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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의 줄거리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이 맞닥뜨리는 상황은 바로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에 갇히는 형국입니다. 이 상황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유일한 대상으로 만나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함이 하나님으로 항상 기뻐함과 하나님과 쉬지 않고 대화함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범사에 감사함입니다.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
(데살로니가전서 5:12~28)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배수진(背水陣)은 전쟁에서 물을 등 뒤로 하고 진을 치는 병법입니다. 퇴로가 없어 매우 불리한 형세이기에 병법에서는 절대로 금기시됩니다. 이기면 다행이겠지만 지면 다 물에 빠져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배수진이 극적인 힘을 발휘할 때도 있습니다.
중국을 통일했던 진나라가 사분오열 되던 시기의 일입니다. 한나라의 장수 한신이 조나라의 장수 이신을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한신의 군사는 만 이천 명이었으나 이신의 군사는 이십만 명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전법으로는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었던 한신은 꾀를 냅니다. 이천 명에게는 한나라 깃발을 들고 매복하게 하고, 나머지 만 명으로는 전투를 하다 물가로 후퇴를 시킵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배수진을 치는 상황을 일부러 만든 것입니다. 이신의 군대는 도망가던 한신의 군을 추격하다 배수진 친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제 독 안에 든 쥐라고 비웃으며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고작 만 명의 군사가 밀려나지 않습니다. 한 걸음이라도 밀리면 뒤에 있는 사람부터 물에 빠져 죽는 상황이었기에, 차라리 앞으로 나가 싸우다가 죽겠다는 임전무퇴의 마음가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신의 이십만 대군은 배수진을 친 만 명 한신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후퇴를 시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신은 이미 매복시켰던 이천 명을 시켜 병력이 모두 빠져나간 이신의 성을 점령하고 한나라의 깃발을 꽂게 한 뒤였습니다. 이제 이신은 자기의 성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배수진을 치고 필사의 각오로 덤벼드는 만 명의 군사를 대적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결국 이십만 대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한신은 더욱 공격을 몰아쳤고 이에 조나라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배수진이 관용어가 될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배수진의 각오로 경기에 임하라, 배수진의 각오로 시험 준비를 한다.’라는 식으로 자주 인용되고는 합니다.
한편 오늘 본문을 보면 바로 이러한 배수진을 연상시키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16~18절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갈 때 놓이게 되는 상황이 바로 배수진과 같습니다. 뒤로는 십자가로 배수진을 치고 앞으로는 하나님을 절벽처럼 마주하는 상황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고백을 할 때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때 마음의 형국이 배수진의 형태와 흡사합니다. 마음에서는 의식 작용과 욕구 작용이 나타납니다. 의식은 무엇인가를 있다고 존재감을 느끼는 작용입니다. 욕구는 마음의 공백을 채우고 싶어 하는 작용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과 욕구의 작용으로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또 생각이 작용할 때 의식과 욕구가 따라가게 됩니다. 의식과 욕구와 생각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작용을 하는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갈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십자가 배수진을 치게 됩니다. 생각이 더는 십자가를 넘어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의식은 무엇인가 있다는 존재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러한 의식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세상의 대상들을 있음으로 느낄 수 없게 됩니다. 또 우리 마음의 욕구는 무엇인가로 채워져서 기뻐하고 만족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욕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세상의 대상들을 기뻐하거나 만족할 대상으로 삼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넘어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배수진에 비유한 것입니다.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놓지 않는 한 십자가는 배수진이 됩니다. 십자가로 인해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필사의 각오로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간 우리 마음이 앞으로 나갈 때 마주하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이 절벽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절벽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피할 길 없이 하나님만을 마주하게 되고, 하나님에게서 막힐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가려고 할 때 반드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갔다면 십자가 배수진을 치고 하나님 앞으로 돌진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절벽처럼 내 앞을 가로막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16~18절에 제시되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절벽처럼 나를 가로막고 계신 하나님께로 파고들 수 있는 굴이 생기고 길이 생기고 빛이 생깁니다. 항상 기뻐하면서,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뚫고 들어갈수록 그 안에서 은총과 기쁨의 무한한 세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절대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배수진입니다. 필사의 각오로 하나님만을 상대하게 합니다. 십자가 배수진을 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게 되면 앞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우리 앞에는 하나님만 계십니다. 하나님 외에는 상대할 다른 대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 앞을 절벽처럼 막고 계신 하나님을 상대하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 때문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놀랍게도 하나님 안에 내 마음이 지나갈 굴이 생기고, 길이 생기고, 들어갈 새로운 나라가 생깁니다.
