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許筠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사회 모순을 비판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이다. 《홍길동전》 외에도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등의 작품을 집필했다. 1606년 원접사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여 명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1610년 진주 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가 되었고, 천주교 12단(端)을 가져왔다.
홍길동의 아버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은 당대에도 명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나 그에 앞서 부패한 정치와 잘못된 제도의 개혁을 통해 자신이 바라던 이상 사회를 이루고자 노력했던 개혁 사상가였다. 명문가에서 태어났음에도 소외 받는 이들에게 애정을 지니고 있었고, 서자나 기생들과도 교류했으며, 당시 배척받던 불교를 받들었다. 성리학이 지배 이념이었던 왕조 사회에서 “천하에 가장 두려운 것은 백성이다.”라는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민초들의 힘을 모아 패도한 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새 질서를 창출하려는 방벌론(放伐論)의 기치를 들기도 했다. 그의 이런 행동들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하지만 개혁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반역자로 남아 비극적인 생애를 마쳐야만 했다.
허균은 1569년(선조 3) 경상도 관찰사인 아버지 허엽과 둘째 부인인 강릉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허균의 가문은 대대로 관료를 배출한 명문가로 아버지 역시 뛰어난 학자였다. 허엽은 첫 번째 부인이 1남 1녀를 낳고 요절하자 두 번째 부인을 들여 2남 1녀를 낳았는데 그 막내가 허균이었다.
허균이 열두 살에 아버지 허엽이 세상을 떠나고 큰 형인 허성이 집안을 책임지게 되었다. 형제자매들은 모두 문학적인 재주가 뛰어났다. 특히 허균은 아홉 살 때부터 시를 지었고, 허난설헌으로 알려진 누나 허초희도 시 짓는 실력이 뛰어났다. 그는 특히 누나와 사이가 좋았는데 누나가 시집을 가자 매우 적적해하며 더욱 시 짓기에 매달렸다.
허균은 처음에는 유성룡에게 배우다가, 나중에는 둘째 형의 친구인 손곡 이달에게서 배웠다. 이달은 비록 서자 출신이기는 했으나 이름난 시인이었다. 그러나 첩의 자식은 과거를 치를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 때문에 과거를 볼 수가 없었다. 이달은 가끔씩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술에 취해 울분을 터뜨리고는 했다. 그런 스승을 보면서 허균은 조선 사회의 불합리함에 대해 느낀 바가 컸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훗날 그가 《홍길동전》을 쓰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홍길동전》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로 조선 중기의 사회 모순을 폭로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다양한 의적 소설과 드라마, 만화영화, 영화 등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소설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허균에게도 과거는 의미가 컸다. 그런데 열일곱 살에 초시에 급제하고 생원시를 앞두었을 무렵, 둘째 형 허봉이 세상을 떠났다. 허봉은 재능이 뛰어난 인물로 열여덟 살에 생원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이미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이이의 행적을 비난 했다는 일로 서인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종성(終城)으로 유배를 갔고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방랑 생활을 하다가 서른여덟 살의 나이로 금강산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난히 자신과 닮았던 형의 죽음으로 그는 큰 고통을 겪었다.
이듬해에는 누이 허난설헌까지 불행한 결혼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슬픔을 공부로 이겨 내면서 1589년 생원시에 급제했다. 그러나 곧 임진왜란이 터졌고 부인 김씨가 피란 중에 첫아들을 낳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계속되는 비극은 그를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만들었다. 결국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를 하고 황해도 도사까지 되었으나 서울에서 기생을 데리고 와 노는 등 방탕한 행동으로 탄핵을 받아 파면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했다. 그의 눈에는 오히려 위선에 찬 조정이 더 썩어 보였기 때문이다. 서울로 돌아온 그의 집에는 자연스럽게 서얼 출신 문인들이나 승려, 무사들이 드나들었다. 허균은 이런 젊은이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사회의 부조리를 한탄했고, 급기야 서출인 서양갑(徐羊甲) 등과 함께 서출에게도 임관의 기회를 달라는 청원서까지 제출했다. 그러다 보니 벼슬아치들은 그를 곱게 보지 않았고 양갓집 자제들은 허균을 ‘막된 인간’이라 보며 멀리했다. 그는 관직에서 멀어진 채 강원도 금강산에 머물면서 병서를 읽고 거사를 꿈꾸며 자금을 모았다. 《홍길동전》은 이 무렵 집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를 안타깝게 여기던 맏형 허성은 그를 설득해 다시 관직에 나가게 했다. 1604년 그는 성균관 전적이 되었고 이듬해 명나라에서 특사가 방문하자 그 접대를 맡게 되었다. 명나라 사신들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를 원하자 그는 4권의 시집을 건네주었고, 그중에는 허난설헌의 시집도 있었다. 이 시집들은 모두 명나라에서 출판되어 우리 문학을 중국에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허균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던 당시의 분위기와 어긋나게 관청 안에서 불경을 외우고 염불을 암송하는 행동을 하여 다시 관직에서 쫓겨났다. 게다가 시험에서 친구와 친척들을 합격시키는 부정행위까지 저지름으로써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때는 허성을 아끼던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한 때라 그에게 도움을 줄 인물이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의 유배 생활을 거친 후 형조 판서, 좌참찬에 올랐지만 계속되는 권력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안한 삶을 살았다. 그가 좌참찬이던 1617년, 인목대비의 폐비 논의가 일어났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의 계비로 광해군의 어머니뻘이었다. 나이는 광해군보다 열 살 아래였는데 인목대비의 아버지와 자식이 모두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광해군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허균은 인목대비의 폐비에 찬성했다. 그러던 중 인목대비를 모략하는 글이 그녀가 거처하는 경운궁에 던져졌다. 이 일을 주동한 사람으로 허균의 일파인 김윤황이 지목되었다.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이 일이 허균과 관련이 있다며 물고 늘어졌다. 이 공방은 허균 쪽의 승리로 일단락되었고, 폐비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은 유배를 떠났다.
그런데 그해 말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렸다. 허균이 역모를 꾀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허균이 반대 상소를 올려 일이 마무리될 무렵인 1618년 8월 10일 새벽, 남대문에 격문이 붙었다. 불쌍한 백성을 위해 광해군을 제거할 것이니 모두 도성에서 피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격문이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사건의 배후자로 다시 허균이 지목되었다. 조정에서는 허균을 처형하라는 대신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특히 당시 권력자인 이이첨은 허균을 처형하라고 광해군을 압박했다.
