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광호의 여관방은 통로 끝에 있는 조그만 방이었다. 창문이 하나 있었다. 그 창문으로 남산 언덕이 바라다보였다. 그 아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들이.
가구는 아무 것도 없고 옷가지만 못에 아무렇게나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광호는 구석에 있는 소형 라디오를 켰다. 구슬픈 팝송이 흘러나왔다. 제럴드 졸링의 ‘열대행 티켓’이란 노래였다. 여기서 듣는 그 노래가 왜 그렇게 가슴을 울리는지 재옥은 울고 싶었다.
광호는 벽에 기대어 그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재옥은 핸드백에서 껌을 꺼내어 광호에게 내밀었다. 광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도 이 추운 사랑의 동토지대를 떠나 열대지방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은 걸까? 그 심정은 재옥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남편에게 버림받았다. 아니 그녀가 남편과의 동침을 거부했다. 더러워서였다.
(이 남자라면?)
재옥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가 무슨 남자건, 무엇을 하건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용산 역전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들 사이엔 필연의 연결 고리가 맺어졌던 게 아닐까?
운명이라면 운명. 악연이라면 악연. 뭐라고 해도 좋다. 문식에게 이 남자를 닮은 구석이 한 군데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멀리 도망쳐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식은 남편이었지만 사랑하고픈, 사랑을 주고픈 감정을 일으켜 주지 않는 남자였다. 오히려 움트는 본능마저 싸늘하게 냉각시켜 버리는 남자. 남편이란 족속. 그 문식에 비하면 광호는 주소도 없는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인간다운 남자였다. 그는 재옥을 구해 줬던 것이다.
재옥은 껌을 딱딱 소리내어 씹었다. 딱딱거리는 껌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 그 소리가 광호의 귀엔 아름다운 멜로디처럼 귀엽게 들렸다. 광호 옆에 나란히 앉아서 제럴드 졸링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그 노래가 끝나고 시끄러운 랩이 흘러나왔다. 광호는 손을 뻗혀 볼륨을 줄였다.
“이 여관은 얼마 후면 뜯긴다. 불도저 같은 중장비가 와서 밀어 버릴 거야. 얼마동안 정든 곳인데, 이 집이 뜯기면 또 어디로 갈지 걱정이다.”
“직업소개소 아저씨완 어떤 관계세요?”
“동업자지 뭐. 그렇게 생각해라.”
“왜 결혼을 안했어요?”
“시골에서 상경하여 돈 번다고 거들먹거리다가 돈도 못 벌고 군대에 갔지. 군대에서 제대하니 할 것이 없더라, 노동밖에는. 꿈은 많고 힘든 노동은 하기 싫고. 전에 함께 했던 패거리들을 찾아가 나쁜 짓을 해 주고 용돈 받는 재미에 빠져들다 보니 이렇게 됐다. 돈도 벌지 못하고 말이야.”
“나쁜 짓이라면?”
“사람을 두들겨패는 짓거리지. 그들이 시키는 대로, 돈을 주지 않는 업소에 가서 난동을 부리거나 협박하거나 주먹을 휘두르면 돈이 나오고 그 대가를 받지. 때론 생명을 건 싸움을 하기도 했다. 눈앞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친구들을 보기도 했다. 이 생활에 차츰 회의를 느끼고 손을 끊으려던 차에 널 만난 거지.”
“왜 제 뒤를 미행했어요?”
“도와 주고 싶어서지. 서울이 하도 무서운 곳이니까. 널 용산역에서 처음 본 순간 참 위태위태하다는 생각을 했다. 넌 고생을 하지 않고 편한 가정에서 자란 공주님 같았다. 이렇게 보니 내가 사람을 잘 본 것 같다. 너무 예쁘니 말이야.”
“예쁘긴 뭐가 예쁘다고 그래요?”
재옥은 수줍게 웃으며 광호의 어깨를 툭 쳤다. 입술이 터진 곳을 손끝으로 어루만져 주며,
“지난번에 때려서 미안해요.”
“태권도 실력이 대단하던 걸. 언제 배웠지?”
“초등학교 때부터요. 아버지가 경찰관이었어요. 권총도 그래서 생겼고. 내가 어렸을 땐 아버진 강력계 형사였지요. 원래 특공대 출신이었고요.
대범한 성격에 항상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서 일했지요. 그러다 보니 적들이 많았어요. 불량배들에게 협박을 받고 수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어요. 이 도시 저 도시를 전전했고요. 그러다 지금은 승진해서 군 경찰서장으로 재직하고 계셔요.”
