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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잃음 제로, 얻음 제로의 경건 연습>의 줄거리 :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경건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는 모든 영적 이야기는 결국 모조리 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가 되어버립니다. 선한 싸움이 성공적이면 반드시 경건 수행의 단계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경건의 구간에 도착하였다면 이제 경건에 이르는 구체적인 연습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 연습 방법이 바로 잃음 제로, 얻음 제로 연습입니다.
잃음 제로, 얻음 제로의 경건 연습
(디모데전서 4:6~16)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우리는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그런데 경건의 연습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잃음 제로, 얻음 제로’의 법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잃음(lose)이 상실이고 손해라면, 얻음(gain)은 이익이고 개선입니다. 우리는 잃음을 제로로 만들고 얻음을 제로로 만듦을 통해 경건을 연습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7절을 보면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연단을 통해 경건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란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거들먹거리는 모든 이론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론이 아닌 실제 생활 현장에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필요함을 가르쳐줍니다.
믿음이란 실제 생활 현장에서의 선한 싸움입니다. 그리고 선한 싸움의 결과는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상태입니다. 잠언 4장 23절을 보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서는 소망의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소망의 작용이란 무엇인가를 바라고 가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바람을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붙잡고 싸워야 하는 선한 싸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만 바람이 유지되기 위해서 이루어야 될 일이 경건입니다.
지난 시간에 경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경건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삶의 현장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에서 나타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실제로 하나님을 눈앞에서 볼 때와 차이가 없는 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 동료를 앞에 두고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직장 동료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직장 동료에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이 눈앞에 계신 것처럼 여기며 말하고 행동을 했다면 경건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눈앞에 계신 것처럼 여기며 돈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면 경건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경건의 근거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를 경건하게 해주는 바탕은 하나님 자신을 소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직접 눈앞에 계신 것과 같은 마음가짐을 갖게 하는 근거입니다.
10절을 보면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란 곧 가질 때 기쁘고 만족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있으면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보아하니 내게 돈을 잘 벌게 해주실 분은 하나님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 소망을 둔 마음가짐이 아닙니다. 소망이 돈을 향해있기 때문입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하면 기쁘고 만족할 수 있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건강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도 하지만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 소망을 둔 것이 아니라 건강에 소망을 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자녀의 형통이 소망이든 배우자의 승진이 소망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무엇을 기쁨과 만족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소망의 내용이 결정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둠이란 하나님을 유일한 기쁨이자 만족의 대상으로 하는 믿음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을 갖기 원하고, 하나님과 두터운 관계에 들어가기만을 바라는 마음가짐이 하나님에 대한 소망입니다.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구주’라고 표현합니다. 보통 구주라는 표현은 예수님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굳이 하나님께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은 바로 소망과 연관이 있습니다. 만약 돈에 소망을 두었다면 돈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 되리라 믿어서 가지고 싶어 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돈을 소망해도 돈은 내게 찾아와서 자기 자신을 주지 않습니다. 건강을 소망할지라도 건강은 내게로 찾아와서 자기 자신을 주지 않습니다. 자녀의 형통을 소망할지라도 자녀의 형통이 내게로 찾아와서 자기 자신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내가 소망하는 하나님은 내게로 찾아와서 자기 자신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구주, 즉 구원의 주로 표현하는 이유입니다. 소망은 바람이고 강렬하게 욕구함입니다. 이렇게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돈을 소망하는 자에게 구원이란 돈이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건강을 소망하는 자에게 구원이란 건강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돈이든 건강이든 이 세상의 것들은 자기 자신을 주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당신 자신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함이란 그 소망 자체로서 이미 하나님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구주라 표현한 이유이며, 우리가 경건에 이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갖고자 한다면 하나님만을 소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저것을 소망하는 가운데 하나님도 소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을 소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당신 자신을 주시는 구주가 되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을 소망한다면 이미 하나님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경건의 근거입니다.
