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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天啓) 3년 계해 봄에 유천(柳川) 한공(韓公 한준겸(韓浚謙)임)이 국구(國舅)로서 영돈령부사로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지자, 은전을 추급하여 그의 선고(先考)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를 추증하고, 선비(先妣)에게는 정경부인을 추증하였다.
이 일이 있은 지 3년 후인 을축년에 서평공이 고 상서(尙書) 만취(晩翠) 오공 억령(吳公億齡)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수도(隧道)에 지명(誌銘)을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르기를 “우리 선공(先公)의 행업(行業)이 그대의 손을 빌려 영원히 전해지리라고 믿습니다.” 하였다. 흠이 그 행장을 읽고 말하기를 “솔직하게 기록하고 꾸미지 않았으니, 돈후(惇厚)한 덕을 기록한 것이로다.” 하였다. 흠이 서평공과는 함께 제과(制科)에 올랐고, 함께 육경의 반열에 올랐으며, 또 함께 문망(文罔)에 걸림으로써 공에게 서로 알아줌을 받은 지 오래이기에, 그 세가(世家)의 명덕(名德)이 유래가 있음을 본디부터 아는 바이다. 그래서 삼가 만취공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차례대로 서술한다.
공의 휘는 효윤(孝胤), 자는 근숙(謹叔)인데 청주인(淸州人)이다. 시조(始祖)인 휘 난(蘭)은 고려를 섬겨 개국원신(開國元臣)이 되었고, 그 후 문혜공(文惠公) 강(康), 사숙공(思肅公) 악(渥), 평간공(平簡公) 공의(公義)를 거쳐, 태학사(太學士) 문경공(文敬公) 수(修)에 이르러서는 도덕과 문장이 한 세대의 모범이 되었다. 아조에 들어와서는 휘 계희(繼禧)가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靖)인데, 오조(五朝)를 내리섬기면서 그 시대의 명경(名卿)이 되었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사무(士武)는 한성 판관으로 좌참찬에 추증되었고, 조 승원(承元)은 정선 군수(旌善郡守)로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고 여필(汝弼)은 문천 군수(文川郡守)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경부인에 추증된 비(妣) 유씨(柳氏)는 문화(文化)의 대성(大姓)으로, 고려 때의 대승(大丞) 차달(車達)의 후손이며, 사도시 정 엄(渰)의 딸인데, 가정(嘉靖) 병신년(1536, 중종31) 8월 21일 갑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젊어서 외구(外舅 여기서는 장인(丈人)을 가리킴)인 예빈시 정 신건(申健)에게 수학하여 화려한 명성이 일찍 널리 퍼졌고, 약관도 되기 전에 연달아 향시(鄕試)에 뽑히었다. 융경(隆慶) 정묘년(1567, 명종22)에는 성균관 생원이 되었고, 경오년에는 대과(大科)에 올랐는데, 새로 급제한 사람들이 모두 우인(優人 배우ㆍ광대)이 따르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으나, 공만은 우인들을 물리쳤다. 이어 승문원(承文院)에 뽑혀 들어가 권지(權知)가 되었는데, 공이 어버이를 귀성(歸省)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기를 요청하였으나, 동료가 아랫사람을 검속한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자,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버렸다. 그리하여 전례(前例)에 의해 봉직(奉職)의 성적이 가장 하등으로 매겨졌다.
신미년에는 의정공의 상을 당하였고, 계유년에는 3년상을 마치고 다시 서용되었다. 갑술년에 부정자(副正字)가 되고, 천거로 예문관 검열에 보직되었다가, 을해년에 다시 대교ㆍ봉교에 전임되었다. 병자년에는 공조 좌랑에 승진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감찰에 옮겨졌으며, 질정관(質正官)으로 성절사(聖節使)를 따라 경사(京師)에 조회하고 돌아와 전적에 제수되었다. 우리 사신 일행이 회동관(會同館)에 있을 적에, 제독주사(提督主事) 당학징(唐鶴徵)으로부터 우리 나라의 종계(宗系)에 관한 일을 지금 막 신증(新增)하여 찬수했다는 말을 듣고 그 고본(稿本)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자, 제독이 우리 사신을 자기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마주 서서 잠깐 내보여주고는 곧바로 책을 덮어버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망연히 그 글을 살피지 못하였는데, 공만은 그 글을 한 글자도 틀림없이 다 외웠으므로, 사람들이 공의 타고난 기억력에 감복하였다.