허균을 탈옥시키려는 움직임도 일었는데 주로 하급 아전들과 노비, 무사 등 소외받던 사람들이었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이이첨은 허균의 주변 인물들을 잡아들여 모진 고문 끝에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조정 대신들은 허균을 당장 처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광해군이 정확한 진상 조사를 명했지만 역적 허균을 하루빨리 죽여야 한다는 대신들의 상소만 쌓일 뿐이었다. 허균에게는 변론의 기회조차 없었다. 일은 자백도 판결문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인명을 소중히 여겨 삼복계(사형은 세 번 반복해 심리를 한 뒤 결정해야 한다는 형사 절차상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고,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죄인의 자백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허균에게는 이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지 못한 채 1618년, 쉰 살의 나이로 능지처참을 당해 생을 마감했다. 허균의 몸은 여섯 토막으로 찢겨 각지로 보내져 경계(警戒)로 삼았으며, 재산은 몰수되었고, 직계가족 중 남자들은 모두 사형당했다.
허균은 비록 대역 죄인으로 죽었지만 그를 따르던 백성들도 많았다. 잘린 허균의 머리를 수습하려다 잡혀간 사람도 있었다. 그가 처형된 뒤로도 몇 달 동안 그를 따르던 이들이 계속 잡혀 들어갔고 귀양을 가거나 고문 끝에 죽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인조는 광해군 시절 역모 죄로 처형되었던 사람들을 모두 복권시켰으나 허균은 조선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모두가 천시하던 한글로 쓰인 《홍길동전》을 통해 그가 꿈꾸던 이상 사회의 정신이 전해 내려왔을 뿐이다.
출처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윤재운 | 청아출판사 글윤재운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펼쳐보기 장희흥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펼쳐보기
1. 개요[편집]
2. 생애 초기[편집]
조선 중기에 작은 어촌 마을 강릉 사천진리의 애일당(愛日堂)에서 태어났다. 가족 중 유명한 사람은 '시'로 유명한 허균의 누나 허난설헌(허초희)이 있다.
애일당은 허균의 외조부 예조판서 강릉 김씨 김광철의 집인데, 김광철의 딸이 허균의 친부 허엽의 둘째 부인이 되면서 강릉의 애일당은 허균의 외가가 되었다. 허엽과 강릉 김씨의 자식인 허봉, 허난설헌, 허균은 모두 강릉에서 자랐다.
허균은 어렸을 때부터 외가에 올 때마다 외사촌들과 함께 사천 앞바다로 나가 바다낚시를 했다. 애일당 뒤쪽에서 사천 앞바다로 이어지는 "이무기 같은" 꾸불꾸불한 능선이 "교산(蛟山)"인데 허균은 이 교산을 이후 자신의 호로 지었다. #
5살부터 글을 읽었고, 9살 때 시를 잘 지었다. 동시대 인물인 유몽인은 어린 시절의 허균을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라고 말하면서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아래의 일화를 소개했다.
9세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작품이 아주 좋아서 여러 어른들이 칭찬하며, ‘이 아이는 나중에 마땅히 문장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모 사위 우성전(禹性傳)만은 그 시를 보고, ‘훗날 그가 비록 문장에 뛰어난 선비가 되더라도 허씨 문중을 뒤엎을 자도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우야담 #
집안에선 여성이었던 허난설헌은 허균의 동복 형 허봉이 따로 스승을 붙여 주어 허균과 함께 글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 스승이라는 사람은 서자 출신의 유명한 학자였던 손곡 이달이다. 손곡 이달은 허균의 동복 형 허봉의 친구였으며, 허봉의 추천 덕분에 허균과 허난설헌은 이달의 문하에 들어가서 같이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허봉과 허균은 형제관계가 좋았는데 허균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허봉이 "열다섯 어린 아이의 필봉이 늠름하다"라고 하면서 허균의 글 솜씨를 칭찬한 적이 있었다.
다음은 임상원 (任相元, 1638~1697)의 저서 <교거쇄편>에서 묘사된 허균과 허난설헌이 어렸을 때 같이 시를 공부할 때 이야기이다.
허균은 글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는데, 어릴 적에 일찍이 시를 써서 그 누님 난설헌에게 보였다. 그 시의 내용에 "여인이 흔들어 그네를 밀어 보낸다."라는 시구를 보고, 난설헌이 말하기를 "잘 지었다. 다만 한 구가 잘못 되었구나."하였다. 동생 균이 "어떤 어구가 잘못 되었는가?"라고 물으니, 난설헌이 곧 붓을 끌어 쓰며 "문 앞에는 아직도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이 있는데, 백마를 타고 황금채찍질 하면서 가버렸다."라고 고쳐주었다. ㅡ 《교거쇄편》 제2권 [출처1] 허난설헌은 1577년 김성립과 혼인하기 전까지 이달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허균은 이후 계속 이달과 글공부를 했다. 이후 허균은 스승 이달을 위해서 이달의 시 200 여수와 홍유형(洪有炯)으로부터 얻은 130여 수를 엮어서 1618년 간행했다. 그러나 혀균이 대역죄로 죽어서 손곡집은 유포가 금지되었으며, 허균의 후손 허영(許穎)이 1693년 간행한 것이 현존하고 있다.
3. 가족의 연이은 사망과 과거 급제[편집]
1580년 허균의 친부 허엽이 경상북도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했으며, 1583년까지 허균은 다른 가족과 함께 성리학의 장례 관습에 따라 삼년상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585년 초시를 급제하고 안동 김씨 김대섭의 차녀와 결혼했다.
1년 후 18살이 되었을 때 여름 봉은사 아래에서 동복 형 허봉의 친구 사명당에게 불교와 문학을 배웠으며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서 문장을 배우고 손곡 이달에게 당나라 시를 배웠다.[2]
1588년 허균의 형 허봉이 율곡 이이를 조정에서 비판하고 귀양을 간 후 금강산 근처 김화군 생창역(生昌驛)에서 황달과 폐렴 증상을 보이면서 병사했다.
1589년 음력 3월 17일 허균은 증광시(增廣試) 시험을 한성부에서 보고 합격했으며, 생원시 2등에서 20위로 급제했다.# 5월 3일 누나 허난설헌이 두 자식이 죽은 충격으로 요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형 허봉이 죽은 것도 충격이 컸지만 누나 허난설헌의 죽음은 허균에게 더 큰 충격이었다. 허균은 이후 간행한 '성소부부고'에서 형과 누나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을 여러번 표현한다.
