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上世)에는 사람이 선악(善惡)을 행하면 그에 따라 받는 화복(禍福)이 한결같이 어긋나지 않았는데, 중세(中世)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발생하여 사람들이 비로소 의심하게 되었다. 세대가 후대로 내려와 쇠퇴하는 데 이르러, 선하지 않은 일을 저지르더라도 뜻을 얻어 귀한 지위에 오르고 장수를 누리고 죽으니, 이는 무슨 덕을 따른 것이란 말인가. 맑고 온화하며 상서롭고 순한 자질을 지니고 천성적으로 훌륭한 재주를 타고 나서 현인(賢人)과 군자(君子)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구한 삶 속에 좌절을 겪다가 억눌린 채 삶을 마치니, 하늘은 무슨 까닭이 있어서 이렇게 한단 말인가. 신군 계량(申君季良)은 옛날의 이른바 선인(善人)이니 마땅히 복을 받을 사람인데, 말세에 태어나 걸핏하면 때와 맞지 않았다. 끝내 복을 받지 못하고 요절하였으니, 장차 무엇을 믿고 선을 행한단 말인가.
계량의 이름은 최(最)이다. 시조(始祖) 태사(太師) 숭겸(崇謙)은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개국(開國)을 도왔으나, 끝내 기신(紀信)에 비견될 만한 절의를 지키고 운명하였다. 평산(平山)을 관향으로 하사받았으니,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관직에 올랐다. 고조(高祖) 휘(諱) 영(瑛)은 우참찬(右參贊)을 지냈고 시호(諡號)는 이간공(夷簡公)이다. 증조(曾祖) 휘 승서(承緖)는 도사(都事)를 지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조부(祖父) 휘 흠(欽)은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니, 인조(仁祖)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세상에서는 상촌(象村) 선생이라고 부른다. 선고(先考) 휘 익성(翊聖)은 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에게 장가들어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으며 호는 낙전(樂全)인데, 대를 이어 문장으로 훌륭한 명성을 드날렸다.
군은 선대의 아름다운 덕을 이어받아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을 지녔으며, 어려서부터 기상이 빼어나 어른스러웠다. 글짓기에 있어서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주가 지극하였다. 글을 지을 때 진한(秦漢)의 글에서 체재를 취하였고, 성명(盛明) 제가(諸家)의 글에 출입하여 반드시 법도가 있어 볼만하였다. 특히 초사(楚辭)를 잘 지어 거의 신(神)의 조화로부터 나온 듯했으니, 명성이 이로 인해 자자하게 일어났다.
열일곱 살 되던 을해년(1635, 인조13)에 진사시 3위로 합격하였고, 무자년(1648, 인조26)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합격하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가 얼마 뒤에 사국(史局)에 천거되었고,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며 설서(說書)를 역임하였다. 소장(疏狀)을 올려 새로운 정치를 펼치기 위해 먼저 힘쓸 것을 논하니, 임금께서 절목을 요약하여 올리라고 명하셨다. 박사(博士)를 거쳐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임금께서 일찍이 야대(夜對)에서 정복심(程復心)의 〈심학도(心學圖)〉를 차분하게 논하시니, 좌우(左右)의 신하들 가운데 끝내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군이 앞으로 나서서 막힘없이 낱낱이 분석하여 말씀드리니, 임금께서 칭찬하고 술잔을 내리셨다. 3년 동안 사직(史職)을 담당하면서 여러 차례 파직되었다가 다시 임명되었으며, 주서(注書)로 옮겼다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그해 겨울에 집안에 재앙이 일어났다. 군은 마침내 세상에 대한 뜻을 접고, 온 가족과 함께 선영이 있는 곳으로 가서 묘전(墓田)을 가꾸며 생활하였다. 아울러 홀로된 형수를 잘 보살폈다.
