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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천사랑운동 원문보기 글쓴이: 인천사랑
인천의 지명유래
인천 동구 만석동
조선시대 나라에 바치는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현물세(벼,보리,콩)를 쌓아두던 조창이 전국에 10군데가 있었다. 각 조창에 보관하였던 세곡은 정부의 수급 계획에 의해 한양으로 운반되어 갔으며, 바다로 운반되는 현물은 조선(漕船)에 싣고 서해안을 통해 인천을 지나 강화, 김포를 거쳐 한강으로 올라가 용산에 적치했었다. 인천지방 농민들이 납부하는 현물은 용산 정부창고에 운반되는데, 만약 지정 기일 내에 납부하지 않으면 고울 사또는 문책을 당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원거리 고을에서는 미리 세곡을 운반해 와서 야적했다. 야적하던 곳이 인천에는 만석동, 영종 경서동 등지인데 특히 만석동 포구에는 가장 많은 세곡을 야적하였고, 그 수량이 '만석'이라 된다고 하여 '만석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천 동구 화수동
화수동은 '화도리'와 '수유리'의 머리 글자를 따서 생긴 이름이다.
원래 인천부 다소면 화촌동이 되었다가 1906년 5월 동을 늘려 수유동, 화촌동, 신촌리 등으로 분할 되었으나, 다시 화동, 신화수리라는 이름을 거쳐 1937년 1월 15일 인천부가 정회 규정을 제정해서 동명을 개칭할 때 화수정으로 다시 부르게 된 것이다.
광복 후 1946년 동명을 화수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화촌, 화동은 이 마을 지형이 마치 장미꽃과 같다고 해서 연유된 이름이고, 신화수와 화수란 화동과 물넘이를 뜻한다.
1950년 인천시 조례 개정으로 화수동을 화수1동, 2동, 3동으로 구분했고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인천 동구 금창동
금창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 금곡리와 우각동 지역인데, 광복 후 금곡리 지역은 금곡동이 되고, 우각리 지역은 창영동이 됐다. 1985년 금곡동과 창영동을 통합하여 그 머리 글자를 따서 '금창동'이라 하였다.
금곡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 금곡리 지역으로서 '쇠골' 또는 '금곡'이라 하였는데 1946년 금곡동이 되었다. 그 후 1985년 창영동과 합쳐 금창동이 된다. 금곡동에는 현재 서적 상들이 몰려 있고 또 오래된 영화관 중의 하나인 피카디리 극장(구 문화극장)이 있다.
창영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 우각리 지역으로 그 지형이 소뿔처럼 생겼다 하여 '쇠뿔고래·쇠뿔·솔뿌리 고래 또는 우각동·우각현·송근현'이라 하였다.
그 후 일제 때인 1914년 4월 1일부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우각리로 하였다가, 1936년 제1차 부역확장때 창영정이라 하였으며, 광복 후 창영동이 된 것이다. 창영동이란 새롭게 번창하기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생긴 동명이다. 창영동에 현재 영화초등학교와 창영초등학교, 기독교사회복지회관, 창영교회 등 교육문화 시설과 많은 고 서방들이 있다.
인천 부평구 부평동
부평동은 부평군 부내면 소속의 '대정리'였는데 1940년에 제2차 부역 확장으로 인천부에 편입되어 '소화정'으로 되었다가 해방 후 부평동으로 개칭되었다.
일정 때는 일본군 병기 제조를 하는 곳이었고, 한국전쟁 때는 미군이 주둔하여 이 지대를 에스캄이라 호칭했으며 주변을 신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인천 부평구 갈산동
갈산동은 원래 부평군 부내면 '갈월리'였는데 1940년에 인천부에 편입되어 '길야정'이 되었다가, 광복 후 '갈산동'이 되었다. 현재 갈산택지 지구에 대형 아파트 단지의 주거지역과 새로운 공업지역이 혼재하고 있다.