돌아가신 나의 누님은 현숙하고 문장도 지녔으나, 시어머니의 사랑을 얻지 못하였고 또 두 자식까지 잃어 마침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늘 생각하면 몹시 슬퍼하길 마지 아니하였는데... 누이를 애통해 하는 정이 애절하고 구슬프니 천 년이 지난 오늘 동기간의 슬픈 정이 이와 같이 서로 같았다. 성소부부고 제3권 훼벽사(毁璧辭) 병서(幷序) #
(허봉)형이 귀양 가기 전 옥당(玉堂)에 있을 때 꿈속에서 시를 짓기를 텃밭에 채마 부치노라니 솜씨야 늘었다만 / 稼圃功夫進 천상은 꿈결에도 어렴풋 / 煙霄夢寐稀 오직 가의의 눈물만 남아 / 唯殘賈生淚 밤마다 차가운 옷을 적실 뿐 / 夜夜濕寒衣 하더니, 가을이 되자 갑산(甲山)에 귀양 가게 되었다. 누님이 평시에 또한 꿈속에서 지은 시에 푸른 바단 신선 사는 요해에 젖어들고 / 碧海浸瑤海 청난은 채봉을 기대었구나 / 靑鸞倚彩鳳 연꽃 스물일곱 송이 / 芙蓉三九朵 서리같이 싸늘한 달빛 아래 지는구나 / 紅墮月霜寒 하더니 이듬해 신선되어 올라가니, 3에 9를 곱하면 27로서 누님 나이와 같으니, 인사에 있어 미리 정해진 운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허난설헌)누님의 시문은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들이다. 유선시(遊仙詩)를 즐겨 지었는데 시어(詩語)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음식을 익혀 먹는 속인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문(文)도 우뚝하고 기이한데 사륙문(四六文)이 가장 좋다.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이 세상에 전한다... 아, 살아서는 부부금슬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받들 자식이 없으니 옥이 깨진 원통함이 한이 없다.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학산초담(鶴山樵談) #
4.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행적[편집]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허균은 홀어미니 장릉 김씨, 부인 안동 김씨, 어린 딸과 함께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을 피해 피난을 가던 중 안동 김씨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하고 첫아들도 전쟁 중에 병사했다.
임진왜란 시기부터 외가 애일당 뒷산의 이름을 따서 호 교산(蛟山)을 사용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집필에 몰두했다.
저자 김동진의 책 임진무쌍 황진에 의하면 허균의 이복 형 허성이 평안도로 피난가는 선조를 따라 간 후 평양에서 선조에게 "강원도에 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왜적과 싸우겠다고 자청했다." 이후 허성은 강원도 순무어사로 임명되었다. 허균은 1605년 4월 16일 선조에게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로로 허성과 함께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는데 이 시기부터 강원도 순무어사가 된 허성과 함께 가문의 본거지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변사가 허성이 "경상도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탄핵한 것을 보면 막상 의병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동인의 초대 당수 선산 김씨 김효원의 딸과 재혼한 이후 분조를 맡은 세자 광해군이 강원도(북한) 이천군에 가서 분조를 이끌 때 동행했으며, 그 공로로 후에 위성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594년 음력 2월 29일 문과 정시에 을과 급제, 합격자 13명중 3번째로 2위였다. # 1597년 음력 4월 2일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했으며, 합격자 5명중 1위였다.# 이후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직인 접반사(接伴使)가 되어서 명나라 사신을 수행하면서 외교관으로서 공을 세웠다.
5. 이매창과의 교류[편집]
임진왜란 후 허균은 기녀들과 많이 친했는데 1598년 황해도 도사로 부임하던 중 한성부의 기녀와 동행해서 탄핵을 받은 적이 있었다.
1601년과 1609년 사이 허균은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의 세금을 걷는 전운판관을 하면서 부안[3]의 명기이자 기녀 이매창과 친해졌다. 허균과 이매창은 친한 친구 관계였는데 1609년 9월 이매창이 죽기 1년전 이매창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이매창을 그리워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봉래산[4] 가을빛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고픈 흥을 가눌 길 없네. 낭자는 내가 구학의 맹세를 저버렸다 응당 비웃겠지. 그때 만약 한 생각이라도 어긋났다면 나와 낭자의 사귐이 어찌 10년간 끈끈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나?... 언제나 하고픈 말 마음껏 나눌 수 있을지. 종이를 앞에 두니 서글퍼지는구려. 1609년 9월 허균이 이매창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출처2]
6. 사상의 자유 포용[편집]
허균은 유교와 시, 학문 등을 가르친 스승 이달, 류성룡 뿐 아니라 다양한 사상가들과도 친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특히 불교의 승려 사명대사는 허균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존경하는 도교 인물로 나이 80에 도교를 믿고 득도했다고 알려진 남궁두(南宮斗)라는 인물과 도를 깨추친 요나라 신선 방회 등이 있었다.
<성소부부고>와 <어우야담>에 의하면 1606년 허균이 1605년 탄생한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장손에 대한 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주지번과 양유년을 영접하는 원접사 유근의 종사관이 되어 의주에 가는데 음력 3월 4일 동행한 신흠이 허균이 날마다 고서를 입으로 외우는 것을 들었는데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사상의 책들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이 탄식했다.#
"그는 사람이 아니다. 생김새 또한 좋지 않으니 필시 여우, 뱀, 쥐 등의 정령일 것이다." <어우야담>
신흠은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의 이종사촌이며, 김성립은 허균의 매형이다. 즉 허난설헌과 김성립을 알게 되면서 허균도 전부터 알고 지냈을텐데 허균이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1610년 스승 사명대사가 입적한 이후 1612년 허균은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요약한 '사명대사 석장비명'을 썼다.#
7. 누나 허난설헌의 시집 간행[편집]1589년 5월 3일 허균의 동복 누나 허난설헌이 사망할 때 유언으로 허균에게 "내가 쓴 문집을 전부 불태워서 없애다오"는 말을 남겼는데, 허균은 이를 듣지 않고 누나의 시를 모아서 시집 간행에 착수했다.
허균은 1590년 스승 류성룡에게 허난설헌의 시를 보여주었는데 류성룡은 허난설헌의 시집 <난설헌고(蘭雪軒藁)>의 발문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훌륭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 어떻게 하여 허씨의 집안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돌아가 간추려서 보배롭게 간직하여 한집안의 말로 비치하고 반드시 전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서애집>#
이후 1598년 정유재란 때 원정 나온 명나라의 오명제에게 허난설헌의 시 200여 편을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 《열조시선》 등에 실리게 했다.
이때 명나라 사신 주지번과 양유년을 만나서 그동안 보관한 누나 허난설헌의 시집을 주어서 중국에서 난설헌시집으로 간행할 수 있도록 했다. 스스로도 누이의 유고를 모아 조선 최초의 여성문집인 <난설헌집>을 1608년에 출간했다. 이렇게 동생 허균에 의해 중국에 전해선 난설헌의 시는 조선과 중국에서 대대적인 히트를 치게 된다. "난설헌의 시는 하늘에서 떨어진 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다"(<열조시집>) "(당나라 대표시인) 이태백을 뒤로 물러나게 한다"(<고금야사>)는 극찬까지 이어졌다. 중국의 편집자들이 난설헌의 시를 앞다퉈 실었으니 가히 난설헌 열풍이라고 할 만 했다.
