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일본 상인의 바이블이자, 일본인의 상도를 최초로 체계화시킨 책으로 『석문심학, 石門心學』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이 상인 국가로 탄생하게 된 바탕이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 『석문심학』을 쓴 사람은 이시다 바이간(1685~1744)이다. 이시다 바이간은 교토 근처에 있는 구와다 군의 도겐이라는 소도시에서 농부인 이시다 곤 우에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바이간은 겨우 8세 때 교토의 작은 포목점에 견습사환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포목점에 온지 얼마 안 되어 그만 가게가 망하고 말았다. 바이간은 점포가 망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아버지로부터 뜻밖의 전갈을 받았다. "주인을 한번 모시면 어버이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 주인의 부끄러운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이시다 바이간의 아버지는 비록 가난했으나 성실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어린 이시다 바이간이 산에서 밤을 주워 왔다. 아버지는 이시다 바이칸은이 주워 온 밤을 보고 그 밤이 산 경계의 어느 쪽에 떨어져 있더냐고 물었다 오른쪽에 떨어져 있다고 하자 아버지는 그 밤을 도로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한밤중에 아들을 산으로 돌려보냈다. 이러한 성품을 가진 아버지였기에 바이간은 고향에 돌아갈 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가게에 남아 13세가 될 때까지 극심한 고생을 하면서도 가게 주인을 봉양했다.
어린 나이의 그가 너무 고생을 한다고 생각한 동리 사람이 그를 다시 고향집에 데려다 줄 정도였다. 바이간은 고향에서 잠시 농사를 짓다가 다시 교토로 나온 것은 그의 나이 23세 때이다. 이번에는 구로야나기 라는 일류 포목점에 취직했다. 바이간은 경력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견습점원이었다. 당시엔 40세만 되어도 노인이라는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견습을 시작하는 나이는 보통 12~13세로, 그때의 23세는 지금의 40세 정도의 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이시다 바이간은 나이와 상관없이 열심히 일했다.
∘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물건들이 거리에서 잘 보이도록 가지런히 정리했고 밤에는 잠들기 전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루 종일 가게 일을 하느라 고단했지만 밤에도 쉬지 않고 책을 통해 유학, 불교, 신도 등을 배우고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 나갔다. 견습 생활은 무려 1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40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반토 즉 지배인이 되었다. 반토 생활을 하면서 그는 더욱 더 깊은 가르침을 얻기 위해 산으로 들로 스승을 찾아다녔다. 그때 만난 사람이 은자 오구리 료운이다. 오구리 료운을 만난 뒤 이시다 바이간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오구리 료운으로부터 배운 것은 도(道)와 심(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참선과 수행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더욱 깊게 다져 나갔다. 바이간의 반토 생활은 2년 남짓으로 길지 않았다. 당시는 45세가 되면 은퇴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바이간은 42세에 은퇴하게 된다.
점원 생활 20여 년은 그에게 장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실천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반토에서 은퇴한 뒤 그는 교토의 구루마야초에 있는 그의 집에서 심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연다. 학교를 연 첫날, 그는 자신의 집 앞에 서서 행인들을 상대로 공개 강의를 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귀담아 들어 주었던 사람은 손에 무를 든 농부 한 사람뿐이었다. 그때부터 15년간 그는 제자를 가르치고 여행을 다니면서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리고 그 시기에 석문심학을 저술하게 된다. '석문'은 이시다 바이간의 아호이다. '심학'이라는 말은 "마음으로 반성해 몸으로 실천한다"는 뜻이다.
∘ 1700년대 일본 사회는 쌀에서 화폐로 경제 단위가 바뀌는 와중에 있었다. 모든 쌀은 오사카로 와서 화폐로 교환되었다. 이시다 바이간은 그러한 시대를 맞아서 상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인은 왜 존재하는가. 이익은 어떻게 남기는 것이 좋은가 등등의 내용을 석문심학에 담았다. 석문심학의 내용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노동은 정신 수양이며 자기 천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노동은 힘들고 고단한 것이 아니라 인격 수양의 길이다. 따라서 빈둥거리고 노는 것보다는 공짜로라도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의 정신 수양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농부는 하루 여섯 시간 일해서 한 달에 쌀 석 섬을 얻는다. 상인은 하루 여덟 시간 일해서 한 달이 쌀 석 섬 한 되를 얻는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것이 이시다 바이간의 생각이었다.
석 섬이나 석 섬 한 되나 사실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하루에 무려 두 시간이나 더 일을 해서 한 달에 겨우 한 되의 쌀을 늘린 것이다. 그래도 이시다 바이간은 그걸 소중하게 보면서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여겼다 오늘날 일본인들의 DNA속에는 이시다 바이간의 영향을 받아 노동은 고통스런 것이 아니라 매우 행복한 수양이라는 의식이 들어 있다
② 진정한 상인은 상대방과 자기가 모두 잘되게 하는 것이다
물건을 팔 때 중요한 것은 "소비자인 상대방도 납득하고 상인인 자신도 납득하는 것"이다. 당시의 상인들은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기는 것이 결국 상대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시다 바이간은 상대와 자신이 모두 잘되는 것이 진정한 상도라고 설파함으로써 이제까지의 상인관을 뒤집었다.
