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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일들
나는 모른다네
창밖을
너구리를
개와 고양이의 꼬리 사용법을
장미꽃이 가장 간지러운 순간을
예수의 손바닥에 박힌 못의 크기를
탄성을 자아내는 여러 가지 체위를
당신의 혀에 돋은 새빨간 돌기의 감촉을
여름에 어울리는 머리색을
열매가 부풀어 오르는 아픔을
지금의 바람과 내가 몇 번째 대면하고 있는지를
허기가 나에게 주는 기쁨과 슬픔을
창밖에서
권투선수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얼굴을 내려치네
빗나간 훅
설령, 설령
디귿의 마음으로
당신은 나를 함부로 이해하네
나의 긴 갈색 머리
웃고 있는 칠월의 책상에 걸터앉아
갈겨쓰네
갈겨쓰고 있네
디귿, 디귿, 디귿이라고
함부르크로
떠나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아이들처럼
찍찍찍
세상이 내 것인 것처럼
갈겨쓰네
사랑을 아십니까
길에서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 없네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싶은
나의 다리들
다리들
다리의 다리들
책장 위를 우아하게 걷는
열 개의 다리를 가진
고양이의 자의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시도하네
비명처럼 길고 긴
기차
검정 거울
나는 모르네
어퍼컷 혹은 라이트 훅
내 몸을 빗나간 뼈들
바닥을 뒹구는 뼈들
*
옆 집 오빠는 키가 작지만
여러 가지 표정을 가졌고
나를 볼 때마다 미소를 짓네
캄캄한 주머니 속
그의 그림자
자꾸만 길어지는 그림자
디귿의 심정으로
난간에 기대
화단에 핀 장미를 내려다보며
우리는 인사를 나누네
그와의 대면이 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모르핀의 투명함
분침이 툭 하고 내려앉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
나는 배고파요
주머니 속의 주머니
주머니 속으로 삼켜지는 주머니
주머니와 주머니들만의 어둠
인사처럼 텅 빈
권투선수의 꽉 쥔 주먹
부풀어 오르는 손톱자국
나는 가장 단순한 사람의 얼굴로
오빠를 바라보았네
턱을 괸 채 킬킬대는 칠월의 꽃들
너구리가 디귿을 물고 골목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네
샹주망 아버지
도마뱀. 물을 핥는 두 개의 뾰족한 빨강. 육교 아래를 질주하는 새벽의 차들. 불빛들. 샹주망. 샹주망. 부릅뜬 눈. 눈두덩을 쓸어내리는 손. 아버지 당신은 아래가 젖은 채 침대에 누워 계시네요. 부르르 떨며. 제 손목을 움켜쥐시네요. 당신은 양서류. 나는 가장 어두운 물 밑을 헤엄쳐요. 산호를 찾아. 다섯 손가락을 벌리고. 입을 벌려요. 차들. 차들. 육교를. 내 아래를 관통하는 차들. 불 위를 떠다니는 배. 주머니 안에 숨겨진 손. 당신이 나를 만들었어요.
아버지. 춤을 추고 싶어요. 물속에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요. 시멘트의 높은 육교 위에서. 너무 먼 차들. 손끝을 모으고. 샹주망. 샹주망. 물 위를 걷는 도마뱀. 당신의 손톱이 팔뚝을 파고들어요. 땅 밑으로 나를 끌어내려요. 아버지 아파요. 아파요. 떨고 있는 쇠 난간. 속을 흐르는 피. 차가운 밤의 불빛이 나를 얼려요. 보내줘요. 혀의 움직임. 혀의 속도. 혀의 방향으로. 물을 그러모으는 손들. 샹주망. 샹주망.
* 샹주망Changement : 발레 동작 중 양다리의 장딴지를 부딪히며 공중으로 도약하는 자세를 말하며, 프랑스어로 변화라는 뜻을 갖고 있다.
