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섬김의 삶
본문 시편 69: 33, 마태복음 20: 28/ 찬송 49 (참 즐거운 노래를), 347 (겸손히 주를 섬길 때), 522 (주님이 가신 섬김의 길은)/ 교독 40. 이사야 58장
머리에
지난 주일 글로벌 예배도 참 복되었습니다. 그날 말씀드렸던 것처럼, 몹시 기다려지던 ‘만남’의 날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예배 날의 ‘만남’이 더 그리워지는 듯도 합니다.
처음으로 사회를 보신 홍콩의 최 선생님은 예배와 이어지는 모든 순서를 잘 이끌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날 7월에 생일을 맞으신 세 분을 위한 축하 노래를 불렀고,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사경회 주제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우간다의 김 목사와 박 선생도 함께하여, 우리 교회가 오랫동안 지속해서 관심을 가져온 ‘예람 장학금’에 대한 보고도 들었습니다.
예배 후 설교를 두고 나눈 대화도 참 보람찼습니다. 그날 설교 본문의 가르침이 제 학문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먹고사는 문제’를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해 왔습니다. 심지어 이 문제를 가장 긴급하고 중하게 여긴 나머지, 인권과 자유를 무참히 짓밟는 독재체제의 장기 집권마저 용인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그 체제의 우두머리가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통령이라며 그를 높이 평가하고 받드는 ‘경제(제일)주의’ 의식 세계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학계에서 별달리 주목하지 않던 이 주제에 제가 매달려 파고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그날 본문의 말씀이 있었을 것이라는 나름의 분석도 덧붙였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이 제가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현대 사회를 진단하며 비판하는 ‘남다른 시각’을 열어준 원동력이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 주제와 대화의 줄기에 이어, 이 시간 오늘의 본문이 주는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주장과 존중
최근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배재고와 광주일고가 경기할 때, 배재고 선수들이 상대를 향해 ‘5·18 민주화운동’을 조롱하는 구호를 외쳤다는 논란이 일었습니다. 광주일고의 코치진이 강력히 항의한 뒤 그 응원이 멈추었지만, 이 사건을 두고 우리 사회는 또다시 두 쪽으로 갈라져 대립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지역감정을 유발하고 민주화 역사를 희화화하여 폄훼했다며 공분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배재고 선수들의 행동을 두둔하며 그것 또한 하나의 ‘응원’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나타났습니다.
이 와중에 또 다른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대통령 직속 특별위원회를 이끄는 한 인사가 ‘5·18이 성역인가’하고 반문하며 문제를 던진 것입니다. 사회의 그 어떤 영역도 ‘성역’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법학 전공 교수님도 계시고, 아메리카에서 범과 정치의 문제를 가르치는 교수님도 계시며, 방대한 인터넷 자료를 추적하여 찾아내는 독립 연구자도 계십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제가 새로운 생각을 덧붙일 수는 없겠으나, 그 인사의 발언이 분명 함께 새겨볼 만한 생각거리를 던졌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가 호출했다고 하는 존 밀턴의 유명한 저작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1644)에 나오는 글귀를 마주했다면, 그의 주장을 곰곰이 새겨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밀턴은 “진리와 거짓을 스스로 맞붙게 놔두라. 자유롭고 공개된 접전에서 진리가 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예람 교우들은 밀턴의 이 문장을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 말, 베인턴의 「세계교회사」 제10장 <신앙고백의 시대>를 공부할 때 읽었던 ‘신앙의 자유’ 부분(266-267쪽)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덧붙임/아래>.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자유’의 뜻을 달리 값 매김 하기도 하지만, 자유의 가치는 누구도 깎아내릴 수 없는 고귀한 정신입니다. 학자들은 국가의 사전 ‘검열령’에 맞선 밀턴의 ‘자유’ 사상이 올해 250돌을 맞은 아메리카 독립 정신의 뿌리가 되었고, 나아가 수정헌법 제1조를 제정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국가가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라며 철저하게 자유를 보장하는 조항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가치는 오늘날 그 어떤 권력도 함부로 짓밟을 수 없는 확고한 원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이치가 된 것입니다. 이제 자유는 단순히 사람들의 호불호나 감정에 따라 억압될 수 없는 절대의 가치로 올라섰습니다. 물리력에 의한 폭력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 한, 어떠한 사상이나 표현도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이 그 나라의 원칙입니다.
우리가 이 자유의 원칙을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배재고 응원단도 보호받아야 하고, 서울광장에서 ‘김일성 찬양’을 외치는 행위 또한 용인되어야 한다는 특별위원회 인사의 입장을 그리 간단히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혐오 발언과 가짜뉴스가 이 자유의 원칙 뒤에 숨는다 하더라도, 원칙 그 자체는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의 원칙이 있기에, 지난날이나 오늘날 다수가 거부하고 때로는 증오하기까지 하는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법률과 사상의 근거도 성립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어떤 진영에 서 있든 모두가 존중해야 할 위대한 가치자, 자유 국가의 기본 조건입니다.
