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마실갑시다."
"오늘은 어느 쪽으로 마실갈 건가요?" "여름 노을 밟으며 해바라기 꽃내음 맡으며 '마누라 꽃길' 걸읍시다." "'마누라 꽃길'? 후후. 나에게만 살짝 지어준 마실길 이름이 듣기 싫지 않네요!"
"32년간 동고동락한 아내에게 동네 한 모퉁이 마실길 이름을 선물한들 누가 우리 내외 마음의 정을 두고 장난스럽게 웃을 수 있겠소?" "재개발되면 또 없어질 마실길인데 남들은 '마누라 꽃길'을 어떻게 부를까요?" "그들 마음 느끼는 대로 부르겠지." "우리 내외가 이 현대판 동네에 둥지튼 지 29년 동안 우리만의 마실길이 얼마나 많이 생겼다가 사라지곤 하였소."
사연이 깃든 마실길이 사라진들 우리 내외 가슴속에 새겨진 마실길은 아련히 되새겨진다. 장 선배네 마실길, 기존 아파트 벚꽃나무 마실길, 광안리 해변 마실길, 송이 주영이네 마실길, 해변시장 등. 우리 내외 가슴에 품고 있는 마실길이다. 또한 현대판 동네인 남천 2동에서 세월 굽이굽이 만들어진 마실길이다.
고독하고 외로운 아파트 생활
길에서 이웃 만나 동고동락 ·현대판 시멘트 동네
신혼생활 3여 년을 서울과 양구에서 보낸 후, 생활터전을 고향으로 정하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에서의 첫 보금자리를 남천동 삼익타워아파트로 정했다. 1980년대 초 남천동은 만들어지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상징인 듯이 말이다. 개발도상국에서 중진국으로 탈바꿈하려는 역동의 경제성장시대에 맞는 맞춤형 동네가 만들어졌다. 즉 부산 최초 및 최대의 아파트촌이 천혜의 광안리 해수욕장을 끼고 남천동에 건립 중이었다. 언덕 위 삼익기존 아파트타워 및 빌라 고층아파트가 우뚝 서서 경제성장의 시작을 알렸다. 언덕 밑 남천만 시퍼런 바다는 한창 매립되면서 소위 금싸라기 땅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또한 시대의 전환기를 의미하는 고층 아파트들이 매립된 대지 위에 우뚝우뚝 세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소위 해방 후 세대가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나서면서 전후 새로운 사회적 구조의 형성이 필요했다. 신세대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그들의 거주지가 부산에서는 남천 2동이었다. 아파트 군락은 신개념의 현대판 동네인 것이다.
옛 동네의 흙 밟는 마실길은 아파트 군락에서 찾기 힘들었다. 또한 마실이라는 여유를 격동하는 경제성장의 시절에는 찾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가파른 경제성장 지표만큼 남천2동은 변화무쌍하게 만들어졌다. 일명 남천삼익아파트 대단지. 지금은 지역 전체가 5천여 세대의 아파트 존으로 형성돼 있다.
개발로 산책길 차츰 사라져
추억으로 가슴에 묻어야할 때 ·마실길은 만들어지다
'마누라 꽃길'은 50대 중반에 접어든 우리 부부 특히 아내에게 나른하고 편안한 마실길이다. 마실길에 늘어놓는 아내 잔소리나 수다는 세월에 상관없이 여전하다. 콕콕 찌르던 목소리가 세월에 녹슨 듯이 중얼중얼 혼잣말하듯 바뀌었을 뿐이다. 나 역시 마실길 꽃내음에 실려 오는 아내 잔소리가 정겹게 들리니 그만큼 세월이 둥글게 귓가를 지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간 여러 가지 사연이 있는 마실길들이 이 아파트 동네 안에 생겼다가 사라졌고 새로이 만들어졌다 없어지기도 했다. 이제는 잔소리나 수다가 둥글게 들리는 우리 부부만의 마실길이 만들어져야 할 나이에 접어든 것이다.