18절을 하반부를 보면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 함은 성경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요청은 신명기 6장 5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생각도 의식도 욕구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앞으로 나가야만 하는 운명적인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절벽처럼 가로막고 계신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으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범사에 감사할 때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립니다. 이처럼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에 놓여있는 상태에서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이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것을 요청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으로 항상 기뻐하며, 늘 하나님과 대화하고,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쁨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먼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떠올려봅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었을 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집니다. 건강이 안 좋다가 회복되면 기뻐할 필요도 없이 기뻐집니다. 웃고자 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간 사람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하나님은 돈을 버는 것처럼 나의 노력으로 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은 건강을 회복하는 것처럼 잘 관리해서 가질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통째로 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스스로를 내주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저절로 기뻐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고백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맞닥뜨림은 돈 같은 세상의 가치들을 맞닥뜨림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이 돈을 맞닥뜨린 상황에서는 실제로 돈을 소유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맞닥뜨릴 때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당신 자신을 주신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각에 대해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돈을 벌었을 때처럼 즉각적인 기쁨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유일한 나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기쁨으로 믿을 때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기쁨이심을 믿을 때 나타나는 모든 태도가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습니다. 멋진 자동차를 사고 싶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그대로 놔둔다면 하나님을 가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할 때 마음은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로 들어갑니다. 십자가 배수진을 치고 하나님이 유일한 기쁨이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마음에는 기쁨과 만족이 생겨납니다. 돈을 벌어서 만족하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차를 바꿔서 기뻐하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을 더 많이 가져야 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유일한 기쁨이심을 믿는 태도가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뻐지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는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만이 내 마음의 진정한 채움이 되시고 유일한 기쁨이 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갖고 싶은 마음의 욕구가 생길 때마다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로 들어갑니다. 절벽처럼 나를 가로막고 계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쁨이라고 믿고, 하나님을 가짐으로써 이 세상을 향해 가졌던 바람들이 없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할 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십자가 배수진을 친다는 것은 더는 세상에서 기쁨의 이유를 찾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만을 유일한 기쁨으로 믿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채워지려는 모든 태도가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함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잠식되고 스며들고 중독되게 하는 모든 일을 막아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에 들어가면 내 앞에 계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쁨으로 믿게 됩니다. 그럴 때 절벽처럼 나를 막고 계신 하나님 안쪽으로 들어가 숨을 쉴 수 있고, 평강을 누릴 수 있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저절로 하하 호호하며 기쁘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러한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으면 오히려 더 괴로워지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기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쁘지 않은 이유는 기뻐할 생각을 하지 않고 기뻐지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에서 기쁨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항상 기뻐함은 하나님이 유일한 기쁨이심을 믿음으로써 나타나는 모든 태도입니다.
이어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도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에 놓인 상태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대화의 상대라고 여기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함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세상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십자가 배수진을 쳤기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전세가 위급하다고 강물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상대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어떤 것인지는 주님께서 주기도를 통하여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입니다.