“꼭 나 같은 놈들이 네 아버지를 못 살게 협박했나 보지. 네 얼굴과 행동거지를 보고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은 했었다. 용감한 경찰관의 딸이었군. 날 잡아갈까 겁난다.”
“시골 경찰관이니까 그런 걱정은 마세요.”
“그럴까?”
둘은 마주보고 멋쩍게 웃었다. 재옥은 소변이 마려워서 아까부터 화장실을 물어 보려고 했다. 이 여관엔 화장실이 없는 것 같았다. 삼층과 사층을 다 찾아 봐도. 광호의 방은 오층 끝방이었다.
“나도 쫓겨다니며 살고 있다. 경찰에 쫓겨다니고 적들에게 쫓겨다니고 항상 쫓기는 삶이야. 우리 패거리들도 내가 어디 사는지 모른다. 내가 수시로 거처를 옮겨 다니니깐. 그래야 안전하거든.”
“오늘은 시간이 많으신가 봐.”
“항상 시간이야 많지. 조직에서 연락이 오면 나타나서 그들의 명령에 따르면 된다. 그러면 돈이 나온다.”
“얼마나 모으셨어요?”
“조금, 아니 동그랑땡이지. 조금 모으면 시골집에 보내 주었다. 부모님들은 내가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돈을 번 줄 아신다. 더러운 돈인 줄도 모르고. 불쌍한 분들.”
광호는 두 손으로 머리칼을 북북 긁었다. 불량배의 초라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그에게 연민이 갔다.
“직업소개소엔 출근 안해도 되나요?”
“거기가 내 일터니까 출근해야 하지만 너를 미행하느라고 거기엔 나가지 않았어.”
“그래도 괜찮아요?”
“죽기밖에 더하겠니? 조직의 계율을 어기면 그만한 보복이 온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널 보호해 주고 싶었다.”
“돈도 생기지 않는 짓을……”
“돈 얘기하지 마. 고향 생각나니까.”
7
그의 고향은 시골이었다. 가난이 유죄. 돈이 무죄. 죄는 신에게 있는데 인간에게 잘못이 있다고들 말한다. 광호는 아무리 봐도 불량배 같지 않았다. 그 선량한 인상과 순수한 말투를 보면 시골 초등학생같이 깨끗해 보였다. 그런 그가 경찰에 쫓기는 범죄자라니. 재옥은 광호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오줌보가 터질 듯 마려웠다. 재옥은 아랫배를 움켜쥐고 울상을 했다. 밖으로 나가서 누구에게 물어볼 데도 없었다. 방들이 거의 비어 있고 주인도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귀신 나는 집처럼 을씨년스러운 여관. 그곳에 광호가 살고 있다.
“추운데 덮어라.”
광호가 이불을 끌어다 재옥의 무릎을 덮어 주었다.
“화장실 어디예요?”
“빈방에 가서 아무 데나 싸라.”
“네?”
“곧 뜯길 건물이니까 지린내가 나도 괜찮아. 나도 그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렇게 체면 차리고 싶으면 밖으로 나가서 공터에 싸고 와라. 사실은 여관 화장실이 고장나서 오래전부터 사용하지 않고 있어. 그리고 집주인이 못 쓰게 한다.”
그랬었구나. 말이 여관이지 이곳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재옥은 광호가 가르쳐 준 공터의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보았다. 판자로 지은 임시 변소였다. 악취가 진동했다. 바닥에 똥과 오줌이 질컥했다. 겨우 앉을 자리를 찾아 소변을 보고 나오니 광호가 어둠 속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재옥을 지켜 주는 것이리라.
그들은 방으로 들어와서 한 개의 이불을 덮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드러누웠다. 재옥의 숨이 가빠졌다. 참으려고 해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광호가 갑자기 그녀의 몸 위로 덮여 왔다. 재옥은 저항하지 않고 옷을 벗었다.
남편 외에는 처음 체험하는 남자의 몸. 그 느낌은 같았지만 숨결과 동작이 판이했다. 광호는 천엽꾼이 물고기를 더듬듯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다루었다. 그는 불량배답지 않게 신사적으로, 영화에서처럼 예술적으로 재옥의 몸에 낯선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항상 정조를 청결히 가꾸라는 아버지의 교훈을 어기고 낯선 남자와 자고 있다. 아마 아버지의 교훈은 그 권총과 함께 어디론지 분실된 것 같았다. 광호에게 몸을 맡기면서도 죄악감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없고 병아리가 어미 깃 속으로 파고들 듯 당연한 본능처럼 생각되었으니……
재옥에겐 얼마동안 쓸 수 있는 넉넉한 돈이 있었다. 현금카드도 여러 개 있었다. 마이너스 통장에 결재가 되지 않으면 주소지인 친정 부모님께 통보가 갈 것이고 그분들이 변제해 줄 것이므로 돈 걱정은 없었다.
