펴야 합니다(아5:1-6, 전5:1-6). 이 두 가지 점에 있어서 만일 그들이 하나님과 자신들의 양심에게 스스로 입증할 수 있다면, 적합한 때에 성찬의 열매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시123:1,2, 42:5,8, 43:3-5). 그러나 만일 그들이 성찬 준비나 성찬 때 태도에 있어서 실패했다면, 겸손해져야 하고(대하30:18,19, 사1:16,18), 향후 보다 더 신중하고 성실하게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고후7:11, 대상15:12-14).
174문이 성찬 실행 때 성찬을 받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에 대한 것이라면 175문은 성찬을 받은 이후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에 대한 것입니다. 성찬을 받은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의 의무, 첫 번째는 성찬 실행 중에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했으며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진진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시면, 고린도전서 11장 3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앞에서도 말했지만, 성찬을 앞두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대요리문답 171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에 대해서, 자신들의 죄와 결핍에 대해서, 자신들의 성찬에 관한 지식과 믿음, 회개의 진실과 분량에 대해서 등으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찬을 실행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대요리문답 174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찬이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보여준다고 할 때 죄를 슬퍼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진지하게 배고파하고 목말라하고 있는지, 이런 측면에서 믿음으로 그를 먹고 마시는지, 나아가 그의 충만함을 받고 있는지 등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살핌은 성찬을 받은 이후로도 계속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대요리문답의 이어지는 내용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찬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데 각각의 경우 자기 자신을 살핌으로 결국 성찬을 통해 유익함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요리문답은 오늘 본문의 내용과 함께 고린도전서 11장 17절도 인용하는데,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로움이 된다고 하는데, 공적인 모임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성찬을 말할 때 성찬이 말씀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모습으로 있게 되고, 그 결과 성찬 멸시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교회 안에 일어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공적 모임을 통한 유익이 아닌 해로움을 말합니까? 그리고 이후 성찬의 유익이 아니라 해가 된 결과들을 말합니까? 해가 되었을지라도 그것을 통해 교훈과 책망을 받아 유익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1장 32절에 보면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도 말씀합니다. 징계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고, 이런 심판이 있는 것은 결국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심판이 마지막 심판에서 피하도록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받은 이후라 할지라도 우리는 자신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유익이 되었는지, 아니면 유익이 되지 않았는지를 살핌으로 결국 유익되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먼저 대요리문답은, 만일 그들이 다시 소생케 되고 위로를 갇게 되었다면, 그 이유로 하나님을 송축했는지, 소생과 위로가 지속되도록 간구했는지,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경성했는지, 자신들의 서원을 갚았는지, 성찬에 자주 참여토록 스스로 독려했는지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찬의 유익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소생케 되고, 위로를 갇게 되는 데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래는 허물과 죄로 죽었지만 그런 우리를 다시금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죄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부패함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영적으로 쇠약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해지기도 하고, 사랑이 식어지기도 하며, 소망이 흐려지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이라는 방편을 사용하셔서 믿음을 강하게 하십니다. 사랑도 회복시키십니다. 소망 역시 견고하게 하십니다. 말씀이라는 방편과 함께 성찬을 통해서도 그와 같은 일을 합니다. 왜냐하면 성찬은 단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그분과 교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성찬은 죄의 잔재로 말미암아 넘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를 다시금 소생케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위로인데,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는 늘 넘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런 우리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말씀과 함께 성찬을 제정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으며, 왜 그리스도가 죽으셔야 했는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통해 다시금 소생케 되고 위로를 갇게 되었다면, 다음의 내용들을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그 이유로 하나님을 송축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역대하 30장 21절에서 23절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즐거워하며 칠 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날마다 여호와를 칭송하며 큰 소리 나는 악기를 울려 여호와를 찬양하였으며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능숙한 모든 레위 사람들을 위로하였더라 이와 같이 절기 칠 일 동안에 무리가 먹으며 화목제를 드리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였더라 온 회중이 다시 칠 일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이에 또 칠 일을 즐겁게 지켰더라” 같은 장 5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지킨 유월절에 대하여 “...이는 기록한 규례대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음이더라”는 말씀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다가 히스기야 왕 시대 때 말씀에 합당한 유월절, 그리고 무교절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인용 구절은 이러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한 내용인데, 성찬이 말씀에 합당하게 행해졌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송축해야 합니다.
