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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위(安衛)
2派13世안원군파
宣武原從功臣 嘉義大夫 全羅道 兵馬節度使 長興都護府使
【생몰년】 1563(명종 18)∼?
【본 관】 순흥(順興) 안(安)
【자·호】 대훈(大勳)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무신
1563(명종 18)∼?.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대훈(大勳)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정여립(鄭汝立)의 5촌 조카가 된다.
선조 22년(1589) 정여립의 난으로 평안도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풀려나 무과에 급제,
찰방(察訪)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거제현령이 되었다.
1594년 제2차 당포해전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전부장(前部將)으로 공을 세웠으며,
1597년 1월 부산의 왜군 화약고에 불을 질러 이를 폭파시켰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통제사 이순신의 지휘하에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벽파정 앞바다에서 왜선 20여 척을 격파하여 선조로부터 《무경칠서(武經七書)》를 상으로 받았다.
1598년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가 되고,
1601년 전라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었으나 정여립의 조카라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다시 파직되었다.
1603년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녹선되어 전라좌수사가 되었는데 방군수포(放軍收布)하였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다시 파직되었다.
1605년 충청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06년 경상도좌수사, 광해군 4년(1612) 포도대장(捕盜大將)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있던 중 동향인 진사 조덕홍(趙德弘)·조응직(趙應쐆) 등을 역모자로 고하였다가 무고임이 드러나 반좌(反坐)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곧 재기용되어 평안도방어사, 인조 2년(1624) 행사용(行司勇) 등을 역임하였다.
김제의 학당사(學堂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湖南三綱錄, 燃藜室記述
안위(安衛) 13세
안공의 휘는 위(衛), 자는 대훈(大勳)이시다. 공의 증조의 휘는 극성(克誠)이니 통례문(通禮門) 통찬(通贊)이셨다가 통례원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셨고, 조(祖)의 휘는 수천(壽千)이니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셨고, 부친의 휘는 경신(敬信)이니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셨다. 공(公)은 가정(嘉靖) 42년 계해년(1563)년 3월 2일에 김제군(金堤郡) 생건리(生巾里)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 특이한 자질이 있었으며 기개가 있고 뜻이 커서 남에게 눌려 지내지 않았다. 모부인의 성품이 엄하여 가르치고 훈계함을 정도로 하니 일찍 아버지를 잃었으나 힘입을 곳을 잃음이 없으니 사람들이 그제야 공의 효성이 천성에서 나왔음을 알았다.
공께서는 갑오년(1594)에 거제현령(巨濟縣令)에 제수되셨으며, 정유년(1597)7월 에는 통제사인 이순신(李舜臣) 공이 폐위되었던 중에 단기로 부임하시어, 무술년(1598) 정월(正月)에는 명랑해전의 공으로 통정대부의 품계에 승진되고 본도의 우수사(右水使)에 배임되시기도 하였다. 후에 안공은 이순신 통제사공을 도와 안골포(安骨浦) 싸움에서 왜적의 우두머리인 평행장(平行長)의 무리들을 물리치셨으며, 공의 충성(忠誠)과 지략(智略)은 크게 통제공의 알아주는 바가 되었고 장막에서 5년 동안 보좌하며 많은 일을 위임받아 매번 이기면 포창하라는 장계를 달려 보내 포창이 있었으니 옛 사람에게 실로 드물게 있었던 이야기였다.
백사(白沙) 이 상공이 항상 왜적을 평정한 공을 논하면서 역시 공을 최고라고 추천하였으니 그 글에 말씀하기를, “권응수(權應銖)는 절도사인 박진(朴晉)의 명을 받고 영천을 공격하여 빼앗으며 능히 적의 머리 7백여 급을 베어 한 도의 의병을 일으켜 명성을 크게 떨치었고 안위는 이순신의 분부를 받아 척선 5백여 척을 벽파정(碧波亭) 밑에서 무찌르고 물리쳐 적으로 하여금 다시는 전라우도(全羅右道)를 엿보며 곧장 충청도(忠淸道)와 충돌하지 못하게 한 것은 위이 대첩이 아니었다면 적이 한산도(閑山島)의 승세를 몰아 곧장 충청도를 침범하였을 것이고 순하게 바다를 올라와도 꾸짖고 금할 사람이 없었으리라. 사변 후 10년에 영천과 명양(울돌목)의 대첩을 가장 통쾌하고 장하였다고 칭송하는데 위의 일은 권응수에 비하면 어찌 만배일 뿐이라고 하겠느냐.” 라고 하셨으니 공의 큰 공로와 위대한 업적과 지용과 정충은 거의 백사(白沙)공께서 알아보시고 발탁하신 감별과 통제공이 보고 알아보신 밝은 식견에 부끄러움이 없으셨다.
기해년(1599)에 가선대부(嘉善大夫)인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올랐고 삼대에 은전이 추가되었으며 경자년 여름에 전라병사가 되었고 임인년 겨울에 본도의 좌수사로 옮겨서 배임되었으니 수전에 익숙하고 밝기 때문이었다.
