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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성이 윤씨(尹氏)요, 휘가 동규(東奎)이며, 자가 유장(幼章)인데, 파평(坡平) 사람으로서 고려 초기에 태사(太師) 신달(莘達)의 후손이자 문숙공(文肅公) 관(瓘)의 24대손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광묘(光廟 세조)의 국구(國舅)인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번(璠)과 정릉(靖陵 중종)의 국구인 파평부원군 지임(之任)이란 분이 더욱 현달한 분인데, 우리 나라의 대성(大姓)을 말할 경우에는 파평윤씨를 으뜸으로 꼽는다. 증조는 충의위(忠義衛) 휘 명겸(鳴謙)이고, 조부는 통덕랑(通德郞) 휘 성수(聖壽)이며, 선고는 생원(生員) 휘 취망(就望)이다. 생원공이 현감인 전주(全州) 이찬(李纂)의 딸에게 장가들었다가 후사를 두지 못했고, 통덕랑 덕수(德水) 이성(李晟)의 딸을 후취로 맞이하여 명릉(明陵) 을해년(1695, 숙종 21) 11월 25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릴 때 뛰어나게 총명하여 범상하지 않았다. 겨우 말을 배울 무렵에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는데, 세로나 가로로 외워도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9세 때에 선고를 여의었는데, 이 부인(李夫人)이 올바른 도리로 가르치고 길러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문리(文理)가 갑자기 진취되었다. 일찍이 종조부의 집에서 《퇴계집(退溪集)》을 보고 매우 좋아하여 여러 번 읽어보며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자 종조부가 기이하게 여겨 드디어는 원질(原帙)을 주었으니, 학문의 기초가 어렸을 때에 벌써 정해졌던 것이다. 성호(星湖) 이 선생(李先生)은 우리 나라에 학문의 연원이 끊긴 끝에 태어나 경기 지방에서 도(道)를 강론하였는데, 선생이 제일 먼저 그분에게 학문을 배웠으니, 바로 선생의 나이가 17세 때인 신묘년(1711, 숙종 37)이었다. 이 선생이 선생의 지조가 견실하고 견해가 명석한 것을 사랑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도가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
고 하였다. 선생은 처음에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한결같이 학문에만 뜻을 두었다. 그리하여 경성(京城)의 용산방(龍山坊)에서 소성(邵城)의 도남촌(道南村)으로 이주해서 날마다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면서 세간에 다시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를 몰랐다.
선생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지극하여 조모 한씨(韓氏) 및 선비(先妣)를 모시면서 봉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의 아우 동진(東震)이 재주와 학식을 지녀 또한 성호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으므로 선생은 평생토록 슬퍼하였다. 한번은 선생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아우가 살아 있다면 이 도가 매우 외로운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아우의 인물도 또한 알 만한 것이다. 그리고 거상(居喪)할 적에는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행하였으니, 선비의 상사와 조모 한 부인의 승중상(承重喪) 때에 3개월 동안 죽을 먹었고 3년 동안 거친 밥에 수질(首絰), 요질(腰絰)을 벗지 아니하였는데 시종 태만하지 않았으므로 군자들이 거상을 잘했다고 말하였다.
