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득행(得行)이고, 자는 도경(道卿)이며, 판중추부사를 지낸 치정공(致政公)의 셋째 아들이다. 치정공은 네 분의 왕을 두루 섬기며 청의(淸議)를 잘 지녀 명예와 덕이 이지러지지 않았고, 작고한 뒤 2, 3십 년 동안 영조 임금은 말이 치정공에 미치면 칭찬하여 이르기를 “충신이다.”라고 하였고, 누차 윤음에 드러냈다. 이것은 진실로 치정공이 당쟁의 화(禍)를 뛰어넘고 왕실에 마음을 두어서 성군(聖君)께 지우(知遇)를 받은 까닭이며 그 출처와 행동에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도운 것이 실로 많았다고 한다.
공은 재주와 사려가 민첩하고 통달하였다. 공은 16세 때 감시(監試)에 합격하여 현달한 지위를 조만간에 취할 수 있었으나 끝내 접질려 넘어졌다.
을미년(1715, 숙종41)에 비로소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임인년(1722, 경종2)에 장릉 참봉(章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에 의금부 도사에 올랐다가 동몽교관으로 바뀌었다.
을사년(1725, 영조1)에 국장 감조관(國葬監造官)으로 수고했기 때문에 6품에 올랐다. 당시에 당쟁이 치성한 탓에 공이 치정공을 서쪽 요새의 적소(謫所)에서 모시게 되었다.
정미년(1727)에 치정공이 유배 중에 상백(常伯)에 기용되고, 공도 사옹원 주부에 제수되었다. 이때부터 감찰, 사복시 주부, 종부시 주부, 공조 좌랑으로 옮겼다.
기유년(1729)에 용인 현령(龍仁縣令)에 제수되었다.
경술년(1730)에 병이 들었음을 고하고 돌아왔다. 치정공의 상을 당하였다.
신해년(1731)에 철산(鐵山)으로 귀양 갔다. 이에 앞서 심성연(沈成衍)이 공경(公卿)의 손자로서 하는 짓이 매우 패악스럽고 또한 미쳐서 이성을 잃었으므로, 공이 그를 배척하여 절교하였다. 무신년(1728) 가을에 갑자기 상변하여 평소 원망을 품었던 자들을 끌어댔는데, 공의 이름도 그 안에 들었다. 심성연이 곧 무고임을 자복하여 상이 그의 공초를 불태울 것을 명하여 공의 직임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요직에 있는 자가 앞잡이들을 사주하여 없는 일을 지어내게 하였는데, 비록 엄한 견책을 받더라도 상이 공의 억울함을 통촉하고 분부하기를,
“심단(沈檀)의 아들에게 어찌 의심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하고, 양이(量移)할 것을 명하였으며, 을묘년(1735)에 석방하고 이어서 서용(敍用)하라는 문서를 내렸다. 이후로 공은 병을 핑계 대고 문을 닫고 세상일을 묻지 않으며 전원(田園)에서 한가롭게 지낸 것이 10여 년이었다. 조정의 의론은 공의 재능을 아까워하여 공을 다시 등용하려 하였으나 공이 달가워하지 않았다.
공은 병인년(1746) 7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숙종 임술년(1682, 숙종8)에 태어났으니, 향년 65세이다. 과천(果川) 별왕리(別旺里) 신좌(申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선영(先塋)이다.