갑진년(1604)에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고 을사년(1605)에는 충청수사(忠淸水使)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병오년(1606) 봄에 경상수사(慶尙水使)가 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교체되어 돌아왔으며 무신년(1608)에 재차로 전라우도의 수군통제사로 보임되었다가 임자 년에 교체되어 돌아왔다. 당시에 유즙(柳楫)의 사건으로 추방되어 전원이 마을로 돌아갔다. 동계(桐溪) 정온(鄭蘊) 공이 상소를 올려 극단적으로 말하기를, “공(公)은 가히 멀리 버려서는 옳지 않습니다.
안위(安衛)는 이에 일국의 명장이 되며 그의 충의(忠義)는 이미 나타났으니 그 공로도 실은 이순신의 다음입니다.”라고 하였고 전에 주부(主簿)였던 조성립(趙成立) 또한 시(詩)를 남겨 말하기를, “장군의 충절은 성명도 아셨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립문을 가리니 해가 더디구나. 후세에 사람들이 당년의 일을 알려고 한다면 모름지기 당전으로 향하여 이 시를 보려무나.”라고 하였다.
기미년(1619) 봄에 또 공을 서용하여 평안도방어사를 삼았으니 북쪽의 오랑캐가 강대하였기 때문이다.
계해년(1623) 인조반정 후에 곧장 공을 기용하여 솔영대장(率領大將)을 삼았다가 잠시 뒤에 좋아하지 않는 자들의 배척하는 바가 되어 교체되어 고향의 거처로 돌아왔다 병자년(1636) 호란(胡亂)에 공의 연세가 74세였으나 분연히 일어나 어가(禦駕)를 호종하기도 하셨으며, 갑신년(1644) 7월 11일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수(壽)는 82세이셨다. 후에 조정에서는 효충복의(效忠伏義) 적의협력(迪毅協力)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가의대부(嘉義大夫) 행 전라도(全羅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겸 장흥도호부사(長興都護府使)에 추증되시었다.
김제시 선현
안위(安衛)
선생의 자는 대훈(大勳)이요,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선생은 여러 대를 김제(金堤)에서 살던 안경신(安敬信)의 아들로 1563년(명종 18년) 김제 생건리(生巾星)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뛰어나서 장래가 촉망되었으며 일찍기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교훈을 받고 자라났지만 효성이 극진하였다.
이항복(李恒福)이 근왕군(勳王軍)을 모집하기 위하여 호남에 내려와서 교장(校場)에 사열하고 있었는데, 금색(禁索)밖에 용모가 특이한 선생을 불러 본 일이 있었다.
1589년(선조 22년) 선생은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무고되어 용천(龍川)에 유배되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도성이 함락되자 임금의 수레를 모시고 따라가려고 배소(配所)를 이탈한 죄목으로 형장을 막고 나서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 후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어느 병사(兵使) 막하(幕下)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영내의 질서가 서지 아니함을 보고 거듭 탈출한 선생은 당시 병조판서(兵曹判書)인 이항복을 찾게 되었다.
이항복은 지난 날 보았던 선생의 용모를 선뜻 알아 차리고 "너는 죄에 묶여 있으니 막하에 둘 수는 없으나 공을 세운다면 변통할 길도 있다. "라고 영내에 머물게 하였다. 그러자 병사가 그 소문을 듣고, 탈영한 죄목을 들고나와 여러 번에 걸쳐 신변을 이송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항복은 끝내 이를 거절하고 있던 차에 선생이 적진에 뛰어들어 6,7명 적의 목을 베어 오는 공을 세우게 되자 비로소 무과(武科)를 치루게 하여 등제(登第)된 후 군인으로 발탁되었다. 그래서 병조판서 이항복의 특천으로 대동찰방(大同察訪) 겸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는데, 1594년(선조 27년)에는 벼슬이 올라 거제현령(巨濟縣令)으로 제수되었으며 같은 해 3월 5일에 벌어진 당항포(唐項浦) 해전에서 적의 중선 한척을 불태우는 전공을 세웠다.
정유년(1597년 선조 30년)에 접어들자 왜적들은 더욱 기세를 올려 우리 나라에 쳐들어왔다. 그래서 그 해 7월 중순에 원균(元均)이 이끈 우리 함대는 칠천량(漆川梁) 앞 바다에서 하루 아침에 패전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은 겨우 사형을 면하고 백의종군 끝에 정유년 8월 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때에 남아 있던 전함은 원균이 칠천량 패전 당시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裵機)이 미리 도망 칠 때 버리고 간 12척 뿐이다.
이순신은 망친 수군을 정비할 겨를도 없이 12척의 빈약한 전함을 이끌고 정유년 9월 16일 새벽 명량(嗚梁 : 진도 벽판 앞바다)에서 적의 전선 1백 33척을 포착하게 되자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의 전선 31척을 격침하고, 적장 10여 명을 위시하여 적병 백여 수를 베었으니 선봉장 先鋒將)에 나선 선생의 공이 제일 컸다.