좋은 물건을 적은 이문만 남기고 팔아서 소비자가 만족을 얻고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상도였다. 상인은 물건을 팔 때 한 푼이라도 더 이익을 남기려 하는데, 필요 이상의 이문을 남기면 오래가지 못할 뿐 아니라 언젠가는 결국 망한다. 그렇다고 이윤을 남기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이익을 남기되 이윤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좋은 물건을 싸게 공급하는 데서 상행위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또한 소비자를 이익 확대의 수단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상인은 작은 부를 꾸준히 쌓으면서 만족해야지 일확천금을 꿈꾸어서는 안된다는 사상이 『석문심학』에 담겨 있다. 즉 3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자기의 치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정직하고 사리사욕이 없도록 하여 천하의 낭비를 줄이자는 것이다.
③ 감사하는 마음에서 출발해 80% 벌이에 만족해야 한다
장사는 키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장사의 질이 어떤가가 문제이다. 무조건 이익을 많이 남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고객을 만족시키느냐가 중요하다. 고객의 만족을 이끌어내지 못한 가게는 머지않아 망한다. 매출의 증대 이전에 더욱 철저한 품질 관리와 고객 관리(애프터서비스)를 통해 매출이 목표의 80% 밖에 안 되더라도 가게를 믿어 주는 고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그 가게를 믿고 평생 찾아온다.
④ 마음이 허하고 정신 수양이 안된 자들이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소비에 열중한다
사치는 적이다. 이시다 바이간은 사치를 극도로 경계했다. 당시의 일본 사회는 사치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상업의 발달로 부가 쌓이면서 벼락부자가 출현했다. 돈은 많은데 마땅한 투자처는 없고 투자할 곳이 없으니 자금이 남아돌았다. 남은 돈을 쓰기 위해 귀족들은 기모노 패션 대회를 여는가 하면 외식산업이 번창하기도 했다.
가부키나 분라쿠와 같은 공연 예술과 공예, 다도, 꽃꽃이 등이 전성기를 맞았다. 이것이 겐로쿠(1688~1703) 시대 일본의 모습이다. 이 시기에 이시다 바이간은 일본인의 사치를 두 눈으로 직접 목도했다. 에도의 목재 상인 기노쿠니야 분자에몬은 에도의 한 동네를 몽땅 사서 거기에 거주하였다.
그는 손님이 한 번 앉았다 일어난 다다미는 모두 교체했는데 그 때문에 다다미를 새로 까는 기술자가 항상 7명씩이나 대기해야만 할 정도로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결국 일본은 재화가 비생산적인 분야로 과다하게 소비됨으로써 얼마 뒤에는 거품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게다가 1707년에는 후지산의 분화구가 대폭발을 한다. 연기와 분진이 에도까지 날아왔고, 햇빛을 받지 못한 농작물은 자라지 못해 일본 경제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겐로쿠 시대의 17년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시다 바이간은 한때의 사치가 훗날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깨달았다(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회상해 보라)
⑤ 인의예지신을 추구해야 신뢰를 믿는다
이시다 바이간은 상인은 반드시 인의예지신을 갖추라고 설파한다. 仁은 타인, 즉 고객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며 義는 사람으로서 바른 마음, 禮는 상대를 존경하는 마음, 智는 지혜를 상품으로 만드는 마음, 信은 돈을 빌리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라는 내용이다.
그는 마치 군자나 갖출 법한 내용을 상인들이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욕을 버려서 눈앞의 이익보다는 상대를 이롭게 하는 것이 오랫동안 장사를 할 수 있는 길이며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 한마디로 좋은 물건에 이익을 조금 남겨서 파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이시다 바이간이 추구했던 것은 상인의 존재 의미와 이윤의 정당성, 검약과 정직이었다. 말하자면 이것이 상도이다.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은 당시에도 많은 젊은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고 제자들은 각지에서 심학 강습소를 열었다. 교토에 슈세이샤, 지슈샤, 메이린샤 등이 세워졌고 오사카에 메이시샤, 세이안샤, 이코샤, 에도에는 산젠샤 등이 문을 열었다. 이시다 바이간은 60세로 사망하기까지 15년간 교토와 오사카 등지를 돌면서 강연회를 열었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도비문답 都鄙問答』과 『제가론 齊家論』을 저술했다.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일본 국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쓴 『석문심학』과 『도비문답』, 『제가론』은 당시 일본의 상공업자를 위한 저술이었지만 2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대를 뛰어넘어 일본 유수의 대기업 경영자들에게 지침이 되는 일본 경영의 고전이 되었다. 파나소닉 그룹의 창업주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살아 생전에 자신의 경영 철학의 80%는 이시다 바이간으로부터 배운 것임을 고백한 바 있다. 또 근면, 절약, 정성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국민성도 바로 그로부터 출발해서 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