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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안정된 삶에 취해 죽어간 사데 교회>의 줄거리 :
사데 교회의 특징은 일곱 교회 중에서 이단의 위협이나 외부적인 탄압과 박해가 가장 적었던 곳이라는 점입니다. 외부적인 아무런 공격이나 위협이 없는 상태에서 사데 교회는 전체적으로 고스란히 내려앉으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주어지는 세상 삶의 안정된 조건들로 인해서 스스로 취하고 질식해 버려 교회를 살지 못한 것입니다.
안정된 삶에 취해 죽어간 사데 교회
(요한계시록 3:1~6)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사데 도시는 에게해 연안을 중심으로 한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헤르무스강과 투몰루스산 사이 계곡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 계곡이 사데 도시를 군사적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데 서쪽의 에게해 건너에는 그리스 반도가 있었고, 남쪽으로만 길이 열려있을 뿐 다른 방향은 계곡에 의해 닫혀있기에 군사적으로 방어가 용이했습니다. 또 이 계곡을 따라서 무역로가 지나고 있었기에 무역의 중심지로서 활발한 상행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지역적으로는 양털 가공업, 염색 공업, 사금 채취도 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전쟁이 많았던 시기였기에 군사적으로 안정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는 점은 큰 이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상공업과 무역이 성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부유했습니다. 이러한 사데 도시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안정적 조건을 갖추기 위한 최상의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데 교회의 문제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바로 세상적인 안정이 교회에 문제를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군사적으로 안정적이고 재정적 부유함은 모든 나라의 정치인과 국민들의 꿈입니다. 이것은 공생애 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꿈이자 이스라엘 사람들의 꿈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데 교회는 특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데 교회는 일곱 교회 중에서 이단의 위협이나 외부적인 탄압이나 박해가 가장 적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것이 사데 교회가 흔들리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사데 교회는 외부적인 탄압이 없는 세상적인 안정이 신앙과 영성에 얼마나 큰 위협의 요소가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1절을 보면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데 교회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초상화가 묘사되고, 사데 교회의 상태를 책망하시는 표현이 이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살았다는 것은 몸이 살아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쨌든 교회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이론상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었다고 믿고 있기에 이름으로는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죽은 자라고 하십니다. 죽음이란 살아계신 하나님과 어떤 식으로도 연결이 되어 있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살고 죽는 문제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연결되지 않은 상태가 죽음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여러 교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칭찬을 들었고, 에베소 교회나 버가모 교회나 두아디라 교회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다만 책망을 들은 교회에 대해서도 사데 교회와 같이 죽음이 언급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사데 교회가 무척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당시의 사데 도시는 세상적인 안정과 번영을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군사적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였고, 양털 가공업, 염색 공업, 사금 채취 등을 통한 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많은 수입으로 세상적인 안정적 조건을 만드는 요소들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안정적인 조건을 좋아해서 마음이 가닿게 되면 그것들은 마음 안으로 스며듭니다. 마치 솜이불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취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데 교회와 관련해서 예수님의 초상화는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로 묘사됩니다. 이러한 표현은 에베소 교회와 유사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교회를 눈에 보이는 조직으로 만들어서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보존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교인들의 마음은 눈에 보이는 교회 조직에 묶이게 되었습니다. 사데 교회가 에베소 교회와 영적으로 비슷한 점이 있다면 마음이 땅에 있는 무엇인가에 묶였다는 것입니다. 한편 다른 점도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이 땅에 터 잡은 조직체로서의 교회에 묶였다면, 사데 교인들의 마음은 땅에 터 잡은 안정된 삶의 조건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데 교인들의 삶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조직 또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재정적인 면에서나 안전에 관한 측면에서나 모든 면에서 온전한 조직을 이루는 삶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에베소 교회나 버가모 교회나 두아디라 교회나 사데 교회는 공통적으로 교회를 살지 못했다는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교회를 살지 못함이란 마음이 땅을 떠나 하늘로 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음을 의미합니다. 다만 세부적인 이유는 에베소 교회나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와 사데 교회가 모두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교회가 교회를 살지 못했음을 책망하십니다. 우리는 이들이 교회를 살지 못한 각기 다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를 살지 못함은 마음이 땅을 떠나 하늘로 가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교회를 산다는 표현은 낯설지만 분명히 성립되어야만 하는 표현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교회를 잘 살았던 교회였습니다. 앞으로 보겠습니다만 빌라델비아 교회도 교회를 잘 살았다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교회를 산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 조직의 회원이 되는 것이나,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예배당에 다니는 것과도 무관한 일입니다. 교회는 다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살아야 합니다. 세례 의식을 통해서 세례 교인이 되거나, 주일이나 때마다 예배당에 출석한다고 해서 교회를 사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에 언급되는 일곱 교회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교회로 번역된 헬라어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의 밖으로 나오다’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ἐξ)와 ‘부르다’라는 뜻의 칼레오(καλέω)가 합쳐진 형태입니다. 교회란 ‘밖으로 나오라고 부른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다시 말해 밖으로 나오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산다는 뜻을 알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봅니다. 