3. 자유와 ‘말씀’
이 자유 덕분에 우리는 표현의 범위를 넓힐 수 있게 되었지만, 반대로 이 자유 때문에 증오와 왜곡가 득세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자유로운 민주 국가는 이를 물리력으로 섣불리 탄압하지 않고 용인하는 것은, 자유를 수호하는 사회라면 마땅히 감내해야 할 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자유는 모두에게 깊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삶의 원칙이자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라는 도구로 수많은 일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기준을 붙잡느냐에 따라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곧 윤리의 문제이고 삶의 지향성 문제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이 자유는 깊이 새기고 새겨야 할 삶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자유는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편리한 수단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로움을 넘어, 다른 사람의 이로움을 구하는 데 쓰이는 값진 도구입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실 수 있는 전능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유로 이 세상을 강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으로 표현하시며 그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이끄셨습니다. 주님이 지니신 자유는 사사로운 자기 이익을 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오직 남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는 자유이며, 낮은 곳에서 ‘남을 섬기는 데로’ 기꺼이 나아가는 자유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하신 마태복음의 가르침처럼, 주님은 결코 자기 이익을 더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신다”는 시편 말씀처럼, 주님은 그 자유를 자기 안위를 위해 쓰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남을 섬기는 일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 고난받는 이들을 돕는 일에 그 자유를 바치셨습니다. 애초에 주님은 자기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자 이 낮고 낮은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고 그 바깥으로 나아가 외로운 이, 따돌림받는 이, 천대받는 이, 힘없는 이, 그리고 고통받는 이들을 보듬어 섬기셨습니다. 그들의 위로자와 격려자가 되시며, 몸소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믿는 사람’이란 바로 이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분의 삶을 닮아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4. 우리의 ‘자유’
우리 역시 시민의 자유를 누리며 민주 사회가 주는 자유를 귀히 여깁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이 자유를 단순히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는 탐욕의 도구로 삼지 않습니다. 자기중심 의식에 갇혀 사사로운 이익만을 위해 행사하는 ‘낮은 수준의 저열한 자유’를 넘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내 자유를 기꺼이 내어주는 ‘높은 수준’의 고결한 자유를 향하여 전진합니다. 서양 철학 사상의 개념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그동안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소극’ 자유에만 많은 관심을 쏟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이 일러주는 바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적극’ 자유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지향성에 따라, 우리는 인간이 행사하는 자유에 언제나 부족함과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처음부터 완전무결한 인격체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밀턴의 통찰을 빌리자면, 인간은 본래 순수한 존재라기보다 불순함을 지닌 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열린 마당에서 다양한 자유가 서로 부딪치고 건강하게 경쟁해야 합니다. 어느 하나의 자유나 이에 대한 해석만이 절대의 해답이라며 우겨대는 인간의 억지와 고집, 독선은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진리와 거짓이 열린 마당에서 맞붙어 싸우도록 놔두어야’ 합니다. 그 치열한 공론의 각축장에서 검증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진리는 더욱 선명해질 것이고, 진리를 분별하는 우리의 윤리 감수성도 한층 높아질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분별해야 할 ‘성역인가, 아닌가’의 문제도 조금씩 풀릴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나 사회의 문제를 두고 그 누구도 ‘이것이 절대의 정답’이라며 ‘강제’하지 못 하도록, 우리 모두 ‘자유로운’ 논쟁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말씀’을 풀이하는 영역에서도 어느 한 사람의 해석을 절대화하지 않고, 더 완전한 진리를 향해 완강한 아집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겸허히’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며 믿음의 발걸음을 앞으로 옮겨가야 할 따름입니다.
5. 나가며
자유는 그 자체로 고귀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자유의 의미는 남다릅니다. 그 자유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남을 섬기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뜻에서 고귀한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자유는 나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그저 자기 기분과 만족, 편리에만 머문다면, 그 자유는 우리가 반드시 넘어서야 할 저급한 자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도>
우리에게 자유라는 고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
이 자유를 나의 안위가 아닌
주님 뜻을 따라 바르게 쓰도록
우리에게 신령한 힘 더해주시기 간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덧붙임>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11년 마지막 달, 유학생 김 주만 예람에게 「The Hebrew Republic」(2011)이라는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광고 시간에 교인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구약을 직접 읽게 되면서 왕정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깨우침을 얻은 잉글랜드 정치 사상가들의 논의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에서 함께 읽었던 「실락원」의 시인 존 밀턴이 ‘공화주의론’을 펼친 정치 사상가라는 사실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이후 그에 관한 글들을 찾아 읽다가, 아마존에서 그의 글모음 책(「John Milton Prose: Major Writings on Liberty, Politics, Religion, and Education」/David Loewenstein 엮음/2013)을 샀습니다. 워낙 난해한 글이었지만 눈에 띄는 글들을 몇 편 골라 읽고자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글이었습니다. 베인턴이 자신의 책에 따와 적은 문구는 윗글 210쪽에 들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