이 동에는 갈산이란 약산이 있는데, 산 전체가 칡으로 뒤덮여 어찌나 오래 묵었는지 집 짓는데 칡 대들보를 쓸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상수도 정수장이 설치되어 한 포기의 칡도 찾을 수 없고 산처럼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또 하천으로는 굴포천이 이 곳을 지나가고 있다.
인천 중구 신포동
답동성당 맞은편 재래시장에 있는 신포동은 바다로 통한 내(川)가 있어 순 우리말로 '터진개' 또는 '탁포'(坼浦)라 하였다.
다른 뜻으로 신포동이란 이름은「터진개」의 의미에서 개포동(開浦洞)이란 뜻을 취(取)하고 새롭게 발전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었다.
인천 계양구 장기동
장기동은 본래 부평도호부 황여면의 지역으로 황어시장이 있어 황어장터, 황어장, 장터라 불러 장이서는 곳이라서 '장기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로 되고, 또 계양면 소재지였다. 1973년 김포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인천 북구에 편입된 계양면의 중심지였다.
인천 계양구 병방동
병방동은 본래 부평도호부 동명의 지역으로, 세조 즉위(1455) 후 이곳에 중익진을 성영하여 병징이 주둔 하였으므로 '병방'이라 했고 또 동면사무소가 있어 동면으로 불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부천군 계양면 병방리로 되고 계양면 소재지가 되더니, 1917년 11월 20일 장기동으로 이전하였다. 1973년 김포군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다시 인천 북구에 편입되었다.
인천 계양구 방축동
방축동은 본래 보평도호부 동면의 지역으로, 앞에 방죽을 막아서 '방죽말', 또 말등성이 같다는 '발번뎅이말'로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부천군 계양면 방축리로 되었다.
이 곳에는 금계와 같다는 '금계봉' 도당굿 터가 있는 '도당산' 쇠물을 녹여 창검을 만들었다는 '검노지산'이 있고 중골, 황쇠골, 멱골, 쇠웅골 등의 골짜기가 있다. 방죽말은 밀양 당씨의 주거지로, 정조 22년(1798) 윤광석이 부평도호부사로 있을 때, 어명으로 좌수가 된 당문보 부자가 살던 곳이다.
인천 남구 관교동
관교동이란 관청과 향교가 있는 '관청리'라는 뜻에서 생긴 동 이름이다.
원래 관교동은 인천의 구읍이었으나 현재에는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옛 면촌에는 동헌, 객사, 향청, 창고터가 남아 있었으며, 동촌에는 향교를 중심으로 문묘등이 있었다고 한다.
1967년 3월 2일자로 문학, 관교동이 분동됨에 따라 정식적인 행정동으로 출범하였다. 관교동은 고려시대 인천부의 중심지의 소재지였기에 '읍내'로 통용되었다.
근세에 와서 '읍내'와 '승기부락'으로 구분되고 1903년 8월에 읍내리, 동총승기리가 되었고 1906년 읍내리는 '관청리', '향교리', 승기리는 '대승기리', '소승기리'로 각각 분할되었다.
1914년 3월 1일 부천군 설치 후, 동년 4월 1일에 문학면 관할로 되고 1914년 11월 20일에 관청리와 향교리가 통합되어 관교리가 되고 대승기리와 소승기리가 통합되어 승기리가 되었다.
읍내 관청리는 관청이 있는 소재지를 뜻하고 향교리는 향교가 있으므로 이름하였고, 관교란 관청과 향교가 있음을 뜻한다. 승기란 옛날 고개에 사람이 살다가 폐동이 되었다가 다시 마을 기지가 이어져서 승기라 불리었다고 전한다. 원정은 원부 소재지를 뜻하고 광복 직후 1946년 '관교동'으로 개칭했다.
인천 남구 문학동
인천이 미추홀이라 불렸을 때는 삼국의 건국 초기이며 고주몽의 아들 비류가 미추홀을 건국하고 도읍지로 정한 곳이 문학산 주변의 어느 곳이라는 사료가 있다.