가정 형편은 본시 빈한하였는데 만년에는 더욱더 몰락하여 몇 칸의 초가집은 비바람도 가리지 못했고 10여 명의 식구들은 먹을 양식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남에게 가난을 말한 적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기는 말을 할 경우에는 이르기를,
“이러한 것이 천명(天命)인데, 모면하려고 한다면 천명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했으며, 분수에 따라 고생스럽게 지내면서도 태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큰 아들의 상사 때 염(斂)을 하는 데는 묵은 솜을 사용하였고 멱악(幎幄 시체의 얼굴을 덮는 천)으로는 검은 천을 썼으며, 대렴(大斂)에는 포교(布絞)를 하지 않았고 상여는 말로 끌었으며, 명정(銘旌)을 요[茵]로 깔았고 공포(功布)는 관(棺)이 빈궁(殯宮)에서 나오자 사용하지 않았으며, 혼거(魂車)는 치워버렸고 삽(翣)은 식장(飾墻)에 세워 유황(帷幌)에다 매달았다. 이러한 것은 검소한 집에서 소략하게 치르는 예에서 나온 것이지만, 실제로 예의 본의에 맞는 것이다. 그리고 선조를 받드는 예절에 있어서는 더욱더 신중하였다. 교하(交河)와 와동(瓦洞)은 바로 두 분 부원군의 분묘가 있고 여러 대의 선영이 있는 곳인데, 선생이 여러 종족들과 시제(時祭) 지내는 예를 강론해 정하고 해마다 자신이 직접 그 곳에 가서 제전(祭奠)을 올리고 이튿날에는 종친회를 가짐으로써 화목을 돈독히 하는 정의를 펼쳤고, 이러한 것으로써 영원히 일정한 규례로 삼았다.
만년에는 용산(龍山)의 옛 마을에 다시 살았는데, 마을 앞에 큰 강이 흘러 강산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이에 선생이 때로는 지팡이를 짚고 거닐기도 하여 ‘무우단(舞雩壇)에 바람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는 뜻’을 가졌고, 수레와 사람이 복잡한 시장거리에 살면서도 조금도 속세에 오염되지 않고 시원한 청풍(淸風)의 기상이 있었다. 아침저녁에 일어나 앉아 성현(聖賢)의 모훈(謨訓)을 외우며 ‘즐거워 걱정을 잊은 채’ 일생을 마치려는 뜻을 가졌다. 계사년(1773, 영조 49) 6, 7월 사이에 복통과 설사의 증세가 있었는데, 이 때 선생의 나이는 79세였다. 병으로 누운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침상에서 지내면서도 《맹자(孟子)》 전질(全帙)을 반복해 읽었는데, 이루편(離婁篇)의 ‘군자가 도에 깊이 나아간다’는 대문에 이르러 곁에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학문하는 방도는 마땅히 이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병이 위독할 때 문인(門人) 이제임(李齊任)이 묻기를, “학문하는 공부 가운데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공경으로 마음을 정직하게 하고[敬以直內] 의리로 행실을 방정하게 하며[義以方外] 학문을 널리 배우고 뜻을 독실히 하며[博學篤志] 절실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며[切問近思] 예로 행하고 겸손하게 드러내는것[禮行遜出]이니,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 하였다. 그리고 퇴계(退溪)의 자명(自銘)을 외우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 글이 실로 내가 평소에 좋아한 바이다.” 하였다.
그리고 자손이 유교(遺敎)를 청하자, 선생이 답하기를, “나는 평생에 입고 먹는 것을 가지고 남에게 구차스럽게 말한 적이 없으니, 스스로 귀신에게 물어 봐도 의심할 것이 없다고 여긴다. 너희들은 기억하라.”고 하였다. 이 때에 판서 채제공(蔡濟恭)이 선생의 병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약간의 인삼(人蔘)을 보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한 번도 이 약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의 생사가 어찌 이것을 먹고 안 먹고에 달려 있겠는가. 보내준 뜻은 감사하지만 먹고 싶지 않다.”고 하고 도로 보내도록 하였다. 사양하고 받는 예절은 임종할 때에도 이처럼 의리에 맞게 하였다. 끝내 8월 7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였는데, 임종할 때에도 정신이 또렷하여 조금도 혼란하지 않았으니 군자의 올바른 죽음이라 이를 만하다. 이해 10월 9일에 도남촌(道南村) 술좌(戌坐)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명정(銘旌)에 ‘소남촌인(邵南村人)’이라 쓰도록 유언하였는데, 학자들이 ‘소남 선생(邵南先生)’이라 불렀다.
