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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오봉 선생의 업적 - 오봉에 의한 명문가 대우 -아주신씨(鵝州申氏)
1. 오봉ㆍ고송(孤松) 부자의 과거 급제
1600년 5월 오봉의 나이 39세 때 아들 홍망(弘望)이태어났다. 이전에 선생에게 아들이 없어 걱정하고 있었는데(오봉 23세 때 결혼) 꿈에 신령이 아기를 안고 나타나 “선행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후손에게 경사가 있다. 그대에게 기이한아이를 보내 줄 것이니,‘망(望)’을 넣어서 이름을 지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고송이 과거에 급제한 40세(1639년 12월 20일)는 오봉의사후 15년이 지나서였다. 고송 선생은 아버지 오봉의 그늘에가려그에 대한 연구도 부족했는데 여기서 고송의 업적을 간단하게 정리해 두기로 한다.33)
- 신홍망(申弘望)의 자(字)는 망구(望久), 호는 고송(孤松), 신응규(申應奎)의 증손으로할아버지는 신몽득(申夢得)이며, 아버지는 승지 신지제이고, 어머니는 함안 조씨(咸安趙氏)로 조지(趙址)의 딸이고, 부인은 영천 이씨(永川李氏) 이민환(李民寏)의딸이다.34)
- 1627년(인조5)진사시에 급제한 뒤 강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39년(인조17) 별시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1645년 승문원(承文院) 주서(注書)가 되었으나모친의 병환으로 사직, 1646년 전적(典籍), 병조 좌랑(兵曹佐郎), 정언(正言), 1647년(인조25) 예조좌랑, 전주 판관(全州判官)등을 역임
- 1623년 7월12일 승정원에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임명되었으니 말을 타고 속히 상경하라고 발급한 유지(有旨)가있다.
- 164년 4월13일 : 이조(吏曹)에서 신홍망에게 ‘봉훈랑 행 승정원 주서 겸 춘추관기사관(奉訓郞行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에 제수하는 봉교(奉敎)
- 1646년 3월13일 : 병조 좌랑
- 1646년 3월18일 : 사간원 정언
- 1647년 4월21일 : 통훈대부(通訓大夫) 예조 좌랑
- 1647년 10월 26일 : 전주부 판관(判官)
- 1652년 7월21일 : 사헌부 지평(持平)
- 1656년 1월19일 : 울산 도호부사(蔚山都護府使)
- 1659년 1월26일 : 풍기 군수
- 163년 4월1일 :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
- 164년 7월6일 : 통훈대부 종부시정(宗簿寺正) 겸 춘추관 편수관
고송 신홍망을 이야기할 때 귀양지의 일기를 쓴 �장사일록(長沙日錄)�35)을빼 놓을 수 없다. �장사일록�은 1652년(효종3) 신홍망(160~1673)이 사헌부 지평으로 재직시에 도승지 이시매(李時楳)36)가 올린 상소 중에 선현을 모함하는 내용이 있어서 이시매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당론(黨論)을 빙자한죄로 평안북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으나 유배가는 도중에 다시 홍제원(弘濟院)에서기다리라는 명을 받고, 또 경북 평해(平海)로 유배지가 바뀌었으며, 평해에서해배(解配) 되기까지1652년 9월부터 12월 21일까지의 기록이다.
이 일기는 1739년(영조15)에 신홍망의 증손인 신진구(申震龜)37)의 서문이 첨가되어 있는데 서문에서 자신의 증조부는 당시에 진언할 수밖에 없는 직책에 있었으며, 혹시 선조의 사적이 훼손될까 염려되어 유배 갈 당시에 지우들과 주고받은 수창시를 첨가하여 다시 쓴다고 서문에서밝혀 놓았다. �일기�에는 조정에서 논의되는 소식을 비롯하여지우들의 전별시와 수창시, 문안 온 사람들, 편지로 위문한사람들, 음식물을 제공한 사람들의 이름과 물명, 지나는 지역에서위문 온 수령들과 지우들, 함께 따라간 자질들의 이
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신홍망이 파직되어 고향에 도착한 지 9일 만에 나졸들이 압송하여 유배지로 출발하여 10월 18일에 한양에 도착하였을 때 다시 홍제원에서 기다리라는 명을 받고, 10월 30일에 정언(正言) 정두경(鄭斗卿)이 상소하여 결코 당론이 아니고 공론(公論)임을 강조하고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계문을 올려1월 2일에 다시 평해로 유배지가 결정되었다.