이는 현 문학동이 인천의 발생지임을 보여주는 자료로 지역 주민으로 하여금 자부심을 갖게 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인천의 명칭 변경이 거듭되었으나 조선말까지 인천 도호부의 지위는 지속되었는데, 그 도호부 청사가 바로 현 문학동에 있고 600여년의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분학동은 문화유적의 고도이다.
문학동은 옛날 '성촌', '남산'으로 불리다 1903년 8월에는 '서촌산성리', '남산리'로 구분되었다. 그러다 1906년 '산성리', '학산리'로 개칭되고 1914년 ' 문학리'로 개칭되었다. 일제시대 문학정으로 다시 개정되었다가 광복 직후에 문학동으로 개정되었다.
문학이란 이름은 문학산에서 유래되었는데 문학산의 옛 이름은 '남산'이 었으나 학날개 형상을 닮았다 하여 '학산'이라고 불려졌다. 이 학산 북쪽에는 향교에 딸린 '문묘'가 있어서 문학이란 이름이 붙여져 문학으로 불려졌다.
문학동은 옛 인천의 부읍 소재지로서 인천의 뿌리가 서려있는 곳이다. 지석묘가 발견된(1927)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부터 어떤 부족이 정착하여 온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이곳 문학산은 미추홀 왕국이 건국되었다는 유서 깊은 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특히 고려조의 7대어향으로 일찍이 인주로 승격되어 발전하기도 했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되면서 감리서가 생겨나 부치를 내리로 옮겨감에 따라 급격히 쇠퇴하였다. 문학동은 인천의 옛 읍으로 1914년 부천군 문학면으로 통폐합되었다가 1936년 인천부로 확장될 때 다시 인천으로 편입된 후 1996년 문학동과 관교동이 분동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천 남구 학익동
학익동이란 앞산이 '학이 날개를 펼친 형상'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이곳에 지석묘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어떤 부족의 무리가 정착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부여시대에도 문학산 기슭에 '강자골'이란 부락이 있었으며 백제시대에도 어떤 부족이 햇골부락에 정착하였다. <햇골>이란 조개의 산지를 뜻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이 해변에 가까웠던 곳을 추정된다.
조선시대 숙종 10년에는 부평 이씨 문중이 낙향하여 강자골 옆에 정착, 부락을 형성하였으며 그 문중에 제운선생이란 분이 있어 그 분의 덕망을 기리는 뜻에서 제운리라 불리게 되었다.
학익동은 옛날에는 읍내에 속한 부락이다. 1903년 학익동으로 개칭하여 사용해 오다 1936년 인천부에 편입되었고 광복 직후에 학익동으로 개칭되었다.
인천 연수구 옥련동
옥련동은 본래 인천부 먼우금면의 옥동, 한진리(현재 송도역 부근), 옹암리(현재 유원지 입구 부근) 지역으로, 1906년 5월 인천부 서면 소속의 서면 5리로 개칭하였고, 1914년 부천군 신설로 그 영역이 됐다. 동년에 먼우금, 한나루, 독바위, 송도를 병합하여 옥련리라 해서 신설된 문학면에 편입 시켰다가, 광복 후 동명 개정으로 1946년 옥련동이 되었다.
옥련동 이름의 유래는 청량산 밑에 '백옥같은 돌이 많다'하여, 옥골 또는 옥동, 옥련동이라 하였다고 하는 설과 옥앞에 있는 연못을 뜻한다는 설이 있으며, 이곳에서 학익동 쪽으로 넘어가는 길 주변은 예전에 동죽, 백합, 가무락 등 조개류가 많이 나서(또는 조개잡이 가는 길이어서) 조갯골로도 불렸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홍어회집들이 늘어서 있다.
