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문
나의 정원으로 들어온 말 ‘난민’
영화 <더 스위머스>를 보고
2026.4. 향기 영란
‘난민’이라는 말을 하나의 덩어리, 단체, 멀리 떨어져서 볼 때 나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들’이라는 단체로 바라보는 시선은 위험하다. 가령 우리 반 아이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면 시끄럽고 말 안 듣는 아이들이 된다. 하나의 단체로 보는 시선을 장착하면 이렇게 잔소리를 하게 된다.
“선생님이 기껏 준비한 미술 활동을 그렇게 대충대충 하다니, 자기 작품에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이라고는 없구나!”
“선생님이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시끄럽게 떠들다니, 너희는 대체 커서 뭐가 되겠니?”
이 말은 인과관계도 맞지 않고, 아이들의 개별성을 완전히 무시한 말이다. 나는 물론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아이들 중에는 미술 작품에 완전히 몰입하여 고운 색으로 완성해 내는 아이들도 있고, 떠드는 친구에게 눈치 좀 챙기라고 조용히 타이르는 아이들도 있다. 나는 17명의 아이들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결을 다 읽을 줄 안다. 내 곁에 있고, 내 눈 안에 들어오니까.
지금껏 ‘난민’이라는 말은 나의 대문으로 들어오지 못한 말이었다.
입장불가합니다. 저는 저 자신의 일, 제 주변의 사람들에 관한 일만으로도 바쁘고 남는 여력이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돌아가세요.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에게 망명을 받아들이고 지원을 해야 한다는 어느 배우의 소신 발언 때문에 구설이 있었다. 그 때에도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했던 난민 편에서 생각하지 않았고, 그 배우를 몰아가는 사회적 분위기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 배우의 팬심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정말 팬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배우가 자신의 이미지에 흠집을 감수하고서도 전하려는 메시지를 이해하고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또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던진, 보트를 타고 가다 해안가에서 발견된 3살 난 시리아의 아기 알란 쿠르디의 사진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시리아의 주변국,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난민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은 이야기들을 들은 정도일 것이다. 내게 난민은 장기하와 얼굴들이 부른 그저 <풍문으로만 들었소>의 제목 수준이렀다.
그대 없는 나날들이 그 얼마나 외로웠나
멀리 있는 그대 생각 이 밤 따라 길어지네
하얀 얼굴 그리울 때 내 마음에 그려보며
우리 다시 만날 날을 손꼽으며 기다렸네
<더 스위머스> 이 영화는 난민이라는 하나의 불특정 사람들의 집합체가 아닌, 그 중 사라와 유스라의 자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삶이다. 난민이라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할 분위기의 수식어를 떼어내고 나면 어떤 사람이든 주인공이 될 수 있고, 그 주인공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시작했다가 중간에서 멈추었다. 시리아 내전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고 싶었다.(실은 잘 몰라도 영화를 보고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뿌리를 찾아 더듬어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다.) 짧은 지식뿐인 내가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시리아 주변에는 튀르키예,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 이스라엘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동서양의 가교 역할의 위치에 있고, 이스라엘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메카가 동시에 있는 곳이다. 시리아에는 이슬람 수니파, 이슬람 시아파의 분파인 알라위파, 그리스도교 등의 민족들이 살고 있는데, 수니파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농업이나 저소득층에 종사하고 소수인 알라위파가 권력의 중심에 있어 석유, 군사, 행정과 같은 주요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은 1920년부터 1946년까지 시리아를 식민 지배했던 프랑스의 책임도 있다. 단순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들이 2011년부터 시작되었던 아랍의 봄- 민주화 열기를 타고 시리아에서도 대규모 시위와 반정부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이슬람 극단주의, 반군에서의 분열, 주변 국가와 강대국들의 개입으로 여러 세력의 충돌로 상황은 양자 대결이 아닌, 다자 대결로 더 복잡해지게 되었다. 현재까지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60여만명 이상, 국내 난민 670여 만명, 해외 난민 660여 만명이다. (출처: 나무위키)
사라와 유스라는 자매이지만 성격은 많이 다르다. 딸 둘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평가는 정확하다. 언니인 사라는 고집이 있고 리더 타입이며, 유스라는 끈기와 강인함이 있으며 절제력이 강하다. 동생은 이미 전국 단위 수영대회에서 기록을 갈아치우며 장래가 촉망받는 선수이다.
