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소(桐巢) 선생 남공(南公)의 묘소가 공주의 갈산(葛山) 해좌(亥坐) 언덕에 있는데, 공의 막내아들 육(坴)이 가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선인을 안장한 지 이미 30년이 되었으나 묘갈을 새기지 못했는데, 저의 계부 잠옹(潛翁)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묘지(墓誌)의 글은 성호(星湖) 이 선생(李先生)이 이미 기록하셨으니 마땅히 집사에게 묘갈명을 받아야만 한다.’고 하시기에 감히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어리석고 비루한데다 늙고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서 이 말을 듣고 놀라서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잠옹은 아버지뻘 되는 어른이기에 감히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할 수 없었다.
가장을 살펴보니 공의 휘는 하정(夏正), 자는 시백(時伯), 관향은 의령(宜寧)이다. 남씨(南氏)는 고려조에 비롯되었는데, 조선조에 들어와 영의정 충경공 휘 재(在)와 좌의정 충간공 휘 지(智)가 있어서 훈업과 덕망이 국사에 드러났다. 4대를 내려와 휘 응운(應雲)은 이조 참판이고 호는 국창(菊窓)이며 문무를 겸비한 재질이 있었으며, 공에게는 6대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두화(斗華)인데 감찰 증 좌승지이고, 조부의 휘는 중유(重維)인데 사림의 무거운 명망이 있었고 대흥 군수(大興郡守)를 역임하였다. 부친의 휘는 수교(壽喬)인데 성균생원이다. 모친은 진주강씨(晋州姜氏)로 부사 석로(碩老)의 따님이다.
공은 숙종 무오년(1678, 숙종 4) 8월 25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덕기(德器)가 있어서 군수공이 몹시 사랑하고 기대하였다. 소시에 부친을 여의었으나 학문에 힘써 게으르지 않았다. 장성해서는 경사백가에 널리 통하고 문장을 잘 지어 명성이 자자하게 퍼져 당시의 제류(儕流)들 가운데 이보다 앞서는 이가 없었다. 어떤 문제(文宰)가 공의 출사책(出師策)을 읽고는 “이 글은 마땅히 택당(澤堂)으로 하여금 권좌를 양보하게 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택당은 곧 인조조 문단을 주도했던 상서(尙書) 이식(李植)의 호이다.
공은 본성이 고요하고 소박하여 나아가 취하기에 급급하지 않았다. 갑오년(1714, 숙종 40)에 비로소 성균관에 올랐으나 세상의 도리가 더욱 무너지고 예의 염치가 쇠미해지는 것을 보고는 더욱 세상에 뜻이 없었다. 병오년(1726, 영조 2)에 모친상을 당하여 공주의 갈산 선영에 안장하고 돌아와 진위현(振威縣)의 동천구장(桐泉舊庄)에서 지냈다. 복을 벗고는 호를 동소(桐巢)라 하고, 오직 글과 술로써 스스로 즐기고 밤낮으로 한가로이 노닐며 다시는 한강을 건너가지 않은 지가 거의 30년이었다.
영조 신미년(1751, 영조 27) 10월 4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4세였다. 12월 모일에 선영에 안장하였다.
공은 인륜에 돈독하여 모친을 섬기기에 그 효성을 다하고 아우들을 어루만지기에 그 우애를 다하였다. 모친의 상중에 있을 때는 공의 연세가 거의 쉰이었으나 상을 마치도록 상복을 벗지 않고 슬픔으로 예제에 지나칠 정도로 몸을 손상시켰다. 제사를 받드는 예절에 더욱 삼가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기에 힘썼다. 선덕이 민몰할까 두려워하여 여러 대의 언행을 두루 기술하여 지석을 굽거나 묘갈에 새겨서 영구히 전하도록 하였다. 사람을 접함에 귀천이 없이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 하고, 자질(子侄)을 가르침에 의방(義方)으로 하여 효우 돈목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벗들이 모두 “공의 가르침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손수 유언을 적어서, 자신이 죽은 뒤의 일은 힘써 검약하게 하도록 하였다. 또 자손에게 경계한 글이 있는데 말하기를
“자손을 보존하는 방도는 덕에 힘쓰고 학문을 권장하기 만한 것이 없고, 가업을 수호하는 방도는 검약을 숭상하고 쓰기를 절약하기 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또 ‘재물을 숭상하고 이익을 계산하며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같이 하는 이는 재앙이 그 몸에 미치지 않으면 반드시 후손에게 미치는 법이다. 내가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았으니 반드시 조심해야만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곤궁하고 영달함은 명이 있으니 힘으로 구할 수 없고, 도덕과 의리는 나에게 있으니 구하기만 하면 얻지 못할 게 없다.”
