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인물 | - 신섬(申暹) 아주는 경남 거제도에 있는 지명이다. 본래 신라의 걸현이었으나 경덕왕 때 아주로 고쳐서 거제에 속하였다. 아주신씨는 평산신씨에서 분적된 계통이다. 시조 호장 영미(英美)의 현손 우(祐)는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과 전라도 안렴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효행이 뛰어나 아버지가 돌아가자 여막에서 3년간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여 무덤 앞에 쌍죽이 돋아났다 한다.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고 그가 살던 마을 이름을 효자리라 하였으며 효행을 돌에 새기고 『삼강행실록』에 기록하였다. 신우는 이성계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의성군 다밀면 망경산으로 내려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우의 7세손 원록(元祿)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교수(敎授)를 지냈다. 신재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설립하자 찾아가 문하생이 된다. 동료와 장천에 서원을 세웠으며 장천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그다음으로는 군기시정 광귀(光貴)가 있으며, 그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희신(希信)은 통훈대부로 단양군수를, 차남 희충(希忠)은 하동현감을 지내고, 막내 희경(喜敬)은 어모장군에 올라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삼강행실록』에 행실이 기록된 지익(之益)의 손자 응태(應泰)는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 『사서제요』와 『천명태주도』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신섬은 자는 예중(詣仲)이며, 호는 북헌(北軒)이다. 춘년(春年)의 아들이다. 1539년(중종 23)에 나서 1594년(선조 27)에 졸하였다. 퇴계의 문인으로 관직에 나가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이르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를 거쳐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만년에는 귀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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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정보 | 문경 > 남동권 > 영순면 - 영순면(永順面)은 문경시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용궁면(龍宮面), 서쪽는 함창읍(咸昌邑), 남쪽은 풍양면, 북쪽은 산양면(山陽面)에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곳의 지명은 신라시대에는 북면임하(北面林下) 또는 무림부곡(茂林部曲)이라 불려지다가 고려 원종 때(1260년경) 태금취(太金就)라는 장군이 임하촌(林下村) 출신으로 몽고군과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다 하여 부곡(部曲)에서 현(縣)으로 승격시켜 상주(尙州)에 예속되었다가, 조선 초에 상주목(尙州牧) 영순면(永順面)으로 호칭되었다. 그 후 조선 순종 때 문경군에 예속되었고 고종 32년(1892년)에 일시 용궁의 서면(西面)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궁서면의 일부인 왕태, 오룡, 금림, 달지와 함창(咸昌) 동면(東面)의 전촌, 율곡, 말응을 병합하여 오늘의 영순면(永順面)이 되었다. 면적은 38.1㎢로 문경시 전체면적의 1/23도 안 되는 비교적 작은 면(面)이며 온화한 기후에 인심도 순박하고 좋으며 미곡 위주의 영농으로 문경시 제2곡창지대로 알려져 있다. 11개리동(里洞)으로 편성되어 있다. 이 마을들은 금림리(錦林里), 김룡리(金龍里), 달지리(達池里), 말응리(末應里), 사근리(沙斤里), 오룡리(五龍里), 왕태리(旺泰里), 율곡리(栗谷里), 의곡리(蟻谷里), 이목리(梨木里), 포내리(浦內里)이다. 면역(面域)에는 소백산맥 남사면의 말단산지와 낙동강 연안의 평지가 뒤섞여 있다. 동쪽의 낙동강 지류인 금천(錦川)과 서쪽의 영강이 남류하다가, 말응리(末應里)에서 합류하여 연안에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