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6장. 2023년, 크루즈 여행
2023년 여름이었다.
우리 초등학교 동창 열한 명은 알래스카로 향하는 11박 12일 크루즈 여행에 올랐다.
공항에 모인 순간부터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들떠 있었다.
“야, 여권 챙겼지?”
“당연하지.”
“짐은?”
“내 짐 네가 왜 걱정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서로의 가방을 확인해주고, 여권을 다시 꺼내 보고, 비행기 탑승 시간을 확인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여행을 떠나는 순간만큼은 나이가 없었다.
어린 시절 소풍 전날 밤처럼 마음이 설렜다.
드디어 배에 오르다
드디어 배에 올랐다.
처음 배 안으로 들어섰을 때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넓은 로비와 반짝이는 조명, 여러 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곳곳에 마련된 식당과 카페.
“야, 이거 배 맞아?”
누군가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호텔이네, 호텔.”
객실을 찾아가 문을 열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야, 생각보다 좁다.”
“그래도 우리 집 안방보다 좋다.”
“침대는 하나네?”
“너희 둘이 한 방 쓰잖아.”
“누가 같이 잔대?”
시끌벅적한 소리가 복도까지 흘러나왔다.
짐을 대충 내려놓고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배가 출항하기 시작했다.
항구가 조금씩 멀어졌다.
누군가는 난간에 기대 손을 흔들었고, 누군가는 휴대전화로 연신 사진을 찍었다.
“야, 우리 진짜 간다!”
누군가 외쳤다.
배의 경적이 울렸다.
우우우웅―
그 소리가 가슴 깊은 곳까지 울렸다.
육지가 멀어지고 바다가 넓어졌다.
나는 난간을 붙잡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초등학교 운동장이 떠올랐다.
흙먼지가 날리던 작은 운동장.
그곳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이제는 거대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11박 12일 여행이 시작됐다.
배에서 맞는 첫 아침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선실 커튼을 열자 바다가 보였다.
육지는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바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는 하얀 물거품이 길게 남았다.
옷을 챙겨 입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춥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태수였다.
“춥다.”
“그런데 왜 나왔어?”
“네가 나왔잖아.”
태수가 웃었다.
잠시 뒤 친구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누군가는 커피를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빵을 들고 있었다.
“아침부터 뭐 먹냐?”
“배고프니까 먹지.”
“조금 있다가 아침 먹잖아.”
“배에서는 먹는 게 일이야.”
그 말에 모두 웃었다.
우리는 아침부터 또 웃었다.
식당으로 내려가자 음식이 가득 차 있었다.
빵과 과일, 달걀, 베이컨, 소시지, 샐러드와 각종 음식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누군가 접시를 들고 말했다.
“야, 이거 다 먹어도 되는 거야?”
“그러니까 크루즈지.”
친구들은 접시에 음식을 하나씩 담았다.
자리에 앉으니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누군가는 커피를 마셨고, 누군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데서 아침 먹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그 말에 모두 잠시 조용해졌다.
우리는 평생 수없이 많은 아침을 맞았다.
논밭에서,
공장에서,
회사에서,
가정에서.
그런데 이렇게 바다 한가운데서 친구들과 마주 앉아 아침을 먹는 날도 있었다.
아직 여행 첫날 아침이었다.
앞으로 며칠 동안 우리는 육지를 떠나 바다 위에서 생활하게 될 터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묘하게 설렜다.
바다 위에서 보내는 시간
크루즈 여행에서는 시간이 조금 이상하게 흘렀다.
아침을 먹고 갑판에 올라가면 어느새 시간이 지나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누군가는 낮잠을 자러 가고, 누군가는 수영장으로 가고, 또 누군가는 바다를 보러 나갔다.
우리 열한 명이 하루 종일 함께 붙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식사시간이면 다시 모였다.
“누구 어디 갔어?”
“몰라.”
“아까 수영장 간다던데.”
“저 나이에 수영은 무슨.”
“너보다는 잘할걸?”
또 웃음이 터졌다.
며칠 동안 이런 시간이 반복됐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좋았다.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지나가는 바다를 바라보고,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배 안에는 공연장도 있었다.
저녁이면 음악이 흘러나왔고, 사람들이 공연을 보기 위해 하나둘 모여들었다.
친구들은 공연을 보면서도 서로 귓속말을 했다.
“저 사람 춤 잘 춘다.”
“너도 한번 해봐.”
“내가 춤추면 너희 다 도망갈걸?”
공연이 끝난 뒤에는 노래방으로 향했다.