박쥐
긴 꼬리 구둣발 소리 미간을 찌푸린 오월의 빛 친하게 지내자 꽃봉오리를 쥐어뜯는 왼손 끈적이는 보도블록 슬로우 다운 슬로우 다운
벗겨지지 않는 피 냄새. 굳게 입을 다문 밤의 냄새가 난다 길 끝에서 두 남자는 주먹질을 하고, 코끝에 손가락을 대고 냄새를 맡으며 냄새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육교 아래서 비를 피하며 물 뜯는 소리를 듣지 차는 멈추고 차창을 내린 하얀 얼굴의 남자는 묻지 찢겨진 입술을 찾아줄까? 묻지 떨고 있는 오월의 난간을 붙들고 가방끈을 꽉 붙들고 고개를 숙이지
슬로우 다운 아버지처럼 웃는 밤거리의 남자들. 뒤집힌 괴물들 세상에서 가장 뻔한 노래를 부르지 슬로우 다운 차창을 내린 얼굴처럼
발톱 오늘 밤의 발톱 셔터가 내려진 꽃집 앞 화분들 발톱에 걸린 긴 소매들 병뚜껑을 모으는 취미 출처가 불분명한 다리의 멍들 뭉개진 꽃잎은 손안에서 끝없이 끈적이고 있지 슬로우 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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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선 / 1987년 서울 출생. 2010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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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청년*
이란 사는 파란 남자는 베이지색 배 안에서 가능성이다
둘 중 한 쪽은 반이 추는 노란 춤일 것이고
자궁이 좁아 옆이 붙어버린 샴의 형일 것이며
엄마는 파라솔의 알록달록 아래 자주 눕고
태양의 정면을 쳐다보는 이란의 유일한 베이지다
파란 것은 배고파 어떡해 자꾸 묻는 아이의 느낌이고
노란 것은 스미고 번져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파란 옆인데
둘이 붙은 것은 파라솔 근처의 태양 때문임을
로션 바른 베이지가 알고 있다
먹힌 것은 그래서 노랑
동생의 배로 잡혀 들어간 트윈의 형
파랑의 움직이는 반
예뻐 죽기 직전인데
왜 청년은 임신인가 노랑을 품었으므로
형은 손톱이 자란 노란 손을 굽힌 채 내내 있었을 것이고
형은 치아가 솟은 노란 입을 모은 채 파란 놈의 내장이 되는데
놀랍지 여기서 노랑을 유지해 이건 형의 고발인가
노랑의 극단적 위장 파랑
사실 살인은 청년 베이지가
파랑노랑 분명하지 못한 놈이
누구에게 배웠나 멋으로 옆을 갈랐나
몸 작은 형은 곱슬거리다 죽지도 못하고 어쩌다 죽지도 못했는데
아니라면 임신이지 그러니까 약간 유머야 배 배 배
내 배 속에 형이 들어 있다
꺼내봐 네 형
죽었나 살았나 몇 살이야
동갑이군 여전히 노래
네놈은 파랑인데 위장이고 형이 노랑이고 아 참
형이 넌가? 너 이란이야 청년이야 이거 알록 아냐?
그러니까 이게 배 안에 두 배가 붙어 한 배가 한 배를
왜 먹었지요?
* 22세 이란 청년의 몸에서 태아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 시신은 청년이 엄마의 태내에 있을 당시 함께 자라던 쌍둥이 형의 몸으로 밝혀졌다.
아버지 딸뱀
소녀의 이름은 외자, 뱀이다
줄거리는 몸 쓰는 놈으로 섭외하고
누린내가 퍼지면 인물들 움직인다
아버지
그는 앉아 있고 단 한 번, 푸드덕댄다
백발을 감아올려 뱀을 세운 딸은
아비 앞에 선 채로 생리를 쏟아내고
기름이 다 빠진 뱀은 다리가 휘어진다
타닌 타닌 타닌*을 외치는 소녀
불현듯 안구를 꺼내 눈구멍을 비우고
멀미 오른 몸은 뒤를 건드리며 부드러워지는데
아비는 지금 무엇을 하나
나는 시력을 잃었으므로
어제 아비는 울었다 어제의 아비는 이제
아비의 어제
이제 나는 영영 아비를 알 길이 없고
한낮 어둑한 후방의 얼굴
깜깜한 얼굴을 삼키며 몸을 불리던 나는
곁이 없어 마른 접시에 든 낙지처럼
배 붙일 곳이 필요하므로 뒤로
뚱뚱하다
(팽팽하고얇은측백잎날렵한근육한점)
정사도 없이 부푼 몸이 나는 어지러운데
왔다 몸 쓰는 놈 이명을 다스리는
개들의 돌림노래
휘파 피 파 휘 축축한 켄터키 뱃집에 햇빛 비치어
어느 뱀 검둥이 시절 휘파 피 팟 척 척
저 해는 긴 뱀을 감아올릴 때 아버지는 벌써 익었다
아비를 굴리며 노는 어린 뱀 세상을 모르고 감나
분장할 시절이 닥쳐오리니 치장해라 아버지 딸뱀
그리운 아버지 등장하시어 울던 몸 오라며 운 날
척척한 등허리 찢으며 놀자 선지를 튕기며 놀자
* 타닌(tannin) 무두질 : 타닌을 이용하여 짐승의 생가죽에서 털과 기름을 뽑고 가죽을 부드럽게 만드는 과정.
