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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청양으로의 여행>
◈ 보령 : 머드팩으로 유명한 보령은 예로부터 벼룻돌(硯石), '보령 남포석(保寧 藍浦石)'의 산지로 유명하다. 이 고장에서는 지역특산품인 양질의 석재(石材)를 이용하여 고대로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명사, 시인, 묵객들의 명시(名詩)와 유묵(遺墨)들을 아름답게 조각한 비석과 여러 유형의 조각 작품들을 건립하여 옛 선비의 얼과 오늘의 지성을 결합함으로서 문화예술의 장을 만들어 사회교육에 크게 기여한다.
◈ 김좌진장군묘......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0외 3필
독립운동가인 백야(白冶) 김좌진(1889~1930) 장군의 묘소이다. 홍성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난 장군은 개화사상이 투철하여 15세 때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논밭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1907년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앞장섰으며, 1911년에는 군자금을 모금하다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17년 만주로 건너가 대한광복단에 가입한 이후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어 독립군을 훈련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청산리에서 일본과 전투를 벌여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승리를 이루었다. 조국광복을 위해 노력했던 장군은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했다. 암살 직후 만주 땅에 묻혔다가 아내 오숙근 여사가 1940년 장군의 유해를 밀감상자로 위장해 비밀리에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하였다. 그 후 1957년 부인이 타계하자 아들 김두한이 현 위치에 합장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뒤편으로 담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봉분은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옆에는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마(馬)석상 한 쌍이 세워져 있다.
◈ 오천항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700-86
오천항은 조선시대 초부터 충청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되어 충청지방 해안방어의 중심지 역할을 한곳으로 성곽, 장교청, 진휼청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있는 역사적인 장소로써 뿐 아니라 보령 북부권의 삶과 생활의 중심지로 써서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오천항은 수심이 깊고 원산도 안면도등 섬들이 자연적으로 방파제 구실을 하여 피항시설이 필요 없을 만큼 자연적 조건이 좋은 곳으로 해안선을 따라 길게 늘어진 선착장에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오천항은 일제말엽만 해도 범선(帆船)의 요람지였다. 광천장날인 4일과 9일엔 풍선(風船)이 백여 척씩 바람을 타고 항구로 들어오는 정경을 찬한 오천항 귀범이 보령 8경중의 하나로 전해져오고 있다. 예전의 영화는 많이 퇴색되었지만, 오천항은 천수만 일대의 주요 어항으로서 제역할을 하고있다. 이와함께 오천항 인근에는 신라의 고찰인 선림사, 도미부인사당, 갈매못 성지 등을 둘러볼 수 있는 연계성뿐 아니라 안면도 연육교가 개설되면 태안해상국립공원과 접근성이 향상되며 공주 부여의 백제문화권등 주변관광지와 연계성도 뛰어나 최고의 입지여건을 갖춘 항구라 하겠다.
◈ 이지함선생묘....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27-3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토정비결』의 저자로 유명한 토정(土亭) 이지함(1517∼1578)은 조선중종 12년에 태어났으며, 당대 학자이며 기인으로 알려졌고, 특히 토정비결의 저자로 유명하다. 선조6년에 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지금의 포천) 현감이 되었는데, 이때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 후에 아산현감을 지냈으며 걸인청(乞人廳)을 두어 빈민구호에 힘썼다. 의학, 복술(卜術) 천문(天文) 지리(地理) 음양(陰陽) 술서(術書)에 능했고, 풍수지리에 밝아 본인의 묘터 역시 생전에 정했다 전하고 있다. 이지함의 신도비는 1965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있는데 없어졌던 신도비를 이곳에 다시 세운 것이다. 묘는 서해바다가 내려다보이고 해송으로 둘러싸여있으며 포구로 들어오는 물이 마치 호수와 같으며 포구 앞에 서너 개의 암초가 솟아나 있고 멀리 큰 섬이 있어서 그림처럼 아름다운 터다.
