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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선 일체 후에 내 개별성과 전체 통일성>의 줄거리 :
교인이라면 반드시 가담되고 접목되어야 할 일체의 근거들을 제시하십니다. 일체 됨을 위한 가장 우선하는 근거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입니다. 그러면 만유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일체를 이룹니다. 그러면 성령의 공통된 열매로 일체를 이룹니다. 이런 일체 됨 후에 교인마다 개별성을 띠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성은 통일성 안에서 만유의 충만을 이루어 갑니다.
선 일체 후에 내 개별성과 전체 통일성
(에베소서 4:1~12)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본문에서는 교회와 교인의 관계가 일체성과 개별성과 통일성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큰 그림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 교회는 나 한 사람이 어떻게 바른 태도를 취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고 그 큰 그림은 좌우될 수 있습니다. 각자가 진정으로 교회를 살아야 교회가 전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윤곽을 드러내고 제 모습을 띨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먼저 교회의 일체성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단순히 전체 속에 포함되어있는 개체가 아니라 독립적인 개별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내가 교회의 일체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체성이 확고하게 유지되면 그 뒤에 나만의 독특한 개별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교회와 교인의 관계에서는 먼저 일체성이 있고 그 후에 나만의 개별적인 독자성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로부터 나와 다른 모든 교인들 간에 모순이 생기지 않는 통일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얼핏 일체성과 통일성이 같은 뜻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보자면 그 의미가 다릅니다. 통일성은 완전히 서로 다른 개별자들이 아무런 모순 없이 조화롭게 유지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먼저 일체성의 근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일치를 이야기할 때 교인들 간의 화합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나와 네가 서로 사랑으로 끌어안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일체가 아닙니다. 교인의 일체 됨은 서로 마주봄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일체가 되는 근거를 가짐으로써 나타납니다. 각자가 그 근거에 가담할 때 교인은 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술래잡기하는 모습을 보면 한 사람이 ‘술래잡기할 사람 여기 붙어라’라고 하면서 손가락을 올리면 하고 싶은 아이들이 달려와서 손가락을 붙잡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인이라면 붙어야 하는 근거가 있고 그 근거에 가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 대학교에 다니는 몇천 명의 학생들이 그 대학에서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서로 마주 대하고 끌어안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개별적으로 그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조건입니다. 교인과 교회의 관계에서 일체 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일체성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교인이 개별적으로 그 근거를 갖고 가담할 때에 교회로서 일체를 이루게 됩니다.
일체 됨의 첫 번째 근거는 1절 말씀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 안에서 갇혔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곧 사도 바울의 마음이 항상 주 안에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교인이란 왕궁에 있더라도 주 안에 있는 자이고, 시장에 있더라도 주 안에 있는 자입니다.
주님은 사도 바울의 마음을 싸고 있는 마음 싸개가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을 접하고 주님 안에 있었습니다. 마음이 항상 주님 안에 있는 동안 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디든지 놓여있었습니다. 이 ‘주 안’은 일체성의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그 다음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이 일체 됨의 근거가 되시고, 성령님이 일체 됨의 근거가 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만 하나님과 성령님의 일체 됨의 근거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주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아기를 업은 엄마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엄마가 어디를 가든지 아기는 항상 엄마 등에 있습니다. 엄마가 집에 있어도 아기는 엄마 등에 있고, 엄마가 시장에 가도 아기는 엄마 등에 있습니다. 교인의 모습이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주 안에 있는 자들이 교인입니다.
이어지는 1절을 보면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우리 마음이 주 안에 들어오게끔 부르시고, 주 안에 머물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주님을 통해서만 들려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일체 됨의 두 번째 근거는 성령님이십니다. 주 안에 있으면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신다는 공통점을 띄게 됩니다. 이것은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 안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성령님께서 나를 움직여가시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2절을 보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나를 움직이실 때 나타나는 대표적 열매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 5장 22~23절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오늘 언급되는 성령의 열매 중에서 갈라디아서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것이 겸손입니다.