똥굿
똥이 폭발한다
꿈에서
젖은 하체가 달아난다
고의는 아니었고
하체는 하의 안에 있다
항문들은 줄을 지어 따라가고
사라지고
순식간에 퍼지는 낮잠의 바닐라
똥 싼다
밑이나 열자
항문이 질과 담합하여 새로운 구멍을 내세울 때
머리를 아래로 하고 기름에 튀겨보지
카락 카락 탁탁 튀는 낱개들 몸살들 쏟아지는
내장들 우리도 할 말이 있다
잠 속의 항문 마이크 물면
누구냐 질
너의 스위치를 켜라
띠용띠용
둥둥 떠다니던 잠자던 마초
꿈을 배신하며 기어코 죽어가
마초를 꿈꾸던 대낮의 애인
불 끈 질을 열고 시체를 내보내
항문엔 담배를 물리지
엉덩이를 낮추고 제법 연기도 뿜어
여배우 같아
임신도 했어 영화같이
엄마 이거야 탯줄 대신 숙주나 연결해줘
여자 다산콜센터로 달려가 허벅지를 연다
부탁해요 데친 숙주
120: 어서오십시오미친년 네 똥집이나 한 입 먹어라
여자: 그래요 그래요 정다운 나의 다산콜센타
임신은 아니었고 항문은 돌아왔다
안심할 일은 아니다 어쨌든 나는
잠이 폭발한다
이번 꿈은 액자식 키보드 구성
똥물 쓴 내가 휙 돌아보면
누군가 똥 싸고 있고 그놈 항문 파내면
내 뒤가 쓰라리고 밑을 건드리면 위가 넘어가고
머리칼 튀고 날고 머리통 구르고
엔터엔터 신나게 두드리는데 얼굴에 엔터 똥칠이고
누가 나 좀 말려봐요 쟤 좀 건져줘요
저년 싸겠네 저거 꿈꾸다 구체적으로 웃는 거 봐
굿이라도 해야겠지 똥병이지 저거
거기 똥신이시어
차라리 나 타인 되게 하시오 이 몸 작살에 올릴 테니
제대로 썰어 다시는 붙지 않게 멀리멀리 뿌리시오
워이 똥물 워이 똥 튄다
장수진/ 1981년 서울 출생. 2008년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연기 전공) 졸업. 2006~2010 극단 〈골목길〉단원.
울타리의 노래
1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어른들은 점잖게
펜스를 들추고 넘어가
마치 펜스라는 게
치마 속에 있다는 듯이
여기, 나는 펜스에 걸터앉아
모든 걸 넘겨봐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노래는 혀까지 미치지 못하고
눈썹에 고인 땀방울이
잠깐, 빛을 받아 넘쳐서
먼 지평의 굵은 턱선을 강조하는 시간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바람이 불 때만 의미를 갖는 예민한 솜털처럼
성급한 땀방울 하나
내가 이룬 모든 걸 거꾸로
그늘 속에 드리우고 있어
있지,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아직도 목초지는 멀어
2
내가 이룰 것들이란 다 무엇일까
한 획의 비행운?
점진적인 책갈피의 이동?
열두 개의 그림자 태엽?
노예선의 새로운 깃발?
주머니가 덜 마른 코트?
