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나는 누구인가?
(5) 내 안에는 내가 모르는 나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명상여행을 통해 '내가 나라고 알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참모습은 ‘김 아무개’가 '나의 현존'으로 존재할 때 드러납니다. 그리고 '나의 현존'은 '나는 나다'라는 분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나의 참모습은 '나는 나다'라는 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나'를 '주'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비로소 존재를 얻기 때문입니다. '주'는 인간을 당신 안에 머물도록 초대하며 인간은 이 초대에 응함으로써 자신의 굴레로부터 해방됩니다. 그 좋은 예를 아브라함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아흔 아홉 살 되던 해에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다, 주, 전능한 하느님, 너는 나의 현존 안에서 살아라. 그리고 완전해져라.”
아브라함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너를 아브람이 부르지 않고 아브라함이라 부르리라.” (창세기 17,1-6)
'주'는 아브람을 당신의 현존 안으로 초대합니다. 아브람이 그 초대에 응하자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변화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람의 참모습인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나는 곧 나다' 라고 하시는 분 안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참모습은 바로 '나의 현존'으로서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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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우리는 길이 우리를 인도하는 데로 꽤 먼 곳까지 여행을 했습니다. 더 나아갈 수도 있겠지만 이쯤해서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첫 출발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김 아무개입니다.”
“김 아무개이기 이전에는 누구입니까?”
“.....”
이제 두 번째 질문이 무엇에 관한 질문인지 감(感)이 오십니까? 두 번째 질문은 ‘당신의 참모습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참모습을 드러내면 대답이 되겠지요. 그런데 참모습을 어떻게 해야 드러낼 수 있는 것일까요? 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나는 곧 나다'라는 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을 때, 거기는 반드시 '나는 곧 나다'라는 분의 보호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현존이, 인간이 원할 때마다 늘 드러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일반적인 경험으로는 그분과의 만남은 삶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인간에게 이 만남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그것에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감질납니다. 우리가 원할 때 언제나 그분에게 달려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와 '김 아무개'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 그만큼 크고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분께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구도 행위의 출발점은 '대체 그분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그분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성서에서도 그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릅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인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런지 확인해 봅시다. 우리 안에는 나에게서 일어나는 행위이면서도 내가 하는 행동이 아닌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숨 쉬는 행위나 잠자는 행위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누구나 숨을 쉽니다. 그러나 숨은 우리가 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활동입니다. 활동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행위는 이루어지는데 그 행위를 하는 주인공은 묘연하여 누가 하는 행위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숨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활동이라 우리는 숨을 쉬면서도 숨을 쉬는지 조차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숨을 의식적으로 쉬어 보십시오. 들숨과 날숨을 인위적으로 조절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얼마 못 가서 숨이 가빠질 것입니다. 그리고는 인위적으로 숨 쉬는 행위를 포기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숨을 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저절로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또 잠도 그렇습니다. 잠을 자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보십시오. 잠을 잘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잠은 저절로 일어나는 몸의 활동입니다. 자아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내버려두는 일입니다.
이처럼 나의 행위이지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행위가 내 안에 있습니다. 나의 행위이면서도 내가 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그 행위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내 안에는 내가 모르는 내가 있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생명과 직결되는 행위는 모두 내가 모르는 그 ‘나’에게 귀속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로 내가 모르는 ‘나’는 나의 생명을 주관하는 자이며 나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이 '나'를 '참나' 혹은 '진아'(眞我)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도적으로 행위 하는 나를 ‘자아'(自我)’라고 합니다.
진아는 우리와 함께 하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위는 분명히 있는데 그 행위의 주체는 찾을 길이 없어 행위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행위가 있다는 것은 반드시 주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행위는 있는데 그 주체가 감추어진 행위를 동양에서는 ‘몰종적(沒蹤迹) 행위’, ‘무공용(無功用)의 행위’라고 하여 최상의 행위로 칩니다.
사실 생명에 관한 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은 저절로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진아의 활동에 의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아가 우리 몸에서 직접 활동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진아에 접근할 길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진아의 활동은 완벽하기에 인간이 거들 여지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진아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의식하면 방해만 될 뿐입니다. 숨 쉬는 일은 의식하지 않는 것이 진아를 위한 일입니다. 진아의 활동과 자아의 행위 간에는 단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아는 자아를 배척하고 자아는 진아를 배척하기 때문에 비록 진아가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자아로서 우리는 진아에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의식적으로 진아에 접근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 있습니다. 가령 숨 쉬는 행위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숨을 잘 쉬기 위해 우리는 담배를 끊을 수는 있습니다. 또 창문을 열어 환기시킬 수도 있고 명상을 통해 마음에서 근심 걱정을 비울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걱정이 차면 숨이 짧아지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이것은 호흡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또 잠자는 행위 그 자체만을 두고 보면 인간이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잠을 잘 자기 위해서 적당한 운동을 한다거나 명상 속에서 하루를 잘 정리하는 일은 잠자는 행위를 돕는 일입니다.
이처럼 의도적인 행위이지만 진아의 활동과 연결이 되는 행위를 ‘참자아적 행위’라고 합니다. 참자아의 행위는 의도적인 활동이란 점에서는 자아에 속하나 진아의 활동과 직결된다는 점에서는 진아에 속합니다. 참자아의 활동은 우리가 진아와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이 참자아가 바로 우리의 참모습인 것입니다.
참자아의 활동을 통해 자아와 진아 간의 부조화가 조화로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자아적 행위에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우리는 하나의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이 자아적 행위일 수도 있고 참자아적 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청소는 자아적 행동일수도 있고 참 자아적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집안이 어지럽고 더럽혀져 청소해야겠다는 생각은 같겠지만 언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일을 하는 신원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집안이 잘 정돈되어 있고 깨끗하면 좋아합니다. 바깥에 나갔던 식구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이 잘 정돈되어 있고 깨끗하면 기분이 상쾌합니다. 그리고 막 바로 집안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바깥에서 집에 돌아왔는데 집안이 엉망으로 너저분하다면 짜증이 날 것입니다. 집안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수고로이 청소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짜증으로부터 집안 생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때 청소는 참자아가 한 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집안사람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청소만을 위한 청소가 있습니다. 가족들이 각자 조용히 자기 일이 몰두해있습니다. 그런데 청소할 시간이라고 해서 사람들을 모두 내쫓고 집안 청소한다고 집안을 들쑤셔 놓는다면 이것은 오히려 짜증을 낳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런 청소는 자아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성서에 자선을 하려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은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치는데 이 말씀의 뜻도 자선의 행위가 참자아적 행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일은 유익한 일이 됩니다. 그러나 겉모양은 자선인데 자아적인 행위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일은 자선이란 핑계로 자신을 도모하는 이기적인 행위로, 진아의 행위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인간은 두 개의 신원을 가집니다. 자아와 참자아가 그것입니다. 자아로서 행동하면 죽음이 오고, 참자아로서 행동하면 생명이 옵니다. 그러나 참자아적 행위는 지혜를 요구합니다.
첫댓글 참자아적 행위는 지혜를 요구함...
내 안에 몰종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분... 항상 진아의 활동에 깨어있으면서 함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