1월 3일 다시 평해로 통보를 받고 출발하여 17일에 평해에 도착했다. 12월12일 감영(監營)에서 관문(關文)이 도착하여 12월 2일에 유배에서 석방되었음을 알게 된다. 신홍망은 유배간 지 26일 만에 석방되었으며, 석방된 지 7일 만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진술하며 월송정을 비롯한 동해 바닷가의 많은 경치를 유람하게 된 것도 역시임금님의 은혜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 일기의 제목도 10리나되는 동해의 긴 백사장을 보고 장사일록(長沙日錄)�이라고제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일기�를 초록한 내용이 35쪽이며, 뒤의 21쪽은통훈대부 승문원 판교 겸 춘추관 편수관 고송부군 행장초(通訓大夫承文院判敎兼春秋館編修官孤松府君行狀草) 로 신홍망의 행장을 기록하였다. 이 문서는 �장사일록�의 뒤에 기록되어 있는 문서로 신홍망의 행장초고이다. 1738년에 신진구가 쓴 것으로 선조의 평생 사적이 민멸될 것을 염려하여 �장사일록� 뒤에 기록한다고 하였으나 신홍망의 문집인 �고송집(孤松集)�을 발행하기 위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고송집�에 실려 있는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이 쓴 통훈대부 행 사간원 정언 고송 신 선생 행장(通訓大夫行司諫院正言孤松申先生行狀) 과는 다소 문자의 출입은 있으나 대동소이 하며, 평해(平海)로 유배 간 내용도 상세히 기록되었으며, 증현손이 80여명에 이르러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2. 임진란과 공신서훈(功臣敍勳)
임진란과 정유재란(1592~1598)이끝나고 160년부터 공신도감(功臣都監)을 설치하고 공훈 심사 준비를 하여 왔는데 여기에는 많은 혼란과 논란이 있었다.임진란에서부산에서 출병한 왜병이 한양에 도착하는데(1592.4.14.~5.3) 짧은 기간이소요된 것은 도중에 조선군의 저항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난이 평정되고 공과를 평가할때 특히관아를 버리고 도망 간 관료들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애매모호하였다. 임란시 안동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함경도 길주 까지 도망간 안동부사 정희적은 도망자 신분에서 악명이 높았지만 평안도에서 관직을 제수 받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와 같이 자료의 한계와 고증의 객관성이 부족하여 공신록 자체를 다루기가 큰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선조수정실록� 38권 4장에 의하면38) 평란 후1601년 공신감훈(功臣勘勳) 시에는 공신들을호종(扈從), 정왜(征倭)로 나누었고, 1602년 가을에는 이를 다시 합록(合錄)하였다. 1604년대봉공신(大封功臣)할 때는 한양에서 의주(義州)까지 가마를 맨 사람들수가자(隨駕者) 18명을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정왜제장(征倭諸將)과병량주청사신(兵糧奏請使臣) 18명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하였다. 또한이몽학(李夢鶴)39) 토평공신(討平功臣) 5명을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봉하고 다시 또 이를 3등으로 나누어서 차등을 두고 석호(錫號=賜號)하였다. 공신 책봉에 혼란이 일어난 것은 처음에 선조 임금에 직접 따라 다닌 사람들로 범위를 너무 한정하였고, 전란 중에 공을 세운 의병장 등에게 그 때마다 관직을 주고 공신으로 대우하여 나중에 중복 문제가 발생되었다.