사람에게는 세상의 가치들을 발판으로 삼아 올라서려고 하는 죄적 본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올라서고 나면 상대적으로 세상의 가치들을 갖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교만해지게 됩니다. 겸손은 이와 반대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을 실제로 갖고 있든 갖고 있지 못하든 올라설 발판으로 삼지 않습니다. 마음이 주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은 세상과 구분되는 영역이고,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영역입니다. 마음이 주 안에 들어가있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발판으로 올라서려 하지 않기에 교만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은 동일하게 주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이어지는 3절을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평안은 주 안에 들어가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는 사람의 종합적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남을 통해 평안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안을 매는 줄로 비유하였습니다. 평안 자체가 교인들을 하나가 되게끔 묶어주는 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성령이 이루시는 열매들을 언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힘써 지키라는 말을 보탭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삶은 모두 성령께서 살아가신다고 했는데 대체 무엇을 힘써 지키라는 것일까요?
우리는 주 안에 들어가기를 항상 힘써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성령의 열매 또한 주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함이 없어지고, 이 세상 가치들로 발을 딛고 서려는 교만이 생기고, 누구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과 불만이 생긴다면 그것은 내 마음이 주 안에서 빠져나왔다는 증거입니다.
어느덧 마음에서 불만과 불평과 원망이 생기고, 기쁨과 감사가 사라졌음을 느끼게 되었다면 주 안에 있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상태가 아님을 깨달았다면 다시 주 안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4절을 보면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 안에 있음을 유지할 때 부활, 승천,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하늘을 향한 흐름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마음의 흐름은 마치 몸의 신경과도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1장 22절에서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하였습니다. 머리에서부터 사지백체로 신경이 뻗어 나가듯이, 예수님으로부터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흐름이 교인 각자에게 뻗어 나가고 있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뇌에 연결된 신경을 따라서 사지백체에 명령이 전달되듯이, 예수님께 연결된 마음의 흐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의지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께서 역사하시게 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인 각자에게로 오시는 성령께서는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삼아 교인 각자가 지체를 이루는 상황에서 내가 오른손이라면, 다른 사람은 왼손이고, 또 다른 교인은 발일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오장육부 중에 하나의 장기일수 있습니다. 이렇게 손은 손대로 뇌에 연결되어 있고, 발은 발대로 뇌에 연결되어 있지만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교인 각자가 교회라는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체로써 각자를 움직이게 하는 뜻과 의지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모든 교인의 소망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교인이라면서 누구는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하고, 누구는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고, 누구는 자녀가 형통하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교인일 수 없고 이들 전체가 교회일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이미 교회의 하나 됨에 가담하지 못하고 접목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예배당에서 연말연시에 기도 제목을 써내는 행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말이 안 됩니다. 교인이고 교회라면 소망은 하나뿐입니다. 한 소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곧 교인이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한 소망은 주 안에 들어가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한 소망에 참여하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참여함입니다.
사람에게는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소망이란 바로 욕구의 흐름입니다. 돈을 원하는 사람은 마음의 욕구가 돈을 향하여 흘러가는 중입니다. 이것이 돈을 소망하는 상태입니다. 소망은 마음의 흐름이자 욕구의 흐름입니다. 그러나 교인은 오직 한 소망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 안에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마음이 흐름을 형성하게 되면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그 하나님으로 부자가 되고, 그 하나님을 많이 먹어서 점점 더 하나님과의 친분이 두터워지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점점 더 이 세상의 가치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증거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세상 것이 별 것 아닌 것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세상 것에 대해 조금도 미련을 갖지 않는 상태까지 하나님과 친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얼마나 부자가 되었고, 하나님과 얼마나 친해졌는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세상 것에 대한 미련이 얼마나 없어졌는가를 살펴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하면 친해질수록 지금 당장 아버지께로 가고 싶다는 열망은 커지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교인에게 동일하게 나타나야 하는 한 소망입니다.
5절을 보면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가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한 분 주님이십니다. 믿음이 하나라는 것은 그 주님과 동일시함이 똑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도 하나라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죽고 부활하여 오직 하늘을 향해 살아있음이 똑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인이라면 한 분의 주님,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에 대해서는 어떠한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되며, 미치지 못함이 있어서도 안 되고, 가담하지 못해서도 안 됩니다.
