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염된 단어 ‘국민’
김철교(시인,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언급한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국민’을 들먹인다. 심지어 법원에서 유죄 판단을 받은 정치인조차도 ‘국민의 현명한 판단’을 바란다며 선거에 뛰어든다. 적지 않은 증거로 법원에서 유죄 판단을 받은 것과, 정치 바람에 휩쓸리기 쉬운 유권자들의 결정 중에,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일까. 비록 법원에서 죄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자신이 무죄라고 확신한다 하더라도 – 양식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억지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 최소한 유권자에게 도덕적 미안함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요즈음 비리에 몸을 적셨던 사람들이 ‘국민의 눈높이’를 언급하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한다. 얼마나 국민을 우습게 보고 있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국민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물론 민주의 참뜻을 망각한 열성 당원들도 국민이다. 자기 가족도 국민이다. 더욱 범위를 좁히면, 감옥에 있는 사형수도, 자기 자신도 국민의 한 사람이다. 대다수의 국민 눈높이가 아닌, 자기가 생각하는 국민의 눈높이는, 특히 일부 정치인의 경우,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고, 성숙한 지금 우리나라 국민의 눈높이를 너무 형편없이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때 부국(富國)이었던 남미가, 후진국으로 전락한 원인 중의 하나도, 당시에 참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국민의 눈높이’에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국가의 먼 장래를 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의 달콤한 정책에 휘둘렸던 ‘아주 낮은 국민의 눈높이’에 호소해서 정권을 잡은 정치인들 때문에 중남미는 후진국으로 전락했고, 그 피해는 후손들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역사를 보면, 국민이 안중에도 없는 소수 지도자의 비민주적 판단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내부정치의 혼란을 전쟁이라는 마약으로 무마하려는 의도가 전쟁의 도화선이 되고 있는 것을 지금도 우리는 보고 있다.
국민의 눈높이 수준을 높이기 위해 무엇보다 사회적 분위기가 건전해져야 한다. 자기 패거리의 환호와 눈 앞의 이익을 즐기기보다, 차분하게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을 되새기도록 교육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국민의 눈높이’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어야, 자기만이 정의의 수호자라는 사이비 지도자들이 퇴출당하는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 ‘지역민의 수준’도 어떤 사람을 지도자로 선택하는지를 보면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선거에서는 낮지 않은 국민의 눈높이로 인해, 후진 정치인이 발붙일 수 없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의 눈높이는, 쓸만한 인재를 선택하기에 충분한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