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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참판(吏曹參判) 목공(睦公)이 만력(萬曆) 계사년(1593, 선조26) 여름에 별세하고 18년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증직되었으니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6년 뒤에 공의 막내아들 대흠(大欽)이 익사 공신(翼社功臣)에 들었기 때문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으며 사천군(泗川君)에 봉해졌다. 셋째 아들 장흠(長欽)이 익사 원종공신(翼社原從功臣) 1등에 들었기 때문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부원군(府院君)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공의 아버지의 호는 현헌(玄軒), 휘(諱)는 세칭(世稱)이다. 공이 귀해졌으므로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조씨(趙氏)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증직되었는데,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휘 온(溫)의 4대손이며 친정아버지는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 휘 격(激)이다. 정덕(正德) 을해년(1515, 중종10) 11월 19일에 공을 낳았다.
아, 기묘년(1519)년 이후에 사림 중에서 현헌처럼 지조를 바꾸지 않은 사람을 볼 수 없으니 현헌은 실로 사문(斯文) 김식(金湜)의 표제(表弟 내종 사촌 동생)로 기묘 명류(己卯名流)이다. 현헌이 이미 덕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으니 마땅히 후손들이 창성할 것이다. 공은 평소 중망(重望)을 받아 지위는 아경(亞卿)에 이르렀고 성조(聖朝)에서 석명(錫命)하여 두 아들로 말미암아 더욱 높아졌으니 하늘이 선한 사람을 돕는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다.
목씨의 선대는 영남 사천현(泗川縣)에서 나왔다. 휘 창덕(昌德)은 통례원(通禮院)의 지후(祗侯)로 고려 시대에 현달했다. 5세 휘 진공(進恭)은 호조 참판으로 국초의 명신(名臣)이다. 그의 아들 휘 보남(寶男)은 서천 군수(舒川郡守)를 지냈으며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휘 철성(哲成)은 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을 지냈는데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조부 휘 희안(希顏)은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으니 모두 공 때문에 추은(推恩)된 것이다.
공의 휘는 첨(詹), 자는 사가(思可)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아름다웠으므로 어려서부터 출입할 때면 사람들이 반드시 눈여겨보았다. 본래 병이 많아 과거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유독 고서(古書)를 좋아했는데 《서경》을 더욱 잘 알았다. 과문(科文)을 지음에 화려함을 숭상하지 않았다.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1) 증광시(增廣試)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선발되어 승문원에 들어갔다. 기유년(1549)에 천거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가 대교(待敎), 봉교(奉敎)로 옮겼다. 예조좌랑 겸 기사관(禮曹佐郞兼記事官)으로 옮겼다. 경술년(1550)에 병조로 옮겼다. 신해년(1551)에 현헌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계축년(1553)에 상기를 마치고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기미년(1559)까지 7년을 오랫동안 조정의 반열에 있으면서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校理), 부응교(副應敎), 지평(持平), 장령(掌令), 헌납(獻納), 사간(司諫), 의정부 검상(檢詳), 사인(舍人), 보덕(輔德)을 역임하였고 대간(臺諫)에서 체직되어 내자시(内資寺)와 종부시(宗簿寺)의 첨정(僉正)에 임명되었다. 병진년(1556)에 부교리로서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병조의 낭관으로 들어가서부터 사헌부와 사간원에 이르기까지 가장 오래 있었다. 강관(講官)이 되어서는 갑절이나 더 있었는데, 등대(登對)할 때마다 반드시 정심(正心), 과욕(寡慾) 등의 격언(格言)을 들어서 권강(勸講)의 제일의(第一義)로 삼았다. 명종께서 매번 경청하면서 칭찬하고 장려하셨다. 경신년(1560, 명종15)에 다시 부응교, 장령에 임명되었다가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로 승진하였다. 신유년(1561)에 판교에서 등급을 뛰어넘어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임술년(1562)에 병으로 한 해를 넘기면서 산질(散秩 실직이 없는 벼슬)에 몸담고 있었다. 당시의 권귀(權貴)가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공이 자신을 따르지 않음을 한스럽게 여겼으나 초연히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계해년(1563) 가을과 겨울에 병조와 이조의 참의를 지냈다. 갑자년(1564)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을축년(1565)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거쳐서 호서(湖西) 관찰사로 나갔다. 윤원형(尹元衡)이 사적인 일을 부탁했는데, 공이 응하지 않아 마침내 무함을 받고 면직되었다. 융경(隆慶) 정묘년(1567)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선조(宣祖) 초년에 조야(朝野)가 한창 지치(至治)를 기대하며 모두 말하기를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벼슬에 나오지 않으니 마땅히 성상의 덕을 어찌 보도(輔導)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공의(公議)에 따라 징소(徵召)하기를 요청하여 이로부터 여러 차례 권면하여 효유하였는데, 선생이 사양하였으나 명을 얻지 못하고 마침내 임금의 부름에 응하였다. 사론(士論)이 이러한 요청을 한 공을 중히 여겼다.