정축년에는 본직(本職)으로 종학사회(宗學司誨)를 겸했다가 나가서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보임되었는데, 이는 조정이 명관을 보내 변방의 장수와 사졸들을 탄압하고자 하여 무릇 세 번이나 사람을 바꾼 끝에 결국 공에게 미친 것이었다. 이때 사론(士論)이 한창 두 갈래로 갈라졌는데, 서로 제휴하려는 자들이 모두 공을 쓰고자 하였으나, 공은 공평성을 굳게 지켜 어느 당에도 들지 않아서 마침내 이 제수가 있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였다. 공은 명을 받은 즉시 임지로 떠났다. 그곳에 가서 직무를 수행할 적에는 청렴하여 백성을 괴롭히지 않으니, 여러 진(鎭)들이 공을 공경하고 어려워하였다. 공은 본디 속병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풍토(風土)로 인하여 손상을 받아 병이 점점 심해졌다. 그러자 어버이 귀성(歸省)을 인하여 고향에 갔다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사헌부의 논박을 받고 면직되었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다.
기묘년 가을에는 아들을 여의고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벼슬하기를 탐탁찮게 여기어, 종부시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뒤에 그만두었다. 경진년 5월 3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45세였다. 치상(治喪)의 일은 일체 공의 선고인 의정공의 상 때와 같이 하였으니, 이는 유의(遺意)를 따른 것이다. 이 해 7월에 원주(原州)의 소재지 서쪽 가마도(佳麻島)의 선영 아래 장사하였는데, 이로부터 29년 뒤에 광중(壙中)이 좋지 않음으로 인하여, 옛 묘소를 옯겨서 부인과 함께 본산(本山) 바깥 등성이의 손향(巽向) 언덕에 합장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도(道)에 가까워서 일찍부터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어, 참판 박민헌(朴民獻)이 서화담(徐花潭 화담은 서경덕(徐敬德)의 호)에게서 《주역》을 배웠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박민헌에게 나아가 수업을 하여 정미한 이치를 탐구해서 발명한 것이 많았으므로, 박공이 자주 칭찬하였다.
공은 《근사록》ㆍ《심경》 두 책을 읽기 좋아하여 이 두 책이 책상 위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무오년간에 서적을 열람하다가 《근사록》 1질을 발견하고부터 비로소 이 글을 존중하여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 대체로 이 글이 세상에 행해지지 않은 지가 오래인데, 공은 능히 일찍부터 스스로 이와 같이 연구했던 것이다.
공과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은 모두가 명인 석사(名人碩士)였는데, 남공 언경(南公彦經)과 한공 명윤(韓公明胤)은 더욱 취향이 서로 같은 것을 사랑하여 서로 종유하기를 즐겁게 여겼고, 한공 수(韓公修) 같은 이는 나이가 공보다 수십 세 위였는데도 배항(輩行)을 굽혀서 서로 사귀었다. 그리고 덕계(德溪) 오건(吳健)은 당시에 한창 성대한 명성이 있었던 분으로, 공과는 처음부터 알지 못하는 사이였는데, 하루는 달밤에 찾아와서 공과 함께 글을 강론하고는 공에게 시를 지어주어 찬미하기까지 하였다.
공은 소시적부터 이미 뜻을 수립한 것이 있어 언어와 동작을 시속대로 따르지 않고 옛사람처럼 하기를 스스로 기약하였다. 그러나 또한 모난 행동은 하지 않았으므로, 현능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가 성심으로 공을 사랑하고 사모하였다. 경전을 토론하는 데는 의리가 밝고 통창하였으므로, 종유하는 선비들이 문리(文理)의 긴요하고 어려운 곳을 만나면 반드시 와서 공에게 물어 결정하였다.