배위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선고는 제인(齊仁)이고, 파곡(坡谷) 성중(誠中)의 6대손이다. 성품이 온순하고 부덕(婦德)을 지녔으며 선생보다 25년 먼저 죽었는데,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광로(光魯)이고, 차남은 광연(光淵)인데 광연은 숙부 동기(東箕)에게 출계(出系)하였고, 청주(淸州) 한형도(韓亨道), 은진(恩津) 송광익(宋光益)은 사위들이다. 광로는 신(愼)과 위(愇) 2남을 두었고, 광연은 무후하였다.
선생은 어린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도(道)를 지닌 스승에게 귀의할 수 있었다. 이 때 성호(星湖)의 문하에 재주가 뛰어난 선비들이 있었지만, 절실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며 독실한 뜻을 가지고 힘써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면 선생 한 사람뿐이었다. 갑자년(1744, 영조 20)에 이 선생께서 병이 위급할 때 선생을 불러 생전의 유언을 일러 주시되 도를 전하는 책임을 당부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사제(師弟) 간의 전수함이 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병인년(1746, 영조 22)에 내가 이 선생을 뵈었더니 이 선생이 당대의 인물에 대해서 말하기를, “송(宋) 나라 때 선비들이 ‘윤화정(尹和靖)은 육경(六經)의 말을 자기 말 외우듯이 한다.’고 칭찬하였는데, 오늘날 윤모(尹某)는 참으로 이 말에 부끄럽지 않다.”고 했고, 또 말하기를,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에 대해서 명(明) 나라 선비 몇몇 사람은, ‘《태현경》의 원본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 말한다.’고 하였는데 윤모는 한 번 보고서 환히 알고 그 취지를 설명하였으니 지금 시대에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을 하는 사람 중에 그보다 앞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그 때 순수(醇叟 이 맹휴(李孟休)의 자)도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그도 또한 나에게 말하기를, “윤장(尹丈)은 주염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의 기상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기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에 유념하였다. 그 다음 해에 나는 도남(道南)의 혼인 석상에서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 처음으로 선생께 인사드렸는데, 뵈옵건데 선생은 풍모가 단정하고 언어가 자상하며 웃는 모습이 뚜렷하고 온화한 기운이 사람에게 엄습하였으니, 한 번 보고서도 성덕 군자(成德君子)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나라의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은 실로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나온 것을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의 서문에 기재한 것인데, 기고봉(奇高峯)이 ‘사단(四端), 칠정(七情)을 이(理)와 기(氣)에 나누어 속하게 한 것’에 의심하여 퇴계와 서신을 왕복하며 논변하다가 나중에 자신의 논설이 그른 것을 깨닫고 퇴계와 일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율곡(李栗谷)은 오히려 기고봉의 논설을 주장했고 그의 논설이 매우 많았다. 이로 인하여 퇴계의 논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율곡의 논설에 이기일원(理氣一元)의 병통이 있다고 하고, 율곡의 논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퇴계의 논설에 이기호발(理氣互發)의 병통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각자 문자를 지어 양쪽이 서로 배척하니 끝내 큰 의논거리가 되었다. 따라서 학자라 이르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는 실제의 학문을 버리고 이 논설을 으뜸으로 여긴 결과 논쟁이 끝날 날이 없게 되었다. 