마누라 꽃길은 삼익비치 아파트 315동 후면 정원 초입에 위치한 경로당이 있는 '상락정(常樂亭)'이라는 팔각건물서부터 301동까지 정원 담장을 따라 나있는 산책로다. 정원은 소나무, 동백나무, 무궁화, 무화과나무들로 이루어졌고 길 따라 분꽃, 해바라기, 코스모스, 나팔꽃, 달리아, 백일홍 등이 계절마다 뽐내듯이 피어난다.
315동 정원에는 '해바라기 동산', 308동 정원에는 '코스모스 길'이라는 팻말이 꽂혀있다. 담장 너머 광안대교라는 절경을 바라보며 걷는 묘미가 요즘 보너스처럼 추가됐다.
"참, 사람들 발길이 무서워. 바다였던 이곳을 흙으로 메워 매립지로 만들어 아파트를 세우고 정원으로 가꾸더니 흙이 그리워 결국 산책길을 만들었네." 아내는 마실 갈 때마다 흘러가는 세월에 만들어진 마누라 꽃길이 신기한 듯 한마디씩 꼭 던진다.
갓 이사 왔을 때 언덕 위 썰렁하게 서 있던 삼익기존 타워빌라 아파트에서 마실길은 찾을 수 없었다. 핵가족 중심의 아파트 생활권에서 사람들은 마실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파트 복도를 오락가락 하는 것이 마실의 전부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웃을 만들기 위해, 이웃과 살아가기 때문에 마실이 필요한 것이다. 답답하던 시멘트 동네에 벚나무가 마실갈 수 있는 구실과 여유를 처음 만들었다. 어리던 1천100여 그루 벚나무들이 아파트 주민들의 마실을 위해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느덧 25여 년 수령의 벚나무들이 이제는 시멘트 동네를 계절마다 다양하게 채색시킨다. 벚꽃은 남천동을 봄동네로 만든다. 사람들은 만개한 벚꽃을 따라서 활짝 웃는다. 삭막한 동네 인심을 가리워 주기도 하고, 지친 삶들을 넉넉하게 감싸주기도 한다. 그러더니 봄맞이 동네 축제가 벚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생겨났다. 벚꽃축제는 삭막한 시멘트 동네에 숨통을 틔웠다. 남천동은 그렇게 만발한 벚꽃 아래서 다른 동네와 어우러졌다. 이제는 부산의 대표적인 거리축제가 돼 남천 벚꽃거리를 명물로 만들었다. 벚나무 가로수길은 소통의 마실길이 됐다.
·사라진 마실길들
마누라 꽃길을 20여 분 걸어 301동에 다다르면 광안리 해변이 펼쳐지면서 협진태양 아파트가 보이게 된다. 이제는 사라진, 우리 내외의 가슴에 추억과 애환으로 남겨진 마실길이 있다. 협진 지점장네 마실길이다. 아내는 그 마실길을 가슴에 깊게 품고 있다.
우리들 30, 40대 힘들고 벅찬 시기에 함께 어울려 마실 다녔던 이웃들, 남천동 언덕 벚나무길을 따라 내려와 협진태양 아파트 앞 광안리 해변에서 마실을 즐겼던 이웃들, 힘든 30, 40대에 서로 조언과 위로, 격려를 나누었던 아웃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동기인 정하네. 대학동기인 주영이네. 고등학교 선배인 장선배 부부. 그리고 사회선배이던 은행지점장 H형(협진 지점장네라 불렸다). H형 이외에는 모두 의료계에 종사하고 있다.