이후 조선의 문화를 명나라에 알린 공로로 광해군이 허균을 삼척부사로 임명했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1604년과 1607년 사이 여러번 탄핵당했다.
8. 강변칠우와의 관계, 적서차별 반대[편집]
1607년 12월 공주 목사로 부임하면서 처외삼촌 심우영과 친한 양반가의 서얼 서양갑 등 서얼들과 친해졌는데 친해진 서얼 중 1613년 계축옥사에 관련된 모임 강변칠우의 일원들도 있었다. 허균은 기존 사회의 적서(嫡庶) 차별과 신분제에 강한 회의와 불만을 가지게 되었는데, 후에 당시 사회에 불만을 갖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서얼과 접촉하여 역성 혁명을 일으키고 적서와 반상의 차별을 타파하기 위한 모의를 했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허균은 서얼들과 친했는데 1607년 이후 친해진 서얼 심우영을 편지에서 "내 친구 심군"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서양갑은 양반 가문의 아들이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혀있었고 같은 처지인 심우영, 이경준, 김평손과 함께 1608년 연명으로 상소했으나 거절당했다.
1609년 명나라로 가는 조선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참여해서 조천[6]을 방문했으며, 천주교 기도문을 가지고 조선에 돌아왔다. 1610년 2월 베이징을 방문할 천추사가 되어서 명나라를 갔다 왔으며, 1610년 4월 다시 천추사에 임명되자 "병이 위중하다 핑계하고 참석"하지 않아서 파직되었다. # 이후 사헌부에서 "감히 싫어하고 꺼리는 마음을 갖고 병을 핑계로 상소하여 누차 성상을 번거롭게 하였고, 심지어는 방물을 싸서 봉하는 날 모른 체 나오지 않음으로써 시급한 하절(賀節)의 행차가 끝내 낭패스럽고 전도되는 근심을 면치 못하게 하였다"고 탄핵했으나 광해군이 허균을 처벌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
허균(許筠)은 본디 경망스럽고 아첨을 잘하는 사람인데 조그마한 재주가 있는 것을 무기로 삼아 일생동안 해 온 일이라곤 그저 은밀히 자기 사욕을 채우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예전에 경외(京外)의 대소 과거에 시관(試官)이 되었을 때에도 대부분 사정(私情)을 따라 행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천시를 받아 온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시(殿試) 때에 대독관(對讀官)이 되어서는 더욱 거리낌없이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노력하였는데, 거자(擧子)의 답안지를 거둘 때에는 일부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자리를 잡고 거두는 시험지를 하나하나 가만히 살폈으며, 또 차비관(差備官)이 있는 근처에서 숙박하면서 자표(字標)를 탐지해 누구누구가 지은 것인지를 모두 알아내고는 시험 답안지 5백여 장을 모두 자신이 읽어 보겠다고 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과거 시험 성적을 매길 때 자기 멋대로 손을 써서 어떤 것은 잘되고 어떤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심사할 때마다 앞장 서서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자기가 뽑고 싶은 사람의 답안지가 불합격 대상에 이미 포함되어 있을 경우라도 멋대로 직접 뽑아내어 합격자 명단에 올렸으므로 동참했던 시관들이 둘러 앉아 서로 돌아보면서 모두 가증스럽게 여겼습니다. 그가 제멋대로 좌지우지하면서 사정을 쓴 자취가 뚜렷하여 숨길 수가 없는데 이에 대해 나라 안에 말들이 자자하고 물정(物情)이 날이 갈수록 더욱 분개하고 있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해 버리도록 명하소서.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 #
1610년 10월 전시(殿試)의 대독관(對讀官)으로서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형 허성의 셋째 아들 허보(許寶)와 셋째 딸의 남편 박홍도(朴弘道)를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사헌부가 탄핵했다.
허균의 제자 이식은 택당잡저에서 허균과 서양갑 등 강변칠우 소속 서얼들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수호전(水滸傳)》을 지은 사람의 집안이 3대(代) 동안 농아(聾啞)가 되어 그 응보(應報)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도적들이 바로 그 책을 높이 떠받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허균(許筠)과 박엽(朴燁) 등은 그 책을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적장(賊將)의 별명을 하나씩 차지하고서 서로 그 이름을 부르며 장난을 쳤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허균은 또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짓기까지 하였는데, 그의 무리인 서양갑(徐羊甲)과 심우영(沈友英) 등이 소설 속의 행동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다가 한 마을이 쑥밭으로 변하였고, 허균 자신도 반란을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농아보다도 더 심한 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택당선생 별집》(澤堂先生 別集) 제15권 〈잡저〉 ‘산록’ #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은 것은 서양갑 등 서얼들과 교류할 즈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허균을 연구한 학자들인 허경진과 이이화에 의하면 허균이 계축옥사 1년전인 1612년에 홍길동전을 지었다.[출처3] 현재 학자들은 허균의 저서 <성소부부고>의 "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를 토대로 전라북도 부안군 우반동 정사암터에서 허균이 홍길동전을 집필했다고 보고 있다. #
홍길동전을 지은 1년 전인 1611년 허균은 시와 문집을 엮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간행했다. 허균의 사상에서 정리된 '성소부부고'와 다른 저서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부터 적서차별을 공공연히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9. 허성과 박엽과의 교류[편집]
이 시기 허균을 도와준 건 이복 형 허성으로 보인다. 성수부부고에 의하면 1611년 허성의 맏아들 허실이 허균에게 음식을 보내서 허균이 "자네는 내가 양식 떨어질까 근심하는데, 나도 역시 자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무턱대고 행동하는 것을 걱정하네. 내가 자네를 근심하는 것은 자네가 내 걱정을 하는 것보다는 더할 터이니, 행동을 삼가서 다시는 어버이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하게나."라고 조카 허실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식에 의하면 허균은 수호전을 좋아했으며, 박엽과 함께 수호전의 도적 두목들의 이름으로 별명을 삼는 것을 즐겼다. 허균과 박엽은 실제로 친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606년 음력 1월 28일 허균이 조카와 함께 평양으로 여행을 갔을 때 당시 평양 서윤(平壤庶尹)인 박엽이 허균을 위해서 구름무늬로 장식한 선방(仙舫 놀잇배)에 춤추는 기녀들을 싣고 잔치를 베풀었으며 관서 지방에서 가장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 그러나 3년 후 1609년 음력 12월 허균과 박엽의 관계가 안 좋아진 건지 허균이 박엽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추부(秋部 형조(刑曹)의 별칭)에서 금속(禁贖 금령(禁令)을 어긴 죄로 내는 벌금)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공도 태수(孔道太守)가 문을 닫고 교지(敎旨)를 거절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문을 닫고 교지를 거절하고서는 제가 금속을 제거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니, 이는 법(法)으로 자기는 단속하면서, 예(禮)로 남을 대우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붕우(朋友)가 상호간에 권면(勸勉)하는 의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역시 각자가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할 뿐입니다. 《성소부부고》 제21권 / 문부(文部) 18 ○ 척독 하(尺牘下) "박숙야(朴叔夜)에게 보냄"[8] #
10. 계축옥사 당시 행적[편집]
1613년 허균과 친한 서얼들 서양갑, 심우영 등 강변칠우 일원들이 계축옥사에서 죽었고 허균은 이름이 언급되지 않아서 살 수 있었다. 이후 허균은 1589년 같이 생원시에 합격한 이이첨과 합류해서 대북에서 인목대비를 폐모하는 주장인 폐모살제의 선봉장이 되었다.