이지함(34세)은 일생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토담으로 지은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어 ‘토정’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는데 그가 한일은 빈민구제, 경세제민의 일이었다. 선박을 빌려 고기를 잡아 팔았고 박씨를 뿌려 바가지를 만들어 팔았고 소금을 생산했으며 백성들에게 장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광산을 개발하고 무역을 활성화 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병든 백성을 치료하기 위해 스스로 간질병에 걸리기도 했고(?),신령한 기운과 신묘한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은 그가 매우 강한 에너지를 타고난 자질 때문으로 해석되고 또한 신선수련법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켰기 때문이라 한다. 조선중기에는 역학이 유행했는데 이지함은 스스로 점괘와 관상을 통해 백성들의 운명을 점쳐 주었다. 조정과 주류성리학자들은 지함을 기인으로 여겼으나 젊은 지식인에게는 인기가 많아 그에게 많은 조언을 듣기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토정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토정이 의학·복술(卜術:점을 치는 술법)에 밝다는 소문이 점차 퍼져 신수를 보아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책을 지었는데 그것이『토정비결』이다.
◉ 이지함의 기행
이지함이 장가를 간 다음날,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는데 도포가 없어진 채였다. 집안사람들이 왜 옷차림이 그러냐고 묻자, 지함은 태연스럽게 무악재 넘어 홍제교를 지나가다 세 명의 거지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있어서 도포를 찢어 나눠주고 왔다는 거였다. 당연한 일을 했는데 왜 놀라느냐는 듯이 쳐다보아서 신부와 집안사람들이 모두 할 말을 잃었다.
◉ 이지함의 논설
사람은 누구나 안으로는 슬기롭고 강해지기를, 밖으로는 부유하고 존귀해지는 네 가지 소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존귀해지는 것은 벼슬하지 않은 것보다 존귀한 것이 없고 탐욕을 부리지 않는 것보다 부유한 것은 없다. 강함도 다투지 않는 것보다 강한 것이 없고 슬기로움도 알지 않는 것보다 신령스러운 것이 없다. 그러나 알지 못하면서도 슬기롭지 못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심성이 혼미하고 어리석은 탓이다. 다투지 않으면서도 강하지 못한 경우는 심성이 나약한 탓이다. 따라서 탐욕을 부리지 않는데도 부유하지 못한 것은 심성이 가난한 탓이요 벼슬을 하지 않아도 존귀하지 못하는 것은 심성이 천박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없으면 슬기롭고, 다투지 않으면 강하고,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부유하고, 벼슬을 하지 않으면서도 존귀해지는 것은 오로지 대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토정선생이 남긴 기억하고 싶은 말
- 사람마다 그 마음을 내는 밭이 다르니 마음도 다르네. 그것이 곧 운명일세
- 남들이 무심히 스쳐지나는 것을 침착하게 알아보면 그게 바로 쪽집게지요
- 방기(放氣) 들어오는 돈을 꼭 잡고만 있지 말고, 잘 쓰라는 말이요.
- 운명이란 느닷없이 찾아와서 사람의 일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다
- 무덤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평생 동안 쌓은 공덕뿐이라네
◈ 성주사지(聖住寺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산골에 자리 잡고 있는 절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석등, 5층석탑(보물 제19호), 금당건물과 그 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동삼층석탑,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 성주사지석등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성주사지오층석탑(보물 제19호) 앞에 놓여있는 8각석등으로, 석탑 앞에 각 부분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71년 석탑을 수리하면서 현재의 자리에 세워 둔 것이다. 형태는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을 이루는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하나의 돌로 다듬어 놓은 바닥돌과 받침의 아랫부분은 그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렀다. 아무런 조각이 없는 가운데기둥은 가늘고 긴 편이다. 윗받침돌은 맨아래의 받침을 거꾸로 놓은 듯 서로 대칭을 이룬다. 화사석은 불빛이 퍼지도록 4곳에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1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다. 화사석에 마련된 창의 주변에 창문을 걸기 위한 구멍의 흔적이 없는 점이나 가운데기둥이 가늘고 길어 전체적 균형이 맞지 않는 점 등으로 보아 뒤의 5층 석탑보다 시대가 늦어지는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 성주사지중앙삼층석탑.....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성주사의 옛터에서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뒷편에 나란히 서있는 3개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상·하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 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 성주사지동삼층석탑....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성주사 창건기에 세워진 삼층탑으로 원형보존이 되어있다. 금당지(金堂址)뒤에, 나란히 서있는 3기의 석탑 중 가장 동쪽에 위치, 신라탑 양식을 보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은 4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 ·위층 기단은 각각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위층 기단의 맨 윗돌과 탑신의 1층 몸돌사이에는 별도의 돌을 끼웠으며,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렸다. 각 층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고 1층 몸돌의 남 ·북면에는 자물쇠모양과 한 쌍의 고리모양을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이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통일신라 후기 절을 새 단장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 탑 역시 이 시기에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 성주사지오층석탑 (聖住寺址五層石塔)....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성주사지에서 금당 터로 보이는 곳의 뒤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탑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석탑이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편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 밑은 수평을 이루다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둔 것은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형식이며,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각 층의 구성이 짜임새가 있으며 우아한 모습이다.