무진년(1568, 선조1)에 부호군(副護軍)으로서 북경에 조회하여 천추절을 축하하였고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기사년(1569)에 병조 참지와 참의에 임명되었다. 경오년(1570)에 외직으로 나가 황주 목사(黃州牧使)가 되었다. 신미년(1571)에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임신년(1572)에 승정원에 들어가 도승지에 올랐다. 이때에 조사(詔使) 한세능(韓世能)과 진삼모(陳三謨)가 왔는데, 무릇 상의(上議)를 도와 익숙하게 강구하여 행하자 법도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만력(萬曆) 계유년(1573)에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어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다. 병자년(1576)에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무인년(1578)에 호조(戶曹)로 옮겼다가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기묘년(1579)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세 번째 도승지가 되었다. 형조 참판에 특배(特拜)되었다가 대사헌으로 옮겼다. 임오년(1582)에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옮겼다. 계미년(1583)부터 을유년(1585)까지 형조 참판과 경조우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京兆右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에 임명되었다.
신묘년(1591)부터 임진년(1592)까지 좌ㆍ우윤을 지냈다. 당시에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와 임금께서 서쪽으로 행차하셨다. 공의 연세가 이미 78세였으므로 따라가지 못하자, 강도(江都)로 들어가 의병을 규합하고 그 군대의 명칭을 일의군(一義軍)이라 하였다. 얼마 후 조정의 명령으로 거느리고 있던 병사를 추의군(秋義軍) 장수 우성전(禹性傳) 공에게 넘겨주고 간도(間道)를 따라 행조(行朝)로 달려갔는데, 연안부(延安府)에 이르렀을 때 마침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두 능이 변을 당하였다. 조정에서 공에게 봉심(奉審)할 것을 명하였으므로 장차 가려고 하였으나 병세가 위독해져 마침내 세상을 떠났으니 계사년(1593, 선조26) 5월 21일이었다. 같은 해 10월 25일 선영이 있는 양주(楊州) 치소 동쪽 금촌리(金村里)에 장사 지냈다.
공은 간묵하고 중후하며 평탄하였고, 외면은 온화하고 내면은 너그러웠다. 육신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안색에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비록 갑작스러운 일을 만나더라도 변함이 없었다.
