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주변을 산책한다. 군 복무 시절부터 밤 10반~11시에 잠들어 새벽 5시 전후해 일어나는 것이 습관인데 시차적응이 아직 안돼서 그런지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고 핸드폰 알람소리에 잠이 깬다. 한 번 깨면 다시 잠을 잘 못자는 내 체질이라 아내가 깰까봐 조용히 옷만 걸치고 호텔 방을 나선다. 백야로 어젯밤 잠을 이루지 못한 호텔 옆 호수는 졸린 눈을 비비고 나를 맞는다. 오리가 헤엄치는 호수를 바라보며 호숫가를 끼고 한 시간 반 산책을 하는데 우리나라와 달리 황사, 먼지, 공장 매연 등 오염원이 없는 이곳의 공기는 청량하다 못해 달다.
호텔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마친 후 버스에 올라 노르웨이 오슬로로 향한다. 오늘은 스웨덴과 노르웨이 국경을 넘어 오슬로로 가 시벨리우스 조각공원을 보고 오슬로 시청사 내부를 구경한 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릴리함메르를 거쳐 돔바스까지 가는 일정이다.
버스에 오르자 인솔 가이드인 신현주씨가 오늘의 일정을 다시 소개한 후 어제 다 못한 스웨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 2003년 여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아들 이재용 등을 대동하고 스웨덴으로 가 발렌베리 가문의 지주회사를 찾아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과 주요 임원들을 만나자 언론에서는 삼성이 한국의 발렌베리 가문를 꿈꾸며 벤치마킹에 나섰다고 보도해 우리 국민에게 발렌베리 가문이 알려져 마치 당장이라도 삼성이 엄청난 변화를 시도할 듯한 분위기였다. 스웨덴의 금융가와 기업가로 알려진 발렌베리 가문은 스웨덴 GNP의 3분의 1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영향력 있고 스웨덴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으로 이 가문에서 운용하는 회사는 노동조합의 경영참여 권리를 존중하는 등 노동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경영으로 장수하는 기업이나 기업의 총수는 한 명도 발렌베리 가문 사람들이 없고 가문에서 출연한 재단의 운용에만 관여하고 있다. 이 재단은 기업이익의 70%를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한편, 가문의 일원 중 하나인 스웨덴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는 위조여권을 이용, 수만 명의 유대인들을 홀로코스트에서 구출해 ‘헝가리의 쉰들러’로 찬양받으나 소련군에 의해 수감되었다가 독살되었다. 그의 행적과 죽음은 유대인들의 증오에 대한 발렌베리 가문의 방패가 되었고, 인도적인 행위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지금 삼성의 어디에서도 발렌베리 가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비슷한 것은 두 가문의 외형적 규모뿐이다. 2차 대전 때 스웨덴은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할 때 철도를 빌려줬고, 스웨덴 키루나의 철광석을 수입하기 위해 노르웨이의 북부 부동항 나르비크를 통해 독일 군수산업에 공급했다. 발렌베리 가문의 장기인 금융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소유한 통신사 에릭슨, 볼베어링의 날, 볼보와 샤브의 전투기·군용차량 엔진 등이 나치 독일에 공급했다. 전쟁 후 스웨덴은 중립국이었기에 기업들은 전범 기업으로 분류되지 않았지만 발렌베리 가문이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는 없었다.
2차 대전 당시 노르웨이는 군대가 없었던 나라로 못살았던 나라였으나 1969년 북해에서 유전이 발견되어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이 10만 달러가 넘는 유럽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이며 2023년 기준 13년 연속으로 민주주의 지수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취약국가지수에서도 179개국 중 꼴찌에 머물러 있을 정도로 대표적인 청렴 선진국이다.”
오슬로로 향하는 버스 창밖으로는 호수와 푸른 들판에 군데군데 농가들이 보인다. 들판에는 밀 또는 호밀을 심은 곳이 드문드문 보이고 거의 가축들을 위한 초지가 대부분인데 말 이외 소나 양 등 가축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농가에 축사가 보이고 가축들에게 먹일 풀 더미를 쌓아 놓은 걸 보면 분명 가축들을 사육하고 있는데 가축들은 지금 어디 있는 걸까?
칼스타드에서 오슬로까지는 3시간 반 정도 걸린다. 오전 7시 반 칼스타드를 떠난 버스는 약 한 시간 반이 지나 스웨덴과 노르웨이 국경에 도착해 잠시 쉬어간다. 스톡홀름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고속도로르 보면 고속도로 번호가 E로 시작하는 번호가 붙었는데 이는 EU 국가에 붙은 공통번호라 한다. 또, 고속도로라고 해도 편도 1차선과 2차선이 번갈아 나타나는데 이는 자연 환경의 훼손을 최소화하려는 것이라 한다. 국경이라야 노르웨이와 스웨덴 국경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 시골창고 같은 면세점 비슷한 상점 몇 개와 화장실이 전부라 썰렁한 느낌이 든다.
