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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거룩한 단어의 사용
기도할 때 언제나 여러 생각과 싸운다.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은 시간에 도달하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향심기도의 목표도 아니다. 마음의 공백을 만들려고 노력해도 안된다. 그것으 기도가 아니다. 우리의 노력은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도록 단순하게 동의하는 것이다. 향심기도는 지향의 기도이지 주의를 집중하는 기도가 아니다. 향심기도를 하는 동안에 이러한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즉, ‘생각을 떠나보낸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어떤 것’을 붙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활짝 열어드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생각조차도 붙잡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떠나 보낸다는 것은 붙잡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한 단어를 떠올린다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하심과 활동하심에 동의한다는 우리의 지향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생각’이라는 용어는 모든 종류의 인식과 지각을 포괄하는 것으로 우리의 주의를 빼앗는 것에서부터 좀 더 민감한 생각까지이다. 사람들은 ‘생각’을 큰 축복으로 여기고 있다. 향심 기도의 방법 안에서 그 생각이 어떠한 것이든 생각을 알아차리면 단순하게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가서 그 생각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생각의 종류들을 살펴보고 다른 종류의 생각들을 같은 방법으로 다룰 수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상상을 떠도는 일상적인 생각
첫째로, 우리는 상상이나 기억을 떠도는 일상적인 생각 즉 기도 시간 전에 했던 일이나 사고 혹은 외부의 소음 같은 것이다. 그리고 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소음들, 전에는 무시했던 것들을 아주 잘 의식하게 된다. 아주 작은 소리도, 기침소리, 재채기 소리, 발끄는 소리, 다리를 굽혔다 폈다 하는 소리, 핸드백을 뒤지는 소리 등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침묵에 들어가면 일반적을 이러한 일상적인 소리에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된다. 기도하기 위해서 가장 조용한 장소를 찾을 수 있지만 하느님과 홀로 있으려 하면 방해하는 소리들이 일어날 것이다. 슈퍼마켓에서 고객들이 유선으로 흐르는 음악 소리가 들리지만 물건을 사는 것에 방해하지 않는 것처럼 향심 기도 동안에 일상적인 생각과 소음들은 슈퍼 마켓의 음악처럼 다루게 된다.
이러한 생각과 소음을 억지로 밀어내려고 애쓰지 말고 맞서 싸우려 하지도 말라. 그럴 정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의식에서 이런 소음과 생각을 차단할 수는 없다. 무엇을 하든 이러한 생각들이 주위를 돌아다닐 것이다. 향심 기도 방법안에서 단순하게 이런 사고를 받아들이고 떠나보내기를 권고한다. 이런 일상적인 사고는 여러분 도처를 지나갈 수 있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좇아가지 말아야 한다. 특별하게 어떤 것에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면 단순하게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지향의 표시인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거룩한 단어는 오직 여러분이 특정한 사고를 좇아갈 때만 사용해서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있겠다는 여러분의 지향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이다.
감정을 유발하는 생각
감정을 일으키는 생각은 여러분의 정서를 압도하고 정서으 lekscn를 누르게 된다. 컴퓨터의 어떤 키를 건드리면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컴퓨터처럼 이런 감정을 일으키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 안으로 다른 생각들을 줄줄이 따라 오게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이 즐거웠는지 불쾌한 것인지에 따라 자동적으로 좋거나 싫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 생각이 무엇이든 생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아주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야 한다.
통찰
통찰과 심리적인 개안(開眼)을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잠심하기 시작하거나 아마도 약간의 평화를 즐기기 시작할 때 일어난다. 영적 여정, 하느님의 본성, 혹은 심지어 우리의 현재 행동에 대한 어떤 통창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 즉 강론을 준비 하려고 할 때, 어떤 것에 대한 섬광과 같은 깨달음이 우리의 의식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는 곧 그의 빛나는 아이디어가 햇빛 가득한 날 이슬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그의 기도를 헛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제에게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지만 모든 것은 때가 있다. 향심기도를 하는 동안은 하느님께 온전히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시간이지 생각을 하는 시간이 아니다.