시리아 아사드정권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반정부 시위는 더 격렬해지고 상황은 악화되면서 미래는커녕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한 상황이 되고, 사라는 사촌과 유스라와 함께 독일로 탈출할 것을 계획한다. 그렇게 그들은 난민이 된다.
오랜 역사를 통해 볼 때, 전쟁은 필연이 아닌 권력자의 정치 행위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전쟁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참혹하게 만드는지 충분히 학습하였고, 우리의 짧지 않은 생을 통해서도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조금만 선을 더 넘으면 그에 못지 않은 상태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어떤 권력자를 두느냐에 따라 그 나라 국민들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 사례는 지금 이 시간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의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실랄함은 튀르키예를 거쳐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 닿는 장면이다. 난민들의 절박한 상황을 이용하여 브로커들은 돈을 갈취하고 7인승 보트에 20여명이 넘는 다 망가진 보트를 태워 보낸다. 사선을 넘고 넘어 물이 새는 보트에서 인원을 줄이기 위해 세 명이 바다에 뛰어들어 세 시간 넘어 수영을 한 끝에 구사일생으로 섬을 눈앞에 두지만, 그리스 경찰은 구조를 거부한다. 물을 좀 달라는 구호 요청에도 섬 사람들은 차갑게 거절한다. 이것은 단지 그들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같은 배를 타고 온 시간, 육지에 닿아서도 여전히 냉혹한 현실에서 함께 한 사람들은 동지애로 뭉친다. 사라와 유스라는 자신이 살아남은 것이 행운이라기 보다는 갈매기가 자신들을 데리고 왔다는 생각을 한다. 보이지 않는 힘, 그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삶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를 확인한다.
메르켈 총리의 정책으로 난민들의 망명과 정착을 도와주는 나라 독일에 도착한다. 수영에 대한 열망으로 유스라는 수영클럽을 찾아 수영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시리아 대표로 출전하기를 꿈꾸었으나 지금 모국은 나라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 난민 대표로 2016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한다.
유스라는 끊임없는 자기 단련과 훈련으로 접영의 최강자 자리를 놓지 않고 실력으로 증명하며 그 유명세를 난민들을 위해 헌신한다. 언니 사라의 다른 선택도 충분히 설득되었다. 그녀는 레스보스 섬으로 갈 때 바다 위에서 죽음에 맞닿았던 시간과 먹을 것, 입을 것 없이 천대받고 다녔던 시간이 자신의 인생을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고 했다. 사라는 지금 현재에도 난민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으며, 2018년 레스보스에서 난민들을 돕다가 그리스 당국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국제 엠네스티에서는 그녀의 구명운동을 위해 힘쓰고 있다고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여서 줄거리의 탄탄함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수영을 취미로 둔 사람은 물 속에서의 장면, 물소리, 수영 자세 등에서도 느껴지는 질감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무엇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난민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만큼 영화의 힘은 크다. 또한 민주적이고 능력 있는 지도자, 우수한 문화, 국민들을 살피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둔 우리나라가 한없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권력자의 수준과 그 나라 국민성의 높이는 같다. 정치에 무심해서도 안됨을 시간이 갈수록 확인하고 있다.
좋은 영화를 한 편 보는 일은 좋은 책을 한 권 읽는 것에 버금가는 일이다. 2시간을 할애하는 물리적인 시간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주변의 이야기를 찾아보는 일, 또 이야기가 내게 머무르는 시간이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강제 시청하는 일이 더 없이 훌륭한 방법이다. 뭐든지 강제가 조금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