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절망〉과 답사기 〈남행록〉, 그리고 《고난의 90일》 《적화삼삭구인집》 《손님》 《침묵으로 지은 집》 《푸른 혼》 《백년여관》 등의 글은 각기 지은이는 다르지만 ‘우리사회의 반공주의와 분단’이라는 거대 담론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일찍이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운 《광장》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반공주의’라는 주제는 이제 원색적인 색깔 때문에 문학작품에서 잊혀진 지 오래다. 하지만 분단이라는 거대담론이 문학작품 속에서 사라진 이유는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과거 이청준, 김주영, 현기영, 윤흥길, 황석영, 조정래와 같은 작가의 작품을 탐닉했던 몇몇은 “요즘 소설에는 거대담론이 없다”며 독설을 퍼붓기도 한다. 분명 분단은 세기를 넘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에도 많은 작가들이 분단이라는 거대담론을 회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순사건, 6·25 거치며 문학에 맹목적 반공주의 주입”
이러한 일부의 위기에 대해 《한국 소설의 분단 이야기》를 펴낸 유임하 한국체육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는 “이제야 진정한 시기와 기회가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상 갈등의 증폭 속에서 문학은 후기 근대의 복잡다단한 사회적 현실을 통찰하지 못한 채 주체의 욕망과 내면성 문제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문학계 상황으로 운을 뗀 유 교수는 “사회정치적 대항 담론 생산과 보편적 가치의 생산에 진력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은 한국 문학의 근대적 역할이 종말을 고했다고 보는 입장의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문학으로서는 무력증에서 벗어나 폭력적인 정치담론과 사회적 의제를 입체적으로 성찰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한다면 국내 소설이 추구해온 분단 이야기는 시효가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 교수는 “분단 이후, 5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분단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된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분단 문학이 쓰여야 할 때”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일까. 《한국 소설의 분단 이야기》 안에는 분단과 소설이라는 주제를 좀 더 다각적이면서 구체적으로 접근하고자 노력한 그의 고뇌가 깃들어 있다.
제1장 <한국 소설과 분단 이야기>에서는 ‘분단 문제의 현재성’부터 ‘소설적 성과’까지 조명한다. 특히 그는 “분단 이야기는 사회가 빚어낸 통제와 억압적 금기를 우회하거나 맞서면서, 사회적 환부에 주목하여 개인의 인권과 정치적 자유의 신장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최인훈의 《광장》, 홍성원의 《남과 북》,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의 작품을 통해 분단 이야기의 성과는 이미 드러났다는 주장이다.
제2장 <반공 규율 사회와 소설의 응전>은 반공주의와 민족 표상화 작업이라는 주제로 여순사건을 다룬 김영랑의 시 〈절망〉과 박종화의 여순지역 답사기 〈남행록〉을 통해, 여순사건이 공산주의에 대한 적의와 반란세력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의 감정이 어떻게 표출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유 교수는 여순사건을 “반공이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인자로 작동하면서 적대성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기원, 국가주의의 대의와 관점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국민을 동원하는 지졈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반공의 맹목성이 제도적 장치로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6·25전쟁이 아닐 수 없다.
유 교수는 6·25전쟁의 발발과 전쟁 기억의 형성을 《고난의 90일》과 《적화삼삭구인집》을 통해 접근한다. 《고난의 90일》은 9·26이후 쓰인 수기 네 편을 모은 반공 텍스트로 제헌 헌법 기초자인 유진오, 시인 모윤숙, 학자 이건호, 기자 구철회의 경험담을 통해 반공을 맹목적으로 조장한다. 시인 모윤숙은 전쟁 당시 “서울을 사수하라”는 선무 방송을 했던 인물로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서울 1945>에 등장하는 문석경의 실존인물”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적화삼삭구인집》은 부산 피란 당시 국제보도연맹에서 간행한 반공 텍스트로 사상 검사로 명성을 떨치던 오제도 등 아홉 사람이 석 달간 서울이나 평양에서 겪은 소문이나 체험을 담은 수기다.
유 교수는 《고난의 90일》과 《적화삼삭구인집》를 통해 전쟁의 와중에 은신과 도피로 연명했던 삶에 대한 회고를 거쳐 전쟁을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규정하는 일련의 절차에 주목한다.
“서울 잔류파이건 도강파이건 간에 전쟁 직후 발간된 수많은 수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공포의 전쟁 기억뿐, 왜 전쟁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은 거의 부재합니다.”
이러한 인공 치하의 수기는 향후 반공주의를 유포하는 모범적인 선전 텍스트로 유통되는 한편, 1950년대 전후 소설에서 인공 치하의 서울 풍경 묘사나 수난을 반공주의의 논리에 따른 서사 구도로 수용하는 문화적 토양을 형성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분단과 전쟁의 기억은 여전히 글 쓰기의 대상”
제3장 <역사와 기억의 서사적 경합-탈냉전 시대와 분단 이야기의 행로>에서는 황석영의 《손님》, 박완서의 《침묵으로 지은 집》, 김원일의 《푸른 혼》과 임철우의 《백년여관》을 통해 분단 이야기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투 동막골〉 등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분단영화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선을 보낸다.
“분단과 전쟁을 소재로 삼은 영화를 일컬어 흔히 ‘상업적 성공의 보증수표’라고 부르지만, 대중문화의 운명은 변덕스러운 대중의 유행심리와 자본의 속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결국 영화가 분단이라는 소재를 소비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소설 속 분단 이야기를 참조하고 소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의 말처럼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분단영화는 대부분 내용이 진부하거나 가족사, 내지는 희극적인 재미만을 부각시키다 보니 분단이라는 본연의 주제에서 벗어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책의 말미에서 문학이 조금 더 분발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문학은 끝없이 욕망을 제어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과 억압에 맞서는 개인 주체의 흔들리는 위상을 다잡고 보다 나은 세계, 보다 인간적인 가치를 획득하려는 도정이다. 이런 이유에서 침묵한 채 발화되지 못한 분단과 전쟁의 수많은 기억은 여전히 문학적 글 쓰기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합니다(149쪽).”
분단이라는 역사와의 조우는 여전히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전쟁과 분단의 이유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는 통일도 요원한 것에 불과하다. 유 교수의 지적대로 향후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전쟁과 분단의 본질에 대한 접근이 이뤄지길 기대케 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