이러한 교인으로서 도달하는 상태가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개별성의 반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한 분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시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삼라만상의 창조주라는 뜻입니다. 만유 위에 계신다는 것은 어떠한 피조물보다 존재감이 크시고, 좋으심이 크시고, 주권자라는 뜻입니다. 또 만유를 통일하신다는 것은 만유에 대하여 뜻을 갖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뜻이 만물을 향해 나가고 있기에 만물이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질서를 이루고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뜻을 갖고 계신 분이 만유 가운데 계신다는 것은 실제로 만유를 이끌어 가시는 일을 지금 이 시간도 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이시고,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십니다. 그런데 만유 중에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등지고 저항하고 반항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자들을 해방시키셨으며,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끌고 가십니다.
높은 곳에 물이 담긴 통을 놓고 호스를 연결해서 물을 빼내면 아래로 물이 계속해서 내려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이와는 방향성이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하늘로 우리의 마음을 빨아들이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마음의 흐름이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만유의 아버지이시고,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 그 아버지께로 마음이 이어지게 해주십니다. 여기까지가 교인의 일체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체성이 있은 후에 나타나는 일이 바로 개별성입니다. 그동안 만유의 아버지이시고 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을 등지고 나 스스로 주권자가 되어 살아왔습니다. 만유를 통일하신 아버지 대신에 나 스스로 인생의 계획을 가졌습니다. 만유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 대신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움직여갔습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내 마음의 흐름이 만유의 아버지께로 연결됨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나의 삶에 내려오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마는 하마가 되고, 사자는 사자가 되고, 사슴은 사슴이 되고, 국화는 국화가 되고, 백합은 백합이 되고, 산은 산이 되고, 강은 강이 되게 하셨습니다. 삼라만상에 고유한 개별성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주 안에 있을 때 나에게도 고유한 뜻과 계획이 내려오게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만유의 아버지에게 저항하는 삶을 살았기에 진짜 나의 모습 또한 드러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삼라만상이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서 고유의 개성을 드러내는데, 사람만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본래의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 세상에 교인과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주 안에 들어간 교인들 각자는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만유의 아버지께 연결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각자에게 그리스도의 공짜 선물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 선물이란 바로 내가 나답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내 노력이나 수고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7절에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나비가 다 비슷해 보여도 같은 나비가 없고, 한 나무에 수십만 개의 잎사귀가 있어도 전부 다른 것처럼, 주 안에서 일체 됨의 근거를 갖게 된 자들은 나로서의 개별성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나만의 고유한 모습은 세상 풍조를 따름으로 발견되지 않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는 세상 풍조나 유행을 통해 사람들을 끌려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갖고 계신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유한 뜻을 받아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뜻을 절단시키고 유행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뭉텅이로 끌려다니게 하였습니다. 개인을 없애고 집단, 군중, 대중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 들어감이라는 일체 됨에 접목되고 가담한 교인들은 비로소 개별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완전히 고유한 내가 됩니다.
일체성과 개별성은 얼핏 공존할 수 없는 개념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교인의 일체됨이란 밀가루 반죽처럼 모든 개인을 한 덩어리로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 안’이라는 일체된 소망에 근거하고 가담할 때에, 비로소 완전히 고유한 나만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주 안에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돈이 없어도 돈이 없는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 있는 것이고, 돈이 있어도 돈이 있는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주 안에 있기에 돈이 있고 없고는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게 됩니다. 내 마음은 주 안에 있기에 배우자가 어떻든 자녀가 어떻든 좌우되지 않습니다. 주 안에 있으면 만유의 아버지께 참여하게 되고 성령이 내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은 모든 교인에게서 일어나야 하는 공통된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완전히 나만의 삶을 살게 되는 개별성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역사입니다. 다른 사람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나만의 삶을 살아가는데 조화를 이루고 통일성이 생겨납니다. 그동안 만유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통일성을 이루는 가운데 인간만이 만유의 하나님께 반항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교회가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인간 세상 속에서도 만유의 하나님에 의한 통일이 이루어지고 확장되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에서 드러나는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큰 그림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그린 큰 그림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역사적인 시점에 놓여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주 안’이라고 하는 핵심적 일체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이라는 일체의 근거에 가담할 때 독특한 개별성을 띠는 가운데 조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통일성을 이루게 됩니다. 먼저 일체를 이룬 후에 나타나는 개별성과 통일성을 통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교회를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는 주역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허락하신 어떤 보물보다도 값진 일체 됨의 근거에 가담하게 하시며, 그럼으로써 나만을 위해 계획하신 하나님의 개별적인 선물들이 나의 삶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세상에서 만유의 하나님에 의한 통일성을 확장시켜 나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