하고, 또 이렇게 말하였다.
“집을 다스림에 사교(四敎)로 하니 근검공서(勤儉恭恕)이고, 집을 정돈함에 사례(四禮)로 하니 관혼상제(冠婚喪祭)이다. 이것은 팔자부(八字符)이니 백세에 전하여 고치지 말아야 것이다.”
이상의 말에서 살펴본다면 공의 마음을 측량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의 초배(初配)는 사천목씨(泗川睦氏)로 좌랑 창만(昌萬)의 따님이다. 공보다 1년 늦게 태어나고, 정유년(1717, 숙종 43)에 돌아가셨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규(圭)는 일찍이 재행(才行)이 있었으나 요절했고, 다음은 서(
)이고 다음은 야(壄)이고, 사위는 정희백(鄭熙百)이다. 후배(後配)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유(維)의 따님인데, 계미년(1703, 숙종 29)에 태어나고 병신년(1776, 영조 52)에 돌아가셨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육(坴)은 곧 비문을 청한 사람이고, 사위는 윤굉과 권상희(權尙熺)이다. 서는 아들이 없어서 종제 혁(赫)의 아들 윤학(允學)을 취하여 뒤를 이었고, 네 딸은 신탁(申晫), 강속(姜涑), 홍낙겸(洪樂謙), 권훈(權壎)에게 출가하였다. 야의 두 아들은 윤겸(允謙)과 윤익(允益)인데, 윤겸은 규의 양자로 나갔다. 육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윤감(允鑑), 윤흠(允欽) 두 글자 원문 빠짐 이다.
공은 이미 예리한 기량을 품었으나 밖에서 구하는 데 뜻을 끊고 한가로이 지내면서 성정을 함양하여, 세상 밖의 풍파를 알지 못한 채 때때로 문장으로 발휘함으로써 그 뜻을 나타내었다.
《사대춘추(四代春秋)》를 지은 바 있는데 이것은 곧 희필(戱筆)로서 전기체(傳奇體)이다. 또 《만록(漫錄)》 몇 권을 지어서 당쟁의 의논이 사람의 마음을 통하지 못하게 함을 통렬히 비판했는데, 위세에 두려워하지도 않고 좋아한다고 두둔하지도 않아 한결같이 정론으로 돌아가니, 말을 아는 사람이 “사가(史家)의 동호(董狐)이다.”라고 하였다.
아, 세상의 교화가 쇠퇴하고 당쟁의 의논이 횡행함에 광채를 숨기고 뜻을 펼 수 없었던 선비들이 어찌 한둘이었겠는가. 그러나 세상에서 오직 동소공을 추중하는 것은 아마 그 문채와 풍절이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점이 있어서 그러하리라.
가장을 지은 잠옹의 휘는 하행(夏行)인데 문행(文行)이 있어 공과 함께 ‘금곤옥우(金昆玉友)’라는 칭송이 있다고 한다.
두 부인의 무덤은 모두 공의 묘와 곁에 부장하였다. 다음에 명을 붙인다.
선생의 도는 / 先生之道
오직 정고(貞固)함을 보존했네 / 惟貞是保
벼슬을 초개처럼 보아 / 芥視軒冕
영락(零落)하게 지내기를 즐겼도다 / 樂此枯槁
선생의 글은 / 先生之文
오직 도리를 기준으로 삼았네 / 惟道是權
형식과 내용이 구비하여 / 華實具備
진부한 말을 버리기에 힘썼네 / 務去陳言
이미 도와 글이 이와 같으니 / 旣道文之若是
정녕 군자임이 분명하네 / 君子人乎君子
[주-D001] 동호(董狐) : 춘추 시대 진(晉) 나라 사관으로서 직필로 사실을 기록하였음. 영공(靈公)이 조순(趙盾)을 죽이려고 하자 조순이 달아나다가 국경을 넘기도 전에 조천(趙穿)이 영공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조천을 토벌하지 않았는데, 동호가 “조순이 그 임금을 시해했다.[趙盾弑其君]”고 기록했음. 이에 공자가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관이다. 법대로 기록하여 숨기지 않았다. [董狐古之良吏也 書法不隱]”고 말하였음. 《春秋 左傳 宣公 二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