이후 허균이 역모 혐의로 죽은 이후 성소부부고의 발문을 쓴 허균의 외손 이필진은 허균이 폐모살제의 선봉장이 된 이유에 대해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에 끼어든 것은 본심이 아니었고 간흉(奸凶·이이첨)의 꾐에 빠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11. 인목왕후 암살 기도 및 역모 사건[편집]
대북의 영수 이이첨은 허균을 신뢰했고 허균이 인목왕후를 몇 차례에 걸쳐 암살을 기도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암살을 기도하는 과정에서 하인준 등 사람을 시켜 도성 내외에 유구국인들이 쳐들어온다는 내용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당시 소외되어 있던 불교계를 끌어들여 봉기 계획을 진행하면서 이이첨과 관계가 틀어졌다. 이후 허균의 일당 하나가 불심 검문으로 붙잡혀 계획이 탄로났다.
설상가상으로 허균의 제자인 기준격이 허균이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보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서 체포되었다. 원래 기준격은 전 영의정 기자헌의 아들로 불교에 심취한 기자헌이 역시나 불경을 섭렵하여 인연을 쌓게 된 허균에게 보내 글을 배우게 했는데 허균은 기준격 앞에서 언행을 조심하지 않았고, 때문에 기준격은 허균의 위험한 사상과 행보를 목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허균은 기자헌이 폐모론에 반대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맹렬히 공격하여 유배를 가게 했고 기준격이 격노하여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 논의 끝에 이이첨의 강력한 주장으로 조사도 하지 않고 반역죄로 단정되었다.
허균이 적서 차별을 혁파하고 역성 혁명을 일으키려 했다는 일부의 주장은 허균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서 체포된 황정필이 한 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황정필은 "추대하는 일은 허균이 애초에는 의창군을 추대하는 것으로 계책을 삼았는데 나중에는 허균이 스스로 하고자 하여 결정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자백했다. # 허균이 지은 호민론, 유재론 등 저서에서 적서 차별 등 조선 사회 문제를 언급하고 비판했으나 이 역모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적서 차별 혁파나 역성 혁명은 아니더라도 당시 시대상 불온한 주장을 많이 해서 반란 혐의로 죽기 전에 많은 사대부들의 눈 밖에 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실제로 실록 광해군일기 중초본 17권, 1609년 시점 사관이 허균은 "요사하고도 음란한데 단지 글재주가 있어서 진신의 반열에 끼었다."라고 부정적으로 서술했다. # 이미 죽기 전부터 조정에서 눈 밖에 난 인물이었는데 폐서인 과정에서 활약하다 죽게 된 것이다.
12. 최후[편집]
허균은 광해군 때 권신인 이이첨의 수족으로 영창대군 제거 이후 소성대비의 폐서인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유언비어를 살포하고 사람들을 모아 불궤[9]를 도모했다가 일이 커지고 발각이 나자 이이첨에게 버림받은 것 같다. 수감 중에도 부하들에게만 심문이 이루어졌으며 본인에게는 제대로 된 심문이 없었으며 곧 이이첨이 의금부에 드나들며 허균을 안심시키다가 창졸간에 끌어내 처형해버렸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허균의 죄는 "기준격의 전후 소 중에 나타난 흉모의 곡절과, 김윤황을 사주하여 흉격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과, 남대문의 흉방에 대해서 하인준이 허균이 했다고 이른 것, 몰래 승도들을 모아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한 것, 산에 올라가 밤에 소리쳐서 도성의 백성들을 협박하여 나가게 한 것, 유구(琉球)의 군대가 원수를 갚으러 와서 섬에 숨어있다고 한 설 등이 모두 허균이 한 것이라고 전후의 흉모에 대해 윤황과 하인준이 일일이 승복한 죄"였으며, 허균이 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한양 서쪽 저자거리에서 처형당했다. #
허균은 심문 받는 줄 알고 나왔다가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자 경악하여 광해군에게 "잠깐만! 아뢰올 말이 있습니다!"[10]라고 외쳤지만 신하들이 "닥쳐라 역적 놈아!"라고 욕을 퍼부었고 결국 한마디도 못하고 끌려나가야 했다. 자신이 역적이라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하자 동의 못한다고 버텼지만 억지로 서명하곤 사지가 찢어졌다. 그 이후 광해군의 반교문을 발표하기를, 성품이 짐승 같은 역적 허균을 잡았으니 대사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역적의 우두머리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전연 없었으며, 윤기를 멸시하고 상례(喪禮)를 폐지하여 스스로 자식의 도리를 끊었다. 붓을 놀리는 자그마한 기예로 출세하여 등급을 건너뛰어 외람되이 작위를 차지하여 녹을 훔쳤다.
홍로(弘老)와 체결하여 동저(東邸)를 위태롭게 하고자 도모했으며, 김제남(金悌男)을 지휘하여 서궁(西宮)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잡고자 하였다. 이의(李㼁)를 옹립하려는 계책을 세웠으나 수렴 청정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이광(李珖)을 추대하려는 계책이 또 같은 무리들에게서 나왔다. 선왕이 승하하신 틈을 타 감히 어린 왕자를 무함했으며, 중국에 들어가 상변(上變)하면서 만금의 뇌물을 쓰려고 했다. 비기(秘記)에 의탁해서 참언을 지어내 몰래 천도의 설을 퍼뜨렸으며, 경운궁(慶運宮)을 그리는 시를 지어 몰래 내부적 화란을 재촉하였다. 군기교(軍器橋) 머리에서 김윤황(金胤黃)에게 화살과 격문을 전달하였으며, 숭례문 밖에서 하인준(河仁浚)에게 방문을 붙이게 하였다. 대론에 가탁해서 조정의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돕는 것처럼 하였으며, 잡다한 무리들을 꼬이고 위협해서 늪지에 숨어 도적들을 규합하는 계책을 이루고자 했다. 밤낮으로 은밀하게 의논해서 역모가 더욱 진행되어 화가 조만간 일어나게 되었다. 산에 올라가 소리를 질러 서울을 놀라게 하였으며, 불을 들고 호응하여 사람들을 모두 도망하게 하였다.
