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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 2023년 2월 12일 주일 예배
본문 / 사무엘상 3:1-14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어도 성도들은 구원을 이루어가를 그 길에서 얼마든지 죄에 걸려 넘어질 수 있고, 죄에 사로잡혀 일어나지 못하고 죄의 노예가 되어 지옥으로 끌려갈 수도 있습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길은 정말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육체를 벗고 이 세상을 떠나 심판대에서 최후의 승리와 영광을 얻기까지 성도는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죄와 싸우는 사람은 압니다. 죄와 적당히 타협하고 죄와 친구가 된 사람은 죄와 싸울 일이 없으니 오히려 마음이 평안할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 그 죄를 친구로 받아들일 때 조금 괴로웠겠지만 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치욕을 받고 죽으신 것은 순전히 내 죄를 자기 죄로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를 믿을 때에 용서받고 내 죄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량없는 대속의 은혜를 받았지만 성도의 마음 안에는 죄의 욕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이루어가는 길에서 죄의 욕망 즉 육신대로 살고 싶은 죄의 욕망은 여전히 살아있기에 육신의 자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사는 겁니다. 내가 내 마음과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죄는 내가 하나님이라고 타락한 교만입니다. 자신을 섬기는 자아숭배가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겨도 자기 마음대로 섬기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죄인 것입니다.
내가 도둑질했어? 사람을 죽였어? 내가 무슨 죄를 지었어? 라고 생각합니까? 삶으로 나오는 것들은 죄의 증상이고 죄의 뿌리는 내가 나의 주인의 되어 나를 위해 사는 자아숭배입니다. 입으로 주여 주여 하면서도 실제로는 내가 내 마음과 인생의 주인이 되어 그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위해 사는 것이 죄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 안에는 회개하고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십자가의 은혜는 받았지만 자신의 주인 됨을 십자가에 못을 박지 못하고, 자신의 주인 됨을 포기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이 주인이 되어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죄와 싸우다 지쳐 또 다시 죄의 노예가 된 사람들도 많은 것입니다.
안전 불감증이라고 하죠. 사고가 나야 난거지 사고가 나지 않으면 안전을 위한 조치는 귀찮고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겁니다. 지금 성도들은 심판 불감증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두려워해도 지옥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말로만 듣던 심판대에 가봐야 두려운지 실감이 나는 거지 지금 살아있는 이 세상에서는 아직 오지도 않는 심판은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판 불감증이 자신이 아는 죄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믿던 안 믿던 사람은 언제 심판대 앞에 갈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있으니 죽을 것 같지 않은 지금 이 순간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고 그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는 죄에서 떠나셨습니까?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쓸데없는 질문이겠지만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성도라면 자신이 무슨 죄에 넘어지는지, 지금 무슨 죄에 발목이 잡혀 좁은 길을 가지 못하는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교회의 대제사장인 엘리와 두 아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시면서 그가 아는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엘리와 그 두 아들은 누굽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들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유명하고 큰 능력과 권세를 갖고 있는 목사에게 하나님은 네가 아는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어떤 죄라도 그 죄를 깨닫고 십자가를 의지하며 마음과 영으로 회개하면 다 용서하십니다. 인간 세상에서 너무 파렴치 하고 흉악하여 도저히 용서받지 못하여도 하나님은 십자가 앞에 나와 회개하면 죄 없다고 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죽어야 할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분이 그것보다 못하시겠습니까? 평생을 죄 가운데 살다 숨이 끊어질 때에라도 십자가를 붙들고 마음과 영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해주십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면 정말 쉬운 겁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고 싶어 환장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는 자들이 적은 것은 심판 불감증으로 인해 아는 죄에서 떠나지 않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 줄 알지 못합니다. 회개하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한 그 죄로 인하여 받게 될 하나님의 준엄한 그 공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목사와 성도들이 엘리와 그 두 아들처럼 된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엘리를 보면 이해가 안 됩니다. 두 아들의 죄에 대하여 알고 있었음에도 미온적으로 대처하였습니다. 지나가는 말투로 타이를 뿐이었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준엄한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것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이스라엘이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한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날에 죽으리라.”