공신 문제의 마지막 정려는 선조 38년 1605년 4월 16일 위의 선무공신 이외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9,060명(1등, 2등, 3등)과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2,475명을 또 서훈(敍勳)했으니이 때 원종공신 개개인에게 급사(給賜)된 교지(敎旨)가 바로 이 녹권(錄券)의 원본이므로 발간된 지 오래되어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원래 공신록 이름에서 호성(扈聖)이 붙으면 선조 임금을 따라 다니며 가마, 호위, 시중을 드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인데 호성원종공신(1등, 2등, 3등) 2,475명으로늘어난것은 전국 의병조직과 활동에서 근왕병(瑾王兵)과 충의군(忠義君) 등으로 임금에게 충성을 표방한 의병 등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오봉 선생의 공신록(功臣錄)은 오봉 연보와 �오봉종택지(梧峯宗宅誌)�에 호성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두 개의 공신(호성원종공신, 선무원종공신) 각 1등으로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선무원종공신은 1등이 맞고, 호성원종공신은 2등이다. 의성조문국 박물관 소장 오봉 종가 고문서(박물관 자료번호 교지 02)에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3) 심수철, 오봉 종가의 자료 , �의성 조문국 박물관 소장자료 해제�, 2018, 65~184쪽. 백채은, 울산도호부사 신홍망(申弘望)에 대한 고찰 , �울산문화연구� 제3집, 2010, 6~24쪽.
34) 지금 오봉 종가에는 신영미로부터 15세인신홍망 때 만든 고문서 보첩(譜牒)이 있는데 여기에는 분명히아주신씨 시조로서 권지호장(權知戶長) 신영미(申英美)가 기록되어 있다.
35) �장사일록�은 오봉종가의 귀중한 고문서로서의성 조문국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36) 이시매(李時楳) : 자는 자화(子和), 호는육은재(六隱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629년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29년 정언을 거쳐 1635년부수찬ㆍ검토관ㆍ수찬ㆍ부교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39년에는 정치화(鄭致和) 등과 같이 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헌납ㆍ부응교ㆍ응교ㆍ사간 등 삼사의 요직을 담당하였다.
37) 신진구(申震龜, 1680~1754) : 자는 문수(文叟), 호는 죽애(竹厓), 본관은아주(鵝洲)이다. 1710년증광시생원에 합격하였다.
38) 류영하(국역), �백암실기(栢巖實記)�, 의성김씨 백암공파 문중, 2013, 14~151쪽.
39) 이몽학의 난은 임란 중 호서지방 최대의 민란으로 전주 이씨 서얼 출신이다. 하층민이 신분제도의 모순에서 탈피, 식량과 민생고에 시달려 경제적핍박을 받아 난을 일으켰으며, 일부 사족과 무인이 반란에 가담하였다.
위 자료는 순치(順治) 3년(1646) 6월 14일에신지제에게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 좌부빈객(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副賓客)’에 추증하는교지이다. 연호 좌측에 ‘호성 원종공신 2등(扈聖原從功臣二等)’이므로법전에 의거하여 추증한다는 사유를 기록하였다.
1605년 4월 최종 공신록에서 숫자가 너무 많은것으로 생각되는데 선무원종공신 9,060명 중에서 신분 상승 측면에서 참여하여 공을 세운 노예와 천민이 3,230명이 포함되어 숙원인 면천(免賤)이 이루어 졌다. 오봉 선생의 공신 등급은 류성룡, 이덕형, 곽재우, 권응평등이 선무원종 1등 공신이며, 류성룡의 호성원종 2등 공신과 비교해 보면 그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선무원종공신에서 1등급을 받은 수혜자에게는다음 3가지 혜택이 부여된다.
1등 ① 각자에게 일자급씩을 더한다.
② 자손에게 음관(蔭官)을 승습시킨다.
③ 부모에게 봉작한다.
2등 ① 각자에게 일자급씩을 더 한다.
② 자손에게 음관을 승습시킨다.
③ 자손 중 지원자에게는 산관 일자급을 더 한다. 만약 자손이 없는 자에게는 형제, 사위, 조카 중 지원자에게 신관 일자급을 더 할 수 있다.
3등 ① 작자에게 일자급씩을 더 한다. 자손에게 음관을 승습시킨다.
<공통 적용>
① 통훈대부(정3품) 이상 자에게는자손 형제 생질여서 가운데 한 사람을 음관일자급을 더 준다.
② 공신중 사망자에게는 원래에 따라 시행하되 일자급을 추증한다.
③ 범죄자로서산직(散職)인 자는 서용(敍用)한다.
④ 금고자나한품 서용자에게도 사노를 허용한다.
⑤ 직첩을빼앗겼던 자에게도 모두 환급시킨다.
⑥ 첩자는한품서용에 구애받지 않는다.
⑦ 공천은모두 면천한다.