그러나 기미를 밝게 비추고 있었으니, 어찌 그림자를 살피는 선견지명이 부족했겠는가. 묵묵히 도우시는 영령의 도움으로 다행히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면하게 되었다. 신령스런 거울을 높게 매달아 높아 도깨비같은 자들을 달아날 수 없게 만들었으며, 하늘의 그물을 넓게 펴놓아 여우같은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현응민(玄應旻)의 정확한 공초에 간악한 본정은 숨기기 어렵게 되었으며, 황정필(黃廷弼)의 정직한 공초에 흉악한 정상은 모조리 탄로났다. 3일을 옥에 가두어 두자 거짓말이 이미 곤궁하게 되었으니, 9월에 논공하자던 교활한 계책이 어찌 시행될 수 있었겠는가.
8월 24일에는 역적의 우두머리 허균과 역적의 도당 하인준(河仁浚)·김윤황(金胤黃)·우경방(禹慶邦)·현응민(玄應旻)을, 같은 달 26일에는 황정필 등을 모두 능지 처참해 죽였으며, 가산을 적모하고 파가 저택(破家瀦澤)하는 일을 일체 법률대로 시행하였다.
아, 죄인을 잡아서 이미 동쪽의 저자에서 죽이는 주벌을 가하였으므로, 다시 아름답게 명해 죄를 용서해 주는 사면을 반포한다. ㅡ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의 반교문 # 과정이 억지스럽고 의혹이 많기는 하나 어쨌든 역적행위로 잡힌 것이었기에 아들들은 연좌되어 처형당했고 허균의 아버지 허엽의 묘 또한 파헤쳐졌다.[11] 그와 관련된 인물들 역시 대거 체포당하였는데, 다만 사위 이사성과 조카들은 의금부에서 허균과 평소 친하지 않았음을 강조해 처벌받지 않았다.
보다 온건한 중북에 속했던 기자헌은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훗날 류희분도 이이첨이 허균을 심문도 안하고 죽인 것을 깠고 이에 이이첨이 주위에 “허균의 죽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던데 내가 평생 역적을 잡은 몸이 아니더냐?”라고 항변하니 다시 "이이첨이 평생동안 역적을 잡아 나라에 충성했다고 자랑하던데 그런 사람이 역적 처리를 그따위로 할 수 있습니까?"라고 허균의 죽음에 대해 까댔다.
12.1. 최후에 대한 논란[편집]
허균은 계축옥사 당시 자신과 친했던 서얼들인 강변칠우가 반역에 연루되자 당대의 권신 이이첨의 밑에 들어가 목숨을 연명했다. 반역이라는 것도 허균의 평가와 사상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허균이 평소에 자유분방하고 사회비판적이긴 했지만 반역을 생각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뜬금없어 보여서 최근에는 그가 이이첨에게 토사구팽당해 죽었다는 설이 지지를 받고 있다. 당시 광해군의 며느리이자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원손을 출산하지 못하자 이를 대신하기 위해 허균의 딸이 왕세자 이지의 후궁이 될 터라 허균이 굳이 갑자기 반역을 일으킬 만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이이첨 휘하에 들어가 영합하면서 충실하게 수족 노릇을 하지 않고 돌발 행동을 저질렀다. 하인준 등 심복을 시켜서 "여진족이 압록강을 넘어온다, 하남대장군이 죄인을 벌하러 온다" 등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한양 도성의 백성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이첨도 인목대비 처리 건에 관련해서는 허균을 지지했으나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백성들을 대피하게 하는건 분명 이이첨에게 전혀 도움이 될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박승종 등 이이첨 반대파가 조정 내에서 즐비한 상황인데 무리수를 두면 비판의 화살은 허균이 아니라 허균을 중용한 이이첨에게 날아올 것이 분명했다. 특히 옥에 갇혔다가 '제대로 심문 1번 받지 못하고 바로 처형되었다는 점이 이이첨이 이미 허균과 척을 진 정황 증거로 손꼽힌다. 그래서인지 죽기 직전에 한 유언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였다고 한다.
다만 당연하게도 이이첨만의 독단으로 처형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일단 허균은 상당한 주요 관직들을 두루 맡은 당상관이었기에 그를 죽이는 큰 일을 광해군의 재가 없이 이이첨의 권한만으로는 절대 행할 수 없다. 또한 허균은 언행이 경박하고 불교를 믿는다는 등의 여러 이유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매우 많은 탄핵을 받았음에도 이전에 광해군은 허균에 대한 탄핵 상소가 매우 심할 때만 잠깐 유배를 보냈다가 얼마 안 지나 곧 복직시켜 주는 등 개인적으로 관대하게 대우해줬었는데, 이때는 지켜주지 않았을 뿐더러 허균이 사형 직전에 광해군에게 마지막 소명의 기회를 원할때조차 들어주지도 않는다. 결국 이때 그가 이렇게 죽은건 광해군의 의지가 강했다고밖에 볼 수 없고, 이 광해군의 결정이 이이첨의 정보조작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광해군 스스로 절차를 무시해가면서까지 허균을 바로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의 상당한 증언이나 증거를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허균의 옥사 사건 시점 이이첨의 권력은 광해군의 왕권을 넘볼 정도로 커져 있었으므로 광해군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이첨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12] 실제로 이후 인조반정 시점 반정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평소 이이첨의 눈치를 계속 보고 있었는지 "혹시 이이첨이 한 짓이 아니던가?"라고 말했다. 이이첨의 독단은 아니겠지만 이이첨을 위시한 대북 세력에 굴복한 광해군의 의지가 큰 것이다.