재옥은 취직할 것도 잊어 버린 채 날마다 광호와 여관방에서 놀았다. 광호는 돈 쓰기를 아까워해서 좋은 모텔로 가자는 재옥의 제의를 사양했다. 돈 주지 않고 사니까 그 여관방이 좋다는 것이다. 낮엔 여기저기 구경하고 아이쇼핑하고 돌아다니고 밤엔 둘만의 환락에 젖어들었다.
광호는 날이 갈수록 재옥을 좋아하고 그녀에게 푹 빠진 것 같았다. 아기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그녀를 쫄랑쫄랑 따라다녔다. 구경의 안내자는 광호였지만 조종자는 재옥이었다. 그는 재옥이 하자는 대로 하고 가자는 대로 다 돌아다녔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재옥은 여관방에 누워 딸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걱정을 했다.
“아기가 아프다고 전화가 왔는데 죽을까 봐 불안해요.”
“애 아빠가 잘해 주겠지.”
“그 자식은 인간이 아니에요. 자식 사랑도 몰라요. 날마다 섹스에 미쳐 여자 속곳 더듬는 짐승이라니까요.”
“나보다 증세가 더 심한가 보지?”
“심한 정도가 아니라 병적이에요. 여자라면 환장하니까요. 그런데도 난 그 사람한테 정을 느낄 수 없으니 내게도 문제는 있지요.”
“네가 잘해 주지 않으니까 바람을 피운 게 아닐까? 네 남편이란 사람이.”
“그가 바람둥이이기 때문에 잘해 주고 싶어도 잘해 줄 수가 없었어요.”
“역지사지란 말 알아?”
“나더러 남편 입장이 돼 보란 말이죠?”
“그렇지.”
“내가 남자라면 난 한 여자만 사랑하겠어요. 그걸로 충분해요.”
“그렇지 않는 남자도 있는 거야. 신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걸 어떡해? 용서하고 감싸 줘야지.”
“우리 아버지 같은 말을 하는군.”
재옥은 입을 삐죽했다.
“용서해 줘야 하는 거야. 난 네가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그럼 우리들은 어떻게 되지?”
“헤어지는 거지. 우리는 남이잖아?”
“싫어.”
재옥은 광호의 목을 껴안고 흐느껴울었다.
“난 자기와 헤어지면 못 살 것 같아.”
“일순간의 감정일 거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사랑해.”
“우린 헤어질 사람들이야.”
“사랑해.”
재옥은 흐느껴울면서 그의 입을 막았다. 뺨과 뺨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금속같이 차가운 광호의 심장에도 더운 사랑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엔 공식도 국경도 없었다.
8
바깥이 소란해지며 계단 위로 누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여러 명이 걸어오는 소리였다. 발자국소리는 복도를 걸어와서 광호의 방문 앞에서 멈추었다. 방문이 열렸다. 광호의 패거리들이 이불 속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사내들은 팬티만 입고 있는 광호를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때리지 말아요!”
팬티바람으로 뒤따라가는 재옥을 사내들이 무자비하게 주먹으로 갈겼다. 재옥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복도 바닥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재옥은 빗줄기 소리에 눈을 떴다. 빗줄기가 세차게 복도 창문 위에 뿌려지고 있었다. 언덕 위의 가로등이 그녀의 비참한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사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재옥은 방으로 들어가서 얼른 옷을 입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광호는 공터 흙 속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져 있었다.
“광호 씨!”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코트를 벗어 얼음장 같은 그의 몸을 덮어 주었다. 재옥이 마구 흔들어도 광호는 반응이 없었다.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그의 처참한 얼굴을 본 순간 재옥은 울음을 터뜨렸다. 패거리들에게 두들겨맞아서 얼굴이 엉망이었다.
“광호 씨, 정신 차려요!”
그녀가 세차게 흔들자 광호가 눈을 떴다. 그는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이 전신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패거리들이 배신자에게 가한 보복이었다. 여자에 빠져 조직의 명령을 듣지 않고 조직의 규칙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재옥은 앰뷸런스를 불렀다. 앰뷸런스가 달려오고 광호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광호는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재옥은 광호의 병상을 지키며 병수발을 했다. 광호는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고 식사도 했다.