◉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保寧 聖住寺址 朗慧和尙塔碑)....성주면 성주리 80-2
성주사 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 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 석탄박물관 :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114-4 (보령시 성주면 성주산로 508)
석탄박물관으로는 국내 최초로 1995년 5월 18일 건립 개관하여 석탄산업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석탄박물관은 실내전시장과 야외전시장으로 구분 조성되어 있고 광물, 화석 및 측량, 굴진, 채탄, 운반 장비 등 3,800여 점의 전시품을 소장하고 있다. 실내전시장은 역사성 사회성, 경제성 등을 강조한 모두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은 그 특성에 따라 관람 안내 및 기념품을 판매하는 안내의 장, 석탄의 생성과정을 보여주는 탐구의 장 석탄 및 암석의 종류와 석탄이용의 역사를 설명하는 발견의 장, 그리고 참여의 장은 탄광갱도모형 및 광산촌모형을 나타내어 실제 탄광에 와있는 듯 사실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또한 확인의 장에서는 석탄이 생산되는 과정이 영상물로 방영되며, 2층에 마련된 체험의 장은 석탄박물관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지하 수직갱을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이 엘리베이터는 국내최초로 수직갱 지하 400m를 내려가는 승강기(케이지)를 재현한 것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 닫힘 버튼을 누르면 엘리베이터는 급강하를 시작한다. 지하100m, 200m……. 불과 1분 만에 엘리베이터는 지하 400m 까지 하강한다. 사실은 2층에서 1층으로 하강하는 것일 뿐인데, 누구나 착각이 될 정도로 정교하게 특수효과 시설을 해 놓았다. 처음 타는 사람은 그 실감이 공포를 느낄 정도다. 정교한 시설과 실감나는 체험현장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바로 모의갱도가 연결된다. 갱도 내에는 광부들의 작업 모습이 실물과 똑같이 제작되어있다. 또한 특수음향효과로 천공작업, 전기발파, 폐석처리, 채탄작업, 운반 작업 순으로 진행되는 작업 과정을 알기 쉽게 재현하였으며, 폐광에서 나오는 찬바람을 이용하여 냉풍터널을 시설하였고 터널벽면에는 탄광관련 사진을 전시하였다. 냉풍터널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오면 야외전시장이다. 야외전시장은 생산된 석탄을 옥마역까지 운반했던 갱도입구, 권양기, 압축기, 광차 등 탄광에서 이용했던 대형장비가 전시되어있고 이와 함께 탄광에서 매몰되어 희생된 근로자들의 명복을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 개화예술공원(입장료 : 2,000원)..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177-2
개화예술공원은 주변에 위치한 부대시설을 포함해 5만여 평의 규모로 조성되어있다. 대단위 예술종합단지인 개화예술공원은 예술공원 내 허브랜드, 음악당, 육필시공원, 비림공원, 그리고 모산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주황색 지붕에 2층으로 구성된 미술관 본관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오직 보령에서만 생산되는 진귀한 돌, 오석으로 지어졌다. 오석은 표면을 갈면 갈수록 더 까만 빛깔을 내고 갈지 않고 쪼을 수록 하얗게 변하는 성질이 있어 비석이나 조각상으로 국내에서 매우 인기가 높은 돌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드는 기괴하면서도 다양한 모양의 천연 거석(巨石)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앞과 뒤, 왼편으로는 울창한 수목으로 꽉 들어찬 산들이 빙 둘러쳐 있고, 5만 여 평의 분지에는 각양각색의 꽃과 나무, 돌 무리와 가슴을 적시는 시들이 탐방객들의 시선을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