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앵커는 전할 수 없는 진실:
히잡 논쟁과 바디우가 폭로하는 ‘가짜 관용’의 민낯
우리는 매일 수많은 뉴스를 마주합니다. 화면 너머 전해지는 세상 소식들은 빠르고 화려하지만, 정작 그 이면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최근 프랑스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히잡 착용 금지’ 논쟁을 보면서 우리는 무심코 지나치던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뉴스 앵커들은 그저 사건의 표면만을 전달하는 사람들인가? 그들에게는 이 세상을 꿰뚫어 보는 진정한 의미나 ‘진리 과정’이 부재한 것인가?”
현대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시선을 빌려 뉴스가 말해주지 않는 히잡 문제의 진실을 파헤쳐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거대한 허위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1. 뉴스가 전하지 않는 것: ‘알록달록함’이라는 위선적 다원주의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사회는 철저한 세속주의(라이시테)를 내세우며 공공장소나 스포츠 경기에서 히잡을 비롯한 무슬림 여성들의 전통 복장을 규제해 왔습니다. 표면적으로 뉴스는 이를 “여성 인권”이나 “공공의 중립성”이라는 세련된 명분으로 포장해 전달합니다.
그러나 바디우의 시각에서 이것은 자본주의와 세속적 현대성이 부리는 거대한 위선에 불과합니다. 평소에는 “세계는 알록달록하며 다양한 문화를 존중한다”며 다원주의를 찬양하던 자유주의자들은, 히잡을 쓴 무슬림 소녀를 볼 때 그녀를 독립된 실존적 주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유주의의 품에 안긴 이국적이고 세련된 구경거리’ 정도로 소비합니다. 뉴스는 바로 이 피상적인 풍경만을 반복해서 중계할 뿐입니다.
2. 진리의 충격 앞에 돌변하는 국가의 폭력
바디우는 날카롭게 경고합니다. 자유주의 체제는 ‘자기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 선에서의 얌전한 다양성’만 허용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히잡을 쓴 소녀들이나 이민자들이 단순히 구경거리로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과 신념을 가지고 서구 중심적인 자본주의적 계산법과 구조적 불평등에 대해 실제로 저항하거나 ‘진리 과정’을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순간, 다원주의를 외치던 국가와 언론은 즉각 돌변하여 법과 공권력이라는 폭력을 휘두르며 그들을 억압합니다. 뉴스는 이 폭력의 구조를 지우고, 오직 소수자들을 통제해야 할 ‘치안의 대상’으로만 둔갑시킵니다.
3. 앵커들은 의미가 없는가? — ‘지배적 계산의 법칙’에 갇힌 시스템의 목소리
그렇다면 왜 뉴스 앵커들과 미디어는 이러한 깊은 구조적 진실을 전하지 못할까요?
바디우의 언어로 빌려 말하자면, 주류 언론과 미디엄은 ‘지배적인 계산의 법칙과 공리적 원리’ 안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뉴스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굴러가는 데 필요한 정보, 시청률이라는 이윤, 그리고 국가 체제가 유지되도록 허용된 ‘관리 가능한 현실’만을 끊임없이 생산해 냅니다. 그들에게는 기존의 질서를 단호하게 정지시키고 새로운 진리를 선포하는 ‘진리 과정(예수님의 공생애와 같이 세상을 뒤흔드는 돌발적 파열)’이 부재합니다. 그들은 시스템의 계산기를 두드리는 충실한 관리자들에 가까울 뿐입니다.
맺음말: 뉴스의 성채를 넘어, 진짜 진리를 마주하는 아침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뉴스와 앵커들의 멘트 이면에는, 이처럼 짐승의 체계(자본과 국가의 지배적 계산법)가 품은 두려움과 통제의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히잡 논쟁을 단순히 ‘문화적 충돌’이나 ‘뉴스 거리’로 소비하는 것을 멈출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이 감추려 했던 진짜 야만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낡은 미디어와 종교의 성채가 전하는 가짜 평화에서 벗어나, 시대의 모순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참된 보편적 진리의 편에 서는 것—그것이 바로 뉴스가 침묵하는 시대에 우리가 비로소 ‘주체’로 깨어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