다시 7절을 보면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경건을 어떻게 연단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기에 앞서 연단에 담겨진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연단’이라 번역된 헬라어 귐나조(γυμνάζω)는 ‘옷을 벗고 움직이다’라는 뜻입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유명한 운동은 달리기나 격투기였습니다. 이러한 운동들은 웃통을 벗고 했습니다. 즉, 귐나조는 실전에 임하는 마음가짐으로 연습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뜻을 염두에 두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는 말씀을 풀어볼 수 있습니다. 경건의 실전이란 부활하여 신령한 몸을 입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한편 육체의 몸을 입고 땅에서 사는 동안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소망하는 가운데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가운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듯이 살아갈 때 경건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한 다양한 장소에서 살아갑니다. 다만 실제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가진 것처럼 대면하여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경건에 이르는 연단입니다. 다만 이러한 말씀을 보자면 도저히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모습을 보자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것처럼 살아온 시간이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기에 가진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실제로 가진 것처럼 소망하는 경건을 이루어나갈 수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이 경건을 위한 연습은 바로 제목에서 말씀드린 ‘잃음 제로, 얻음 제로’의 법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육체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소망 안에서 가질 수 있습니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서 하나님을 갖는 것이 실전이라면, 육체로 살면서 하나님을 소망함은 실전과 동일한 연단이고 연습입니다. 이 연단의 방법이 ‘잃음 제로, 얻음 제로’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 종신형을 살게 되었다고 해봅니다. 감옥에서는 기존에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욥처럼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가족과의 관계조차 잃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옥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면 그동안 재산을 얼마를 쌓았든지, 어떤 인간관계를 맺었든지, 어떤 삶의 흔적을 남겼든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설령 이러한 상황이 올지라도 의미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 안에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입니다. 하나님을 소망한다면 감옥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잃게 되는 이 세상의 좋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셈입니다. 잃는 것은 있지만 내게 좋다고 여겨지는 대상이 아니므로 아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잃음 제로’의 상태입니다.
‘잃음 제로’는 하나님만을 소망 안에서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설령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일지라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재산이 없어지고, 명성이 없어지고, 가족관계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가 없어지고, 심지어는 몸이 없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을 가지고 있기에 아무것도 잃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이것을 스스로에게 날마다 깨우쳐가는 과정이 경건에 이르는 연단의 방법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으로 믿고, 그렇게 믿는 하나님을 소망하고 있다면 이와 같은 태도가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라는 사실이 이론이 아닌 실제 생활 현장에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주어져 있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먼저 몸이 있습니다. 그리고 몸으로 마주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자가든 전세든 월세든 가족이 살아가는 집이 있습니다. 많든 적든 얼마간의 돈도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과의 인간관계도 있습니다. 직분이 있고 직장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린다고 생각해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손해 의식이나 상실감을 하나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소망 안에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스스로에게 일깨우는 과정이 경건에 이르는 연단입니다.
경건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가짐이 하나님을 직접 볼 때의 마음가짐과 동일한 상태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을 눈앞에 마주하는 것과 동일해지는 경건에 이르는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연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연단의 방법이 바로 ‘잃음 제로’의 마음가짐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다 없어진다고 해도 하나도 잃을 것이 없음을 반복하여 깨우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이라는 이론을 실제로 느끼고 누릴 수 있는 상태로 나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실제로 느낄 수 없다면 아무리 입으로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할 때 하나님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반대로 ‘얻음 제로’의 마음가짐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경건에 이르는 연단은 잃음뿐만 아니라 얻음에도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솔로몬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된다면 설령 솔로몬 같은 부귀영화가 임하더라도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라면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주어지더라도 이미 가진 하나님 이외에 더 가질 것은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한 번 고백하고 끝낼 일이 아닙니다. 생활 현장 속에서 반복되고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장사가 잘돼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기뻐하고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돈이 기쁨이나 만족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돈을 앞에 놓고 경건에 이르는 연단을 해나가게 됩니다.
‘하나님! 오늘은 손님이 많이 와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이 돈이 내가 소망 안에서 하나님을 가짐으로 생겨난 기쁨과 만족에 대해서는 조금도 보탬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으로 인한 좋은 마음이 생겼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소망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좋음이시라면 돈은 좋음일 수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좋음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돈이 하나도 안 벌렸다고 해서 잃는 것이 없듯이, 돈을 많이 벌었어도 얻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십자가를 붙잡고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경건에 이르는 연단입니다.
