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군 술한(李君述漢)이 돌아가신 그의 조부 판관공의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조부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지금 거의 60년인데, 실로 언행에 민멸해서는 안 될 것이 있는 까닭에 일찍이 농와(聾窩)에게 행장을 받았으나 묘지명이 빠졌으니, 원컨대 어르신께서 이 글을 지어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해보니, 돌아가신 나의 조부 양기공(兩棄公)이 공과는 동문이고 또 금란(金蘭)의 교분이 있었는데,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행장을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석인(錫仁), 자는 계수(季受)이고 광주인(廣州人)이니 고려말의 명신 둔촌(遁村) 집(集)의 후예이다. 이후로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경상(卿相)이 이어졌는데, 공은 선조조의 어진 재상 문익공(文翼公) 휘 덕형(德馨)의 현손이다. 증조는 판결사 휘 여규(如圭)이고, 조부는 군수 휘 상정(象鼎)이다. 부친의 휘는 윤적(允迪)으로 숙부 상겸(象謙)의 양자로 갔다. 모친은 한양조씨(漢陽趙氏)인데 응교 위봉(威鳳)의 따님이고, 문간공(文簡公) 경(絅)의 손녀이다.
공은 현종 무신년(1668)에 태어났는데 8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태학사 권공(權公) 유(愈)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뜻을 돈독하게 가져 학문에 힘써서 경오년(1690, 숙종 16)에 진사에 뽑히고, 정해년(1707, 숙종 33)에 처음 벼슬에 나가 경녕전 참봉을 지내고 기축년(1709, 숙종 35)에 제용감 부봉사로 옮겼다. 경인년(1710, 숙종 36)에 상서원 직장으로 전보되고, 신묘년(1711, 숙종 37)에 군자감 주부에 승진되어 공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사소한 일로 파직되었다.
계사년(1713, 숙종 39)에 모친상을 당하여 상을 치를 때 예를 다하고, 신축년(1721, 경종 1)에 다시 내섬시 주부에 제수되었다가 얼마쯤 있다가 창평 현령이 되어 풍교(風敎)를 돈후하게 하고 절효(節孝)를 숭상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고 폐단이 많은 정사를 개혁하며 기근을 당하여 백성을 진휼하니 백성들이 궁핍하지 않아 어사가 칭찬하는 보고를 올렸다. 갑진년(1724, 경종 4)에는 익산 군수로 승진되었는데 그 치적이 창평에 있을 때와 같았다. 그 고을에는 법을 따르지 않는 호족(豪族)이 많았는데 공이 법으로 규제하자 그 사람이 대관(臺官)을 사주, 탄핵하여 파직시키게 하였다. 이에 공은 은진의 농사(農舍)로 돌아왔는데, 당시에 사명을 받들고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이 그 실정을 알고서 돌아가 아뢰어, 다시 서용되어 사도시 주부에 제수되었다가 자리를 옮겨서 김포 군수에 제수되었는데 1년 만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정미년(1727, 영조 3)에 예빈시 주부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외직으로 나가 전주 판관이 되었다. 전주는 곧 호남의 웅부(雄府)로서 사람이 많고 땅이 크며 아전은 교활하고 백성들은 횡포하여 본디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는 말이 있었다. 부장(府臧)이 본디 가득하여 넘쳤으나 전후로 이 곳에 부임한 이들이 많이들 창고를 맡아보는 아전과 짜고서 다른 명목으로 유용하고는 농간을 부려 문서를 위조하거나 감추어 마침내 적발하기 어려웠는데, 공이 통렬히 그 폐단을 고치고 과조(科條)를 만들어 엄하게 방지하니,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신축년(1721, 경종 1)에 세자를 세우면서부터 당의(黨議)가 더욱 극심하여져서 여러 불량한 무리들이 흉한 모의를 꾸미고 근거없는 말을 퍼뜨렸다. 