예교(禮敎)가 무너져서 관혼상제의 예가 대부분 본 법식대로 되지 않고 있으므로, 공이 이를 불만스럽게 여겨, 자녀들을 혼인시킬 적에는 반드시 친영(親迎)을 하여 그대로 가법(家法)을 이루었다. 자제들에게 관례(冠禮)를 행할 적에도 엄숙한 빈(賓)을 맞아 삼가(三加)의 예를 준행하였다.
모친상을 당해서는 오로지 문공(文公 주희의 시호)의 《가례》대로 따라서 하여 졸곡 때까지 미죽만 마셨고, 일찍이 이르기를 “부모의 상중에 있는 자는 비록 잠을 자지 않을 수는 없으나,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자서는 안 된다.”하고서 향당재숙의(鄕黨齋宿儀) 침의(寢衣) 제도대로 하여 상을 마쳤다. 그리고 남녀간에 대공복(大功服) 이상의 경우에는 최질(衰絰)을 갖추어 성복(成服)하고, 부인은 질장(絰杖)을 갖추도록 하는 일도 또한 예경에 준거하여 시행하였다. 또 장자공(長子公 큰아들인 한백겸을 가리킴)이 아내 구씨의 상을 당했을 때는 공이 아들로 하여금 자최기년복(齊衰期年服)을 입게 하였으니, 처상(妻喪)에 대한 복제(服制)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공에게 딸이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이 자기 자식과 혼인하기를 청하였으나 공이 들어주지 않자, 세력으로 공을 협박하였다. 그러자 공이 그를 피해 산사(山寺)로 들어가서 여러 해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해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공의 막내 외삼촌 시직공(侍直公) 유광찬(柳光纘)이 그의 숙부 좌의정 유관(柳灌)의 양자가 되었는데,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부친과 함께 죽었고, 그의 아내도 자녀가 없이 죽었다. 그러자 이에 시직공의 여러 조카들 가운데서 공을 가리어 그의 여동생을 아내로 삼아주면서 자기가 죽은 뒤의 일을 부탁하므로, 공이 정성을 다해 봉양하였고, 좌의정 유관이 설원(雪冤)됨에 미쳐서는 공이 힘써 동성(同姓)을 취해서 후사로 삼기를 권하고 자신은 거기에 관여하지 않아서, 재물 보기를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겼다.
아, 기묘사화외 을사사화를 겪은 이후로는 사우(師友)가 서로 종유하는 것이 세상의 큰 금기가 되었는데도, 공은 능히 속된 학문 이외에 경술(經術)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독실히 좋아하여, 한 시대의 명현을 좇아서 자신이 아직 이르지 못한 곳을 구하여 찾았고, 예학에 이르러서는 온 세상이 다 강론하지 않은 것이었는데도 이를 깊이 연구하여 힘써 지켰으니, 공이 오래 살았더라면 천리(踐履)의 성취가 반드시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던 것인 바, 세상에 쓰였으면 곧 또한 한 세대의 의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도에서 막히어 세상에 베푸는 일을 다하지 못했으니 어찌하겠는가.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인데 3남 6녀를 두었다. 장남 백겸(伯謙)은 호조 참의인데 문학과 행의로 한 시대에 명성이 있고, 다음 중겸(重謙)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재명(才名)이 있었는데 공보다 1년 앞서 별세하였으며, 막내 준겸(浚謙)은 바로 서평공(西平公)인데 문무의 재주를 모두 갖추어 성대히 공보(公輔)의 인망이 있고, 선조조 때에는 도원수가 되었었다. 장녀는 홍적(洪迪)에게 시집갔는데 홍적은 사헌부 집의이고, 다음은 심흔(沈忻)에게 시집갔는데 심흔은 예문관 대교이며, 다음은 권흔(權昕)에게 시집갔는데 권흔은 의정부 사인이고, 다음은 서용갑(徐龍甲)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황유길(黃有吉)에게 시집갔는데 황유길은 감역(監役)이고, 다음은 일찍 죽었다.