이것이 ‘잃음 제로, 얻음 제로’의 법칙입니다. 잃어도 잃음이 아니며, 얻어도 얻음이 아닙니다. 실제로 내가 잃거나 얻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없어졌으나 마음에서 잃음에 대한 느낌이 제로라는 뜻이고, 생겼으나 마음에서 얻음에 대한 느낌이 제로라는 뜻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소망 안에서 가졌기 때문입니다.
소망 안에서 가지고 있는 상태를 실전으로 여기는 것이 연단입니다. 실제로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직면하듯이 하나님을 소망하면 ‘잃음 제로, 얻음 제로’의 법칙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을 보고 산 아래의 일들을 완전히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산 아래에서 무엇을 잃는다고 해도 잃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었고, 산 아래에서 무엇을 얻는다고 해도 얻는 것으로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소망함으로써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소망 가운데 가졌다는 상태를 삶에 적용할 때 실제로 하나님을 가진 것과 동일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실제 생활 현장에서 몸이 있기 때문에 주어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것들에 대한 연단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아무리 입으로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라고 고백할지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소망 가운데 하나님을 가졌다면 실제로 하나님을 가진 자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연습이 바로 잃어도 잃는 것이 없고, 얻어도 얻는 것이 없다는 ‘잃음 제로, 얻음 제로’의 법칙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생활화의 완성 단계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에 하나님만을 상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만을 상대함이란 곧 하나님만을 소망함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유지될 때 하나님만을 소망함이 실제 생활에 적용됩니다.
돈이 안 벌려도 손해 의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돈이 벌려도 무엇인가를 얻었다는 의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안 벌려도 하나님의 주권이 하신 일이고, 돈을 벌게 하셨어도 하나님께서 용도가 있으셔서 주셨을 뿐입니다. 돈이 벌리면 벌리는 대로, 안 벌리면 안 벌리는 대로 하나님을 소망할 뿐입니다.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건강하지 못하면 못 한대로 하나님을 소망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기에 설령 아프고 죽는다고 해서 손해 볼 일이 아니며, 건강하다고 해서 이득을 본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생각하고 실제 생활에서 적용해나가는 것이 경건에 이르는 연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좋음을 스스로에게 제시하고 적용해야 경건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는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족이 있고 집이 있고 재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유일한 있음으로 의식하기에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있음으로 느끼지 않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도 없고 집도 없고 재산도 없을지라도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기에 하나님만을 소망으로 갖고 있을 때 없다고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세상 것은 없어도 없음이 아니고 있어도 있음이 아닙니다. 세상 것은 잃어도 잃음이 아니고 얻어도 얻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잃음 제로, 얻음 제로’의 법칙을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관련해서 계속해서 실제 생활 속에서 적용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돈이 벌리지 않아도 잃은 것이 없다고 느껴지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어도 하나님을 소망함으로 이미 얻을 것은 다 얻었다고 느껴지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단이 없다면 변화산에서의 베드로의 경험이나 천국에 계신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을 직접 가졌다는 실전 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적용하는 연단의 과정이 없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을 직접 가졌을 때 나타나는 반응과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함을 통해 우리는 점점 더 경건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2절을 보면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경건은 연륜과 상관이 없습니다. 풍부한 세상살이 경험을 가졌든, 많은 학문을 쌓았든, 한 분야의 전문가로 불리든 경건과 상관이 없습니다. 경건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소망의 대상으로 삼으며 직접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에 적용하는 자들이 경건할 수 있습니다.
그 적용의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연관하여 이루어지는 ‘잃음 제로, 얻음 제로’의 법칙입니다. 세상 것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없어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으면 다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없으면 다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친구가 많고 돈이 많아도 하나님이 없으면 다 없는 것입니다.
세상 것의 ‘잃음 제로, 얻음 제로’의 법칙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기 때문에 세상 것은 아무리 잃어도 잃음이 아니며, 얻어도 얻음이 아닙니다. 이것을 실제 생활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제로 보듯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실제로 하나님을 마주하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상태가 하나님 소망의 특징이고 경건으로 이어지는 연단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사는 동안에 ‘잃음 제로, 얻음 제로’의 법칙을 계속해서 적용하여 나날이 경건에 가까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생활화에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경건에 이르기 위하여 오늘도 구체적인 생활 곳곳에서 ‘잃음 제로, 얻음 제로’의 법칙을 활용하여 경건에 이르는 연단을 쉬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