이에 이 선생은 학자들의 학술이 어긋나게 되는 것을 걱정하여 사칠신편(四七新編)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에, “사단, 칠정의 명칭과 뜻은 인심(人心), 도심(道心)과 실상이 같고 명칭만 다른 것이다. 그러나 후인들은 합하여 하나로 만들 줄을 모르기 때문에 ‘사단, 칠정이 선(善) 한 쪽에 포함되었다.’는 말에 구애되어 논설에 각자 다른 폐단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선생이 이 책을 받고서 말하기를, “이 책의 내용이 명확하고 상쾌하여 양쪽을 갈라 놓은 것과 같으니, 다시 논평할 여지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 선생은 뒤에, 문인인 상사(上舍) 신후담(愼後聃)이 “지각(知覺)의 기(氣)와 형기(形氣)의 기, 이 두 ‘기(氣)’ 자는 같지 않다.”고 하고, 또 “공리(公理)의 칠정과 인심은 또한 도심이다.”라고 하여 “공리의 희노(喜怒)는 이(理)의 발이다.”라는 설을 하였는데, 이 선생이 그 설을 따라 사칠신편의 발문(跋文)을 다시 지었다. 이에 선생이 그 설에 대해서 변론하기를 “마음에는 본시 형기에 따라 발하는 것이 있다. 《중용(中庸)》의 서문에서 이른바 형기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은 이 형기가 아니라면 이 지각도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형기란 용어를 활용성 있게 보아야 하는 것이다. 성인(聖人)의 마음은 순전히 천리(天理)이기 때문에 희노가 저절로 절도에 맞는 것인데, 그 모습을 찾아보면 끝내 형기에 돌아갈 뿐이다. 장남헌(張南軒)의 말에, ‘의리의 노여움은 이(理)의 발이라 하더라도 실로 불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근본을 미루어 나누어 말한다면 기(氣)에서부터 발하는 것은 본시 그대로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이 선생이 즉시 다시 지은 발문을 지워버리고 그 설을 쓰지 않았다.
선생이 이전에 말하기를, “사칠이기(四七理氣)의 변론에 대해서는 젊었을 때 대략 이해하고 있었으나 환히 알지는 못했는데, 깊이 생각하고 반복해서 나의 공심(公心)과 사심(私心) 사이에서 체험한 지가 5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조리가 분명하여 혼미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아래로 인사를 배우고 위로 천리를 깨닫게[下學上達] 하는 것에 불과한데, 인사를 배우는 공부를 미처 하지 않고 천리를 깨닫는 공부를 먼저 한다면 자신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단지 사단(四端)이 발할 때 확충시키고 칠정(七情)이 발할 때 절도에 맞게 할 줄 알아야 한다.” 하였다. 정산(貞山) 이경협(李景協)이 신후담의 논설을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선생은 자신의 주장을 시종 굽히지 않았고, 임종할 무렵에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사칠이기설은 사칠신편과 서로 뜻을 발명하는 것으로서 후세에 반드시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자신의 주장을 이처럼 독실히 믿었다.
가정 안에서는 규범이 매우 엄숙하여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하였고, 사람들을 접대할 즈음에는 화기와 공경이 모두 지극하여 손님과 친지들이 모두 흠모하였다. 그리고 함장(函丈)에게 질문하고 토론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의견이 같더라도 그저 같은 것이 아니었고 다르더라도 그저 다른 것이 아니었으며 힘써 의리가 올바른 경우를 따르려고 하였는데, 이 선생이 선생의 의견을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며 가상하게 여긴 적이 많았다. 그리고 사문(師門)을 섬기는 데는 마치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것처럼 하였다. 신미년(1751, 영조 27) 가을에 이 선생의 병이 위독할 때 내가 가서 뵈었더니, 당시 선생이 시병(侍病)하고 있었는데, 약제를 올리는 일을 직접 보살폈고 심지어 코나 가래와 대소변을 받아낼 무렵에도 자신이 직접 부축하며 공경과 정성을 다하였고 밤새도록 의복을 벗지 않은 채 시병한 지가 여러 날이었는데도 조금도 태만한 뜻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나는 선생의 성의가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 것임을 더욱 알게 되었고 또한 스승과 어른을 섬기는 도리를 알게 되었다.
