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일당 (유형문화재 32호)
1512년 46세 때 , 농암은 분강의 기슭 농암 위에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한 이른바 ‘날 사랑의 집’-‘애일당(愛日堂)’-을 지었다.
농암은 그 취지를 ‘효도’와 ‘수양’이라 하고, ‘자손들도 대대로 지켜야 하는 규범으로 삼고자 한다’고 희망했다.
농암의 이런 경로사상은 당시 관료 진신들을 고무시켜 대거 방문하게 하고, 수많은 축하시가 답지했다.
애일당은 농암 유적 가운데 가장 정체 있는 건물로, 농암 바위와 더불어 '어부가','농암가' 등의 국문시가 작품이 지어진 유서 깊
은 농암문학현장의 성격도 아울러 지닌다.
애일당 편액은 중국 제 2의 명필의 글씨라는 전설이 전해오고, 지금 마루에는 농암, 모재, 회재, 퇴계의 시가 걸려 있다.
농암은 “애일당의 편액을 ‘애일’이라 한 것부터 이미 일신의 즐거움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부모 효도에 ‘날(日) 부족함의 뜻’이 거
기 있다”고 했다.
애일당을 지을 당시의 농암의 소회는 다음과 같다.
‘애일당’은 집 동쪽 2리의 거리, 영지산 한 자락 높은 바위 위에 있었다.
1508년 가을, 내가 어버이를 위해 외직을 구걸하여 겨우 영천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영천은 고향과 불과 3일의 거리로, 일상공무로 왕래하면서도 성친하기가 달을 넘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마다 유감스러운 것은 고향 경계가 협소하여 어버이를 즐겁게 할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는 점이었다.
그러다가 1512년, 드디어 이 바위 위에 집을 짓기로 했다....
매번 가신명절, 양친을 모시고 동생들과 더불어 색동옷을 입고 술잔을 올려 기쁘게 해드리기를 반드시 이 집에서 했다.
그러나 어버이의 연세가 더욱 많아지니 ‘희구지정’이 없을 수 없어 집의 편액을 ‘애일’이라 했다....
당의 편액을 ‘애일’이라 한 것부터 이미 일신의 즐거움을 위함이 아닌 것이다.
부모의 봉양에 ‘날(日) 부족함’의 뜻이 정녕 거기 있는 것이다.
늙은이 자손들이 역시 이 마루에 올라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여 ‘親老而惟孝’를 하도록 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여가가 있으면 조용히 가슴을 열고 수양하는 장소로 삼고자하는 것인즉,
‘애일당’은 늙은이의 가문에 ‘대대로 지켜져야 하는 규범(世守之規範)’으로 삼고자 함이다.”
『농암집』 ‘농암애일당(聾巖愛日堂)’
十室宣城是我鄕 조그만 고을 예안 나의 고향,
祖先餘慶積流長 선조들의 積善餘慶 길이 쌓여 있네.
皤皤雙老年踰耋 백발 어버이 90세가 넘었고,
膝下雲仍已滿堂 슬하 자손들이 마루에 가득하네.
古人猶說 親老那堪戀帝鄕 어버이 늙으심에 어찌 나라를 잊을까
古人猶說事君長 고인들은 임금 섬기는 날은 많다고 한다
平泉世業汾水曲 아름다운 고향 분강 구비에,
新作巖邊具慶堂 새로 바위 위에 정자를 지었네
농암의 이러한 효(孝) 사상은 조정으로 알려져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이곳은 눌재 박상(訥齋 朴祥), 용재 이행(容齋 李 荇), 양곡 소세양(陽谷 蘇世讓), 눌헌 이사균(訥軒 李思鈞) 라헌 김극성(蘿
軒 金克成), 호음 정사룡(湖陰 鄭士龍), 용재 성현(慵齋 成俔), 금헌 이장곤(琴軒 李長坤), 관포 어득강(灌圃 魚得江) 등 당대 명현
들이 대거 축하 시를 보냈으며,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퇴계 이황(退
溪 李滉), 송강 조사수(松岡 趙士秀), 어은 임내신(漁隱 任鼐臣),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등의 인사들이 끊임없이 예방하였
다.
이 같은 측면은 첨예한 당시 정계 동향에서 정의로움으로 조화를 잃지 않았던 농암의 인격을 반증하는 것으로, 농암에게는 귀거래
의 정서로 귀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