이 전쟁으로 적은 서해안을 돌아 북상하려는 계획이 좌절되었으며 그 기세는 꺽인 상태에서 노량해전(露梁海戰)을 최후 발악으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선생은 1598년 11월 18일 노량해전에도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러한 빛나는 전공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장계에 의하여 널리 알려지고 1598년 정월에 통정(通政)에 오르고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에 제수되었다. 1599년에는 가선(嘉善)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槪府事)가 되었고 이듬해 1600년에는 전라병사(全羅兵使)로 제수(除授)되 었다.
1602년에는 전라수사로 임명되었고, 1604년에는 가의(崙義)에 올라 이듬해 1605년에는 충청병사(忠淸兵使)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1606년 경상수사(慶尙水使)가 되었다가 1608년에는 전라수사로서 수군을 통제하였다. 1612년에는 유집(柳橋)의 사건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었는데 정온(郵蘊)의 간곡한 상소로 1619년 평안방어사(平安防禦使)로 임명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되자 다시 대장으로 등용하려 하였으나 반대파의 시론(時論)에 부딪쳐 향리에 돌아와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자 선생은 74세의 고령으로 임금의 수레를 모시고 따라가기 위해 북상하던 중 은진(恩津)에 머물고 있었으나 길이 막힌 상황이어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마침내 강화(降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1644년(인조 22년)에 향년 82세의 고령으로 별세하였다.
선조는 친필과 동시에 무경칠서(武經七書), 공신록(功臣錄), 방어사27부교지(防禦使二+七符敎旨)를 하사하였으나 오늘에 전하고 있는 유품으로는 오직 하나인 병부(兵符)의 유서(諭書)로 송하영 故(宋河英:전주 풍남중)씨가 소장하고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諭行慶尙左道水軍節度使 安 衛 卿受委-方體任非輕凡發兵應機安民制
敵-應常事自有舊章慮或有豫與卿獨斷置事非密符莫可施爲且意外姦謀不可
不預防如有非常之命合符無疑然後當就命故
煬押第二十七符卿其受之故諭
萬曆三十四年二月 二十一?
만력 34년은 선조 39년(1606년)에 해당된다.
김제 시민들은 김제시 백산면(白山面) 학당리(學堂里)에 학당서원을 세워 1704년(정조 18년) 갑인 9월에 선생과 웅치전쟁(熊峙戰爭)에서 수훈을 세우고 순절한 김제군수 정담(鄭湛) 등 다섯 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서원은 1869년(고종 6년)에 허물리었다가 1971년 김제읍 생건리(生巾里)에 중건되었다. 묘는 김제시 백산면 대산(垈山)에 있다.
안위장군묘(安衛 將軍墓)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 산 4-5
안위장군의 묘는 김제에서 북쪽으로 약 7km지점,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 대산마을 뒷편 야산에 반경 22m의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봉분의 방향은 서북쪽을 가르키며, 정면 중앙에는 석등(0.4m, 높이1.8m)이 세워져 있으며 석등에서 4m 좌.우측에 석인이 각 각 1개씩(가로 0.4m, 세로 0.4m, 높이 1.5m)세워져 있고 묘 바로 앞에는 상석(각각 1.2m,세로0.8m)이 있으며, 봉분의 직경은 7.3m 묘둘레의 길이는 23.2m, 봉분의 높이는 1.4m로 묘지 앞에서 뒤끝까지의 거리는 대략 20여m 정도이면 묘 주위에는 소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안위장군의 관향은 순흥(順興)이요, 자는 대훈(大勳)이다.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고려때 상장군(上將軍)으로 나라에 공훈을 세웠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된 안유(安裕)를 낳은 가문이기도 한다. 안위장군의 8대조 안문개(安文凱)는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분이요, 5대조 안처(安處)는 세종조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든 분으로 학당서원에 배향되었다.
안위 장군묘
지정번호 : 지방 기념물 제 102호
소재지 :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 산 4-5
지 정 : 1999년 11월 19일
관리자 :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 594 안종래
안위장군의 묘는 김제에서 북쪽으로 약 7km지점,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 대산마을 뒷편 야산에 반경 22m의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봉분의 방향은 서북쪽을 가르키며, 정면 중앙에는 석등(0.4m, 높이1.8m)이 세워져 있으며 석등에서 4m 좌.우측에 석인이 각 각 1개씩(가로 0.4m, 세로 0.4m, 높이 1.5m)세워져 있고 묘 바로 앞에는 상석(각각 1.2m,세로0.8m)이 있으며, 봉분의 직경은 7.3m 묘둘레의 길이는 23.2m, 봉분의 높이는 1.4m로 묘지 앞에서 뒤끝까지의 거리는 대략 20여m 정도이면 묘 주위에는 소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안위장군의 관향은 순흥(順興)이요, 자는 대훈(大勳)이다.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고려때 상장군(上將軍)으로 나라에 공훈을 세웠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된 안유(安裕)를 낳은 가문이기도 한다. 안위장군의 8대조 안문개(安文凱)는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분이요, 5대조 안처(安處)는 세종조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든 분으로 학당서원에 배향되었다.