선생은 사람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소학(小學)》을 기본으로 삼아 순서에 따라 배우도록 하였으므로 7, 8세의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모두 절하고 읍(揖)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을 알았으며, 재주가 높고 낮은 정도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이 달랐지만, 대체로 자신을 반성하고 스스로 터득하도록 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이리하여 말하기를, “옛 사람은 학문을 한다 하면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하였는데, 선을 밝히고[明善] 자신을 성실히 하는[誠身]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빠져도 학문이 아니다. 따라서 조금씩 쌓아가고 번민과 고통을 참고 견디어 세월이 갈수록 더욱더 독실해져야만 사물에 대응할 때 도리에 맞게 되어 쾌활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방법은 《주자서(朱子書)》에 다 들어있다. 문제자와 문답할 경우 사람에 따라 침(針)을 주듯이 교훈하였기에 후인들이 증세에 따라 치료하는 약이 모두 이 책 속에 들어 있으니, 독자(讀者)들은 자신에게 알맞는 가르침을 취하여 실행해야 한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퇴계는 주자를 잘 배운 분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속에 천길의 절벽처럼 우뚝한 기개가 있으니, 퇴계는 바로 우리 나라의 주자이고 백세(百世)의 사범(師範)이다. 따라서 후학들은 퇴계를 사표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세상의 학자들 가운데 비루한 자는 전주(箋注)의 학문에 빠져들어 연구하는 것만을 일삼되 세속에 적용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고상한 자는 신기한 논설을 좋아하여 별도로 문장을 만들되 남보다 우세하려는 뜻을 갖는다. 선생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나쁘게 여겨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학문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는 학문이라 하더라도 모두 남을 위하는 학문이니, 과연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독서하는 법에 대해서 말하기를, “익숙히 읽고 세밀히 완미하여 본 뜻을 알려고 힘써야 한다. 이리저리 읽어 나갈 때 의심나는 데가 없을 수 없을 터이니, 의심나는 것은 수록하여 자신의 학문의 진도를 점쳐 보아야 한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채취하고 여러 서적의 문구를 찾아내어 한 단락마다 자신의 말을 해야만 실학(實學)이라 하겠는가. 옛 사람의 말을 따르기만 하면 공력이 생략되는 법이니 자신의 의견으로 억측하여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전하려고 한다면 마음이 벌써 다른 데에 가 있는 것이어서 자신을 위하는 학문이 아닌 것이다. 옛 사람의 서책도 오히려 다 읽을 수 없거늘 자신이 지은 서책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리하여 저술한 문장 가운데 전할 만한 것이 없고 대략 지(志), 의(疑) 몇 권만이 있다. 그리고 여러 경서(經書)에 대해서도 모두 설(說)을 지었다. 《서경(書經)》의 우공(禹貢)에 대해서는 별도로 산천연혁고(山川沿革考)가 있고, 《주역(周易)》에는 계사설(繫辭說)이 있고, 《춘추(春秋)》에는 불개월변(不改月辨)ㆍ제희공설(躋禧公說)이 있고, 《주례(周禮)》에는 종률합변의(鍾律合變疑)ㆍ선궁구변동이변(旋宮九變同異辨)이 있다. 만년에는 《의례(儀禮)》에 대해서 더욱 공력을 다하였는데, 주(註)ㆍ소(疏)가 너무도 많아 학자들이 다 읽어 볼 수 없는데다 주ㆍ소의 내용에 모순되는 데가 많으며, 《속통해(續通解)》의 취하고 버린 것도 허술하고 누락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정리하려고 하였지만 미처 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례(家禮)》에 대해서도 편차선후변(編次先後辨)이 있는데, 이상의 변(辨), 설(說)은 모두 변경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가례》의 변에 대해서는 나도 간여하여 논란한 것이 있었는데 일치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선생이 세상을 떠났으니, 아, 슬프다.
선생은 여러 경서에 모두 통달하였지만, 매우 공력을 쏟은 것은 전적으로 사서(四書)에 있었다. 이리하여 늘 말하기를, “성현의 학문을 공부하는 데는 사서를 뛰어넘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일상 생활의 다반사(茶飯事)처럼 익히되 체험하는 공부를 한 순간도 중단이 있게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이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는 공경과 의리를 같이 지녔고 마음과 행실을 함께 수양하였으므로, 위의(威儀)와 거동의 법칙은 70년이 하루와 같았고 청렴한 지조와 고상한 절의는 진정 부귀와 빈천에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기풍을 지녔던 것이다. 그리고 당론(黨論)이 유행하는 시대에 처해 있으면서도 실학을 말할 경우에는 사람들이 모두 선생을 추앙하였으니, 이러한 것이 어찌 공연히 그러하였겠는가.