심리적인 만회, 어떤 상황에 걸려 넘어지거나 어떤 특정 개인을 좋아하지 않는지 등을 깨닫게 되는 통찰에 관하여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문제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에는 때가 있고 향심기도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그 시간은 거룩하기에 단순히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서 생각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기도 시간 밖에서 쉽게 다룰 수 있고 기도 시간에 본 통찰을 나중에 보면 하잘 것 없다는 것을 흔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기도 안에서 아주 친밀한 형태의 자기부정이 요구된다.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사고와 정서 그리고 그것들이 나오는 원천인 거짓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 그분께 말씀드리는 것,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모두 그 자체로 훌륭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것을 위해서 시간을 내야 하지만, 우리의 사고, 관념, 정서로 하느님을 속박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 현존에 대한 느낌은 그것이 아무리 훌륭해 보일지라도 확실하게 하느님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거나 오지 않을 수 있기에 그것을 처리하는 최선의 길은 받아들이고 떠나보내는 것이다. 향심기도의 정수는 그것이 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하더라도 나의 모든 사고, 관념, 언어, 상상을 떠나보내고 하느님의 현존 안에 쉬겠다고 단순하게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동의하는 것이다. 향심 기도하는 시간 외에 생각하고 말하고 중재기도를 할 수 있는 상당한 시간들이 있다. 향심기도를 하려고 앉아 있는 시간은 행하는(doing)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하심과 활동하심에 동의하려고 존재하는(being) 시간이다.
자아성철
네 번째 종류의 골치 아픈 생각은 자아 성찰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체험 그 자체를 소급해서 걷는 것과 같다. 나중에 어떤 단계에서 우리의 체험을 성찰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향심 기도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시간에는 우리는 이런 체험들을 받아들이고 떠나보내는 것이다. 자아 성찰이라는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마침내 나는 어디쯤 도달했다’, 혹은 ‘이런 평화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혹은 아마도 ‘나는 이것을 할 수 없어’. 여러분이 자신의 체험을 성찰하는 것을 알아차리면 단순하게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가야 한다.
무의식을 덜어냄
우리는 매우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살고 있고, 소음(말과 생각, TV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적으로 고요할 때도 소음이 상당히 일어나고 있다.(내면에서 일어났던 일, 만났던 사람에 대한 내적인 해설, 앞으로의 계획, 다른 사람과의 내적인 논쟁 등) 우리는 참된 침묵에 익숙치 않기 때문에 침묵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의 무의식은 우리가 주의를 주지 못했던 어떤 것에 우리의 주의를 끌고 간다. 이런 것은 억압의 감정이나 기억일 수 있으며 상당한 힘과 긴급성을 지니고 올라오며 이런 생각들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때로는 단지 혼란스러운 사고나 모호하고 불편한 정서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갈망과 긴장 속에서 사는 것을 배웠고 삶에 대처하기 위해서 다양한 형태의 방어기제들을 발달시켰다. 일상적인 쉼은 긴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지만 깊은 내적인 침묵속에서 향심기도가 가져다주는 것은 우리 안의 정서적인 덩어리들을 천천히 풀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완 과정이 진행되면 정서적 파편들이 우리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오게 된다. 기도하는 동안에 우리 인격의 어두운 부분 안으로 들어온 통찰이 드러나게 되고 우리는 우리 행동의 표면 밑바닥을 보기 시작하고 우리의 진정한 동기를 대면하게 된다.
자아 인식은 영적 여정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겸손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환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선호한다. 우리가 하느님께 진실하게 열어드리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오랫동안 우리 자신을 속이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점차적으로 우리의 진실한 동기가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진리 안에 머물기를 갈망하면 이 진리는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미처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정서적인 욕구와 요구들을 통찰하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청소를 한 후 더욱 밝은 전등을 켜면 더럽게 보일 수 있는 것과 같다. 더럽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미세한 먼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을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하느님과의 관계를 성장시키고자 한다면 자신의 허상을 드러낼 준비를 해야만 한다.