이 해 겨울에 부문(府門)에 흉한 투서가 있었는데 공이 감영에 보고하여 주상에게까지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주상은 익명의 투서를 위에 알리는 것이 제도에 어긋난 일이라는 이유로 문책하니, 공은 그로 인해 파직되었다. 며칠 후에 또 남원에서 흉서가 나붙은 변고가 있자 조정에서 비로소 놀라서 범인을 잡으라고 명하고 공에게 다시 판관의 직책을 맡게 하였다. 이듬해 봄에 역적이 호서에서 일어나 청주를 함락시키고 절도사를 죽였다. 공은 병기와 병사를 동원하여 경계하고자 했는데, 감사가 조정의 명령이 없었다는 이유로 어렵게 여겼다. 공은 먼저 일을 일으키고 뒤에 보고할 것으로 쟁변하여 그날 병사를 점검하였다. 당시에 역적의 우두머리 필현(弼顯)이 태인 군수가 되어 근왕(覲王)을 칭탁하고 병사를 들어 북상하여 부(府)의 서쪽 10리인 삼천 땅까지 이르렀다. 이에 온 부중(府中)이 마치 솥이 끓듯 요란하고 감사는 벌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은 적을 감당할 것을 자청하고 장졸(將卒)들로 하여금 성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흰 노새를 탄 한 적이 성 밖에 이르러 이쪽 정황을 살피고 있어서 공이 첩자를 놓아 알아보니, 곧 필몽(弼夢)의 아들 사관(師寬)으로서 필현을 따라왔던 것이었다. 공은 그 뜻을 헤아리고 엄하게 문졸(門卒)에게 신칙하여 객과 통하지 못하게 하고 즉시 감영에 나아가니, 감사가 문을 닫고 질병을 핑계삼아 문지기에게 경계하여 공이 들어 오지 못하게 막도록 하였다. 공이 장차 도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 하자 이윽고 문이 열렸는데, 공이 곧바로 감사의 침소로 들어가 “지금이 어찌 질병을 구실삼을 때이겠습니까. 어째서 질병을 무릅쓰고 성에 올라 생사를 걸고 싸우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며 음성과 안색을 모두 준엄하게 하였다. 감사가 급히 일어나 사죄하고 또 “장차 어떤 계책을 내야 하겠는가.” 하니, 공이 “적들이 가운데로부터 일어나 인심을 측량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사방 성문의 장졸을 바꾸어 배치하여 그 변화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감사가 마침내 군중에 명령하기를, “성을 수비하는 절제(節制)를 일체 판관의 지시에 따르라.” 하고, 공으로 하여금 서문을 수비하게 하였는데, 서문은 적들이 밀려 들어오는 곳이었다.
공은 관아에 들어가 가묘에 하직하고 가족과 작별한 뒤 서문으로 달려가서 군졸을 포진하기를 마치자, 적이 또 사람을 성 아래로 보내 진영에 서찰을 전하러 왔다고 칭탁하였다. 공이 은밀하게 장교로 하여금 붙잡게 하니 적이 달아나 돌아갔다. 이에 적의 무리가 필현에게 기만을 당한 줄 알고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고, 필현도 또한 달아났다. 이 때에 만약 적의 계략대로 이루어져 승세를 타고 멀리 달려 북상하여 호서의 적과 합세했더라면 국가의 안위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니 공의 공로가 어찌 크지 않겠는가.
당시에 영남의 적의 성세(聲勢)가 매우 급하여 장차 팔량치를 넘어 곧바로 전라 감영을 칠 기세였다. 군졸과 백성들이 흉흉했는데 한 군졸이 말을 퍼뜨려 군중을 미혹시키자 공은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조리 돌리니 인심이 겨우 진정되었다. 공은 밤낮으로 군졸을 어루만지고 보살펴 몸소 음식을 날라주고 충의로써 격려하니 군정(軍情)이 감복하였다. 이윽고 난이 진정된 후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행차가 전주를 경유하고 찬획사(贊畫使) 윤순계(尹淳繼)와 원장(援將) 박동추(朴東樞)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였는데, 공이 응접하고 조치함이 모두 환심을 얻으니, 장졸이 모두 입을 모아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가을에 세선(稅船)에 부패한 곡식을 실었다는 이유로 잡혀가서 조사를 받은 뒤 직분을 띤 채 임소로 돌아가라는 판결을 받았는데, 공이 질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여 체직되었다.