안위장군은 부친 안경신(安敬信)과 모친 조양임씨(兆陽林氏)사이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명종 18년(1563) 3월 2일 김제시 백산면 생건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준엄한 교육을 받고 자라나매 매사에 그르치는 일이 없었으며 홀로 된 모친에게 극진한 효도를 다하였다.
어느 해 이항복은 근왕군(勤王軍)을 모집하기 위하여 호남에 내려와서 교장(校場)을 설치한 후 장병을 사열한 일이 있었다. 교장의 금줄밖에 용모가 특이한 청년이 서서 구경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이항복은 그 청년을 교장에 불러 들여 성명과 경력을 물어보았으나 안위가 무술을 연마한 경험이 없다는 대답을 하자, 이항복은 씁쓸한 표정으로 청년을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안위장군은 정여립(鄭汝立)과 척분이 되는 관계로 선조 22년 기축(己丑) 옥사때 무고되어 혐의를 받게 되자 그이 형과 함께 평안도 용천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어지럽자 임금이 계신 행재소(行在所)에 호종(扈從)하여 충정을 다하자는 데 뜻을 모아 평양으로 도망쳐 어느 병영에 입대하였으나, 질서가 문란하여 실망한 나머지 다시 탈출하여 병조판서로 호종하고 있는 이항복을 찾아 나라에 공을 세워 속죄(贖罪)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항복은 안위장군의 용모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네가 바로 전날 전라도에 갔을 때 교장에서 본 자가 아니냐"
고 물어본 끝에
"너는 죄에 묶여 있으니 막하에 둘 수는 없고, 공을 세운다면 변통할 방도가 있다"
고 타이르고 영내에 머물게 하였다.
안위장군이 어느날 적진에 뛰어들어 6.7급의 왜적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오는 공을 세우게 되자 바로 무과(武科)를 치루게 하였다. 무과에 합격하게 되자 이항복은 크게 기뻐하여 성찬을 베풀어 격력하고 쓸만한 재목이라고 임금께 아뢰어 대동찰방(大同察訪)겸 조방장(助防將)이라는 직함을 얻었다.
정유년 9월 7일에 장군은 통제영을 노려 이순신을 야습한 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전라우수사로 승진하였다.
임진왜란 종전 후 장군은 선조 32년(1599)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고, 이듬해 경자년(1660)에는 전라병사로 승진하였다. 선조 35년(1602) 갑진에는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고, 이듬해 을사년에는 충청병사를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병오년(1606)에는 경상좌수사가 되었다가 얼마 아니되어 그만두고 무신년(1608)에는 전라우수자로서 수군을 재통제하였다.
광해(光海) 4년(1612)에는 유집(柳輯)의 사건에 연루되어 고향에 내려와 있었는데 정온(鄭蘊)이 간곡한 상소를 올려 광해 11년(1619) 봄에는 평안도방어사로 임명되었다.
계해년(1623)에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자 다시 대장으로 등용하려 하였으나 반대파의 시론(時論)에 부딪쳐 할 수 없이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인조 14년(1636)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하자 안위는 74세의 고령으로 호종하려고 북상하던 중 길이 막혀, 은진(恩津)에 머물고 있던 차 정홍명, 이기발도 의병을 이끌고 은진에 도착하여 안위장군에게 적을 방어하는 계책을 묻기도 하였다. 장군은 "남한산성에는 임금께서 친히와 계시니 막을 길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강화(江華)는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이듬해 정축년(1637) 정월 22일에는 강화가 무너지고, 같은 해 정월 30일에는 인조가 삼전도(三田陶)에서 적장(청나라 太宗)에게 항복하는 국치(國恥)를 당하고 말았다. 안위는 고향에 돌아와서 국난을 막아 낼 인재가 없음을 한탄하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인조 22년(1644) 7월 11일 82세의 고령으로 서거하여 김제군 백산면 대산(大山 : 속칭 대메) 기슭에 묻혔다.