복음이 기쁨의 소리인 이유는 밖으로 나오라는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밖으로 나오라는 부르심을 받아들였음을 의미합니다. ‘나를 밖으로 나오라고 불러주시다니 이렇게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라는 심정이 되기에 복음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나오라는 하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나를 부르고 계시고, 내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나오라는 부르심을 받고 하늘로 갈 수 있다니 가장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내게 가장 기쁜 일은 돈을 많이 벌거나 로또에 당첨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서울대나 하버드대 같은 일류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아닙니다. 몸이 아프다가 건강이 회복되는 것도 아니며, 기가 막히게 멋진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내게 있어서 가장 기쁜 소식은 이 순간 하늘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으로부터 마음이 빠져나와 하늘로 오라!’는 부르심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의 사건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는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하늘로 오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로부터 생활 현장에서 교회를 산다는 것은 에클레시아를 사는 것으로써 세상 밖으로 나와 하늘로 오라는 부름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활 현장은 다양합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시장이나 관공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생활 현장에서나 교회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교회를 산다는 것은 밖으로 나오라는 부름에 응답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클레시아 말 자체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음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교회를 산다는 말을 자꾸 예배당에 출석하거나 교인으로서 예배당 조직에 충성 봉사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진정한 본래 의미에서 교회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세상의 이런저런 일들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처럼 교회 조직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로잡힘은 마음이 하늘로 가지 못하는 이유가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교회란 하늘로 오라는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와 같은 상황에서는 교회 조직이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고 하늘로 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기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나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도 살펴봤습니다만 사데 교회와 마찬가지로 결국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다양한 이유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데 교회는 ‘죽은 자’라고 표현될 정도로 마음이 이 세상에 붙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마음은 좋음을 얻어서 만족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경우는 환난과 궁핍의 장애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마음을 땅에 붙이기 불편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신발 속에 작은 모래가 들어가도 걸음이 불편해지는 것처럼, 서머나 교회가 당한 환난과 궁핍의 장애는 마음을 땅에 붙일 수 없게 하는 고마운 불편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데 교회는 상황이 반대였습니다. 뱀이 배를 땅에 붙이듯이 마음의 배를 땅에 붙이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전면적으로 세상을 흡수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결과 솜이불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마음이 세상에 스며들었고 세상에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하나님이라는 존재, 예수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식 자체가 사라져 버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할 때 온 국민이 ‘잘살아 보세’라는 모토 아래에 힘을 쏟았습니다. 예배당도 예수 믿어서 잘살아 보겠다는 사람들로 북적댔습니다. 그런데 차츰 경제가 발전하며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하는 시대는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들도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한때 1,200만 명을 헤아리던 개신교인의 숫자는 현재 200만 명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빠져나간 천만 명의 사람이 바로 사데 교회와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남아있는 200만 명 중에도 에베소 교회의 문제점, 버가모 교회의 문제점,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 상태를 유지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는 옮겨질 것이고, 입의 검으로 싸워서 죽이는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함께 아예 예배당을 떠나버린 천만 명의 경우는 보다 사태가 심각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기록된 사데 교회의 상태가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스며들었고, 세상에 취하여 잠겨버렸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 자체를 부를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은 상태입니다. 사데 교회와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어지는 2절을 보면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하셨습니다. ‘남은 바’가 언급되는 것은 사데 교회가 완전히 죽은 상태는 아님을 가리킵니다. 우리 마음은 교회를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땅에서부터 하늘로 올라오라!’는 부르심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는 것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에 취한 상태를 벗어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르심에 대해 이론으로나마 ‘저 말이 맞기는 맞다.’라는 일말의 양심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데 교회에 대해 언급된 ‘남은 바’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데 교회를 향해 양심의 마지막 끄트머리를 굳게 붙잡고 일깨울 것을 요청하십니다. 정신을 못 차리고 혼미한 상태의 사람에게 암모니아 냄새를 맡게 해서 정신을 돌아오게 하듯이 세상에 취한 상태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사대 교인들의 마음은 세상적인 안정적 토대 위에서 세상이 스며들고 취해버린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곧 교인의 신분이 더럽혀지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교인은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가 뜻하는 대로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하늘로 오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들입니다. 교인 됨이 곧 교회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에 속한 교인으로서 신분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 흰옷을 입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중력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더군다나 사데 교회처럼 세상에 안정적 조건을 갖춘 상황에서는 더합니다.