원래 건강한 사람이라 회복 속도가 빨랐다. 보통 사람 같으면 죽거나 병신이 됐겠지만 그는 강장체질이어서 한 달 후에 퇴원했다. 퇴원할 때까지 그의 패거리들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재옥이 돌보고 있으니까 그러려니 했다.
입원비와 치료비는 재옥이 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광호에겐 병원비 낼 돈이 없으니까 애인이 낸 것이다. 그들은 그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도 그는 속으로 멍들어 있었다. 그는 한쪽 다리를 절뚝거렸다. 무릎 연골이 파괴되어 수술해도 완치할 수 없었다. 패거리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 여자와 헤어지든지, 헤어지기 싫으면 직업소개소에 나와서 근무해라. 일하면 여자와 노는 걸 눈감아 주겠단 말이야.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여자를 죽여 버리겠다!”
재옥과 헤어지든지 재옥과 살림하면서 광호가 그전처럼 직업소개소에 근무하든지 양자택일하란 명령이었다. 여자와 동거를 허용하는 건 그들 세계에선 상당히 후한 조치라고 할 수 있었다. 재옥과 헤어지란 말은 조직 폭력에 합류하란 뜻이고, 직업소개소에 근무하란 말은 돈을 벌어 바치란 뜻이다.
전화를 받고 나서 광호는 고민했다. 광호는 두 가지 다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재옥도 동감이었다.
“난 너를 안전하게 네 집으로 돌려보내 줄 테다. 그것이 내 의무이다.”
“난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광호 씨와 살래요.”
“널 불륜한 범죄자의 애인 만들고 싶진 않아. 넌 돌아가야 해.”
“싫어요, 싫어요. 왜 그렇게 내 마음을 모르세요? 내가 일시적인 기분으로 광호 씨와 불장난을 즐긴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재옥은 광호의 몸을 껴안고 울먹거렸다.
“직업소개소에 나가서 그들에게 충성하는 척해요. 그러다 기회를 봐서 우리 함께 도망쳐요.”
“그놈들은 독뱀처럼 냄새를 잘 맡아서 내가 어디 있든지 금방 찾아낼 거야. 널 집에 보내 주고 난 그 세계로 돌아가야겠다.”
“안 돼요. 그 세계로 돌아가면 안 돼요. 나도 집에 돌아가지 않겠어요. 우린 건전하게 살 수 있어요.”
재옥의 얼굴이 우는 아기 얼굴처럼 흉하게 일그러졌다. 광호는 그 뺨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광호는 재옥을 살리기 위해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던 암흑가로 되돌아가려 한다. 그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지금 재옥을 살릴 수 있는 길은 그녀와 헤어지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의 결심은 굳어 있었다.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이해해라.”
“그건 죽는 거예요.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는 바보 같은 짓이에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니?”
광호는 자신이 그 답을 바꾸지 않을 줄 알면서도 사랑하니까 바보처럼 물었다.
“함께 도망쳐요.”
“그렇게 내가 좋으냐? 이 썩은 육체가 그렇게 좋으냐?”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의 영혼을 사랑해요. 당신의 모든 부분을 다 사랑하고 싶어요. 이 눈물까지도……”
그들은 눈물과 눈물을 섞어 마시며 울었다. 광호는 확실히 마음이 약해져 있었다.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약해진 것이 아니고 더 무섭게, 처절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그 힘은 재옥의 영혼을 통해 그의 영혼과 육체의 세포 각층으로 스며들었다.
“이 세상은 넓고도 넓어요. 당신이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어요. 내가 도와 주겠어요. 내가 따라가겠어요.”
“넌 네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돌아가겠어요. 그리고 정리하겠어요. 당신을 따라 남극이건 북극이건 따라가겠어요.”
“이 예쁜 널 그렇게 고생시킬 필요가 있겠냐?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바보, 죽긴 왜 죽어? 살아야지. 우리가 뭘 잘못했어? 하늘에 대고 물어 봐. 이 세상 사람들에게 귀를 열고 들어 보라고 해. 우린 사랑한 죄밖에 없어.”
자락자락 내리는 빗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가려 버렸다. 주룩주룩 내리는 눈물이 그 빗물이었다. 그들은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빗소리에 깨어 보니 새벽이었다.