현헌을 섬김에 효자로 일컬어졌으니 조석으로 옆에서 모실 때에는 엄한 스승을 모시듯 하였다. 공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고 현헌에 대한 양지(養志)의 효성도 끝까지 다하지 못했으므로 항상 풍수(風樹)의 통한이 있었다. 이에 그 당(堂)의 이름을 두일(逗日)이라 하고 그대로 자호(自號)로 삼았다. 이는 대개 날을 아낀다는 뜻을 취하여 종신토록 사모하는 정을 붙인 것이리라. 공은 어려서 어혈(瘀血)을 앓았는데 늙도록 치료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어느 날 밤 꿈에 현헌이 이르기를 “마땅히 너로 하여금 아팠던 병이 곧 낫게 하겠다.” 하였다. 이로부터 묵은 병이 다시 발생하지 않았으니 효성이 감응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돌아가신 이 제사 모시기를 살아계신 이 섬기듯이 하였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고하였으며 새로운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사당에 올렸고 제사는 반드시 가묘(家廟)에서 지냈다. 과부가 된 누이동생을 대함에 우애가 매우 돈독했으며 내외의 친족에게는 비록 소원하더라도 반드시 힘을 다해 살림이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자식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선을 따르도록 권면하였다. 새벽에 일어날 때마다 여러 자식들을 대하여 주부자(朱夫子 주희(朱熹))의 〈경재잠(敬齋箴)〉을 엄숙하게 외우면서 말하기를 “심신을 수렴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길인(吉人)은 말을 적게 하고 조급한 사람은 이와 반대임을 생각하라. 학문을 하는 것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공이 자득(自得)한 것이니 빈 말이 아니다. 본성이 검약(儉約)하여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는 손님이 왔는데, 당 아래에 서 있는 동자(童子)가 입은 옷이 거칠고 비루하였다. 손님이 하인인가 의심하여 물으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 손자입니다.” 하였다.
집이 청파(靑坡)의 후미진 골목에 있었다.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누각에 발을 치고 문을 닫고 지내니 겨우 한두 노복이 문을 지킬 뿐 문밖에는 거마(車馬)조차 없고 왕래하는 이는 친척과 친구들에 불과했다. 늘그막에 상공(相公) 청천(聽天) 심수경(沈守慶), 판부사(判府事) 송찬(宋贊), 참의(參議) 권덕여(權德輿)와 더불어 이웃 노인 대여섯 사람을 초청하여 기영회(耆英會)를 만들고 자주 시와 술을 즐겼다. 신묘년(1591, 선조24) 간에 기로소(耆老所)에서 조정에 청하기를 “송찬과 목첨은 모두 선대 조정의 덕망이 높은 기로(耆老)의 신하로 연세가 이미 많으니 비록 종2품이지만 관례를 깨고 모두 기로소에 참여하게 해 주십시오.” 하여 임금께서 허락하셨다. 옛날에는 반드시 나이 70에 벼슬이 정2품이라야 비로소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 이 명령이 내려지자 사람들이 영예롭게 여겼다.
초취부인은 이씨(李氏)이다. 이씨의 친정아버지 휘 보(寶)는 판서에 증직되었으며 고려(高麗) 태사(太師) 도(棹)의 후손이다. 《소학(小學)》ㆍ〈내칙(內則)〉 제서(諸書)에 통달하였다. 모형(母兄 동복(同腹) 오빠) 판서 이문형(李文馨)이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부인에게 가서 결정하였다. 정덕(正德) 병자년(1516, 중종11)에 태어나 경신년(1560, 명종15)에 별세하였으니 향년 45세였다. 양주(楊州) 금촌리(金村里)에 장사 지냈으니 공의 묘소와 10보쯤 떨어져 있다. 여러 차례 증직되어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다.
후취부인 정씨(鄭氏)는 동래군(東萊君) 휘 호(湖)의 7대손이며 판서에 증직된 휘 건(謇)의 딸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얌전하여 공에게 시집온 뒤로 부도(婦道)를 행하여 어김이 없었다. 전처 소생 보기를 자기 자식과 똑같이 하였고 종친을 대함에 모두 그 마음을 얻었다. 의복과 음식은 빈한한 선비의 집안처럼 하였다. 과부가 되자 자식들 경계하기를 공처럼 하였으므로 세 아들과 여러 손자들이 모두 학문과 도의를 세움이 있었다. 부인은 기해년(1539, 중종34)에 태어나서 75세에 별세하였으니 계축년(1613, 광해군5) 10월 7일이었다. 예의상 공의 묘에 합장함이 마땅하였으나 여러 자식들이 개조(改兆)할 뜻이 있었으므로 같은 묘역 진향(震向)의 언덕에 자리 잡아 12월 20일에 장사 지냈다. 을묘년(1615)에 이르러 공의 묘를 옮기면서 마침내 격장(隔葬)하였다. 이해에 공의 품계에 견주어 정경부인으로 증질(增秩)되었다.