참의의 초취(初娶)는 구사중(具思仲)의 딸인데 여기서는 자녀가 없고, 후취는 김정준(金廷俊)의 딸인데 여기서 1남 1녀를 두었는 바, 아들 흥일(興一)은 예문관 봉교이고 딸은 홍비(洪棐)에게 시집갔다. 중겸은 이태수(李台壽)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선일(善一)은 삭녕 군수(朔寧郡守)이고 다음 덕일(德一)은 사섬시 봉사이며, 딸은 진사 심대형(沈大亨)에게 시집갔다. 서평은 예조 정랑 황성(黃珹)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회일(會一)은 남양 부사(南陽府使)이고 다음 소일(昭一)은 일찍 죽었다. 장녀는 이유연(李幼淵)에게 시집갔는데 이유연은 종부시 정이고, 다음은 여이징(呂爾徵)에게 시집갔는데 여이징은 사간원 정언이며, 다음은 정백창(鄭百昌)에게 시집갔는데 정백창은 사헌부 집의이고, 그 다음이 바로 우리 왕비전하(王妃殿下 인조의 비인열왕후)인데,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 되던 해인 을축년에 황제께서 우리 전하의 고명(誥命)과 면복(冕服) 및 왕비전하의 고명과 관복을 내리었다. 왕비전하께서는 4남을 탄생하시어 원자가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니, 아, 훌륭하도다.
홍적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여익(汝翼)은 돈령부 도정이고, 다음 여량(汝亮)은 형조 좌랑이며, 딸은 생원 강홍적(姜弘勣)에게 시집갔다. 심흔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정화(廷和)는 청성군(靑城君)이고 딸은 조기(趙琦)에게 시집갔는데 조기는 경상 병사이며, 다음은 아무(某)에게 시집갔다. 권흔은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한(僩)이고, 딸은 한립(韓岦)에게 시집갔는데 한립은 사인(士人)이며, 다음은 이성구(李聖求)에게 시집갔는데 이성구는 사간원 대사간이고, 다음은 어리다. 서용갑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운준(雲駿)은 보은 현감(報恩縣監)이고, 다음은 운기(雲驥)이며, 딸은 어리다. 황유길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이밖에 증손ㆍ현손 남녀가 몇 명 있다.
작은 바다는 황하(黃河)에서 근원하고, 뭇 산들은 곤륜산(崑崙山)을 조(祖)로 삼는 것이니, 참으로 덕이 후한 자는 흐르는 은택이 길다는 것을 의정공의 가세(家世)에서 보아 알겠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꼭 높은 벼슬을 하지 않고도 /宦不必成
명성을 완전히 하였고 / 以完其名
꼭 장수를 하지 않고도 / 年不必壽
후손들을 번성하게 하였네 / 以阜其後
경사롭기도 해라 임사 같은 왕비님 / 任姒慶隆
우리 해동의 어머니라오 / 母我海東
성대하다, 공의 가성 / 蔚矣佳城
백년 천년 전하리라 / 於千百齡
[주-D001] 문망(文罔)에 걸림 : 문망은 곧 법망(法網)과 같은 뜻으로, 여기서는 즉 선조(宣祖)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인 신흠(申欽)과 한준겸(韓浚謙)이 광해군 5년(1631)에 계축옥사 때 함께 파직되어 유배된 일을 가리킨다.[주-D002] 삼가(三加) : 관례(冠禮)를 행할 적에 관을 세 차례 씌우는 예. 즉 맨 처음에 치포관(緇布冠)을 씌우고, 다음에는 피변(皮弁)을 씌우고, 그 다음에는 작변(爵弁)을 씌우므로 이른 말이다. 《禮記 冠儀 註》[주-D003] 임사 같은 왕비님 : 임사는 주 문왕(周文王)의 모후(母后)인 태임(太任)과 주 문왕의 비(妃)인 태사(太姒)를 합해서 일컫는 말인데, 모두 성덕(聖德)이 있는 훌륭한 왕비들이었으므로, 여기서는 곧 인조의 비가 된 한효윤(韓孝胤)의 손녀를 임사에 비유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