비는 그치지 않고 밤새 내렸나 보다. 그 비가 개이면 봄이 올 것이다. 어서 봄이 와서 봄처럼 만물이 약동하고 그들에게도 기쁨이 찾아왔으면 했다. 두 개의 슬픔덩어리. 빗물 같은 슬픔들.
그 슬픔들이 만나 꿈을 꾸고 있었다. 사랑의 꿈을. 언제 헤어질지 모를 이별의 준비를.
햇빛이 유리창 안으로 스며들었다. 맑은 날에 어쩌다 잠깐 구경하는 햇빛은, 아침에 일 분이나 이 분 방안에 머물다 지나갔다. 재옥은 그 햇빛을 더 오래 붙잡아 두려고 창문을 가린 낡은 커튼을 제쳐 놓고 창문을 활짝 열었지만 차가운 겨울바람이 뼈속을 파고들 뿐 그 이상 오래 붙잡을 순 없었다.
그 햇빛이 그녀의 눈을 해맑게 비쳤다. 비는 개이고 하늘은 쾌청했다. 재옥은 눈을 뜨고 습관처럼 광호의 가슴을 더듬거렸다. 항상 잡히던 그의 가슴이 없었다. 가슴뿐 아니라 광호의 몸뚱이가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누운 자리는 따스했다. 보일러가 들어와서 방은 춥지 않았다. 그러나 어딘가 썰렁했다.
(화장실에 갔나?)
그 알량한 화장실에 갔나 보다고 중얼거리며 일어나서 옷을 입으려다 머리맡에 놓인 하얀 쪽지를 발견했다. 광호가 떠나면서 남긴 편지였다.
<그동안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너를 살리기 위해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조직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나를 잊고 가정으로 돌아가라. 아기가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하겠니? 그 생각만 하면 죄인이 된 기분이다. 현실의 불만을 참고 부디 좋은 엄마가 돼 다오. 광호.>
9
재옥은 부모님을 졸라서 문식과 합의이혼을 서둘렀다. 썩은 부분은 빨리 도려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구태의연한 가정의 굴레를 벗고 새삶을 찾아 동분서주한 결과 합의이혼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경찰서장인 아버지의 힘이 컸다. 문식은 순순히 이혼해 주지 않으려고 한 달 동안 버티다가 재옥의 아버지가 간통한 증거를 잡고 고소하려고 하자 두 손을 든 것이다. 위자료를 주지 않으려는 속셈에서였다. 재옥은 위자료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혜리는 재옥이 맡아 기르기로 했다. 혜리는 지금 재옥의 친정집에서 외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아기가 아프단 말은 재옥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친정 부모님의 연극이었다.
재옥은 가벼운 마음으로 친정집을 나와 역으로 향했다. 오전 열 시 삼십 분에 용산행 새마을호 열차가 있었다. 지난번 무작정 상경할 때 재옥이 타고 갔던 그 열차였다.
재옥은 용산역 대합실에서 나와 서쪽문 출입구로 걸어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전자상가 앞 통로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춤추는 아이들이 또 춤의 묘기 공연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기묘한 춤을 보고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언제 봐도 그 춤은 아름답고 멋있었다.
그것은 자유분방한 인간의 표상이었다. 인간의 신비는 춤추듯이 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춤에는 인생의 의미가 다분히 내포되어 재옥을 한없이 감동시켰다. 그녀 자신이 춤의 무아지경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그들과 함께 뒹굴고 춤추고 싶은 욕망. 그녀의 춤. 그녀를 위한 그녀만의 창조적인 춤을.
재옥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광호가 어떻게 있는지 궁금해서 마음이 차분하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시끄러운 음악과 춤의 공연을 뒤로 하고 바삐 계단을 내려왔다. 광장에서 택시를 타고 광호의 여관방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가 그 여관방에 돌아와서 재옥을 기다릴 것만 같은 예감. 그 예감은 그녀의 영감이었다.
그녀는 그녀를 뒤따라오는 발소리를 들었지만 그것이 광호의 발소리인지 몰랐다. 계단엔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한쪽에 에스컬레이터가 있었지만 그녀는 넓은 계단을 춤추듯 한들거리며 내려왔다.
재옥의 앞으로 택시가 한 대 달려와서 멎었다. 재옥은 그 택시를 타고 남산 개발지역 동네 골목으로 달렸다. 동네 이름은 알 수 없고 골목의 위치와 모양만 생생히 기억했다. 한 달 동안에 동네가 많이 변해 있었다.