다시 버스에 올라 오슬로로 향한다. 노르웨이에 왔으니 노르웨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피오르드로 유명한 노르웨이는 250만 년 전 시작된 제4 빙하기에 여러 번 빙하로 뒤덮여 지금도 약 1,700여 개의 빙하가 있으며, 북해안과 서해안은 빙하에 침식돼 생긴 피오르드가 있다. 알래스카와 비슷한 위도 상에 위치하고 있지만 노르웨이의 기후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스웨덴이나 핀란드보다 더 따뜻한 것은 멕시코만류 덕분이며, 이 만류는 피오르드의 동결을 막아준다. 몇 년 전 만해도 7월 평균기온은 남쪽의 17℃로부터 북쪽의 10℃까지, 1월 평균기온은 남동 해안의 -2℃로부터 내륙의 -10℃까지였으나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지금은 7~8월에 30도가 넘는 날이 많아졌다. 북극에 가까워 빈번한 돌풍이 발생하며 날씨 변화가 심하다. 북부는 백야(白夜)의 지방으로 5월 중순부터 7월말까지 해가 지지 않고, 또 반대로 11월말부터 1월말까지는 해가 지평선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노르웨이인들은 98%는 게르만계이며 최대 소수민족은 약 0.6%를 차지하는 랩인이다. 약 90%가 루터교 신자이며 노르웨이어를 사용한다. 인구는 551만 명이다. BC3000~2500년 경 게르만인들이 동부에 정착했고 800~1050년 바이킹시대에는 수 없이 많은 약탈원정을 떠났다. 노르웨이인의 후손이 그린란드에 정착했고, 빈랜드(뉴펀들랜드해안)원정에 나섰다. 900~1035년에는 여러 국가들이 형성돼, 무사들을 이끄는 족장이 지배했다. 1015~30년, 최초 왕이 된 울라프 2세는 많은 노르웨이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1130~1240년에는 왕위를 둘러싸고 내란이 벌어졌으나 후에 왕권이 강화됐으며,13세기 후반과 14세기 왕의 부와 권력은 증대했다. 1389년 포머른의 에리크가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고 1397에는 스웨덴과 덴마크의 왕이 되었다. 1442년 에리크 왕의 폐위 후 노르웨이는 어느 정도 독립을 유지하며 새로운 헌법을 가졌으나, 스웨덴과 합병된 1814년까지 덴마크 왕이 지배했고 1905년까지 스웨덴 왕이 통치하였으나 스웨덴의 오스카르 2세는 노르웨이 왕권을 양도했으며, 노르웨이인들은 투표로 공화국보다는 독립된 군주국을 재수립하기로 결정해 덴마크의 카를 공이 호콘 7세로 선출되었다. 1905~14년 기간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뤘고 의료보험을 비롯해 1일 10시간 근무와 주당 48시간 근무 같은 많은 사회개혁을 법규화했고, 1913년에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질병·출산 보조금을 포함해 가족수당·노령연금·지체 부자유연금·실직연금 등을 제공한다. 병원진료가 무료이며 의사들에게 급여를 지급한다. 초등학교 졸업 후 전문화된 중등교육이 이어지는데, 기술훈련이나 대학으로 가는 교과과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입헌군주국으로 단원제 의회에 입법권이 있으며 행정권은 명목상으로 왕에게 있으나 왕의 역할은 주로 의식적인 것이며, 총리가 이끄는 국가평의회가 집행권을 행사한다. NATO에 가입되어 있어 침략을 받을 경우 나토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EU의 회원국이나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고 자국화폐인 NOK(1NOK는 한화 130원 정도)를 쓴다.
국토의 약 5%만을 경작할 수 있는데, 경작지는 골짜기·호수·피오르드 주변에 집중되어 보리, 감자, 귀리, 밀 등을 재배하거나 양, 소, 돼지 등을 사육하고 침엽수로 이루어진 삼림이 국토의 약 1/3을 차지하고 있어, 임업이 주산업이며, 해안을 중심으로 청어를 비롯해 대구·새우 등을 냉동시키거나 통조림으로 만들어 수출하는 등 1차 산업에 종사해 왔다. 2차 대전 후 광업과 제조업 활동이 크게 증가해 철 합금과 금속합금 세계 최대 수출국이다. 또 유럽 최대 타이타늄 광석 매장지가 있고, 수력발전과 마그네슘 세계 최대 생산국이며, 1975년 이후 북해유전에서 생산되는 석유로 인해 석유수출국이 되었으나 균형경제발전을 촉진하려는 의도에서 북해 유전개발을 제한하고 있다.
노르웨이 국경을 넘어서도 차창 밖 풍경은 크게 바뀌지 않지만 스웨덴 보다 산과 들판에 바위가 덜 보인다. 피오르드가 많은 노르웨이라 그런지 이제 바다가 힐끗힐끗 보이고 터널이 많이 나타난다. 좀 더 지나자 오슬로가 가까워지는지 건물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럼 여기서 노르웨이 오슬로에 대해 알아보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슬로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도시로 노르웨이 남동쪽 오슬로 피요르드 끝부분에 있다. 오슬로는 노르웨이 말로 "신들의 정원"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노벨평화상이 수상되는 도시로 오슬로 중심 도시권 인구는 920만 명, 오슬로 수도권 전체를 합하면 1,710,000명 정도에 달해 노르웨이 인구의 1/3 정도를 차지한다. 고임금을 노리고 온 외국인 이주민이 많아 식당, 상점 등 곳곳에서 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원래는 아케르 강 동쪽에 있었는데 1050년경 하랄 하르드로데 왕이 세웠으며 1300년경 하콘 5세가 아케르스후스 요새를 세웠다. 13세기 호콘 5세에 의해 수도로 지정되었으며 한자동맹에 가입하였다. 이후 칼마르 연합에 속한 노르웨이 왕국의 수도로 남았으나 노르웨이 반란을 진압하고 즉위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3세에 의해 노르웨이의 실질적인 수도가 코펜하겐으로 옮겨가면서 오슬로 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전체의 발전이 정체되었다. 1624년 대화재로 전소된 후 이 도시를 재건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의 이름을 붙여 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로 불리다가 1925년 오슬로라고 이름을 고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