공이 용인을 다스릴 적에 조세(租稅) 외에 강제로 징수하는 명목을 바로잡으니, 백성이 1년에 내야 하는 조세 중에 감면된 것이 6분의 5나 되었고, 관아에서 쓰는 것은 모두 가격을 상의하여 거래하고 그것을 정식으로 만들고 글로 써서 기록하니, 백성들이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만대에 혜택을 주셨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녹봉을 덜어 따로 저장하고 그것을 ‘보민고(保民庫)’라 명명하며 염산(斂散)으로 이익을 취하여 국가의 뜻밖의 수요에 응대하였다. 무릇 역(役)이 있어도 용인의 백성들은 알지 못하였으며, 쇠로 만든 비석을 세워 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공의 재능이 어찌 다만 백 리를 다스리는 정도에 그치겠는가. 공은 깊은 식견과 장구한 사려가 있어서 수를 나누거나 사물의 이치를 밝힐 때 계산할 것이 있으면 비록 혹 수억만에 이르기까지 산가지를 펼치거나 손가락을 굽히고 계산하지 않아도 털끝만큼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무릇 국조(國朝)의 전장(典章)의 연혁, 전곡(錢穀)과 갑병(甲兵), 산천(山川)의 이정(里程), 국경의 방어가 흉중에 벌여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이 늘 말하기를,
“만약 국가의 융성을 도우려 한다면, 관서(官署)는 반드시 한가한 자리를 제거하고 의정부의 서사(署事)를 복구해야 하고, 군대는 반드시 오위(五衛)를 복구하고 항오(行伍)를 뽑는 제도를 설치해야 하며, 과거 제도를 중지하고 현량과(賢良科)를 행하고, 겸병(兼幷)을 혁파하고 한전법(限田法)을 써야 한다. 이어서 또한 10년마다 한 번 양전(量田)하고 장적(帳籍 호적 대장)을 분명하게 하여 비여족당(比閭族黨)의 제도를 행하며, 조적법(糶糴法)을 중지하고 주자(朱子)의 사창법(社倉法)을 설치한다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 꼴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공이 경제에 관하여 온축한 것이다.
무신년(1728, 영조4) 봄에 공이 약산(藥山) 오공 광운(吳公光運)을 보고 말하기를,
“최 상국(崔相國)이 상변한 뒤에 조정이 진정시키기 위하여 힘쓰며 변화에 응하여 관대하게 하고 있으니, 우리 부자(父子)가 이제 죽을 자리를 얻었다.”
하자, 오공이 말하기를,
“저의 뜻도 그러합니다.”
하여, 이에 서로 마주하고 눈물을 닦았다. 다음 날 오공이 등대(登對)하여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궁궐 호위를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니, 무신년의 공로는 실로 오공이 으뜸이나, 공의 마음이 곧 오공의 마음이었다. 이것은 공이 충의(忠義)를 바친 공로이다.
치정공의 연세가 80세를 넘자, 공의 형제 또한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었으나 밤낮으로 곁에서 모셨다. 이를테면 이불을 밤에 깔고 아침에 개는 것을 반드시 몸소 부지런히 하고 시중드는 노비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지 않았다. 재산을 나눌 때에는 비옥한 토지를 골라 종가에 돌려주고서 후사를 세워 제사를 받들기를 기다렸으며, 나머지도 형제자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척박한 토지를 갖는 데 그쳤다. 이 또한 공이 집안에서 행한 것 중에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이다.
심씨(沈氏)는 본래 청송(靑松)의 명망 있는 집안이다. 시조이자 고려를 섬겨 위위시 승(衛尉寺丞)을 지낸 이는 홍부(洪孚)이다. 3대를 내려와 시중(侍中)을 지내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진 이는 덕부(德符)이다. 조선에 들어와 세종 임금의 장인이 되었으며 영의정에 오르고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안효공(安孝公)인 이는 온(溫)이다. 이로부터 경상(卿相)이 서로 이어졌다.
증조는 평시서 영(平市署令)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증직된 휘 서(諝)이다. 조부는 영의정에 증직된 휘 광면(光沔)이다. 아버지는 곧 치정공인 휘 단(檀)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직된 광주 이씨(廣州李氏)로, 별검(別檢)을 지낸 이윤원(李允元)의 따님이자 한음(漢陰) 선생 이덕형(李德馨)의 현손이다.
공은 좌참찬 유재(游齋) 이공 현석(李公玄錫)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은 온순하고 검소하며 시부모를 섬김에 효성스러웠다. 부인은 기유년(1729) 2월 23일에 용인 관아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처음에는 용인에 장사 지냈다가 공의 묘소로 옮겨 합장하였다. 부인의 딸 한 명은 정언 임선(任珗)에게 시집갔다. 계배(繼配)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사인(士人) 유한명(柳漢明)의 딸로, 외아들은 규(逵)이다. 영조 임금께서 치정공을 생각하여 “그의 손자에게 관직을 주라.” 했는데, 규가 그 손자이며, 군수가 되었다. 사위 한 명은 남우로(南羽老)이다.
임선의 양아들은 임희존(任希存)이다. 남우로의 양아들은 남이정(南履正)이다.