선생은 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을 개탄하고는 여러 사서(史書)를 참고하여 자수(訾水)ㆍ열수(洌水)ㆍ패수(浿水)ㆍ대수(帶水)의 사수변(四水辨)을 저술하였고, 상위(象緯)ㆍ역법(曆法)ㆍ지리(地理)ㆍ강역(疆域)의 학문과 의방(醫方)의 소문(素問)ㆍ운기(運氣)와 산수(算數)의 개방(開方)ㆍ염우(廉隅)의 법에 대해서도 모두 연구하였다. 계사년(1773, 영조 49) 여름에 또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논하기를, “《태현경(太玄經)》 및 《한서(漢書)》의 오행지의(五行志疑)와 하도낙서설(河圖洛書說)은 후대의 구양공(歐陽公)의 말에서 나온 것이니 이러한 것을 생각해 봐야 하고, 주염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도 《태현경》의 현리편(玄攡篇)의 문장을 인습한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하도ㆍ낙서의 본수(本數), 선천(先天)의 괘기(卦氣), 경방(京房)의 벽괘(辟卦)와 감여술가(堪輿術家)의 분금(分金)ㆍ성도(星度)ㆍ납갑(納甲) 등이 모두 《태현경》에서 나온 것이니, 아마도 양웅(揚雄)ㆍ엄장(嚴莊)ㆍ경방(京房)의 제자들이 각자 전수받았고, 또 오계(五季) 시대에 이르러서는 마의 도사(麻衣道士)ㆍ진도남(陳圖南)의 무리들이 서로 부연하여 그렇게 된 듯하다.”고 하였다. 우매한 내가 미처 회답을 올리지 못했으나, 그 말이 착착 맞았으니 이전 사람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했다고 이를 만한 것이다. 아, 훌륭하여라.
유고(遺稿) 몇 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선생이 별세하신 이후 사자(士子)의 학문이 날로 분열되었고 별세하신 지가 지금 또 13년이 지났는데, 대의(大義)가 어긋나고 미언(微言)이 사라지고 있다. 이른바 천주학(天主學)이란 것은 실로 불씨(佛氏)의 하승(下乘)의 설만도 못한 것인데도 현시대의 재주와 학식이 훌륭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 속에 빠져들어 서양이 중국보다 더 높아지게 하고 마두(瑪竇)가 중니(仲尼)보다 더 훌륭해지게 하면서 “진정한 학문이 천주학에 있다.”고 한다. 사자의 추향(趨向)이 올바르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이 나쁜 데로 빠져들어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러서 구제하여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에 나는 선생의 덕을 더욱더 사모하는 한편 또한 우리 사문(師門)이 전수한 공자(孔子), 맹자(孟子),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바른 교훈도 저버릴까 염려된다.
선생의 손자 윤신(尹愼)은 선생의 언행(言行)이 오랜 세월이 지나 민멸되는 것을 애통해한 나머지 내가 선생에게 동문의 후배이고 선생에게 알아줌을 받은 지가 근 30년이었으므로 선생의 사적을 아는 사람으로는 나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 나에게 행장을 지어받아 다른 작자(作者)에게 묘지명(墓誌銘)을 청하려고 하였다. 이에 내가 비록 문장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의리상 사양할 수 없기에 대략 권귀언(權龜彦)이 기술한 원장(原狀)에 의거하고 아울러 평소 나의 문견을 서술하여 이 행장을 기록한다. 내가 비록 형편없는 인물이지만 어떻게 지나친 말로써 선생의 덕을 손상할 수 있겠는가. 삼가 이상과 같이 갖추어 기록하여 작자가 채택하기를 기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