선조는 친필을 내림과 동시에 무경칠서(武經七書)와 공신록(功臣錄) 및 사압(賜押) 제27부(符)를 하사하였으나
오늘에 전하는 유품으로는 오직 병부유서(兵符諭書)만이 전주시내 어느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白沙先生別集卷之四 雜記 [論亂後諸將功蹟] -이항복(李恒福)
안위(安衛)는 일개 현령(縣令)으로 이순신(李舜臣)의 분부를 받아 큰 전함(戰艦) 한 척을 가지고 조수(潮水)를 이용하여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명량(鳴梁)의 어귀에서 적진(賊陣)에 충돌한 다음 더욱 강력하게 혈전(血戰)을 벌이어 끝내 적선(賊船) 5백여 척을 벽파정(碧波亭) 밑에서 격파하여 물리쳤으니, 적들로 하여금 감히 다시 전라 우도(全羅右道)를 엿보아서 곧장 충청도(忠淸道)로 진격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안위의 힘이었다. 당시에 안위의 승첩(勝捷)이 아니었다면 적들이 한산(閑山)에서 승리한 기세를 타고 장차 충청도를 곧장 범하여 바다를 따라서 올라오더라도 이를 물리쳐 금할 사람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변란이 일어난 이후 10년 동안에 걸쳐 영천과 명량의 전투를 가장 장쾌(壯快)하다고 칭하는데, 그러나 안위의 일은 권응수의 일에 비하면 또 어찌 만 배만 더 장쾌할 뿐이겠는가.
安衛。以一縣令。受舜臣分付。以一大艦。乘潮順風。突衝賊陣於鳴梁之口。血戰益力。摧却賊船五百餘艘於碧波亭下。使賊不敢復窺全羅右道。而直衝於忠淸者。衛之力也。當時微衛之捷。賊乘閑山之勝勢。將直犯忠淸。順海而上。無人呵禁。變後十年。永川,鳴梁之戰。㝡稱快壯。而衛之事。比應銖何啻萬倍。
[安衛]
安衛者。以武人。爲巨濟縣令。李統制之再將也。賊勢方張。我師單弱。諸將氣奪皆有退逃心。舜臣收散兵邀賊碧波亭下。舜臣令諸將列艦渡口以待賊。至夜。衛擧碇而逃。舜臣擧而執之將斬。衛大呼願立功自效。諸將亦皆請釋之。舜臣許之。及戰。賊衆我寡。勢如山壓。士卒危怖觀望。獨舜臣有必死之志。中流下碇。爲賊所圍。諸將謂其無救。皆却不敢進。衛引其船退走。舜臣立船頭大呼曰。安衛走乎。衛逡巡。舜臣又呼曰。爾必欲死於軍法乎。爾以退走爲可免乎。衛乃回 船冒入。船幾陷。舜臣麾兵救之。大戰賊大敗。以功擢水軍節度使。光海朝誣告逆變廢死。
白湖先生文集卷之二十一 事實 諸將傳 윤휴(尹鑴)
안위(安衛)는 무인으로 거제현령(巨濟縣令)이 되었다. 이 통제사가 재차 장수가 되었을 적에 적의 형세는 한창 치성하고 아군은 단약하여 여러 장수들이 기가 꺾여서 모두 도망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때 순신이 흩어진 군졸을 거둬 모아 벽파정(碧波亭) 아래서 적을 요격할 계획을 세우고는,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도구(渡口)에 배들을 나열해 두고 적을 기다리게 하였다. 그런데 밤이 되자 안위가 닻을 올리고 도망치므로, 순신이 그를 체포하여 참수하려 하니, 위가 스스로 힘써 공을 세우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큰 소리로 외치고, 여러 장수들 또한 모두 그를 용서해주기를 청하므로, 순신이 허락하였다. 드디어 싸움이 벌어지자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어서 형세가 마치 산에 눌리는 것 같았으므로, 사졸들은 두려워서 관망만 하고 있었고, 유독 순신만이 필사의 뜻을 가지고 중류(中流)에 닻을 내렸다가 적들에게 포위되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순신을 구원할 계책이 없다고 여기어 모두 퇴각하여 감히 나가지 못하였고, 위 역시 자기 배를 끌고 물러나 달아났다. 그러자 순신이 뱃머리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치기를, “안위는 달아나느냐?” 하니, 위가 머뭇거리므로, 순신이 또 외치기를, “네가 기필코 군법(軍法)에 죽고 싶으냐? 네가 물러나 달아난다고 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니, 위가 이에 배를 돌려 마구 쳐들어가다가 배가 거의 함몰되려 하자, 순신이 또 군사를 지휘하여 그를 구원해 주어 대판 싸워서 적을 크게 패배시켰다. 이 공으로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었다. 그는 광해군 때에 역변(逆變)을 무고한 죄로 폐해져서 죽었다.
난중잡록 4(亂中雜錄四)-경자년 상 만력 28년, 선조 33년(1600년)
안위(安衛)를 병사 겸 장흥부사로 삼았다.
거제巨濟 현령 縣令 안위安衛
거제도 주민들은 늘 당당하게 거제도가 우리나라를 세 번을 구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이순신 장군의 최초의 승전인 옥포대첩으로, 두 번째는 6.25때 모두가 꺼려하는 반공포로를 따뜻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세 번째는 IMF 때 조선경기로 귀한 달러를 현금으로 벌어들여 나라의 부도사태를 넘긴 것이다.
그러나 한 번을 더 첨가하여 4번을 구원했다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량전투에 참여한 ‘거제 현령 안위安衛’(1563~1644)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현령縣令이란 종5품의 외관직으로 현의 가장 높은 벼슬로 작은 현은 현감을 큰 현에는 현령을 두었다.