자식으로 장남 수흠(守欽)은 이씨 소생으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이다. 다음 서흠(敍欽)은 병조 정랑이며 다음은 장흠(長欽)과 대흠(大欽)이다. 장흠은 승지, 대흠은 공조 참의이다. 딸은 넷인데, 사위는 종사랑(從仕郞) 김굉서(金宏緒), 교관(敎官) 정기남(鄭基南), 현감(縣監) 윤전(尹㙉), 참의(參議) 김치(金緻)이다. 3남 4녀 모두 정씨 소생이다.
손자는 여덟이다. 취선(取善)은 병조 좌랑, 낙선(樂善)은 진사인데 수흠의 소생이다. 처선(處善), 기선(嗜善), 겸선(兼善), 돈선(敦善)은 서흠의 소생이다. 성선(性善), 행선(行善)은 장흠의 소생이다. 대흠은 후사(後嗣)가 없어서 행선이 후사가 되었다. 손녀는 넷이다. 수흠의 소생은 하나인데 생원 이광(李茪)에게 시집갔다. 서흠의 소생은 하나인데 어리다. 장흠의 소생은 둘인데, 하나는 진사 이적(李𥡦)에게 시집갔으며 하나는 어리다. 교관은 2남을 낳았으니 집(鏶), 단(鏄)이다. 단은 무과에 합격하였다. 현감은 1녀를 낳았으니 진사 이덕현(李德顯)에게 시집갔다. 참의는 1남을 낳았으니 득신(得臣)이다. 증손자는 하나인데 유구(悠久)로, 낙선의 소생이다. 증손녀는 여섯이다.
공의 아들 서흠, 장흠, 대흠이 참찬(參贊) 오억령(吳億齡) 공이 쓴 행장을 가지고 내게 명(銘)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 호조 참판공의 딸 목씨(睦氏)는 바로 좌우(左右 존칭으로 유근을 가리킴)의 고조비입니다. 불초한 저희들이 감히 좌우를 놔두고 다른 사람에게 구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여러 차례 공을 찾아가 얼굴을 우러러 뵌 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마음과 눈에 선하므로 감히 고루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어버이를 드러냄이 효도이니 / 顯親爲孝
오직 입신양명에 달렸고 / 惟在立揚
게을리하지 않아서 욕되게 하지 않음이 / 匪懈無忝
군자가 훌륭하게 여기는 일이지 / 君子所臧
무릇 온순한 용모를 갖춘 이는 / 凡有婉容
반드시 온화한 기운에 근본하니 / 必本和氣
어떻게 그것을 이루는가 / 何以致之
자신을 닦는 데서 시작하지 / 自修己始
공의 삼가는 행실은 / 公之飭行
받은 데가 있다고 하니 / 曰有所受
우뚝한 현헌이여 / 卓爾玄軒
후세에 끼침이 돈독했도다 / 篤於貽後
배움에 연원이 있고 / 學有淵源
이것을 자식에게 전했도다 / 以是傳子
공이 일찍이 마음에 새겨 / 公早服膺
잃지 않고 떨어뜨리지 않았네 / 勿失勿墜
스스로 청운에 올랐으나 / 自致靑雲
자신의 본분을 바꾸지 않았고 / 不渝素履
은혜가 삼대에 미쳤으니 / 恩及三世
옳은 방법으로 가르친 효험이지 / 義方之效
선을 진실로 쌓으면 / 善苟能積
하늘이 보답하지 않음이 없지 / 天無不報
공이 크게 쓰이지 못하여 / 公未大施
참판에 그쳤지만 / 亞卿而止
이러한 은총을 받았으니 / 有此寵錫
실로 어진 자손으로 말미암았네 / 實由賢嗣
효행은 이어지는 것이니 / 惟其不匱
진실로 석류라 하는데 / 寔曰錫類
복을 구함이 여기에 있음은 / 求福在玆
바로 기반이 두터워서이지 / 乃基之厚
빗돌은 마모될 수 있지만 / 石猶可磨
명문은 영원히 전해지리라 / 銘其不朽
[주-D001] 목공(睦公) : 목첨(睦詹, 1515~1593)으로.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사가(思可), 호는 두일당(逗日堂)ㆍ시우당(時雨堂)이다.[주-D002] 목대흠(睦大欽) : 1575~1638. 본관은 사천, 자는 탕경(湯卿), 호는 다산(茶山)ㆍ죽오(竹塢)이다. 저서에 《다산집(茶山集)》이 있다. 《記言 別集 卷25 茶山睦公墓碣銘》[주-D003] 목세칭(睦世稱) : 1487~1551. 본관은 사천, 자는 공달(公達), 호는 현헌(玄軒)ㆍ산옹(散翁)이다.[주-D004] 조온(趙溫) : 1347~1417. 이성계의 생질(甥姪)로, 부친 조인벽(趙仁璧)을 따라 위화도(威化島) 회군에 참여하여 회군 공신(回軍功臣)에 책록되었다. 1392년(태조1)에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공으로 개국 공신(開國功臣) 2등과 한천군(漢川君)에 봉해졌다. 1398년(정종 즉위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정사 공신(定社功臣) 2등에 봉해졌고 1401년(태종1)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좌명 공신(佐命功臣) 4등에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주-D005] 김식(金湜) : 1482~1520.