허균 문서의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사상가로서는 재능이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사상을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를 보였다. 이 때문에 다소 적나라하게 말하면 정치가로서 관료로서도 심지어 힘있는 이의 수족으로서도 쓸모가 없었고 그렇게 능력없는 주제에 배포만 쓸데없이 컸다는 견해가 있다. 애초에 딸을 광해군의 후궁으로 간택하게 하면 광해군의 세자의 장인이 되니 허균 입장에서는 가만히만 있어도 부귀영화는 따 놓은 당상인데 굳이 하인준 등 심복을 시켜서 스스로 논란거리를 자초해서 죽은건 처세가 뛰어나지 않았던 건 분명하다. 왕세자의 장인어른 아니면 왕조의 반란자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분명 전자를 고르는 것이 허균에게 현실적으로 얻을 것이 많았을텐데 굳이 후자를 고른 건 현실과 타협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반란을 할 거면 치밀하게 준비했어야 했는데 그것도 아니라서 제자 기준격이 상소를 올리고 난 후 무리수만 둘 다 가문도 풍비박산나고 하나뿐인 목숨도 날아가고 말았다. 자세한 것은 역적 이이첨 문서를 참조할 것 .
13. 명예회복[편집]"무신년[13] 이후 억울하게 옥에 갇힌 이와 연좌되어 귀양 간 사람을 모두 풀어주었으나 오직 허균(許筠) 등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였다." ㅡ <연려실기술> 제23권 인조조 고사본말 #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허균을 처형한 책임이 있는 인물들인 광해군과 북인 세력이 몰락한 이후 집권한 인조와 서인은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과 연좌되어 귀양 간 사람들을 풀어주는 등" 광해군 시기 옥사와 역모 혐의의 피해자들을 복권이나 신원을 했지만 허균만은 "죄를 용서"하지 않았다. # 그리고 이후 조선이 멸망하기 전까지 허균은 복권이나 신원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허균 생전 허균과 관련이 있었던 인물들은 대다수가 복권되었다.
정조 시기 허균과 친하게 지낸 적이 있는 북인계 인물 유몽인[14]이 복권되었고, 철종 시기 북인계 인물 박승종이 복권되었고, 고종 시기 조선의 건국에 공이 있다고 평을 받고 허균이 존경했던 정도전과 허균과 생전 수호전 놀이를 하면서 친해진 친구 박엽이 복권되었다.
순종 시기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조선시대 역적이 된 인물들을 신원 및 복권할 때, 허균 생전 허균과 같은 붕당으로 활동했던 북인의 거두 정인홍 등이 작위, 시호, 관작이 회복되었지만 허균만은 회복되지 못했다. # #
이에 대해 허균을 연구한 역사학자 이이화는 다큐멘터리 <KBS 역사스페셜 –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 허균>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몽주는 고려를 받든 충신인데, 조선시대에서도 충신이라고 받고 해주거든. 그게 유교 이념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죠. 허균의 경우는 정면으로 유교에 완전히 반대, 정몽주와는 경우가 다르다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념적으로도, 이 걸 인정해줄 수가 없고, 또 이게 당쟁이 아니다 이 말이죠... 단순한 계획적 차원에서 당쟁에서 희생된 인물이 아니고 변혁적으로 일을 벌렸다라는 그런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에, 허균을 복권시켜주지 않았습니다." ㅡ 역사학자 이이화의 말 # 허균 사후 가족들은 처형되거나 흩어졌다. 2000년 허균의 직계 후손이자 교산공파 회장 허성엽이 전한 가첩에 의하면 당시 허균의 아들 허굉(許宏, 1606 - ?)은 허균이 처형당한 1618년 "조령을 넘어 영천의 정씨 집에 있다가 몇년 후에 울산의 고씨 집에 훈장으로 세상을 보냈다" 한다. 그러나 이후 허균이 복권되지 않았으므로 허굉은 남의 가문 "봉례공파"에 들어가 허균의 직계 후손임을 숨기고 지내왔다고 한다.[15]# 이후 허굉이 "교산공파(蛟山公) 판도좌랑공 11세손(균)파"로 전해지는 것을 보면 허굉 사후 조선 멸망 이후 허균이 가문 내에서 복권된 것으로 보인다. #
허균의 직계 후손 허성엽은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3대, 9족을 멸할 그런 죄목이시니 간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대로는 안되는 거에요. 교산의 아들이라 살아남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봉례공으로 끼어가지고, 우리 아버지는 봉례공입니다.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ㅡ 교산공파 회장 허성엽의 말 # 300년 이상 남의 족보에 끼어있었다고 다큐멘터리가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과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허균의 직계 후손은 계속 남의 족보에 끼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복권된 것은 1999년 4월 23일이었다. 허균이 역적으로 사형된지 381년만이었다. 강릉시 포남동 허균·허난설헌 시비공원에서 허균의 후손들에 의해 "허균의 억울함을 풀고 복권을 선언하는 행사"를 열었다. 행사에서 허균을 연구한 교수들인 목원대학교 교수 허경진과 강릉대학교 교수 장정룡이 허균의 사상을 공식적으로 재평가했으며, 장정룡 교수는 "병란과 정쟁이 격심했던 조선시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는 등 시대를 앞서 가는 탁월한 식견을 제시하며 정치.사회적 모순을 타개하려 했던 그의 복권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라고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들 참조. # # #
2018년 9월 3일 교산 허균 400주기가 될 때, 교산 허균 400주기 추모 전국대회추진위원회는 청와대에 “조선 왕조에서 역모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허균의 신원을 회복,현대적 차원에서라도 억울함을 풀어주고 복권을 통해 명예를 회복시켜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장정룡 교수와 반태연 도의원과 국민 11,247명의 서명과 함께 제출했다. # 1999년 가문 내에서 복권이 되었지만 정부 차원에서 복권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부에 직접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로도 유명한 허균은 왕조시대에 적서차별 등을 평등사상을 설파했고,호민론을 통해 이민위천(以民爲天) 사상을 일깨운 최고의 개혁사상가요,선각자 였으나 형신(刑訊) 등의 절차를 무시당한 채 역모의 누명을 쓰고 49세를 일기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 올해로 400주기를 맞았다”며 “조선왕조가 끝날 때 까지 유일하게 복권되지 못한 비운의 인물인 허균 선생의 복권을 통해 민본과 민주의 정신을 재조명해 달라.."