군수군(郡守君 심규(沈逵))이 일찍이 나에게 글을 물었는데, 명(銘)을 짓는 일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약산(藥山 오광운)의 서론(緖論)에 익숙한 자이고, 약산은 사람을 가볍게 허여하지 않았는데, 유독 말하기를,
“당대에 더불어 의논할 만한 자는 오직 심도경(沈道卿)이다.”
하여, 나는 이로써 공을 일찍 알게 되었다. 지금 행장을 살펴보니, 전에 들었던 것과 딱 맞기에 드디어 즐겁게 명을 짓는다. 사(辭)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가 재상이었으니 / 父爲宰相
겁운이라 말할 수 없고 / 不可謂劫運
자신이 민사를 다스렸으니 / 身莅民社
곤액을 당한 것만은 아니었네 / 不全爲阨困
그러나 겁운과 곤액을 / 而劫與阨
공이 참으로 당했으니 / 公實有之
하늘은 무슨 까닭으로 / 天曷故焉
재능은 주고 시운은 주지 않았는가 / 與其材而不與其時
[주-D001] 치정공(致政公) : 심단(沈檀, 1645~1730)으로,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여(德輿), 호는 약현(藥峴)ㆍ추우당(追尤堂)이다.[주-D002] 공이 …… 되었다 : 이때 심단은 삭주(朔州)에 유배되었다.[주-D003] 치정공이 …… 기용되고 : 심단은 1727년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상백은 주(周)나라 때 임금의 옆에서 민사(民事)를 관리하던 대신의 관직 이름인데, 뒤에는 시중(侍中)의 별칭으로 쓰이게 되었다.[주-D004] 심성연(沈成衍) : 1704~1728. 본관은 청송, 자는 평오(平五)이다. 승지 심중량(沈仲良)의 손자이다.[주-D005] 서사(署事) : 의정부가 육조(六曹)의 공사를 총괄하여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육조가 각기 소관 사무를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부에서 이를 협의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아서 육조에 돌려보내 실시하였다.[주-D006] 비여족당(比閭族黨)의 제도 : 향리(鄕里)의 이웃끼리 결속하여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돕도록 한 제도를 가리킨다. 《주례(周禮)》 〈지관사도(地官司徒)〉에 “5가(家)가 비(比)가 되는데 서로 보호해 주도록 하고, 5비가 여(閭)가 되는데 서로 받아 주도록 하며, 4여가 족(族)이 되는데 서로 장사를 지내 주도록 하고, 5족이 당(黨)이 되는데 서로 구원해 주도록 한다.” 하였다.[주-D007] 조적법(糶糴法) : 환곡(還穀)을 방출하고 수납하는 모든 사항을 규정한 법을 말한다. 즉 봄에 백성들에게 나라 곡식을 꾸어 주는 것을 조(糶)라 하고, 가을에 백성에게서 봄에 꾸어 주었던 곡식에 10분의 1의 이자를 덧붙여 거두어들이는 것을 적(糴)이라 한다.[주-D008] 주자(朱子)의 사창법(社倉法) : 사창(社倉)은 기근이 들었을 때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설립한 곡식 저장 시설로, 주희(朱熹)가 1171년 건녕부(建寧府) 숭안현(崇安縣) 오부리(五夫里)에 설립하였다. 원곡(元穀)을 민간에 대여하고 가을 추수 이후에 이자와 함께 원곡을 갚도록 한 제도인데, 1181년 주희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사창법을 실시할 것을 선포하였다. 《晦庵集 卷13 辛丑延和奏箚, 卷77 建寧府崇安縣五夫社倉記》[주-D009] 오공 광운(吳公光運) : 오광운(1689~1745)으로,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영백(永伯), 호는 약산, 시호는 충장(忠章)이다.[주-D010] 최 …… 뒤 : 최규서(崔奎瑞, 1650~1735)가 상변한 일을 말한다. 최규서는 영의정을 지낸 뒤에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를 받고 돌아갔는데, 1728년 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날 때, 용인에 있으면서 정보를 입수하고는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조정으로 달려와 알렸다.[주-D011] 재산을 …… 기다렸으며 : 심단의 큰아들인 심득천(沈得天)이 승문원 정자를 지내고 요절하였는데, 이때까지 후사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조치한 것으로 보인다. 《星湖全集 卷63 輔國判中樞府事兼吏曹判書致仕奉朝賀藥峯沈公墓誌銘》[주-D012] 자신이 민사를 다스렸으니 : 심득행이 용인 현령을 지낸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