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사서(沙西)ㆍ동천(東泉)ㆍ정우당(淨友堂),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기묘사화로 선산에 유배되었는데 거창으로 피했다가 자결하였다. 저술로 《사서집(沙西集)》이 있다.[주-D006] 공은 …… 높아졌으니 : 석명(錫命)은 임금이 조서를 내려 명령함을 말한다. 《주역》 〈사괘(師卦) 구이(九二)〉에 “왕이 총애하는 명령을 세 번이나 내리도다.[王三錫命]” 하였고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세 번 명을 내린 것은 공이 있기 때문에 왕이 세 번 거듭 명한 것이다.[三錫命者, 以其有功, 故王三加錫命.]” 하였다. 목첨은 이조 참판을 지냈고 아들 목대흠(睦大欽)이 익사 공신(翼社功臣)에 참여했기 때문에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목장흠(睦長欽)이 익사 원종공신에 들었기 때문에 영의정에 추은된 것을 말한다.[주-D007] 중시(重試) : 아직 관직이 없는 문ㆍ무과 급제자와 관직에 있는 당하관(堂下官)을 대상으로 10년마다 한 번씩 병년(丙年)에 시행하였다. 이에 합격하면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주-D008] 한세능(韓世能)과 진삼모(陳三謨) : 1572년(선조5) 5월에 명나라 목종(穆宗)이 죽고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한림원 검토(翰林院檢討) 한세능과 급사중(給事中) 진삼모가 등극조사(登極詔使)가 되어 조선에 왔다.[주-D009] 우성전(禹性傳) : 1542~1593.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ㆍ연암(淵庵),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군호(軍號)를 추의군(秋義軍)이라 하였다. 해염(海鹽)과 식량을 조달하여 난민을 구제하고 강화도에 들어가 김천일(金千鎰)과 합세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강화도를 장악하여 남북으로 통하게 하였다. 병선을 이끌어 적로를 차단하였으며 권율(權慄)이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행주에 이르자 의병을 이끌고 지원하였다. 《孤臺日錄 人名錄》[주-D010] 선릉(宣陵)과 …… 당하였다 : 선정(宣靖)은 서울 강남구에 있는 성종의 능인 선릉과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서울에 들어와 이 두 능을 파헤치고 불태우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燃藜室記述 卷16 宣祖朝故事本末》[주-D011] 양지(養志) : 어버이의 뜻을 제대로 알고서 그대로 따르는 효도를 말한다.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하는 등 부모의 육신만을 위하는 구체(口體)의 봉양(奉養)과 상대되는 말이다. 《孟子 離婁上》[주-D012] 풍수(風樹)의 통한이 있었다 : 풍수는 부모를 잃은 슬픔을 뜻한다. 공자께서 길을 가는데 고어(皐魚)가 나무를 안은 채 슬피 울고 있었다. 공자께서 까닭을 물었더니, 고어가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며 서서 울다가 말라 죽었다고 한다. 《韓詩外傳 卷9》[주-D013] 날을 아낀다 : 한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효지(孝至)〉에 “이 세상에서 오래 갈 수 없는 것은 어버이를 모시는 것이다. 따라서 효자는 날을 아낀다.[不可得而久者, 事親之謂也. 孝子愛日.]”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주-D014] 종신토록 사모하는 정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대효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니 50세가 되어서도 부모를 사모한 자를 나는 대순에게서 보았노라.