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리:2001.10.6 ~ 10.7
10.6(토)17:00심원마을-17:20대소골 갈림길-18:00비박
10.7(일)08:00기상-09:40출발-13:30반야봉 헬기장-14:15묘향대-15:00중식/출발-15:50헬기장-15::55심원,달궁갈림길-16:10산죽 갈림길-16:25무덤-17:10안심소
지리의 품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었던가? 엊그제는 설레던 마음에 꿈속에서조차 지리를 어슴푸레 보았지 않았던가. 이번 산행은 오랜만에 지리산에서 밤을 보내게 되어 그 어느 때보다도 몸과 마음이 후끈 달아올랐다.
오늘은 필O님과 사감 선생과 동행하여 지리산으로 길을 떠난다. 오전에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부식과 술안주를 챙기고 배낭을 꾸려 놓았다. 오랜만에 75L 종주 배낭이 빵빵해 제법 산꾼 배낭다운 자세가 나온다. 약속장소에 나가니 필O님은 벌써 도착해있었다. 남원터널과 휴게소를 지나면서부터 지리산 서북 능의 만복대와 반야봉, 노고단이 까마득하게 조망이 되어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오늘의 여정은 뱀사골로 반야봉에 올라 일망무제의 풍광을 즐기고 노루목에서 대소골로 하산하여 심원을 거쳐 뱀사골로 회귀하는 산행으로 코스를 잡았다. 하지만 반선 마을에 도착해 필O님과 산행에 대한 의견을 다시 나누고 곧바로 심원마을로 올라간다.
반선을 내가 처음 찾은 것은 80년대 초였다. 동료들과 뱀사골로 올라 천왕봉으로 향하던 그 당시는 인월에서부터 비포장길을 따라 버스가 털털거리며 굽이굽이 한참을 올랐고 현재에 있는 상가건물보다 훨씬 더 아래 우측으로 십여 채의 민박집과 상점이 초라한 모습으로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오지마을로서 각인된 곳이기도 하다. 그 후 뱀사골의 수려한 경관과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지리산행 때 단골 코스가 되었고 여름 피서철과 나들이로 자주 들른 곳이 되었다. 반선 마을은 반세기 전 여수주둔 14연대 반란군 대장 김지회(육사 3기 중위)가 국군 토벌대의 총을 맞고 숨진 곳이다. 반선 마을 끝 뱀사골 입구에는 전적기념관이 있는데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전투 관련 자료가 잘 전시되어 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무더운 여름과 함께 많은 피서객으로 붐비던 반선, 달궁계곡과 덕동마을은 가을이 깊어감에 다소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가을은 감동적이다. 차츰 옷을 갈아입는 불그죽죽한 단풍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을 다시 생각해보기도 한다. 가을이 되면 자연의 변화에 대해 감정이 미묘해진다. 길게만 느껴지던 20대가 어느새 훅 지나고 30대에 들어서자 쏜살같이 나이를 먹고 벌써 불혹을 넘겼다.
심원마을 입구에 주차하고 세 명의 건각은 하늘아래 첫동네 심원마을을 거쳐 대소골 초입을 따라 걷는다. 심원계곡은 반야봉과 노고단 그리고 종석대에서 발원하고 있는 여러 개의 물줄기를 만나 아래로 내려보내 달궁계곡 물과 만나고 뱀사골 물과 만나 엄천강으로 흘러나간다. 해발 800m의 지리산 최고의 깊고 깊은 산골 심원마을은 행정구역상 구례군 산동면이며 지리산 개발의 붐과 함께 현대식으로 단장을 하고 비둘기집처럼 옹기종기 모여 사이좋게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니 임걸령에서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주능이 비교적 가깝게 조망된다. 노고단은 짙은 구름에 싸여 신비감을 간직하고 있다. 심원마을은 노고단 근처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아래에 보이는 마을인데, 이곳에서 바라보니 제법 까마득하다. 영구 휴식년제 구간으로 묶인 심원-노고단구간. 언제쯤이나 이곳에서 노고단을 다시 오를 수 있을까.