6·25 전후세대로 또래또래 어울려 80, 90년대를 힘차게 헤쳐 나왔다. 그 중 등산을 즐기는 신실한 사회인인 H형은 외곬수 집단인 우리들에게 마실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우리들을 씩씩하고 건강하게 만들었고, 농담과 위트로 우리들의 힘든 30, 40대를 위로해줬던 사람이었다. 특히 사회적 경험이 부족했던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형님이었다. 험난했던 40대를 넘길 즈음, H형의 자살은 충격적이었다. 그토록 명랑했고 씩씩했던 H형이 왜 자살을 선택했을까. 우리는 혼란에 빠졌다. H형의 죽음은 급변하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인 듯했다. 명랑 쾌활했던 그 모습을 마실길에서 다시는 찾을 수 없어 우리 부부는 H형이 남긴 마실길에서 통곡했다. 그리고 협진 지점장네 마실길을 가슴에 꼭꼭 묻었다.
남천동 사는 동안 가슴을 텅 비게 하는 마실길이 있었다. 이제는 사라진 삼익기존 아파트 벚나무 가로수길이다. 그 가로수길을 매일 오가며 벚나무와 함께 두 아이의 성장을 지켜봤다.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매일 벚나무길로 바쁘게 마실 다녔다. 두 아이 등하굣길, 과외공부길, 학부모로서 이웃과의 정보교환 등등.
선진국 진입을 위한 또 한 번의 변신? 아니면 시대조류에 동반해야하는 재개발이라는 승부수? 30여 년 삼익기존 아파트 마실길이 재개발로 사라져버렸다.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잘렸을 때, 가슴이 텅 빈 듯했다. 몇 날을 오가며 베어진 벚나무 밑동을 미련스럽게 바라보았다. 아! 이렇게 세월이 가는구나! 아니 세월이 흘러야 하는구나! 삼익기존 벚나무길도 세월의 한 묶음으로 가슴에 묻어야 했다.
·삶 속의 마실은?
아내의 발길이 삼익비치 301동 마누라꽃길에서 오른쪽으로 돌려진다. 먼저 방파제 초입에 큰 화분 조형물이 보인다. 프랑스 조각가 장 피에르 레노의 '화분'이라는 작품이다. 여기서부터 잘 다듬어진 산책로가 뻗어 있다. 방파제 산책로다. 삼익비치 아파트 300동대 담장 너머 방파제 따라 생긴 마실길이다. 망망대해 태평양이 펼쳐지며 광안대교가 광안리 바다를 가로지른다. 방파제 산책로도 변화무쌍하게 세월을 달려왔다. 이제는 우레탄으로 곱게 포장돼 있고 담장에는 벽화가 예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광안리에서 이기대 갈맷길의 한 구간이 됐다. 방파제 산책로에서는 노인네들 웃음소리로부터 새벽마실이 시작된다. 하루종일 남녀노소 인종에 관계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달리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체조나 에어로빅을 끼리끼리 한다. 또한 계절마다 불어오는 저녁·새벽 바람을 즐기려고 여러 곳의 사람들이 마실온다. 남천동에서 가장 번잡한 마실길이 됐다. 방파제 아래엔 파도가 넘실대고, 광안대교가 우뚝 서 있고, 건너편 해운대 마린시티에는 고층아파트들이 드리워져 있고, 갯바람에 긴 여름도 날아가고….
아내 발걸음이 흥겹게 보인다. 방파제 산책길에서 언제나 여러 이웃을 만나게 된다. 아내의 눈길과 손짓이 바빠진다. 산책 중 이웃과의 수다도 별미인 것이다. "삼익비치 아파트도 재개발할 모양이야. 그럼 마누라 꽃길이나 벚나무 가로수길 여기 방파제 산책로도 사라지겠지?" 아내의 한숨 속에 서운함이 배어 있다. 여러 이웃을 만날 수 있는 마실길들. "벚꽃거리 축제를 또 잃어버리겠지?" 도시는 또 다른 변신을 해야 한다. 도시의 팔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특히 남천2동은 더욱 그렇다. 도시 변신에 어울리는 새 동네가 짜여 질 것이다. 그럼 우리는 새로운 마실길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또 어떤 마실길이 만들어질까?
허 택 소설가 ◇약력=2008년 문학사상 '리브 앤 다이'로 등단. 작품 '칫솔' '눈물' '마음속 봄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