옥련동은 옛날부터 중국과 교류를 하던 능허대가 있고 풍부한 수산물을 얻을 수 있는 지역이었다. 송도 유원지가 있어 일제시대 때부터 유명 했는데 송도 유원지 앞 바다를 매립하여 원목야적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갯벌이 없어져 최근까지도 이곳에서 풍부한 어류 패류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1천여명의 어민들 생활 터전이 없어졌음은 물론, 심각한 해상 오염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한편 인천 상륙작전 기념관, 인천시립박물관 등이 있어 연중 관람객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인천 연수구 청학동
청학동은 본래 인천부 먼우금면의 산뒷마을이며, 산뒷마을은 이곳이 문학산의 뒷편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1903년 인천부가 동리명 확정 때, 산후리라 하였고 그 후 1906년 면명을 개정할 때 먼우금면을 서면으로 개칭하고 이 지역은 서면 2리라 개정하였다.
일제시대인 1914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청릉, 뒷골, 안골, 옥터를 병합하여 '청학리'라하여 신설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되었는데, 청학이란 이름은 청릉마을의 '청'(靑)자와 문학산의 '학'(鶴)자를 따서 일본인 마음대로 지은 이름으로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의 하나로 여겨진다.
1940년 2차 행정구역 조정 때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어 일본식으로 청학정이라 하다가, 광복이 되어 1946년 부터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청학동이 되었다.
인천 서구 백석동
백석동을 '한둘'이라 불러왔는데 이는 '흰돌'이 변한 것으로 마을 뒷산에 코끼리 모양의 상산에는 흰돌이 많아 생긴 마을 이름이다. 백석동은 구한말 부평군 모월곶면 백석리였는데, 1914년 부천군 서곶면 백석리로, 1940년 인천부 운양정이 되었다가 1946년 백석동이 됐다.
1955년 검안동에 병합되고 1988년 이후 서구 백석동이 되었으며 현재 행정동은 서구 검안동이고 법정동은 서구 백석동이다.
이 마을은 조선 선조 때 부평부사를 지내고 훗날 우의정을 역임한 심수경(풍산 심씨)의 후손들이 현재까지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 마을 앞 한둘 방죽은 개결수(큰 배수로 수문 공사)를 못 막아 농경화를 못했는데, 구한말 권실 친일파 송병준이 방죽 매립에 성공하였다. 또한 백석동을 '한들'이라고도 부르는데, '큰 들'을 뜻한다.
인천 서구 시천동
시천동은 '시시내'라 불러 왔는데 이는 계양산 북맥 성황댕이를 경계로 '시냇물이 시작된 곳'이라서 생긴 이름이다. 원래 깊숙한 골짜기 벌판이었는데, 봇둑을 쌓아 논을 만드니 갯골이 시내가 되어 냇물이 비로소 시작된 곳이라 '시시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한강 서쪽의 요충지였으나, 지금은 가장 벽촌이다. 시천동은 한말에 부평군 모월곶면 시천리였다. 1914년 부천군 서곶면 시천리로 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 춘일정으로 되었다. 1946년 시천동이 되었다.
인천 서구 가정동
가정동은 '개경주'라 불러 왔는데, 이는 조선 시대 개국 공신 숙위공 조반의 별장이 이곳에 있어 '가정'이라했는데 '가정지'가 변음되어 '개경주'라 하였다.
이 가정지는 가정동 456번지에 비 지정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가정동은 한말 부평군 석곶면 가정리였다가 1914년 부천군 서곶면 가정리가 된다. 1940년 인천부 천대전정으로 바뀌고 1946년 가정동이 되었다. 1965년 석남동에 병합되었다가 1983년 신현동과 함께 가신동으로, 1988년 서구 가신동으로 되고 1990년 신현동과 분동되어 가정동이 되었다.
인천 서구 석남동
석남동은 구한말 부평군 석곶면에 속한 마을로 고잔리, 번작리 등의 작은 동네로 나뉘어 있었다. 석남동은 가정동, 신현동 등지까지 모두 속해 있던 석곶면 중에서 남쪽에 있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1914년 고잔리와 번작리를 합하여 부천군 서곶면 고작리가 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 촌상정으로 변했고 1946년 석남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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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수구의 선학동, 청학동, 옥련동, 청량산, 남구의 학익동이 모두 문학산, 즉 학과 관계되어 있다는 건 모두 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