만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은 내가 첫 곡 간다.”
“또 시작이다!”
음악이 시작되자 만수는 몸을 흔들었다.
종수와 관수가 곧바로 옆에서 따라 했다.
우리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배 밖에는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배 안에서는 오래된 친구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바다 위에서의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고래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갑판에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들었다.
“고래 나온대!”
누군가 소리쳤다.
우리도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저마다 망원경이나 휴대전화를 들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저쪽!”
“어디 말하는 거야?”
“아, 방금 나왔는데!”
“사진 찍었어?”
“못 찍었어!”
친구들이 난간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잠시 후 멀리서 물기둥이 솟았다.
푸우우―
“왔다!”
우리 모두 동시에 소리쳤다.
검은 고래의 등이 잠깐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사라졌다.
“봤냐?”
“봤지!”
“진짜 크더라.”
“나는 꼬리까지 봤어.”
서로 자기가 더 많이 봤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또 웃었다.
고래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날의 고래는 아주 잠깐 모습을 보여주고 사라졌지만, 우리에게는 여행의 한 장면으로 오래 남았다.
그리고 배는 다시 알래스카를 향해 천천히 북쪽으로 나아갔다.
빙하를 향해
며칠간 바다 위를 항해한 뒤, 드디어 알래스카의 풍경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배 위에 올라오는 사람들의 옷차림부터 달라졌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나오는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누군가는 장갑을 끼었고, 누군가는 목도리를 둘렀다.
“야, 이거 너무 춥다.”
“그러니까 옷을 더 입으라니까.”
“나는 한국 사람이라 추위에 약해.”
“한국 겨울은 더 춥잖아.”
“그래도 여기는 다르지.”
한참을 항해하던 배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멀리 산 사이로 하얀 빙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작은 흰색 벽처럼 보였다.
배가 가까워질수록 빙하는 점점 커졌다.
하얀 얼음벽이 산 아래에서 바다까지 이어져 있었다.
누군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와…”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사진을 찍던 친구들도 어느 순간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냥 눈으로 보고 있었다.
배는 빙하 앞에서 천천히 방향을 바꾸었다.
한쪽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했다.
“우리 쪽으로 온다!”
배가 돌아가자 반대편 친구들이 소리쳤다.
“야, 이제 우리 차례다!”
웃음이 터졌다.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지만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빙하에서 간혹 얼음이 떨어질 때면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쿵―
멀리서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방금 떨어진 거야?”
“그런 것 같은데.”
우리는 다시 빙하를 바라봤다.
몇십 년을 살아오면서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태수는 한참 빙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우리 이런 데까지 와서 같이 보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만으로 충분했다.
빙하를 바라보며 먹는 알래스카
빙하를 바라본 뒤 갑판 한쪽에서 따뜻한 음식이 나왔다.
찬 바람 속에서 따뜻한 국물 냄새가 올라왔다.
친구들은 종이컵을 하나씩 받아 들었다.
“야, 이게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
“추워서 그렇지.”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마시자 몸속까지 온기가 퍼졌다.
우리는 빙하를 바라보며 음식을 먹었다.
식당 안에서 먹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이거 사진 찍어서 가족한테 보내야겠다.”
“보내.”
“뭐라고 보내?”
“‘나 아직 살아 있다.’”
모두 웃었다.
빙하를 뒤로하고 배가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알래스카의 풍경은 조금씩 멀어졌지만, 배 안의 일상은 다시 시작됐다.
여행 중에도 변함없는 친구들
항해 중 또 한 번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와이파이가 끊겼다.
“어?”
“카톡이 안 되는데?”
“사진도 안 올라가.”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이거 안 되면 가족들이 걱정할 텐데.”
그때 태수가 일어났다.
“내가 알아볼게.”
태수는 승무원을 찾아갔다.
잠시 뒤 돌아온 태수가 말했다.
“네트워크 쪽 문제래.”
“그래서?”
“조금 기다려봐.”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에서 알림음이 한꺼번에 울렸다.
띵.
띵띵.
“됐다!”
친구들이 박수를 쳤다.
“역시 안다태!”
태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별거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 불편해하고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그게 태수였다.
여행지가 어디든, 배 위에 있든 육지에 있든, 태수는 여전히 태수였다.
그리고 우리도 여전히 어린 시절 그 모습 그대로였다.
옛날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고
어느 날 점심을 먹으며 학예회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우리 반에서 연극했잖아.”
“맞아.”
“민수가 대사 하나를 까먹었지.”