오랜 뒤에 전적(典籍)으로 서용되었고, 계사년(1653, 효종4)에 낭천 현감(狼川縣監)이 되었다. 고을이 폐해진 지 10년이 지나 온갖 폐단이 마구 발생하였다. 군은 힘껏 개혁을 시행하려고 하였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병신년(1656, 효종7)에 또 외직으로 나가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에 임명되었다. 군은 세상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으므로 삼가고 조심해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궁벽한 변방의 산골로 두 번이나 내쳐져 풍토에 시달려 모르는 사이에 원기(元氣)를 잃었으니,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병이 나고 말았다. 겨울을 넘기면서 더욱 심해져 무술년(1658) 1월에 운명하였다. 광주(廣州) 사부촌(莎阜村)에 안장하니,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의 묘소가 바로 오른쪽에 있다.
군은 남들보다 뛰어난 자질과 세상을 초탈하는 식견을 지니고도 이리저리 떠돌고 버림받아 자신의 능력을 백에 하나도 펼치지 못했다. 아아, 안타깝도다. 군은 스스로 집안 대대로 선비의 길을 걸어왔다고 여겨, 덕행과 선행을 쌓아 후세에 경사(慶事)를 남겨 주려고 하였으나, 뜻하지 않게 재앙을 당했다. 숙씨(叔氏) 진사공(進士公) 또한 영동 바닷가에서 떠돌다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는데, 평소 문득문득 울분을 느껴 왕왕 술에 취해 눈물을 줄줄 흘리곤 하였다. 평소 살려는 의지가 적었는데 끝내 불행한 삶을 마쳤으니, 하늘이 훌륭한 재주를 부여한 사람에게 이와 같이 어긋났다.
군은 일찍부터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이치 탐구에 몰두하였다. 19세에 《동관내외편(童觀內外篇)》을 지어 수리(數理)를 밝혔고, 이어서 열한 편의 원(原)을 지어 뜻을 분별했고, 《예가부설(禮家附說)》을 지어 의문점을 고증하였다. 그 글이 수만 자에 이르렀으며, 두루 정통하고 밝게 이해하여 조금도 부족한 점이 없었다. 그밖에 구류(九流)와 칠략(七略)으로부터 율력(律曆), 복서(卜筮), 의술(醫術)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으니, 여기에서 그의 전모를 볼 수 있다.
한가한 곳으로 물러나 살면서 자호(自號)를 춘소(春沼)라 하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시를 지어 충담(沖澹)하고 화평(和平)하며 풍부한 재주로 침울하고 울적한 심사를 드러냈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세상에서 버림받아 스스로 당대에 드러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내가 더욱 시에 힘을 쏟아 스스로 적응하여 경지를 만들 것이다. 어찌 인간세상의 일에 관여하여 평생을 묻혀 지내겠는가. 수천 년 뒤에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나온다면 또한 즐거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그의 시문(詩文) 몇 권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니, 군이 스스로 했던 말이 거의 이루어질 것이다.
군은 청송 심씨(靑松沈氏) 교리(校理) 희세(熙世)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7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사 의화(儀華)와 범화(範華)인데, 의화는 1남 1녀를 두었다. 맏딸은 정자(正字) 권두추(權斗樞)에게 출가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동생들은 한백기(韓伯箕), 김환(金奐), 권적(權頔)에게 출가하여 모두 딸 하나씩 두었다.