[大孝, 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 見之矣.]”라고 한 것을 원용하였다.[주-D015] 공은 …… 하였고 : 목첨이 부모의 제사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는 말이다. 《중용장구》 제19장에 “죽은 분을 섬기기를 산 분을 섬기듯이 하고 없는 분을 섬기기를 생존한 분을 섬기듯이 하는 것이 효의 지극함이다.[事死如事生, 事亡如事存, 孝之至也.]”라고 한 말을 원용하였다. 여기서 작은 분과 산 분은 모두 목첨의 부모를 가리킨다.[주-D016] 출입할 …… 고하였으며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사람의 자식이 된 자는 나갈 때는 반드시 아뢰고 돌아오면 반드시 얼굴을 뵈며 노는 곳이 반드시 일정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夫爲人子者, 出必告, 反必面, 所遊必有常.]”라고 한 것을 원용하였다.[주-D017] 길인(吉人)은 …… 생각하라 :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길한 사람의 말은 적고 조급한 사람의 말은 많다.[吉人之辭, 寡, 躁人之辭, 多.]”라고 한 말을 차용하였다.[주-D018] 심수경(沈守慶) : 1516~1599.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희안(希安), 호는 청천당(聽天堂)이다. 대사헌과 8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590년(선조23) 우의정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체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저서로 《청천당시집(聽天堂詩集)》, 《견한잡록(遣閑雜錄)》이 있다.[주-D019] 송찬(宋贊) : 1510~1601.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치숙(治叔), 호는 서교(西郊)이다. 1570년(선조3) 호조 참판으로 《명종실록》의 편찬에 관여하였고 경상 감사, 경기 감사, 영흥 부사를 지냈다. 우참찬을 거쳐 판돈녕부사, 판중추부사 등의 직에 올랐다.[주-D020] 권덕여(權德輿) : 1518~159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원(致遠)이다. 황해 감사를 지낸 뒤 호조 참의, 병조 참의, 이조 참의, 도승지, 부제학 등을 거쳤다.[주-D021] 이문형(李文馨) : 1510~1582.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형지(馨之)이다. 중종(中宗) 경자년(1540)의 별시(別試)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이조 판서(吏曹判書), 병조 판서(兵曹判書) 등을 지냈다. 《國朝榜目 中宗條》[주-D022] 정덕(正德) : 저본(底本)에는 ‘嘉靖’으로 되어 있으나, 가정 연간에 병자년은 없다. 이에 수정하여 번역하였다.[주-D023] 수흠(守欽) : 목수흠(睦守欽, 1547~1593)으로, 본관은 사천, 자는 요경(堯卿), 호는 하담(荷潭)이다.[주-D024] 서흠(敍欽) : 목서흠(睦敍欽, 1571~1652)으로, 본관은 사천, 자는 순경(舜卿), 호는 매계(梅溪), 시호는 충정(忠貞)이다.[주-D025] 장흠(長欽) : 목장흠(睦長欽, 1572~1641)으로, 본관은 사천, 자는 우경(禹卿), 호는 고석(孤石)이다.[주-D026] 겸선(兼善) : 목겸선(睦兼善, 1609~?)으로, 본관은 사천, 자는 달부(達夫), 호는 용재(容齋)이다.[주-D027] 성선(性善) : 목성선(睦性善, 1597~1647)으로, 본관은 사천, 자는 성지(性之), 호는 병산(甁山)이다.[주-D028] 단(鏄) : 원문에 ‘박(䥬)’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았다.[주-D029] 득신(得臣) : 김득신(金得臣, 1604~1684)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柏谷)이다. 저서로 《백곡집》ㆍ《종남총지(終南叢志)》 등이 있다. 