하나님이 엘리에게 심판에 대하여 미리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회개하면 용서해주겠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는 아는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엘리에게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엘리에게 전하였습니다. 어린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들은 엘리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곧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간다는데 강 건너 남의 집 불구경하는 태도인 겁니다. 하나님은 엘리가 회개하기를 얼마나 원하셨을까요? 그래서 계속해서 심판을 선포하며 기회를 주시지만 그러나 엘리는 끝내 아는 죄악을 끊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와 두 아들이 아는 죄악으로 저주를 자청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엘리의 그 가문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제사를 드리는 자들로 택하셨으니 이게 얼마나 큰 은혜와 사랑을 받은 것입니까? 하나님도 엘리에게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내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시 아니하였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와 그 두 아들은 놀라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장 큰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아는 죄에서 끝까지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알려주고 심판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시며 기회를 주었지만 끝내 아는 죄악에서 돌이키지 못한 것입니다.
차라리 죄라는 것을 모르면 나중에 죄를 깨닫게 되면 회개할 수 있지만 아는 죄악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미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죄로 자신을 숭배하는 재미와 즐거움과 쾌락에 깊이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그 죄로 인하여 받을 심판의 두려움보다 지금 당장 육체로 누리는 그 죄가 주는 달콤한 유익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아는 죄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수가 없는 겁니다. 지금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눈이라도 멀고 창자가 끊어질 듯이 아프기라도 하면 모를까 회개하지 않는다고 오는 고통도 없는 겁니다. 믿어지지 않는 막연한 심판의 두려움만 있는 겁니다. 지금 당장은 그 죄로 육체의 정욕과 탐심과 즐거움과 쾌락으로 자신을 숭배하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도 아는 죄에서 돌이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무서운 저주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음에도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는 죄에 마음과 영을 빼앗긴 것은 아닙니까? 아는 죄의 사슬에 매여 이제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질질 끌려가는 것은 아닙니까? 죄는 얼마나 육체를 원하고 육체는 얼마나 죄를 원합니까?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말씀하셨지만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결국 죄를 따라가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끈적끈적한 죄와 그 육체를 십자가로 떼어놓지 못하면 죄와 육체는 철썩 달라붙어 하나가 되어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고 지옥의 불구덩이까지 가는 것입니다.
죄와 육체는 자석과 쇠와 같은 것입니다. 쇠와 자석이 어떻게 떨어질 수 있습니까? 이 둘은 강력하게 서로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 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내 육체의 자아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을 때에만 죄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한 장로님에 대하여 자주 증언하죠. 이 분이 하는 말입니다. 처음 죄를 지을 때는 하나님이 두려워 죽을 것 같았다는 겁니다. 심장이 뛰고 두근거리고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답니다.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겁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겁니다. 그런데 죄가 주는 유익이 있는 겁니다. 서서히 두려움은 줄어들고 죄로 얻은 유익은 커지는 겁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두렵던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더라는 겁니다. 더 많은 죄를 지어도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오래 동안 죄를 지으면서도 철저하게 예배하고 새벽에 나와 기도하고 아주 그럴듯하게 장로의 직분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그 죄가 사람들 앞에 드러난 것입니다.
목사님은 기가 막힌 겁니다. 어떻게 이런 죄를 지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생활을 했느냐? 하나님이 두렵지 않았느냐? 처음에는 두려워 미치는 줄 알았지만 서서히 그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제라도 회개해라.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려고 죄를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마침 암에 걸렸고 그 암이 급속하게 퍼져갔습니다. 이제라도 회개하면 된다. 제발 회개하고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가라고 전 교역자가 매달려 기도했다는 겁니다. 그래도 회개를 못하더라는 겁니다.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목사님 회개하고 싶은데 여기가 안 된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목사는 정말 미치고 환장하는 겁니다. 오래 동안 마음이 서서히 굳어져 그 무시무시한 심판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회개가 안 되는 겁니다. 생각은 회개하고 천국에 가고 싶은데 안 되는 겁니다. 서서히 단단하게 굳어진 마음이 그게 한 순간에 풀립니까? 지옥의 불구덩이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돌이키지 못하는 겁니다.
그게 아는 죄악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데. 끊어야 되는데.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자신이 아는 죄악에 익숙해져 있는 성도들은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이 원하면 얼마든지 죄에서 돌이킬 수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 회개하라고 해도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좀 더 있다가, 좀 더 있다가 하며 그 죄를 붙들고 있으면 마음은 서서히 더 굳어지고 나중에는 그 죄가 그 마음과 영을 완전히 지배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이 구원받을 만한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엘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던 때가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도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굳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서서히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왜 먼저 되었지만 나중 될 자들이 많다고 하셨겠습니까? 왜 많은 성도들이 영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습니까?