대소골 계곡을 따라 걸어 오른다. 이십여 분쯤 걸어 올라가자 계곡이 갈라지는데 오른쪽은 노고단과 종석대 쪽에서 발원하는 소계곡이며, 좌측은 임걸령이나 노루목, 반야봉으로 오르는 대소골 본류이다. 반야봉에 올라 이곳을 내려다볼 때마다 노고단-삼도봉 주능을 따라서 길게 이어지는 골짜기를 보며 대소골을 동경해왔다. 6시가 되자 벌써 지리산 속은 어둠이 깊어진다. 날이 어두워지면 저녁준비가 어려워진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술에 취해, 대화에 취해, 지리산에 취해 깊은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에 잠이 깨었으나 숙취한 몸이 말을 잘 안 들어 날이 훤히 밝은 8시가 되어서야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산행을 시작한다.
인적없는 대소골은 정말 깨끗하다. 맑고 청량한 물줄기가 아담한 계곡 사이로 쉼 없이 흘러 내려간다. 대소골은 아직 단풍이 절정을 이루지 않았지만, 곳곳엔 노랗고 빨간 단풍이 함께 어우러져 가을이 깊어간다. 대소골은 정식 등산로가 없으며, 계곡을 따라 오르는 곳엔 제법 많은 수량의 물을 간직한 큼직한 소가 즐비하다. 그 소에는 낙엽이 떨어져 아름다운 풍치를 느끼게 해주었다.
다시 계곡 갈림길이 나온다. 좌측이 대소골 본류. 우측은 임걸령 방향으로 오르는 곳으로 추정이 된다. 오름길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정면으로 노고단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된비알이 시작된다. 이마에서는 계속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사감 선생은 어제 먹은 술에 그로기 상태가 되고 말았다. 해병 출신으로 운동도 잘하고 체력도 좋은 그인데, 술에는 역시 장사가 없는가 보다.
얼마나 올랐을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젠 노고단이 눈 아래로 보인다. 이쯤이면 반야봉에 거의 도달하지 않았을까. 힘을 내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뒤에 쳐진 사감 선생과 보조를 맞추어 반야봉을 치고 오른다. 반야봉 7~8 능선쯤부터 앞을 가로막는 잡목 나뭇가지들은 떨어진 체력과 함께 계속 이어져 우리에게 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몸과 배낭이 가지에 걸려 거미줄에 걸린 곤충과 올가미 덫에 걸린 짐승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톡톡히 비탐방구역을 오른 댓가를 치르고 나서야 확 트인 산정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필O님이 웃음을 머금고 반긴다.
우리가 반야봉 정상 부위에 도착한 곳은 북봉과 남봉 사이의 헬기장 안부였다. 대소골에서 4시간 정도가 소요된 것이다. 대소골에서 노루목까지는 2시간 정도의 거리인데 이곳 고도가 높은 반야봉까지는 예상 시간보다 긴 오름길이었다. 헬기장 무성한 억새 사이로 동쪽을 바라보니 천왕봉과 중봉, 두류 능선이 구름바다를 뚫고 뾰족한 모습으로 둥둥 떠 있다. 멋진 풍광이다. 휴식을 취하며 조망을 즐기다가 반야봉에서 온 십여 명의 산꾼들을 만나는데 그들을 만나 우리의 여정은 바뀌게 되었다.