⑧ 역당및 역적의 피죄자는 모두 현직관에는 복귀시키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공신녹권을 받은 자는 관직을 부여 받았고 또그 자손에게도 음관의 혜택이 주어졌다. 3품 이상자를 우대하였으며 금고자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제한을 두었던 한품서용 자에까지도 관로를 열어 주었다. 공천자는 면천되고 첩자는 한품서용에서 벗어나신분 해방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자만은 끝까지 현직 관작에 복귀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선무공신에는 여러 해 동안 왜적을 정벌한 사람이 누락된 반면, 호성공신에는하다못해 임금의 말고삐를 잡은 천예와 명령을 전달하는 내시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비판이 없지 않았다.
오봉에게는 본인보다도 위의③항에 의하여 할아버지 응규(應奎)에게 증 공조참판(贈工曹參判), 아버지 몽득(夢得)에게 증 승정원 좌승지(贈承政院左承旨)가 부여되었다.
오봉의 3촌 몽필(夢弼)에게 증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 판윤(漢城判尹)의관직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전 재산을 군량미로 제공한 공덕을 인정받은 결과이다.
3. 396주기(周忌) 불천위(不遷位) 제사 – 2020.1.8.(음력) –
현재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전국에는 특정 조상에 대하여 영원히제사를 모시는 (불천위不遷位) 가문이 수백 가문이 넘고 있다. 아주 신씨의 경우에도 오봉을 포함하여 두 개의 가문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불천위 제사는 나라 임금의 승인과 지시에 의한 것과 그러하지 않고 자손들이 스스로 결정하여 특정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불천위가 있다. 지금 전국에는 이 두 가지 불천위 조직이 나누어져 있다.40)
오봉 선조의 불천위 제사는 음력으로 1월 8일이고 2020년 1월 8일 제사는 396주기(周忌)이다. 시대의 변화와진전에 따라 불천위 제사에 참여하는 종원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현상은 어쩔 수 없지만 아직도 오봉 종가에서는 제사 음식이 차려 진 안 건물의마루, 뜰, 마당에 까지 자손들이 모이고 있다. 2017년도 제사 때는 기록으로 남겨두기 위하여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제사의 전 과정을 촬영하였다고 한다. 제사 음식의 내용, 절차 등은 옛날과 비교하여 다소 변화가 있기도하지만 전통적인 복장(도포)이나 방식은 옛날 것을 그대로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조상에 대한 제사와 관련하여 종가에는 재사완의(齋舍完議)라는 고문서가 있다. 완의(完議)는 종중(宗中), 가문(家門), 동중(洞中), 계(稧)등에서 제사, 묘위(墓位), 동중사(洞中事), 계등에 관하여 의논하고 그 합의된 내용을 적어 서로 지킬 것을 약속하는 문서를 입의(立議)라고도 한다. 이 완의는 전체 32쪽으로오봉의 증손자인 신숙범(申叔範) 숙보(叔簠), 숙연(叔筵), 숙호(叔箎)의 4형제에 대한 제사를 후손들이 잘 지켜 나가자고 약속하면서 기록한 것이다. 서문은 1717년(숙종 43년) 10월 그믐날에 분구(賁龜)가썼으며, 그 다음에 영원(鴒原)이라 하고 봉사 대상자인 숙범 등 4형제를 기록하였다.
영원은 척령재원(鶺鴒在原)의 준말로 곧 ‘할미새가 노는 언덕’을 의미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 상체(常棣) 에 “할미새가 언덕에있으니 형제가 서로 어려움을 구해 주도다.”에서 온 말이다. 그다음으로 제사를 위한 약속을 절목으로 기록하였다. 그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기제와 묘제를 네 집에 돌아가며 행하되, 제답 소출이 많게는 40석에 이르므로 그 뒤의 윤차를 따라서 제수로쓰고 1위(位)에 2석에 한하여 출급할 일.
② 유(由), 청(淸), 면(麵), 미(米), 과물(果物)을 각각준비하며, 소란할 단서가 있으면 2석 중에서 각자가 변용할일.
③ 3대(三代)의 제사는 이와 같이 나누어 쓰며, 정월 8일의 제사41)는 고비(考妣)의제사와겹치므로 기본 2석에다 1석을 더할 일.
④ 제사에 맞추어 출급하지 않으면 궁한 집은 미리 끌어다쓰는 근심이 있으므로 유사가 헤아려 지급할 일.