이듬해 여름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덕(李匡德)은, 공이 힘을 다하여 성을 수비한 정상을 칭찬하여 아뢰었는데, 주상이 특명으로 자계(資階)를 더하도록 했으나 방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해 윤7월 23일에 약한 감기로 광주의 사촌(莎村) 옛집에서 임종하니 향년 62세였다. 탑곡(塔谷) 선영 해좌(亥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천품이 이미 높아 준수한 기국이 있고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관대하고 인후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항상 녹으로써 미처 봉양하지 못한 것을 깊이 애통하게 생각하였다. 제사에는 정성을 극진히 하여 매양 기일을 맞으면 반드시 목욕 재계하고 음식을 갖추어 엄숙하게 서서 새벽을 기다려 혼령이 임하여 계신 듯 정성을 다하였다. 백씨가 일찍 돌아가시고 중씨 부부도 모두 돌아가셨는데, 살아계실 때 봉양하고 돌아가셔서 장사지낼 때 유감이 없게 하였고, 백수(伯嫂)를 마치 모친을 받들 듯이 하였다. 내외의 친척에게는 은혜와 사랑으로 대하여 일 있을 때마다 보살펴 도와주었다. 교제하는 사이에는 정성과 신의로 대하고 후박(厚薄)을 달리하지 않았다.
전후로 고을원이 되어서는 관아의 문을 활짝 열어 곤궁한 벗과 가난한 일족이 팔을 흔들며 무난하게 들어왔다가 뜻에 맞아 돌아가게 하였다. 고을을 다스림에 백성에게 임하기는 인자하고 아전을 단속함은 엄하였으며, 자기를 다스림은 청렴하고 송사를 듣기는 밝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관직에 있으면서 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만족하고, 도리를 어기고 명예를 구함으로써 이름을 훔치는 것은 내가 부끄러워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재식(才識)과 기량(器量)이 일찍이 시망(時望)을 지녀 사람들이 조정을 보좌할 그릇으로 기대했으나, 어지러운 시대를 만나 낮은 벼슬에 침체되어 내면에 온축한 포부를 크게 펴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부인은 무안박씨(務安朴氏)로 우윤 징(澄)의 따님인데 부덕을 구비하였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고 공보다 13년 뒤에 돌아가셨는데 공의 묘소 왼편에 부장하였다.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광란(光蘭)인데 진사이고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문행(文行)이 있었다. 아들이 없어 재종질 술한(述漢)으로 후사를 삼았고, 네 딸을 두었는데 정사급(鄭師伋), 생원 한유인(韓有仁), 이순섭(李舜燮), 권준(權浚)은 그 사위이다. 딸은 진사 홍일환(洪日煥)에게 출가했는데, 세 아들은 간(侃), 단(儃), 참(傪)이고 세 딸은 권덕신(權德身), 오처중(吳處中), 정언 신사욱(申史澳)에게 출가했다. 다음에 명을 붙인다.
아, 공의 큰 기량이여 / 繄公偉器
크게 쓰이지 못했네 / 用未大施
군현에 머물러 지냈으나 / 棲遲郡縣
낮게 여기지 않았네 / 不以爲卑
백성의 고통을 쓰다듬고 은혜를 끼치니 / 瘼櫛惠孚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랑하였네 / 吏畏民懷
위태한 성에서 적을 막으니 / 危城捍賊
남쪽 지방의 울타리였네 / 保障江淮
역적의 우두머리 달아나니 / 逆酋遁逃
흉적의 무리가 전복하였네 / 凶醜顚踣
난을 진정시킨 공로는 / 勘亂之功
공이 실로 으뜸이라 / 公實爲首
성주가 포장하려 했는데 / 聖主褒嘉
또한 방해하는 이가 있으니 / 亦或惎之
공에게야 무슨 손상이리 / 在公何損
세도가 탄식할 일이지 / 世道可嘻
탑곡의 언덕은 / 塔谷之原
울창한 무덤일세 / 鬱鬱佳城
백대의 뒤에 / 百世在後
이 명을 징험하길 청하네 / 請徵斯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