남원에서 10여 명 단체로 온 산꾼 중에는 지리산 자락을 거의 훑고 다니며 지리를 꿰뚫는 사람이 있었는데 복장 자세와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로 보아 한눈에 지리 산꾼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묘향대를 들러서 이끼폭포를 거쳐 뱀사골로 내려간다고 한다. O제님은 삼도봉에서 묘향대를 갔었고, 얼마 전 반야 북봉에서 묘향대 길을 찾지 못하고 이끼 폭포를 거쳐 제승대로 빠진 경험이 있으므로 흥미를 갖고 있었다. 나 역시 묘향대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을 뿐 가본 경험이 없어, 이번 기회가 절호의 기회라고 O제님을 앞세운다. 토끼봉에서 바라보면 반야봉의 7~8부에 있는 묘향대. 평소에도 묘향대로 가는 길은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어 찾기가 어려운데 낙엽이 많이 쌓인 가을이나 깊은 눈 속의 겨울은 묘향대 길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묘향대로 가는 길은 북봉에서 달궁가는 길의 좌측의 이정표를 버리고 우측에 소로가 슬쩍 열려있는데 그곳이 바로 묘향대로 가는 길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곳에서 내려가다가 좌우 갈림길이 나오는데 어디로 향하든 묘향대로 가는 길이었다.
가파른 산 사면을 따라 40여분을 내려갔을까. 전설적으로 보이던 묘향대의 묘향암은 우리에게 신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는데 수도하는 스님은 출타 중이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니 근사한 토끼봉과 화개재가 우측으로 가까이 보였고 지리주능의 갈지자 끝에는 천왕봉과 중봉이 선명히 보였다. 또한, 중북부 능선과 남부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연결되어 광활한 지리산 자락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커다란 바위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로 수통을 채웠고,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허기를 달랜다. 시간을 보니 벌써 가을 햇살이 뚜렷하게 약해진 오후 4시가 다 되어간다. 하산길이 걱정되어 O제님과 상의 끝에 반야봉에서 가장 가까운 하산길인 심원마을로 택한다. 달궁마을 쟁기소 쪽으로 하산 길을 잡으려고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그곳은 가본 경험이 있고 반야봉-심원 구간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기도 해서 심원 방향을 하산길로 잡았는데 필O님은 이미 이 코스를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반야봉 능선 사면을 따라 뻗어있는 이 길은 두서너 차례 멋진 압권의 조망권을 형성하는데 그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고 한동안 정신이 나가기도 한다. 바로 지척에 가깝게 보이는 임걸령-돼지평전-노고단-종석대-성삼재-고리봉-만복대로 이어지는 능선을 하염없이 황홀하게 바라보며 하산길 발목을 붙잡는다.
멋진 풍광을 바라보며 하산길은 비교적 걷기 좋은 산죽 길이 무성히 오랫동안 이어지는데 상당히 정겹다. 이어지는 하산길에는 나뭇가지 숲 사이 아래로 심원마을이 힐긋힐긋 보이기도 했으며 자동차,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 하산길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려 주기도 한다. 곧심원계곡의 맑은 물의 안심소를 만난다, 이곳에서 잠시 몸을 닦고 청기O집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두 사람은 사제 간이었다. 여학생은 선생님을 사랑했었다. 세월은 흘러 그 여고생은 교사가 되었고 선생님은 대학교수가 되었다. 연수 때 우연히 사제가 다시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나이 차이가 크게 나서 여자 집안에서 심한 반대를 했었고, 결국 두 사람은 잘 나가던 대학교수직과 교사직을 반납하고 아무도 자신들을 찾지 못하게 이곳 심원마을로 숨어 들어와 두 사람만의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벌써 20여 년 가까이 되었으며 그곳이 청기O집이라 한다. 이 일화를 어젯밤 필O님으로부터 들었다.
사랑이란 정말 아름다운 것. 두 사람의 사랑은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었다. 오로지 지리산의 품속만이 그들의 사랑을 지켜주고 가꾸어 준 것이다. 이곳에서 그 주인공인 사모님을 직접 만나 보았다. 필O님과 함께 기념사진 한 장도 간직하게 되었다. 구수한 된장찌개와 산채 덮밥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와 어두워진 지리산을 뒤로 한 채 정령치를 넘는다. 그 건너편 저 산자락 아래에는 남원 시내가 아름다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고 지리산의 가을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첫댓글 반야봉의 매력을 딱 한번 알았는데 역시 멋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