⑤ 유사는 매년 개체(改遞)하며 네 집이 돌아가며 맡을 일.
⑥ 기본 2석을출급하고 남은 곡식은 모아 두었다가 정 쓸 일이 없으면 논을 사서 뒷날을 준비할 일.
⑦ 혹 남은 곡식으로 솥이나 제기를 사다가 네 집이 돌아가며내어다가 쓰게 하고 제사를 마친 뒤에는 유사가 즉시 점검하여 받아들일 일.
⑧ 상사(喪事)시에는 형제간의 우의가 있어야 한 즉, 양상(兩喪)에 한하여 5석을출급하고, 자손의 상사에는 허급하지 않을 일.
⑨ 유사가 부지런하지 않을 때는 일가가 회의하여 그 경중에따라 벌할 일.그 뒤 1758년(영조34) 12월에 성구(聖龜)가 추정약조(追定約條)를더하여 완의를 처음 창설 당시의 절목을 보다 구체화하였다. 따라서 처음의 9조목이던 것이 20조목으로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은 후손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선현 봉사에 해이해지는 후손들의 기강과 유대를 다진다는 의미가 깊다.
40) 불천위 제사와는 별도로(사단법인) 임진란 정신문화선양회에 가입되어 있는 전국의 단체는 2018년 현재 47개 조직에 이르고 있다.
41) 정월 8일의 제사란 오봉선조의 불천위제삿날을 의미한다.
4. 오봉 종택(梧峯宗宅)
207년 8월 고려대학교 교수직을 정년퇴직하고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 병용(炳用,종손 泳均의 3촌)과 함께 안동 지역의 종택을 방문하고 다녔다. 하회 서애 류성룡, 퇴계 종가, 학봉종가, 안동 권씨 종가 등을 방문하였는데 구미 오봉 종손의 3촌이라고하니 모두가 알아보았다. 옛날 임진왜란 때에 오봉 선조가 이 일대를 지킨 공로가 새삼스럽게 기억나고있었다.
하회 마을은 종손 3촌의외가 동네이지만 입촌료(入村料)를 내라고 하였고, 퇴계 종가는 우리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종손(당시 70대 후반)을 만나려고 했는데 출타 중이어서 10세가 넘은 종손이 마당에서 우리를 맞았다. 마당에서 서로가 고개숙여 인사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높은 뜰과, 퇴청 마루, 사랑방으로안내를 받고 들어가니 종손이 커다란 도포를 걸치고 정식으로 서로 엎드려 큰절을 하였다. 방안에는 큰냉장고가 있었고 그 속에는 ‘비타50’이 가득하게 들어 있었다. 손님 접대를 위해 집 안채로 연락할 것 없이 이것을 준비해 놓은 것으로 보였다. 학봉 종가는 집 앞에 찾아가서 서 있는데 정원에서 우리를 본 관리인이 뛰어와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와 같이 안동 지역 일대에는 아직도 각 성씨 종가가 즐비하게 남아 있는데 이곳은 특이한 경우이고 전국의 유명한종택(宗宅)과 서원(書院) 등은 점차 사라지고 종손들도 생업을 찾아 도시의 아파트로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오봉 신지제 선생은 조선왕조 13대 명종 임술(1562년) 7월 19일 문소군(聞韶郡) 금뢰면(金磊面) 신례동(新禮洞), 지금 주소로는 의성군 봉양면 상리(현재 중리 1리)에서 태어났다. 당시그 곳은 외진 산골로 천수답에 의존하는 환경이어서 생활 환경으로는 부적합하였다. 오봉의 아버지 몽득(1539~1607)은 20리 가량 떨어진 봉양면 지내(池內)로 이사하였다. 지내(池內)는 현재 구미동 서부 ‘못안동네’이다. 이곳으로 와서 세월이 흐를수록 우수한 인재가 배출되고 생활이윤택해 졌는데 무엇보다도 오봉의 구미보(龜尾洑) 축조와 영농조건이 용이해 졌기 때문이다.
오봉 선생의 증손자 숙범(叔範, 1648~1713)이 지내(池內)에있던 종가를 헐고 현재의 종택 위치를 중심으로 한 9칸을 건립하였다.건물의 크기는 현 종택의 위치에서 그 옆의 마을 회관(경로당)까지 미쳤다고 한다. 이 시기가 숙종 재위 연간으로 가세가 가장 왕성한때였다. 정치적으로 그 이후 남인에게는 벼슬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오봉부자에 버금가는 인재가 나오지 못했다.