커다란 굴뚝을 입에 물고
여기, 나는 완강히 버티고 서서
모든 걸 넘겨 보낼 작정이야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맞아
내 검은 워커는 진창에서 얻었지
무릎까지 푸욱 잠겨서
비석에 새겨진 이름에는 이끼가 자라지
입술을 뒤덮는 콧수염처럼
3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건초지는 발밑에 영원처럼 머물고
노래도 새들도 떠난 둥지에는
느긋한 노을 한 줌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걸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어
알아,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나를 가리키던 시간들
내가 될 수 없던 몸짓들
그것들 모두가
내 생의 단위로 자라날 때까지
여기, 나는 펜스에 기대서서
그 모든 걸 굽어봐
4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아기들은
펜스를 기어서 지나가
마치 펜스라는 게
텅 빈 빨랫줄인 것처럼
사람들, 눈부신 속옷들
바람에 멀리 날려 가고
목초지만큼 멀어져 가고, 나는
여기, 기다란 그림자 되어
펜스를 넘어서는데
하나, 둘…… 눈이 멀어
울타리를 지워가는데
숨 숲 수프
개구리를 토해 낸 뱀이 개구리의 어두운 허기로
쉬이익— 빨려 들어가듯
벌목꾼은 숲으로
붉은 책갈피를 펼쳐보는 저녁,
배꼽의 태엽을 거꾸로 돌려보면
나는 그녀의 배 속에서 소화되는 것처럼 보이겠지
갑자기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심해어의 눈알처럼
인광을 내뿜는 무수한 저녁의 육체들
신경이 퉁퉁 불어서
근육질의 구름
우르릉우르릉 비석을 갈고 있다
벌목꾼은 검은 매왈츠*를
이제 검정 크레파스를 긁어내면 무지개가 맺힐 겁니다
그건…… 그건 살색이에요!
비명이 울창하던 노을
반달도끼로 도려낸 숲의 싱싱한 내장들
검은 책갈피를 펼쳐보는 새벽
감전된 새가 창백하게 짖었다
무딘 도끼날에 베어오는 소름
벌목꾼은 늪으로
쥐 먹은 자리를 에워싸는 머리카락들처럼
한데 모여 늪을 끓이는 침엽수들
개구리들의 눈빛을 모아 독기를 푼다
머리통은 예리한 발톱에 꿰여 지붕 위로
몸통은 덕지덕지 크레파스 늪 속으로
개구리 배 속에서 꾸역꾸역 자라난 뱀은
개구리—허눌을 벗는다
벌목꾼은 검은 매 왈츠를
————
* Chris Garneau의 음악「Black Hawk Waltz」(Hidden Track)
몰락의 맛
네가 하프라인을 줄기차게 넘나드는 왼쪽 날개였을때
누군가네 얼굴이 새겨진 은화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네가 출렁이는 골망처럼 환호성을 네지를 때마다
누군가 네 얼굴이 새겨진 은화들을 으깨고 있었다.
네 시선이 오른쪽 카메라를 의식했을 때,
전광판에 비친
너의 뻥 뚫린 뒤통수와 마주쳤을 때,
누군가 네 얼굴이 새겨진 은화들을 녹여서
한 발의 탄환을 만들고 있었다.
*
네가 플래시 세례를 받아
안락의자의 늙은이로 다시 깨어났을 때
산성山城처럼 커다란
네 초상화를 그리던 잡부들은
수염을 그려낼 목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사실은…… 갑자기 늘어난 네 흰 수염들 때문에
초벌한 선산先山 전체를
다시 한 번 불태웠다고 고백했다.
너는 콧구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달덩이를 올려다보며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
시간은 맑은 콧물처럼 훌쩍훌쩍 뒤로 흘러,
거친 약솜으로 콧물을 훔치다 인중이 벌겋게 달아오른, 어느 저녁나절.
네가 가지절임을 억지로 삼키는 아이였을 때
네 어머니의 도마 위에서 사내들은 코가 잘려나갔다.
네가 가지절임에서 질질 새어 나오는 물빛으로 잠들 때
코 잘린 사내들이 수면 위로 입술을 떠올렸다.
네가 물었다.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그들이 답했다.