1597년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날뛰며 포효하는 명량의 물살을 타고 새까맣게 몰려오는 적의 선단 앞에 조선수군 모두가 사령관인 이순신의 배를 두고도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이때 거제 현령 안위는 잠시 주저하긴 했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가장 먼저 이순신을 돕기 위하여 죽음의 바다 한 가운데로 자신을 던져 달려갔다.
안위는 역모의 혐의를 받고 처형된 정여립鄭汝立의 5촌 조카이다. 자는 대훈大勳이고 순흥順興 안씨安氏로 김제시 백산면 생건리에서 태어났다. 1589년, 기축옥사 때 정여립의 일가이기에 평안도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 무과에 급제, 찰방이 되었다.
다음해 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거제현령이 되었다. 역신의 친척으로 조선의 무거운 연좌제를 풀고 자유의 몸이 되고 다시 중신의 천거를 받아 현령이 될 정도이니 무척이나 실력을 인정받는 무관이었을 것이다.
1594년 제2차 당항포해전 때 이순신의 휘하에서 전부장으로 공을 세우고, 1597년 1월, 부산의 왜군 화약고를 폭파시켰다. 그해 7월, 조선 수군이 거의 몰살한 칠천량에서 살아나 마침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지휘 하에 앞서 명량 대첩에 참여 한다.
거제 현령 안위.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절체절명, 조선의 운명의 거센 바람 앞에 바야흐로 꺼지려고 할 찰나였다. 지휘관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며 적의 포위망에 떨어지려는 직속상관인 이순신 장군 마저 외면할 때, 대장선에서 올린 초요기를 보고 안위는 가장 먼저 배를 몰아 달려간다.
“노를 저어라. 대장선에 접근한다. 어서 장군을 구하자”
대장선에 도착하자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라는 불호령을 듣고 그대로 전투에 뛰어든다.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왜선들에게 둘러싸여 안위함은 곧 죽음의 위기에 빠졌고 이순신 장군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거제 현령 안위의 생사를 넘은 과감한 돌격은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참전을 유도하고 충무공을 외면하고 있던 다른 장수들의 마음을 돌려 모두 참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날, 조선 수군은 세계 해전사상 유래 없는 기적을 만들어 낸다.
이순신 장군은 안위의 공로를 직접 조정에 장계를 올려 안위는 '무경칠서(武經七書)'를 선조로 부터 하사받는다. 무경칠서는 중국 병법의 대표적 고전으로 여겨지는 일곱 가지 병법서(손자병법, 오자병법)등을 말한다. 이처럼 안위는 이순신 장군의 신뢰를 듬뿍 받은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1597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순국하고 마침내 7년 전쟁은 끝이 난다. 안위는 1603년 공신도감에서 임진왜란의 전공자로서 20명의 선무공신宣武功臣의 일원이 된다. 그 해 전라좌수사가 되었다가 1605년 충청수사로 재기용, 경상좌수사가 되고 1612년 임시 포도대장이 되었다. 1623년 그의 나이 60세 인조반정에 휘말려, 지역 향리로 내려와 조용히 살게 된다.
그러나 충신은 사라지지 않는 법. 안위安衛라는 이름은 ‘나라를 안전安全하게 보위保衛하라’는 뜻은 아닐까?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거제현령 안위’는 또다시 왕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한양으로 급히 달려간다.
도중에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뿌려 통곡하며 돌아간다. 인조 22년, 81세로 별세하니 김제의 학당사學堂祠에 제향 되었다.
10월 25일은 명량대첩으로 나라가 보존 된 날이다. 다음날인 26일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또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척결한 날이다. 거제 현령 안위安衛와 안중근安重根은 순흥 안씨로 이 또한 마땅히 우리 후손들이 잊지 말고 기려야 할 일이다.
이순신대장군과 안위장군
"배를 좌현으로!"
"방포하라!"
"우현 사수 발사하라!"
"정면 적선, 충파하라!"
이순신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을 보며 정신없이 싸웠다. 뿌연 포연속에 뒤처져 있는 아군 함대가 보였다. 저들이, 저들이 합세해야만 이길 수 있거늘, 이순신은 애가 탔다. 육지의 언덕과 산에서 바라보는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대장선을 남겨두고 뒤처져 있는 조선 함대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같은 시각, 거제 현령 안위는 자신의 배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장선만 적선에 둘러싸인 채 고군분투하고 있을 뿐, 나머지 조선 판옥선들은 모두 물러나 있었다. 특히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는 더 멀리 물러나 있었다. 대장선을 보호하고 호위해야 할 중군장 김응함의 배도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순간 거제 현감 안위는 대장선에서 오른 깃발을 보았다. 그것은 대장선 호위군인 중군장을 부르는 깃발이었다.
"노를 저어라! 대장선에 접근한다! 장군을 구하라!"