만일 기도하는 동안에 이러한 골칫거리인 생각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당황하지 말고 아주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 올라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내면을 봄철에 대청소하는 것과 같고 신적인 정화 활동에 동의함으로써 하느님의 직무에 감사하고 승복해야 한다.
향심기도 방법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쌓아온 방어기제인 거짓 자아를 알아내도록 도와준다. 거짓자아는 우리가 어떻게 다루었고 대처했는가, 변화에 대한 반응과 불안, 그리고 자아 가치 상실과 같은 체험으로 형성된다. 우리는 최상의 동기에서 우러난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동적인 면들이 우리 안에 작용하기 시작할 때 전에 믿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너그럽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이러한 변형의 과정은 자아 인식을 가져오고, 오직 자아 인식을 통해서만 우리의 참자아와 참된 잠재력만이 아닌 우리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고 우리 자신에 대해 훨씬 더 실제적인 눈을 뜨게 한다.
우리는 변형되어 가는 것을 통해 관계안으로 초대 되었다. 이것은 도덕적인 진보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변형되어가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실체를 받아들이고 집착하고 있는 허상과 여러 해 동안 쌓아온 방어기제들을 떠나보내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실제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각, 심지어 우리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조차 떠나보내고 성령께서 기도하시도록 우리 안을 열어드리도록 초대받았다는 것은 축복의 시간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동굴을 정화하시려고 우리 안에서 가장 활동적을 역사하실 때 우리에게 생각이라는 공세를 퍼붓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기도가 평화스러울 때도 있을 것이고 또 생각과 감정으로 가득 채워질 때도 있을 것이다. 모든 체험들은 통합과 치유과정의 동일한 요소이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으로 고통스러워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상상 안에서 분명하게 거룩한 단어를 말하거나 혹은 여러분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성급한 효과를 내려고 거룩한 단어를 계속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자연스럽게 마음에 들어오는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편안하게 거룩한 단어를 생각해야 한다.
4가지 경구
향심기도 방법 안에서 온갖 생각의 종류가 무엇이든 정확히 같은 방법으로 다루어야 한다. 생각을 알아차리면 우리 안에서 하느님이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도록 동의하는 지향의 표시인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가야 한다. 생각을 다루는 방법을 기억하도록 돕는 4가지 경구가 있다. 1. 오는 생각에 저항하지 말라. 2. 생각에 매달리지 말라. 3. 생각을 감정으로 대하지 말라. 4.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가라.
흘러 들어오는 생각에 맞서려고 하지 말라. 만일 우리가 생각에 저항하려 한다면 하느님이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동의하는 것에서 특정한 생각과 맞서려는 욕구로 옮겨가는 것이다.
특정한 생각은 나중에 그것을 기억해내게 할 정도로 매혹적일 수 있다. 심지어 이것이 포착하기 어려울지라도 다시 우리의 지향을 바꾸어 놓는다. 사실 정서적으로 긴장시키는 생각에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정서적으로 긴장된 생각에 반응한다는 사실은 이런 종류의 기도가 더 거룩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표시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여러분이 사람이라는 표시이다. 여러분이 생각을 한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은 기도하는 대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하심과 활동하심에 동의한다는 지향이 향심 기도 방법의 핵심이다. 향심기도의 진전은 생각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모든 생각에서 초연해지는 것이다. 초연해진다는 의미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은 여전히 따라오지만, 더 이상 그것들이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기도 안에서 분심으로 여러 해 동안 곤란을 겪어온 모든 이들에게 기쁜 소식은 여러분이 고의로 생각을 즐기거나 혹은 기도를 포기하고 나가지 않는 한 향심 기도 안에서는 분심아란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