코 잘린 심연이오.
핏물 빠진 수련이오.
수면에 바싹 다가가서 네가 물었다.
그럼 네 이름은 무엇이냐?
바싹 다가선 코에
코 잘린 자리를 맞대며 그들이 답했다.
잘린 코들을 지지는 인두요.
몸을 버린 창백한 코…… 냄새를 맡아라.
기억해내라.
기억해내라.
*
그렇다.
너는 규토硅土 위에 지어진
두 개의 집에 살았다.
첫 번째 집에 돌아오면 네 어머니가
축구화를 뒤집어 넣어주었다.
신발장 속으로
신발장 속에서
정든 피라미드가 닳고 있었다.
남몰래 가지절임을 뱉었던
네 입안에서
네 입안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두 번째 집으로 돌아가면 네 아버지가
마우스피스를 물려주었다.
열기와 침묵 사이로
열기와 침묵 사이에서
관중들의 목젖이 헐고 있었다.
어깨를 맞대고 양손으로 거시기를 가린
네 이빨들 뒤에서
네 이빨들 뒤에서
골키퍼가 떨고 있었다.
*
너는 총구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탄환이 장전된 파이프를 빨고 있다.
네가 말했다.
그렇다. 이것은…… 냄새가 없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잡부들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창문에 바싹 다가서서 네가 말했다.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라면
이것은 또한……
가지절임도 아니다.
너는 파이프에 불을 당긴다.
*
파이프는 단 한 번 격렬하게 불을 뿜었고, 양 갈래로 뚫려 있는 화장터의 굴뚝처럼, 너의 머리통은 앞뒤가 분간이 되질 않아 연기가 오래 머물렀다. 비탄과 폭동이 동시에 메아리치며 두개골 같은 성채城砦를 무너뜨렸고 폭우 속의 지렁이처럼 장례 행렬은 잿더미 선산으로 민머리를 들이밀었다. 네 심복이 중얼거렸다. 유지를 받들겠습니다. 선생님의 오늘까지를 초상화에 넣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선조께서는…… 닥쳐올 사건보다 열등하게 존재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잡부들은 무너진 성곽의 돌들로 무덤 위에 탑을 쌓았고 꼭대기에 네 가죽을 벗겨 만든 커다란 북을 달았다. 쇠파이프로 북을 내려치며
심복이 물었다.선생,
이것은…… 파이프가 맞지요?
초상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
* 마그리트의 그림「이미지의 배반(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불안의 탄생석
처음으로
누군가 말했다
여길 봐 우리가 무엇 앞에 서 있는지
커다란 바위가 있고
작은 돌들이 있어
커다란 바위 둘레를 맴돌면서
어떻게든 옮길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함께일 수 있다
그러나 작은 돌들을 걷어차면서
어쨌든 치울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너나없이
두 손 다 썼다고 여기면 먼저 떠나는 거다
아마 죽을 때까지 어긋나겠지
누가 먼저 말했건 그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처음으로
비가 내린다. 빗방울. 빗방울을 끌어내리는 손은 더 가벼운 빗방울들이다. 빗방울들. 작은 창에 게으르지만 분명하게, 내 뒤틀린 의식 위로 또 다른 흐름을 보태며 방점을 찍으며, 애써 가라앉힌 닻을 끌어올린다. 닻들을 올린다. 닻들을 끌어올리는 손은 더 무거운 닻이다. 닻을 올린다.
처음에 덧붙이며
눈뭉치가 구른다.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두발자전거를 탄다. 오르막길. 자전거에서 내린다. 네발자전거가 되어 나는 언덕을 끌고 있다. 내가 끌고 있는 것은 언덕이 아니라 단지 내 시선이다. 그 누가 한 번도 앞을 지나간 적 없는 것처럼 안경을 닦는다. 그 누가 한 번도 뒤를 봐준 적 없는 것처럼 성냥을 긋는다.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다.