"정부차원의 사면복권이 어렵다면,실천적 방안으로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의 추모사,정부가 발간하는 국민 홍보책자에 허균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언급함으로써 사면복권의 효과를 가져오게 하는 방안도 가능할 것..." ㅡ 청원서의 내용 # 2018년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반이나 국가원수 차원에서 허균의 복권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적은 없었지만 양천 허씨 가문 내에서, 대한민국 대중들 사이에서 사실상 "복권"이 되어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민간 차원에서는 복권이 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11월 29일 대한민국 행정안전부에서 허균의 생애와 사상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홍보자료 웹툰 "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개혁사상가 허균, 그는 왜 천지간 괴물이 되었나"를 행정안전부 공식 홈페이지에 올리고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천재 허균"이라고 평가한 이후 허균의 "사면복권의 효과"를 성공적으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
[출처1]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85쪽[2] 사명당, 류성룡, 이달 모두 허봉의 친구였다. 허봉이 소개해서 제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3] 허균 버전 홍길동전의 율도국과 박지원이 각색한 허생전의 가상세계 섬의 원 배경이 이곳이다.[4] 변산반도국립공원으로 유명한 천하명승 변산의 별칭이다.[출처2] 이매창 평전, 저자 김준형[6] 베이징의 옛 명칭[출처3] 허경진의 '허균평전' (2002)과 이이화의 '허균의 생각' (2014)[8] 숙야는 박엽의 자이다.[9] 아무래도 소성대비를 암살하려고 한 것 같다.[10] 다른 전승으로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라고도 한다.[11] 허굉 등 일부 아들은 도망치는데 성공해 화를 면하였다.[12] 이는 광해군 재위 내내 광해군의 왕권을 키웠던 옥사 사건들 때문이었다. 광해군이 옥사를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궁궐 내 여당이자 옥사 사건 처리를 담당한 대북의 힘도 자연스럽게 커졌고 대북의 실권자인 이이첨의 힘도 커졌기 때문이다.[13] 광해군 즉위년이다.[14] 허균/평가 참조. 허균 생전 허균은 유몽인의 글을 좋게 평가했고, 유몽인은 허균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15] 다큐멘터리 <KBS 역사스페셜 –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 허균>에서 "남의 가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양천 허씨가 아닌 다른 가문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나무위키>
네 벗이 사는 집
허균
내가 사는 집 이름을 사우재(四友齋)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내가 벗하는 이가 셋이고 거기에 또 내가 끼니 합하여 넷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세 벗이란 것은 오늘날 생존해 있는 선비가 아니고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옛 선비들이다. 나는 원래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데다가 또 성격이 제멋대로여서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꾸짖고 떼를 지어 배척하므로, 집에는 찾아오는 이가 없고 밖에 나가도 찾아갈 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탄식했다. “벗은 오륜(五倫)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는데 나만 홀로 벗이 없으니 어찌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벼슬길에서 물러나 생각해 보았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더럽다고 사귀려 들지 않으니 내가 어디서 벗을 찾을 것인가. 할 수 없이 옛 사람들 중에서 사귈 만한 이를 가려내서 벗으로 삼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는 진나라 처사 도연명이다. 그는 한가롭고 고요하며 작은 일에 대범하여 항상 마음이 편안했으니, 세상일 따위는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래서 가난을 편히 여기고 천명을 즐기다가 죽었다. 그의 맑은 풍모와 빼어난 절개는 아득히 높아 잡을 길이 없으니, 나는 깊이 흠모만 할 뿐, 그 경지에 미치지는 못한다. 그 다음은 당나라 한림 이태백이다. 그는 뛰어나고 호탕하여 온 세상을 좁다고 여기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귀인들을 개미 보듯 하며 스스로 자연 속에서 방랑했다. 그런 그가 부러워서 따라 가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또 그 다음은 송나라 학사 소동파이다. 그는 허심탄회하여 남과 경계를 두지 않으므로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 귀한이나 천한 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더불어 즐기니, 유하 혜가 자기의 덕을 감추고 세속을 좇는 풍모와 같은 데가 있다. 내가 본받으려 하나 아직은 그리 되지 못하고 있다. 이 세분의 군자는 문장이 천고에 떨쳐 빛나지만, 내가 보기에는 문장은 그들에게 취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내가 취하는 바는 그들의 인품에 있지, 그들의 문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 세 분 군자를 벗 삼는다 할 것 같으면 굳이 속인들과 함께 옷소매를 맞대고 어깨동무를 하며, 또 소곤소곤 귓속말을 할 것도 없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친구의 도리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나는 이정(李楨)에게 명하여 세 군자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내가 찬(贊)을 지어 한석봉에게 해서(楷書)로 쓰게 했다. 그래서 내가 머무는 곳이면 반드시 그 초상을 좌석 귀퉁이에 걸어 놓으니, 세 군자가 엄연히 서로 마주보고 품평하며 마치 함께 웃고 이야기하는 듯하고, 더욱이 그 인기척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여 쓸쓸히 지내는 나의 생활이 괴로운 줄을 거의 알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나도 비로소 오륜을 갖추었으니, 사람들과 사귀는 것은 더욱 탐탐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아, 나는 본디 글을 못하는 사람이라, 세 군자의 뛰어난 문장에도 따라가지 못한다. 게다가 성격마저 거칠고 망령되어 그런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바이다. 다만 그분들을 존경하고 사랑하여 벗으로 삼고자 하는 정성만은 귀신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런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고 하는 것도 모르는 사이에 그 분들과 서로 일치되는 바가 있다. 도연명은 팽택의 수령이 되어 80일 만에 관직을 그만두었고, 나는 세 번이나 이천 석을 받는 태수가 되었으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번번이 배척받아 쫓겨나고 말았다. 적선(謫仙) 이백은 심양과 야랑으로 귀양 가고, 소동파는 대옥과 황강으로 귀양 갔으니, 이는 모두 어진 이가 겪은 불해이었다. 그런데 나는 죄를 얻어 형틀에 묶여 곤장을 맞은 뒤 남쪽으로 귀양을 갔었으니, 아마도 조물주가 장난을 쳐서 그들과 같은 고통만은 맛보게 하면서도 주어진 재주와 성품만은 갑자기 바꿀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하늘의 복을 받아 전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으니, 관동 지방은 나의 옛 터전으로, 그 경치며 풍물이 중국의 시상산, 채석강과 견줄 만하고, 백성은 근실하고 땅은 비옥하여 또한 중국의 상숙현과 양선현보다 못지않으니, 마땅히 세 분 군자를 모시고 벼슬을 모두 버리고 경포 호숫가로 돌아간다면, 어찌 인간 세상에 한 가지 즐거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저 세 분 군자가 안다면 역시 즐겁고 유쾌하게 생각하실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은 한적하고 왜져서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으며, 오동나무가 뜰에 그늘을 드리우고 떨기로 난 대나무와 들매화가 집 뒤에 줄지어 심어져 있으니, 그 그윽하고 고요함은 꽤 즐길 만하다. 그런 중에 북쪽 창에다 세 군자의 초상을 펴놓고 분향하고 읍을 하는 생활을 한다. 이에 편액을 사우재라 하고, 그 연유를 위가 같이 기록해 둔다. 신해년(1611년) 2월 사일(社日)에 쓰다 허균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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