김득신의 취묵당(醉墨堂)에 걸려 있는 〈독수기(讀數記)〉에는 평생 1만 번 이상 읽은 글 36편의 목록이 적혀 있다. 이중 《사기(史記)》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을 무려 11만 3천 번이나 읽어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지었다고 한다.[주-D030] 오억령(吳億齡) : 1552~1618.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대년(大年), 호는 만취(晩翠)이다.[주-D031] 어버이를 …… 달렸고 : 《효경》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에 “자신의 몸을 바르게 세우고 바른 도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 드날림으로써 부모님을 드러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의 마지막이다.[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고 한 말을 차용하였다.[주-D032] 게을리하지 …… 않음이 : 무첨(無忝)은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시경》 〈소완(小宛)〉에 “내 날로 매진하거든 너도 날로 나아가라.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지어다.[我日斯邁, 而月斯征. 夙興夜寐, 無忝爾所生.]”라고 한 것을 차용하였다. 늘 노력하여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주-D033] 온순한 …… 근본하니 :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효에 대해 묻자, 공자가 “부형 앞에서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기가 어려우니, 이것을 잘하는 것이 효이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대해 주희(朱熹)의 주(註)에 “효자로서 깊은 사랑이 있는 자는 반드시 화기가 있고, 화기가 있는 자는 반드시 유순한 빛이 있고, 유순한 빛이 있는 자는 반드시 공순한 용모가 있다.[蓋孝子之有深愛者, 必有和氣, 有和氣者, 必有愉色, 有愉色者, 必有婉容.]”라고 하였다. 《論語 爲政》[주-D034] 스스로 청운(靑雲)에 올랐으나 : 자신의 힘으로 높은 벼슬에 올랐음을 뜻한다. 전국 시대 위(魏)나라 범수(范睢)가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를 섬겼는데, 제(齊)나라와의 관계로 수가에게 오해를 받아 모진 매를 맞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간신히 도망쳐 진(秦)나라로 가서 마침내 정승이 되고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지니 보화(寶貨)가 왕실(王室)보다 많았다. 수가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범수를 보고 “나는 그대가 스스로 청운의 위에 오를 줄 생각지도 못했다.” 하였다. 《史記 卷79 范睢列傳》[주-D035] 자신의 본분 : 소리(素履)는 장식을 하지 않은 흰 신발이라는 뜻으로 소박하고 깨끗하게 자신의 본분을 지킴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역》 〈이괘(履卦) 초구(初九)〉에 “본래의 행함으로 가면 허물이 없으리라.[素履, 往, 无咎.]”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주-D036] 공이 …… 말미암았네 : 목첨은 이조 참판을 지냈고 아들 목대흠(睦大欽)이 익사 공신(翼社功臣)에 참여했기 때문에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목장흠(睦長欽)이 익사 원종공신에 들었기 때문에 영의정에 추은된 것을 말한다.[주-D037] 효행은 …… 하는데 : 《시경》 〈기취(旣醉)〉에 “위의가 심히 제때에 맞거늘 군자가 효자를 두었도다. 효자가 다하지 아니하니 길이 너에게 좋음을 주리로다.[威儀孔時, 君子有孝子. 孝子不匱, 永錫爾類.]”라고 한 말을 차용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