처음에로 연결된 전신주
지나치며 본다. 아직도 묻히기를 거부하고 허공에 붙들린 채로 또 다른 경이의 교각으로 떠 있는, 그것을 본다. 높은 뇌압腦壓을 부여잡은 양극지의 긴장과 그보다 질긴 피복으로 감싼 무도정無道程의 흐름. 흐름? 순환. 그 성긴 편직編織건물들 사이 무정형으로 누빈 풍경들, 서로의 몸속으로 쑤셔박은 배관들을 나는 언덕에 심긴 채로 내려다본다. 비탈길. 비탈길? 가속구간.
다시 처음에 덧붙이며
눈덩이가 구른다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머리맡에 냉장고를 두고 이부자릴 편다 누군가 십 년째
같은 자리에서 냉장고 문을 연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내용물은 모른 채 그것을 나눠 품은 비닐들
기한 지난 쇠잔한 눈빛들 푸르게
푸르게 발등으로 떨어진다 움찔
움찔 냉장고 옆에 잠들어 있던 내가
눈 뜬다 그 발은 아무것도 꺼내지 않고 문을
닫는다 이마와 귓불이 서늘하다
반쯤 덜 녹은 눈빛 얼렸다가
닫힌다 냉장고가
마지막인 듯 처음으로
웅웅거린다…… 꿀벌 떼가 비상하는 꿈…… 낡은 선풍기…… 말벌이 되는 꿈…… 라디에이터…… 꿀벌 떼가 덮치는 말벌이 되는 꿈…… 물 새는 보일러…… 내 꿈이 너의 꿈에 침수되는 꿈…… 따뜻해…… 자다가 투욱,
힘껏 감아 던진 고무동력기
힘줄 풀리는 소리
들린다. 예감의 오라 감기는 소리.
뒤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는 목줄.
나는 기울어지며
수평을 무너뜨리며,
내가 딛고 있는 경계의 접점 속으로
매듭 속으로 파묻힌다.
또다시 처음에 덧붙이며
눈사태, 눈사태, 눈사태, 눈사태? 눈사태에 이은
산사태. 팔다리 수십 개
눈덩이마다 박혀 있다.
눈덩이는 수천 개
처음이 어려운 것이다
냉장고 문짝에서
자석이 떨어진다.
한기에 파묻힌 내 이마로
자석이 떨어진다.
낮달, 처음에로 끌려갈 뿐이다.
별들의 예인선 다가온다.
낮달.
어렵게 처음에 덧붙이려는
몸 잃은 팔다리 수만 개
제자리를 찾아 밤하늘에 꿈틀거린다.
나는 아— 하고
처음으로 올려다본다
빙점(氷點)
이곳은 아무리 지나쳐도 강조되지 않는다
*
욕조가 없고 창문이 없고 절정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또 지나친다 조심해야 한다 내가 딛고 선 빙판이 투명해질 때를 조심해야 한다 내가 딛고 선 꿈이 수위를 높일 때를 너무 많은 심증은 초점을 부러뜨린다 네 탓이오 네 탓이오 너의 큰 탓이다 그러므로 가파르게 책망하오니…… 이 밤의 심지는 깎여나간다
*
빛의 탄주彈奏는 눈앞을 컴컴하게 만든다 이곳에서 소금은 고향을 잊는다 이곳에서 낙엽은 스스로 썩지 않는다 이곳에서 물방울의 세계는 다시 한 번 뒤집히고 중력은 잠의 머리채를 잡아챈다 그리고 검고 매끄러운 벽돌이 구워지고 벽돌은 어떤 색유리보다도 성실하게 빛을 상영한다 이곳에서 방아쇠는 당겨지지 않았으나 메아리는 그 죽음보다 많은 뼈들을 일으켜 세우며 끌려간다 시간 밖으로 호명할 수 없는 날씨 속으로 기억의 구멍은 저벅저벅 뚫리고 그 숨통을 매듭지을 구두끈은 언제나 모자라다 이곳에서 방충망은 벌레와 문자를 구분 없이 거르고 부들부들 기도문을 읽으면 악몽은 기도문을 거꾸로 뇌까린다 코앞에서 마주 보는 거울 속에서 그 누구도 마주보지 않는다 그곳에서 유한은 무한을 함부로 다루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으리라 나는 촛불을 불어 이곳을 구기고 싶다 저편에서 유언을 적지 못한 하늘이 날마다 자신을 번복하듯이 나는 아무리 깎아내도 강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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