인생도 그렇지만 믿음은 끝이 좋아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과 친밀했어도 마지막에 등을 돌리고 원수가 되면 영원히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어도 마지막에 극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영원히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인생의 마지막을 알 수 없으니 늘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것을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아는 죄악과 싸우고 어쩔 수 없이 넘어지면 회개하고 결국은 싸워 끊어내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아는 죄와 그 익숙한 죄와 싸우지 않을 때 엘리의 마음은 굳어졌고 하나님의 음성은 더 이상을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영적인 귀머거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도 엘리를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다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엘리의 영적인 상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엘리는 영적인 소경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가는 길을 알지 못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교회를 대표하는 제사장이 마지막에는 영적인 치매환자가 된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 안에 영적인 소경과 귀머거리가 되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영적인 치매환자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나는 누구인지, 지금 어떤 길을 가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가 받은 십자가의 은혜가 엘리가 받은 그 은혜보다 작다 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전한 은혜와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가 막힌 은혜를 받고도 내가 아는 죄와 싸우지 않고 끝내 떠나지 못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아는 맛이 무섭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최고의 요리라는 캐비어가 먹고 싶었던 적이 없습니다. 제가 그 맛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짜장은 일 년에 몇 번씩 먹고 싶습니다. 제가 그 맛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영이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을 알아도 내 육체가 이미 알아버린 죄는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내 육체가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그 죄를 완전하게 끊었다고 자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죄와 싸우지 않으면 내가 알고 있던 죄는 슬그머니 마음으로 들어와 내 육체를 지배하고 영을 노예로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정말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릴 적에 엄마나 바람이 나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그 충격에 술중독이 되어 아이들을 학대하고 돌보지 않는 겁니다. 아이들은 거리에 나가 구걸하고 도둑질하고 초등학교 1학년에 담배를 피우고 본드를 하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거리에서 살던 아이가 한 목사님을 만나 생활하게 되었는데 나이는 어리지만 일찍부터 죄에 빠져 살았으니 그것을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본드를 너무 해서 코가 다 망가진 겁니다. 뇌가 정상이 아닌 겁니다. 중학교에 들어가 굿모닝 단어 하나 배우는데 한 달이 걸렸다는 겁니다. 본드 때문에 뇌가 정상이 아닌 겁니다.
그런 아이를 붙잡고 말씀을 전하고 기도를 하는 겁니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회개하면 하나님도 너를 회복시켜 주실 거야. 이 아이가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겁니다. 새벽에 일어나 눈물콧물을 쏟으며 기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굿모닝을 배우는 데 한 달 걸린 아이가 얼마 후에는 영어시험에서 한 문제만 틀린 겁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만에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감신대에 들어가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겁니다. 교회에서 전도사를 하며 자신의 간증을 통해 아이들을 지도하는 겁니다. 4학년이 된 겁니다. 이 목사님은 이제는 저 아이는 됐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리포트를 쓰기 위해 pc방에 갔다가 게임을 한 번 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도박 사이트에 접속하게 되었고 그 길로 걷잡을 수 없는 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도박과 절도까지 하게 되어 교도소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도 나는 이제 죄에서 오래 전에 떠났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 생각으로 게임 한 판 하자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아는 죄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숨죽이고 있던 육체의 정욕과 탐심이 때를 만나자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불길처럼 일어나는 그 죄의 욕망을 자신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나는 죄에서 떠난 줄 알았지만 육체는 아는 죄악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말씀하고 히브리서 12장에서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죽을힘을 다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내 안에 남아있는 죄의 세력과 말입니다. 내 자신과 말입니다. 자아숭배와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교묘하게 내 감정을 숭배합니까? 사람들이 상처 상처하며 그 상처 안에 있으며 그 상처받은 감정으로 자기 자신을 교묘하게 숭배하는 것은 다 십자가에 나를 못을 박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아숭배자는 끝까지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면 상처도 내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게 하는 은혜이며 믿음의 자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는 붙들고 살면서 얼굴이며 몸매며 피부는 얼마나 관리합니까? 돈과 재산을 얼마나 의지하고 중요하게 여깁니까? 이래저래 다 자신의 주인 됨과 자존심을 섬기는 자아숭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아는 죄를 이기고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아는 죄에 붙들려 발목이 잡혀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며 주님의 뒤만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그 십자가로 내 마음과 영을 관리하는 믿음에 영생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가 아는 죄에 여전히 붙잡혀 있다면 빨리 십자가를 붙들고 회개하고 그 보혈로 씻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인생은 다 지나가고 결국은 심판대 앞에 서고야 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까?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죄를 회개하고 다 끊어냅시다. 아멘! 죽을 때까지 죽을힘을 다하여 아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다 용서하며 삽시다. 저도 용서해 주시고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사랑하며 삽시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자답게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면서 함께 구원의 소망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