정묘년(1627, 인조5) 정숙옹주(貞淑翁主)가 운명했을 때, 군은 아홉 살이었는데 곡하며 가슴을 치고 조문객에게 절하는 모습이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가엾게 여겼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제 군은 장성하였고 나는 늙어 70세가 되었으니, 조만간 다가올 내 묘도문자(墓道文字)에 관한 일을 일찍이 군에게 부탁하여 사라지지 않게 해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생사(生死)와 수요(壽夭)가 이처럼 고르지 못할 줄을 누군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군에게 부탁했던 일을 도리어 나에게 부탁하게 되었으니, 슬프도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너그럽고 화락하며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데다 / 寬樂孝友
아름다운 재주까지 갖추었으니 / 克有才美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 온전하건만 / 天受者全
떠밀고 거꾸러뜨렸네 / 旣擠旣躓
끝내 요절하고 말았으니 / 而卒夭閼
하늘이 어찌 이리도 혹독하게 앗아갔나 / 天奪胡偏
오직 훌륭한 이름은 / 唯有令名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니 / 穹壤不滅
이 말로 저승의 혼령을 위로하노라 / 以慰下泉
[주-D001] 신숭겸(申崇謙) : ?~927. 평산 신씨(平山申氏)의 시조로, 초명은 능산(能山), 시호는 장절(壯節)이다.[주-D002] 기신(紀信)에 …… 운명하였다 :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위급해진 왕건(王建)을 구하기 위해 신숭겸이 힘써 싸우다가 순절(殉節)했다는 말이다. 기신은 한(漢)나라 초기의 장군이다. 유방(劉邦)이 형양(滎陽)에서 항우(項羽)에게 포위당해 위급해졌을 적에, 그가 한왕의 행세를 하며 항우에게 항복을 하고 그 틈에 유방을 탈출하게 하였는데, 항우가 그 사실을 알고 불태워 죽였다. 《漢書 卷1 高帝本紀上》[주-D003] 신익성(申翊聖) : 1588~1644.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ㆍ동회거사(東淮居士),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淸陰集 卷26 東陽尉申公神道碑銘 幷序》[주-D004] 소장(疏狀)을 …… 논하니 : 1649년 5월에 인조(仁祖)가 승하하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신최는 문학(文學) 이제형(李齊衡)과 함께 신정(新政)에 보탬이 되도록 시강(侍講) 때 했던 말들을 정리하여 소장을 올렸다. 《承政院日記 孝宗 卽位年 6月 5日》[주-D005] 정복심(程復心)의 심학도(心學圖) : 정복심(1279~1368)은 원(元)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견(子見)이다. 이학(理學)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사서장도(四書章圖)》를 저술하였다.[주-D006] 집안에 재앙이 일어났다 : 신최의 큰형인 신면(申冕)이 김자점(金自點)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다가 죽은 일을 가리킨다.[주-D007] 진사공(進士公) : 신경(申炅, 1613~1653)으로, 본관은 평산, 자는 용회(用晦), 호는 화은(華隱)이다. 1643년(인조21) 척화오신(斥和五臣)으로 지목되어 청나라에 붙잡혀 갔던 아버지 신익성(申翊聖)이 풀려나 이듬해 죽자, 서울로 돌아왔다가 1652년에 다시 강릉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가 있다.[주-D008] 열한 편의 원(原) : 신최의 《춘소자집(春沼子集)》 권3에 〈원속(原俗)〉, 〈원교(原敎)〉, 〈원농(原農)〉, 〈원재(原財)〉, 〈원병(原兵)〉, 〈원정(原政)〉, 〈원례(原禮)〉, 〈원악(原樂)〉, 〈원력(原曆)〉, 〈원재(原才)〉, 〈원학(原學)〉이 실려 있다.[주-D009] 구류(九流)와 칠략(七略) : 구류는 한대(漢代)의 아홉 학파로서, 유가(儒家)ㆍ도가(道家)ㆍ음양가(陰陽家)ㆍ법가(法家)ㆍ명가(名家)ㆍ묵가(墨家)ㆍ종횡가(縱橫家)ㆍ잡가(雜家)ㆍ농가(農家)를 가리킨다. 칠략은 유향(劉向)이 아들 유흠(劉歆)과 함께 작성한 서적의 목록 일곱 가지로서, 집략(輯略)ㆍ육예략(六藝略)ㆍ제자략(諸子略)ㆍ시부략(詩賦略)ㆍ병서략(兵書略)ㆍ술수략(術數略)ㆍ방기략(方伎略)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