민수가 숟가락을 멈췄다.
“내가?”
“그래, 너.”
민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어?”
친구들이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민수가 다시 물었다.
“우리 그때 학예회 했었어?”
순간 폭소가 터졌다.
“민수야!”
“너는 진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민수도 웃었다.
“나는 왜 기억이 안 나지?”
누군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억해줘야지.”
그 말에 모두 잠시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세월이 흐르면 혼자서는 기억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
하지만 친구가 옆에 있으면,
“그때 너 이랬잖아.”
하고 다시 꺼내준다.
여행은 풍경만 남기는 것이 아니었다.
잊고 있던 기억까지 다시 꺼내주고 있었다.
저녁이면 다시 노래방으로
저녁이 되자 만수가 나타났다.
“자, 오늘 노래방 간다.”
종수와 관수가 동시에 일어났다.
“또?”
“오늘은 내가 부를 거야.”
만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노래가 시작되자 세 사람은 금세 무대 앞을 차지했다.
우리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만수는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친구들을 향해 마이크를 내밀었다.
“다 같이!”
열한 명이 한꺼번에 따라 불렀다.
누가 음정을 맞췄는지도 몰랐다.
박자가 맞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재미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만수가 말했다.
“야, 우리 아직 죽지 않았다.”
“그건 인정한다!”
박수가 터졌다.
그렇게 하루가 또 저물었다.
광수와 한수
다음 날 아침에도 광수는 일정표를 들고 있었다.
“오늘 몇 시에 내려가야 하는지 알아?”
“몰라.”
“일정표 안 봤어?”
“네가 알려주잖아.”
광수가 한숨을 쉬었다.
“아휴, 나는 한숨도 못 잤어.”
친구들이 동시에 웃었다.
“너 어제 제일 먼저 잤잖아.”
“아니야.”
“코까지 골았어.”
광수는 못 들은 척 일정표를 접었다.
그 옆에서 한수가 웃었다.
저녁이 되자 한수는 또 마이크를 잡았다.
「잊혀진 계절」
조용한 노래가 배 안에 흘렀다.
아까까지 떠들던 친구들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창밖으로는 검은 바다가 지나가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가 터졌다.
한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광수가 말했다.
“너 이런 재주가 있었냐?”
한수가 웃었다.
“몰랐냐?”
여행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더 자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게 됐다.
즐거운 시간은 이상하게 빨리 지나갔다.
바다를 바라보는 영수
그날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갑판으로 나갔다.
영수가 먼저 와 있었다.
난간에 기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자?”
내가 묻자 영수가 고개를 돌렸다.
“잠이 안 오네.”
나도 옆에 섰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는 어둠 속을 천천히 나아갔다.
멀리 보이는 불빛도 없었다.
하늘에는 별이 떠 있었다.
영수가 말했다.
“우리 참 멀리 왔다.”
“그러게.”
“어릴 때 이런 데 올 줄 알았겠냐?”
나는 웃었다.
“그때는 읍내 가는 것도 큰 여행이었잖아.”
영수가 웃었다.
우리는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말이 없어도 편했다.
그날 밤 바다는 유난히 조용했다.
나는 우리가 처음 배에 올랐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모두가 들떠 있었다.
이제는 여행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시 만난 아이들
며칠 동안 우리는 배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는 함께 밥을 먹고,
낮에는 바다와 빙하를 바라보고,
항구에 도착하면 함께 내려가 거리를 걸었다.
저녁이면 다시 배로 돌아와 술잔을 기울이고 노래를 불렀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다가 웃었고,
누군가는 멀리 떨어져 조용히 바다를 바라봤다.
열한 명의 모습은 모두 달랐다.
하지만 한 배에 타고 있었다.
어릴 때 우리는 작은 운동장에서 함께 뛰었다.
이제는 태평양과 알래스카의 얼음 바다 위에서 함께 걷고 있었다.
그날 밤 갑판에 모여 앉은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깊어진 주름.
조금씩 느려진 걸음.
그런데 웃을 때만큼은 이상하게 예전 얼굴이 보였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우리가 여행을 온 것은 알래스카를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오래전에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러 온 것인지도 몰랐다.
바다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곁에서는 또 웃음이 터졌다.
“야, 내일 아침 몇 시에 만나?”
“왜?”
“같이 밥 먹어야지.”
“또 먹어?”
“크루즈에서는 먹는 게 여행이야.”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모두가 웃었다.
배는 다시 천천히 북쪽으로 나아갔다.
우리도 함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