중장비들이 집과 건물을 파헤치고 여기저기 공사 담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건축 파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골목 아랫부분에 있던 집들이 없어지고 그 긴 골목이 도중에 끊겨 있었다. 택시는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재옥은 택시에서 내려 기억을 되살리면서 골목길을 찾아 올라갔다. 숨차게 걸어 올라갔다.
언덕 위로 남산타워의 뾰족한 탑 끝이 조금 보였다. 탑의 위치로 봐서 그 골목이 틀림없었다.
(여관이 뜯겼으면 어쩌나? 정든 보금자리였는데……)
재옥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허우적거리며 한없이 골목을 타고 올라갔다. 두 번이나 방향을 잘못 잡아서 되돌아 나와서 다시 걸었다. 낯익은 주택들이 보였다. 그 골목 일대는 아직 안전했다. 재옥은 신바람이 나서 휘파람을 불고 싶었다. 그 여관 간판이 보였다. 광호와 한 달 전에 묵었던 그 여관이었다.
여관으로 들어가니 낯익은 아이들이 그 여관에서 나오고 있었다. 사층에 살던 가난한 장사꾼의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을 보니 반가워서 선물을 사 주고 싶었다. 재옥은 만원짜리 두 장을 꺼내어 두 아이들 손에 각각 쥐어 주었다.
아이들은 좋아하며 구멍가게로 달려갔다. 그 구멍가게도 그대로였다. 광호와 둘이 그 가게에서 곧잘 라면을 사다 끓여 먹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재옥은 쉬지 않고 한달음에 오층까지 달려 올라갔다. 복도 끝 작은 방문을 열었다. 항상 잠기지 않고 열려 있던 그 방문.
허나 광호는 없었다. 싸늘한 냉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전등을 켜니 방안이 밝아지며 광호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제럴드 졸링의 ‘열대행 티켓’을 좋아하던 광호. 칼날같이 매서우면서도 여자에게 친절하고, 시골 농부처럼 텁텁한 미소 속에 정이 묻어 있던 광호. 재옥을 끔찍이 사랑하고 아껴 주던 남자. 너무나 짧았던 사랑. 이 방의 주인.
그 광호가 그 방에 없는 것이다. 방바닥에도 벽에도 천장에도 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한쪽에 예쁘게 개어 있는 이불과 요. 그것은 그녀가 떠날 때 둔 그대로였다. 광호는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재옥은 흐느껴울면서 그 방안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밖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발자국소리는 계단을 타고 올라오더니 오층 복도 끝에 와서 멈췄다. 방문이 열리고 한 사나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옥은 여관의 관리인이겠지 하고 사나이의 출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체취와 숨소리가 어쩐지 광호 같아서 신념 없이 흘낏 쳐다보았다. 그는 광호였다. 재옥은 꿈이 아닌가 했다.
광호는 빙긋이 웃으며 중절모자를 벗고 재옥에게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서서 얼빠진 듯 한참동안 소리없이 웃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새 커다란 럭비공이 선수의 손에 들어가듯이 재옥은 그의 품속에 안겨져 있었다.
“어떻게 왔어요?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누군가의 밀고로 왕초와 간부들이 경찰에 모두 체포되어 우리 폭력 조직이 와해되었지. 경찰이 골머리 앓던 용산파 조폭이 소탕된 거야. 나도 범죄자지만 네가 보고 싶어 자수를 뒤로 미뤘다. 이렇게 네가 올 줄 알고.”
“꼭 자수를 해야 되나요?”
“자수해서 광명을 찾고 싶어.”
“그럼 나와 결혼한 다음에 자수하세요.”
“그럴까? 농담이겠지.”
“정말이야.” “그 말도 농담.”
“진담이야. 남편과 이혼했어. 부모님께 우리 관계를 말씀드렸더니 당신을 한번 보자고 하시던 걸.”
그들은 속살거리듯 대화를 나누면서 꼬집기도 하고 낄낄대고 웃기도 했다. 너무 좋아서 그러는 거다. 꿈같은 이 만남이 너무 좋아서.
한참 후 그들은 다정히 손잡고 여관 계단을 내려왔다. 방해하거나 간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은 천국애 든 기분이었다. 유리창 밖으로 파란 하늘이 보이고 주택 울타리의 개나리꽃이 활짝 웃고 있었다.
.........................................................
나오는 사람들
허재옥(26)……가출 가정주부
엄광호(28)……조직 폭력배의 일원
친정 부모
직업소개소 사장
춤꾼 소년들
불량배들
조직 폭력배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