한편 주기도를 보면 뒤에 용서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짓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내게 손해를 끼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씀은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보물이라는 뜻입니다. 그 의미를 풀어보자면 ‘하나님! 내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만 붙잡게 해주시옵소서. 그런데 내 마음에서는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는 작용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만이 있음이고, 하나님만이 좋음이기에, 하나님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보물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보물이시기에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내게 잘못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보고 있는 한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서 하나님을 빼앗아 갈수 없습니다. 몸으로 만나는 세상 것들에 대해서 손해를 끼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에 끼어서 하나님만을 유일한 보물로 생각하고 있다면 피해의식이나 손해의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돈을 사기 당했어도, 누가 나를 때렸어도, 누가 나를 모욕하고 자존심을 상하게 했어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보물이라면 손해의식을 가질 수 없기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서 거룩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보물이며,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좋음이라는 내용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내용의 기도를 드리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만사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움직여지리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하고 소원하라는 뜻입니다. 배우자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직장생활을 비롯한 모든 관계에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배수진을 치고 하나님 절벽 사이에 우리의 마음이 유지되는 동안에 할 수 있는 유일한 대화로써의 기도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나의 유일한 대화의 상대이십니다. 내가 만나는 가족이나 이웃들에 대해서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 대화의 결과를 대변인으로서 관계하게 됩니다.
한편 기도는 골방에서의 기도와 생활 현장의 기도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골방에서의 기도는 주기도의 내용을 따라 전부 다 혼자 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생활 현장의 기도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대로 주의 기도가 생활 현장에서도 이어져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보물이시기에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게 해주시고,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바라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관계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아버지의 나라 다시 말해 아버지의 주권이 임하기를 바라며,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십자가에서 주체성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행동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오직 나의 말과 행동은 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여지는 것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보물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내가 하는 관계에 임하시기를 바라며, 내가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만 이루어지기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에 낀 마음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내가 몸으로 처하는 생활 현장의 상황과 때와 필요에 따라서 늘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담긴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에 있을 때,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서 인격의 핵심인 마음이 관여할 수 없게 됩니다. 십자가 배수진을 쳤다는 것은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필사의 각오고 전진해서 절벽처럼 앞을 가로막고 계시는 하나님 안으로 뚫고 들어가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십자가 배수진을 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항상 기뻐함으로써 절벽이 열리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관여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에 낀 상태에서 하나님 품으로 깊이깊이 파고 들어가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십자가 배수진을 친 사람들은 세상의 일들을 강 건너 불 보듯이 합니다. 인격의 핵심인 마음이 세상에 관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에 이끌려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다양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가족 문제, 직장 문제 등은 몸에 있기 때문에 관계하게 되는 일들입니다. 이러한 일들에 문제가 생기고, 일이 생기고,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마음이 십자가 배수진을 치고 있다면 관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면서,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범사가 주어집니다. 이런 일도 주어지고 저런 일도 주어지는데 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강 건너 불 보듯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감사가 하나님 안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어 가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으로 항상 기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쉬지 않고 대화하기 위하여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서 범사에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입니다.
19절을 보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20~22절의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은 모두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는 말씀에 포함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저녁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 보다 자세히 말씀드릴 것이기에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 배수진을 치고 세상으로 퇴각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 절벽에 가로막혔다면, 기쁨과 기도와 감사로 살아계신 하나님 안으로 뚫고 들어가서 깊이깊이 안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는 내가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내 몸을 직접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는 살아있는 인격적 원리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에 머물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한 구하지 않아도 성령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의 인격적 원리가 되어주십니다. 그러나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를 벗어나서 우리의 생각과 의식과 욕구가 이 세상 것을 향한다면 성령께서는 더는 우리의 인격적 원리가 되어주실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것을 생각하고, 어떤 대상을 하나님보다 더 우선적인 존재감의 대상으로 느끼고, 세상 것을 바라고 욕구한다면 성령은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더는 성령을 따르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에 마음이 머물면서, 오직 절벽처럼 나를 가로막고 있는 하나님만으로 기쁨을 삼고, 하나님과 쉬지 않고 대화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범사에 감사할 때 성령을 소멸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서 성령의 원리대로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모습을 마음에서 그리시고 의식으로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함으로써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에 마음이 머무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일에는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쪼록 십자가 배수진과 하나님 절벽 사이를 끝까지 평생 동안 유지하시고 고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세상으로 퇴각하지 않는 배수진을 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 앞을 절벽처럼 가로막힌 하나님 안으로 뚫고 들어가기 위하여 전력을 다해 기쁨과 기도와 감사를 쉬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성령의 살아계신 행동 원리를 따라 말하고 행동하며 사는 기가 막힌 사람들이 될 수 있게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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