또한 오랜 세월 비바람에 시달린 종택은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오봉 선생으로부터 13세 종손 건수(建洙, 1868~1924)는 184년 2월 지손(支孫)들이 있는힘을 다해서 자재를 모으고 보강해서 현존 종택을 축소 개축하였다. 현존 종택 기둥에 네모난 나무토막으로기둥을 때운 것은 개축의 한 증거로 남아 있다.
오봉 종택은 그 옆에 고송(孤松) 신홍망(申弘望) 선생이관직 은퇴 후 후학 양성을 위해서 지은 낙선당(樂善堂)을건축했는데, 화재 등으로 몇 차례 개보수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날대원군이 전국을 떠돌아다닐 때 이곳에 들러 쓴 글씨 춘오재(春梧齋)를보고 1950년대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이대통령 출마 전 신씨들의 집성촌 의성 구미에 와서 하룻밤을 자면서 대원군의 글씨와 똑같이 ‘춘오재(春梧齋)’라고 써 주었다. 오봉종택은 오봉과 고송 부자분의 흔적을 간직한 채 오봉 선생의 불천위 제사를 모시면서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최근에는 종택이 비어 있다. 대구에 사는 종손이 주말마다 농사도 짓고 종택을 관리하고, 방문객을맞이하고 있다.
불천위 제사는 종택 안채에서 모시는데 공교롭게도 오봉 내외분의제사일(祭祀日)이같은 날이다. 오봉 선생은 인조(仁祖) 갑자(1624년) 정월 초8일향년 63세, 배위(配位)인 정부인(貞夫人) 함안조씨(咸安趙氏)는 경인(1650년) 정월 초8일 향년 8세로졸하셨다. 오봉 종택이 비교적 많은 유물을 현재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13세 종손 원식(元植)께서 1950년 6월 피난 직전 오봉 사당 정문 아래 주춧돌을 들어낸 뒤구덩이를
파고 큰 독에 유물을 넣고 묻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4년 3월 1일자로종택 일곽 내에 있는 건물 6동(棟)이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187호로 지정되었다.
2016년 4월30일에는 도운회(陶雲會) 정기 총회 및 학술발표회가 있었는데, 의성의 전통 있는 두 문중 오봉 선생(아주신씨)과 만취당 선생(의성 사촌 안동 김씨)이 연구 발표의 대상이었다. 필자가 누구보다도 오봉 선생과 오봉 종택에대해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오봉 선생의 자손인 본인과 오봉 선생으로부터 15세 되는 종손및 그 가족들과의 돈독한 관계 때문이다. 오봉 선조와 나의 나이 차이는 380년이며 의성 구미라는 같은터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또한오봉(1562~1624), 홍망(160~1673), 한노
(1623~1676), 숙범(1648~1713), 분구(167~1745), 도삼(1695~1742)으로 이어지는 6세까지는 필자도 종손 가족이었다. 7세 근인(1727~1791)이 도삼의 둘째 아들로서 분가ㆍ독립하였다. 우리집안에서는 이 어른을 영천 할아버지, 영천 할머니라고 한다.
영천 할아버지는 흑석동에 산소가 있고, 할머니는 친정 부근인 군위군 고로면 양지동 앞산에 산소가 있다. 그곳은 6.25 직후 팔공산 줄기의 잔비들 때문에 성묘를 가지 못했는데 지금 근인으로부터 6세 손자, 6세 손자며느리인 나의 부모님 산소가 그 곳에 있어서할머니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자손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필자가 누구보다도 오봉 종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15세 종손 병철(炳哲) 선생이초등학교 교사로서 종가 옆의 봉양초등학교에서 오랜 교편을 잡고, 종택을 지켜 왔으며, 종손의 넷 동생 중에 나와 초등학교ㆍ중학교 동창인 병용(炳用)이는 나의 친구로서 중학교 여름 방학 동안 아예 종가에서 여름밤들을 함께 보내왔다. 또한 겨울에는 종가 뒤에 대나무를 베어 연을 만들어 날리기도 하였다. 병용이와나는 남다른 우의를 다지며 평생을 살아 왔는데 2015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