안위는 명령했다. 자신이 중군장은 아니지만 장군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안위 배의 격군들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안위의 배가 이순신에게 접근하자 산 위의 파난민 사이에서 함성이 올랐다. 안위는 곧장 적선의 옆구리를 들이받고 화살과 총통을 쏘면서 이순신장군의 배에 접근했다. 이순신 대장선에 숨통이 트인 것이다. 이순신은 안위를 노려보았다.
"안위야! 네가 도망가면 어디로 갈 것이더냐! 군법으로 내 손에 죽으려느냐? 적과 싸우다가 죽으려느냐?"
"장군! 소장, 한놈이라도 베고 죽도록 해 주십시오! 돌격하라!"
안위의 배가 일본군 함대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이순신 대장선도 전투를 개시했다. 그때였다. 뒤처져 있던 조선 배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배가 적선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느겼다. 노를 젓지 않는데도 배가 이순신과 안위가 왜군과 싸우고 있는 명량해협의 한가운데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적의 시작이었다. 거세게 조선 배를 뒤로 밀고 가던 조류가 천천히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울돌목 바다가 몸을 뒤채더니 물살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왜군에게 순류이던 물살이 갑자기 거꾸로 바뀌면서 역류가 된 것이다. 왜군 함대의 선두에 섰다가 파손된 배들이 왜군 진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배의 잔해와 파편들이 왜군 배에 부딪혔다. 동시에 조선 함대측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무수한 총통이 불을 뿜었다. 장군전이 날가가 꽂히고 단석과 비격진천뢰가 날았다. 주먹만한 쇠공이 한꺼번에 수백개씩 날아가 일본군 갑판을 뒤엎었다. 전황이 바뀌고 있었다.
이것은 웅진지식하우스의 '불패의 리더 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라는 책에서 명량해전을 묘사한 부분을 발췌한것이다. 안위와 이순신의 전우애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을 한대목 더 알아보자.
"통상! 만약에 말입니다."
안위가 잔뜩 뜸을 들였다.
"만약에! 무슨 말인가?"
"만약에 조정에서 통상께 다시 통제사직을 제수하면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하도 울어서 잔뜩 목이 쉰 안위가 물었다. 이 전 통제사도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과연 상께서 백의종군중인 나를 통제사에 복귀시킬까?"
사실 백의종군이 문제가 아니라 임금이 과연 이순신을 통제사에 복귀시키는 선택을 할까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임금은 이순신을 괜히, 이유없이 미워했기 때문이다. 사실 임금에게도 이순신을 미워하는 이유는 있었다. 왜군에게 국토를 빼앗기는 것은 용납해도 반란은 추호도 용서하지 않았던 임금이라면 이순신을 충분히 경쟁상대로 여기고도 남았다.
"통상 말고는 대안이 전혀 없습니다. 그럴 경우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안위가 다시 물었다. 통제사 원균이 아직 살아 있다지만 계속 통제사를 맡겼다가는 똑같은 짓을 반복할게 뻔했다. 그리고 그나마 믿을 만한 수사 이억기와 최호는 죽었고 배설은 도망쳤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순신 말고 다른 사람이 통제사가 되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순신은 여전히 고민하는 듯 했다.
"흐음, 글쎄다. 나는 아직 상중이라서..."
"통상! 비겁하십니다!"
너무나 안타까워 안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안위는 금새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순신을 비겁하다고 감히 말할 자는 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와 왜국을 통틀어 단 한명도 없었다. 만약 있다면, 조선 국왕 이연 단 한명 뿐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래, 자네 뜻은 잘 알겠네. 나도 내게 지워진 책무를 피하려 하지는 않아, 비록 백의종군중이지만 나는 군인이니까.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조정에서 내린 명령을 받들어야겠지."
"그렇게만 되다면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있겠습니다."
안위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빙긋 웃었다.
"판옥선 9척, 최대한 30척으로 왜선 150척과 싸우란 말이지? 그게 가능할까?"
"통상이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안위가 주먹을 꽉 쥐며 단언했다.
"자넨 날 과대평가하는군."
"통제대감께서는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계십니다. 우리 판옥선이 9척에 불과하지만 한꺼번에 100척 이상만 상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지형을 이용한다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음과모음에서 출간된 '임진왜란'에 나오는 글의 일부를 옮긴것이다. 이처럼 이순신장군과 부하 장수 안위의 신뢰와 존경은 장군과 부하 이상의 애뜻한 정을 느끼게 한다. 전사에 길이 남을 울돌목 해전에서 겨우 12척의 판옥선으로 300여척의 왜군 전함을 격파할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은 리더를 중심으로 상호간의 믿음과 존중에 의한 일치단결과 죽음을 불사하는 돌격정신에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한편 그 많은 조선해군의 장수와 군졸들은 전세한 게임이 안되는 불리한 상황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왜군과 싸우다가 죽어갔나 생각해 본다. 임금을 위해서?