둘째, 소생과 위로가 지속되도록 간구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안에는 죄의 잔재, 부패성이 있어서 늘 넘어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통하여 다시금 소생케 되고 위로를 갇게 되었다면, 그러한 소생과 위로가 지속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역대상 29장 18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주의 백성의 심중에 영원히 두어 생각하게 하시고 그 마음을 준비하여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오며” 다윗 자신은 성전을 건축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다윗은 같은 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그리고 인용 구절로 기도하기를 이러한 마음을 주의 백성의 심중에 영원히 두어 생각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겁니다. 성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러한 은혜가 지속되도록 늘 간구해야 합니다.
셋째,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경성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넘어지기가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는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도 합니다. 인용 구절인 이 말씀 앞에는 구약의 실제적인 예를 말하기도 하는데, 3절 이하 5절까지만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특히 3절과 4절은 성찬의 의미로 표현하는데, 성찬에 참여한 자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경성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자신들의 서원을 갚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성찬의 유익으로 다시금 소생케 된다고 할 때 거기에는 죄에 대해서는 슬퍼하지만, 의를 따르고자 하는 다짐 또한 있게 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말씀하신 것처럼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짐에 대하여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록자는 시편 50편 14절에서 이렇게 권합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하나님께 감사하여 예배하는 자라면 예배에 합당한 서원은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서원, 맹세, 다짐에 대하여 갚으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성찬에 자주 참여토록 스스로 독려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성찬은 세례처럼 한번만 참여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린도전서 11장 25절과 26절에 의하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즉 한번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할 때마다 자신을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여 그가 오실 때까지 늘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패함으로 넘어지기 쉽지만, 말씀과 함께 성찬을 통해 일으켜 세우길 원하신다고 할 때,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유익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 우리는 성찬에 자주 참여토록 스스로 독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을 통해 늘 유익만 있느냐? 고린도전서 10장이나 11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유익함이 아니라 오히려 해로움으로 있을 때는 없느냐? 대요리문답은 그런 경우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설명하기를, 그러나 만일 그들이 현재 유익을 갖지 못했다면, 자신들의 성찬 준비와 성찬 때 태도를 보다 더 정확하게 다시 살펴야 한다고도 가르칩니다. 즉 성찬에 참여했지만 성찬을 통해 현재 유익을 갖지 못했다면, 왜 유익을 받지 못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들의 성찬 준비와 성찬 때 태도를 보다 더 정확하게 다시 살펴야 하는데, 대요리문답 171문과 174문을 통해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성찬에 나오기 전에 어떻게 자신들을 준비했는지, 그리고 성찬이 실행되는 동안 어떻게 성찬에 참여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요리문답은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두 가지 점에 있어서 만일 그들이 하나님과 자신들의 양심에게 스스로 입증할 수 있다면, 적합한 때에 성찬의 열매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성찬에 나오기 전에 어떻게 자신들을 준비했는지, 그리고 성찬이 실행되는 동안 어떻게 성찬에 참여했는지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자신들 양심에 있어서 거리낌이 없다면 적합한 때에 성찬의 열매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찬에 앞서, 그리고 성찬이 시행되는 동안 합당하게 준비하고 참여했다 할지라도 곧바로 유익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것은 값없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물을 자신이 판단하시는 때에 주십니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받기 싫은데 억지로 받게 하시는 게 아니라, 주고자 하시는 때에 받고자 하는 마음이 되게 하셔서 구하여 받게 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믿음 안에서 늘 주로부터 오는 모든 은혜의 선물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성찬 준비나 성찬 때 태도에 있어서 실패했다면, 겸손해져야 하고 향후 보다 더 신중하고 성실하게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부분이 우리와 더욱 관련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성찬 준비나 성찬 때의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나 우리의 양심에 있어서 합당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경우는 많은 부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성찬을 통해 열매보다는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온 성찬 멸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오늘날 없다 할지라도 더욱 주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대요리문답이 잘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더욱 겸손해져야 하고, 나아가 향후 보다 더 신중하고 성실하게 참여하도록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요리문답의 이후 내용처럼 성찬의 열매를 주시도록 주께 기도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