예를 들어 몸이 무척 건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진을 해봐도 이상 있는 곳이 없고 이러한 상태라면 백 살도 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건강을 자신하는 상태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건강에 스며들고 건강에 취하게 됩니다. 건강과 관계된 영역에서는 의식에서 하나님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남편이 매달 천만 원이 넘는 돈을 벌어옵니다. 회사에서 남편의 능력이 굳건히 인정받고 있기에 잘릴 일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내의 마음이 남편의 능력이나 재정적 상황에 가 닿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에 재정적 안정이 스며들어 옵니다. 그럴 때 재정과 관련해서는 더 이상 하나님과 예수님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재정에 취하게 된 것입니다. 혹은 은퇴를 해서 연금이 두둑합니다. 한 달에 사오백만 원씩 나오는 연금으로 노후에 대해서는 걱정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 노후와 연관해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 상태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음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이기기 위해서는 교회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안정된 삶의 조건 중에 가 닿아서 스며들어 와 있는가를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이 스며들어 와 있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는 싸움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김은 싸움 끝에 주어지는 것이지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유는 내 속에 육체 친화적이고 세상 친화적 속성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데 교회와 연관하여 이김이란 삶의 안정된 조건에 마음이 가닿지 않도록 기쁨의 소식을 따라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안정됨을 좋아합니다. 건강이 안정되고, 재정적으로 안정되고, 미래가 보장되고, 자녀들이 제 앞길을 찾아 잘 나가는 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쁨이 아닌 죽음입니다. 건강이나 재정이나 자녀의 형통 자체가 죽음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마음에 스며든 상태가 죽음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스며든다면 하나님을 찾을 필요도 없고 예수님을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가 될 바에는 차라리 건강이 안 좋은 편이 더 낫고, 재정이 불안한 상태가 더 나으며, 자녀들이 말썽을 일으키는 편이 더 낫습니다. 연금이나 미래에 대한 보장이 아무것도 없는 편이 낫습니다. 마음이 안정된 세상의 조건에 가 닿을 때 죽기 때문입니다.
이김이란 이렇게 세상이 스며들지 않는 마음 상태를 갖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고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흰옷을 입게 됩니다. 세상이 스며들어서 얼룩지지 않은 보혈로 씻긴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들어오시며 하나님의 빛이 나를 통해 발산됩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가 흰옷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이어서 5절 하반절을 보면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는 것은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록된 이름 중에서 지울 사람을 살펴보시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우는 사람의 특징은 사데 교회에 대한 책망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 이름을 알게 되고 부르게 되고 천국의 있음을 믿게 되었다면 그 사람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마치 출석을 부르시듯이 날마다 생명책의 이름들을 보실 것입니다. 그 부르심의 실제 효과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고 부활시키시고 다시 하늘로 끌어 올리시면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자 해도 죄로 더럽혀진 우리는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이루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에 실제 의미를 갖게 하신 사건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 길을 따라서 날마다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출석을 부르시듯이 우리의 이름을 확인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늘에 올라오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에베소 교회처럼 조직에 마음이 매여서 하늘로 오지 않습니다. 버가모 교회처럼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아들여서 육체 친화적이고 세상 친화적인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느라 올라오지 않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처럼 궁극적인 관심을 다 바꿔놓고 하나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세상에서의 관심거리를 위한 것으로 정당화하느라 올라오지 않습니다. 사데 교회처럼 세상의 안정된 조건에 마음이 가닿아서 세상에 스며들고 취해 올라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시겠지만 끝내 그 사람의 마음이 날마다 하늘로 올라오지 않는다면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우실 것입니다.
교회를 산다는 것은 에클레시아를 사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오라는 하늘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나를 부르시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복음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세상을 빠져나오라는 부르심이고, 부활과 승천의 사건은 하늘로 올라오라는 부르심입니다. 교회를 산다는 것은 에클레시아를 사는 것이고, 다시 말해 세상 밖으로 나오라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시인하시는 조건은 내가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함이란 버가모 교회처럼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교인임을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예수님을 시인한다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어야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시인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는 방식은 그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시인하시겠다는 것은 진정한 천국의 가족으로 귀속시키시겠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불안하고 잘 안되고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는 꽤 안정적이라고 느껴지는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안정적인 삶의 조건이 마음에 스며듭니다. 마음이 세상으로 얼룩지고 더러워지고 찌들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에 취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발산되는 빛에 의한 흰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에베소 교회나 버가모 교회나 두아디라 교회와 같은 특징을 드러내더라도, 안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세상에 취하는 사데 교회와 같은 특징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취해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상태를 잡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안정적으로 주어져 있기에 평소에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마음은 사로잡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스며들고 마음을 취하게 하는 부분들을 일깨워 잡아내서 십자가에서 죽이며 밖으로 나오라는 부르심에 응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좋은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 세상을 빠져나오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복음은 세상에 대한 죽음이며 세상을 빠져나감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최고는 세상에서 빠져나가 하늘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의 소리이며 하늘로부터 나를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교회를 사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어지는 모든 생활 현장에서 세상에 취하지 않고 교회를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