안위(安衛)선현의 자는 대훈(大勳)이요,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선현은 여러 대를 김제(金堤)에서 살던 안경신(安敬信)의 아들로 1563년(명종 18년) 김제 생건리(生巾星)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뛰어나서 장래가 촉망되었으며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교훈을 받고 자랐으며 효성이 극진하고 의기가 강하였다.
임진왜란시 거제현령이었던 안위는 이순신장군과 함께 출전하여 여러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것이 이순신장군의 장계에 의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왜란 후인 1598년 정월에 통정(通政)에 오르고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에 제수되었다. 1599년에는 가선(嘉善)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槪府事)가 되었고 이듬해 1600년에는 전라병사(全羅兵使)로 제수(除授)되었다가 1606년 경상수사(慶尙水使)가 되었고 1608년에는 전라수사(全羅水使)로서 수군을 통제하였다.
1612년에는 유집(柳橋)의 사건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다가 정온(郵蘊)의 간곡한 상소로 1619년 평안방어사(平安防禦使)로 임명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되자 다시 대장으로 등용하려 하였으나 반대파의 시론(時論)에 부딪쳐 향리에 돌아와 조용히 머물고 있다가 말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고 1644년(인조 22년)에 향년 82세의 고령으로 별세하였다.
이름 | 안위(安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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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순흥(順興) |
성씨 | 안(安) |
자 | 대훈(大勳) |
생년 | 1563 |
몰년 | 9999 |
신분 | 무반 |
왕대 | 왕력 | 년 | 월 | 일 | 관력 | 형태 | 해당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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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 30 | 1597 | 3 | 24 | 거제 현령(巨濟縣令) | 현직 | |
선조 | 30 | 1597 | 11 | 10 | 거제 현령(巨濟縣令) | 현직 | |
선조 | 31 | 1598 | 3 | 18 | 우수사(右水使) | 현직 | |
선조 | 31 | 1598 | 6 | 27 |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 현직 | |
선조 | 33 | 1600 | 1 | 16 | 수사(水使) | 전직 | |
선조 | 34 | 1601 | 7 | 18 | 병사(兵使) | 현직 | |
선조 | 34 | 1601 | 7 | 30 | 전라도 병사(全羅道兵使) | 현직 | |
선조 | 36 | 1603 | 7 | 18 | 수사(水使) | 현직 | |
선조 | 36 | 1603 | 7 | 23 | 좌도 수사(左道水使) | 현직 | |
선조 | 36 | 1603 | 9 | 1 |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 현직 | |
선조 | 36 | 1603 | 11 | 5 | 수사(水使) | 전직 | |
선조 | 38 | 1605 | 10 | 21 | 수사(水使) | 현직 | |
선조 | 39 | 1606 | 6 | 18 | 좌수사(左水使) | 현직 | |
선조 | 34 | 1601 | 7 | 1 | 병사(兵使) | 현직 | |
인조 | 2 | 1624 | 3 | 23 | 행 사용(行司勇) | 현직 |
안처(安處)이조판서 청백리(淸白吏)ㅡㅡ> 안보(安堡)ㅡㅡ>안극명(安克明),안극수(安克修),안극성(安克誠)
10世 조부 통례(通禮)안극성(安克誠)ㅡㅡ>부친 분순부위(奮順副尉)안수억(安壽億)ㅡㅡ>安敬仁,安敬義,安敬禮,安敬智,安敬信
奮順副尉 안수억(安壽億)
贈工曹參議 안수천(安壽千)
안경인(安敬仁)參奉ㅡㅡ>안득(安得)內禁衛ㅡㅡ>안대룡(安大龍)奉事
안경의(安敬義)ㅡㅡ>안행(安行)ㅡㅡ>안영일(安永一)
안경예(安敬禮)參奉ㅡㅡ>안징(安徵)號伴梅堂。當壬辰亂倡義殉節。有俎豆之享ㅡㅡ>안충남(安忠男)階嘉善。在童時獨往伴梅堂殉節之所。尋屍負歸。
안경지(安敬智)參奉號松菴ㅡㅡ>영릉참봉(英陵參奉)안철(安徹)參奉號竹軒ㅡㅡ>안정길(安貞吉),안영길(安永吉)將仕郞,안유길(安惟吉),안연길(安逢吉)ㅡㅡ>승지 안대규(安大規)ㅡㅡ>증손 안눌(安訥)
안경신(安敬信)參奉贈戶曹參判ㅡㅡ>안㣧(安㣧)通德郞。안위(安衛)全羅兵使。有功於李忠武公露梁之戰。後建祠以享안위(安衛)
안㣧(安㣧)通德郞ㅡㅡ>안처선(安處善)通德郞。안취선(安就善)通德郞。以孝㫌閭。안보선(安晉善),안락선(安樂善)俱通德郞。
안위(安衛)全羅兵使ㅡㅡ>안여선(安與善)持平。안흥선(安興善)僉使。載甲子勳錄一等。안무선(安務善)訓鍊主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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