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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10(종려주일예배)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마태복음 21:1~11
설교 김종수 목사
*무엇을 원하십니까?
인터넷에서 본 어느 목사님의 글입니다. 『“두 아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친구와 속도를 맞추기 위해 다른 아이도 빠르게 걷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둘은 서로 경쟁하듯 더 빨리 걸었습니다. 이렇게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어느새 달리기가 되었습니다. 숨이 턱에 차도록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뛰다가, 앞서가던 아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넘어진 아이 위로 친구도 넘어졌습니다. 뒤따르던 아이가 물었습니다. “너 어디로 가는 거야?” 앞서 가던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몰라, 나도....”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도 모른 채 달려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문병하목사) 여러분, 부지런히 씩씩거리며 달려오긴 했는데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지금은 우리는 어디쯤 와 있습니까?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무슨 수단과 방법으로라도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말입니다. 목적지가 서울인가요? 왜 서울로 갔습니까? 그리고 서울 맞기는 맞나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향한 곳은 이스라엘의 서울,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면서 제자들과 예수님은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성공 출세의 길인 줄 알았습니다. 아마도 탱크를 몰고 한강 다리를 넘어 서울로 입성한, 반신반인으로 숭배되고 있는 누구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 직전 두 제자,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절하며 무엇인가를 청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입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다가와서 절하며, 무엇인가를 청하였다.”
이 어머니가 두 아들들과 함께 절까지 하며 청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이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2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선생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주십시오."”
아마도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는 예루살렘 입성을 쿠데타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나라’라고 합니다. 혁명에 성공하여 선생님이 통치하는 나라가 되면 두 아들을 우의정과 좌의정에 임명해달라는 청탁입니다. 이 어머니는 예수님이 누구처럼 18년 독재, 아니 영원한 통치를 할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예수의 길과 어머니의 길은 이토록 달랐습니다. 같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데 서로 생각은 달랐던 것입니다. 사실 이 청탁은 원래 마태복음보다 먼저 써진 마가복음에 의하면 어머니가 아니라 두 아들이 직접 한 것입니다. 사실 그 어머니보다 더 노골적으로 들이댑니다. 마가복음 10장 35절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슨 청탁을 하든 반드시 들어달라는 강압적인 태도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도 종종 이렇게 기도합니다. 단지 “주시옵소서” 혹은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거나 더 나아가 “들어주셔야겠습니다”라고 거의 윽박 수준의 기도를 하곤 합니다. 기도가 아니라 거의 겁박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가 좋은 믿음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먼저 나온 마가복음을 읽은 마태복음은 후에 사도가 될 이런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가 너무하다 싶어서인지, 이 청탁을 어머니를 앞세우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속없는 일은 여자가 합니다. 요즘은 확실히 덜하지만 예전 드라마만 봐도 남자는 다 점잖고 성숙한 역할을 하고 여자는 철없는 역할을 합니다. 마태만 해도 유대인으로 거의 꼴통 수준입니다. 여하간 이 부탁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이어지는 22절 전반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청탁은 어머니 혼자 드린 것인데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로 나옵니다. 적어도 두 제자의 생각도 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사실 이 어머니의 청탁으로 다른 열 제자들이 분개한 것으로 보아 예수님을 따르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의 예루살렘 길을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길은 좌의정 우의정처럼 권력 지매의 길이 아니라 섬김의 길, 십자가의 길, 고난과 죽음의 길인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선생님의 나라’, 그리고 마가복음 10장 37절에서 청탁하는 두 제자의 말을 빌자면 “영광 받으실 때에”라고 말하듯 성공 출세의 길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두 제자는 예수님의 길이 고난과 죽음의 길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29절 이하 두 시각장애인을 치유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단지 육적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치유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30절의 ‘눈 먼 사람 둘’입니다. 의도적입니다. 두 제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두 제자를 통해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 예수님의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보지 못하는 눈 먼 이들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눈 먼 두 사람이 무리의 조용히 하라는 꾸짖음에도 예수님께 거듭 소리치며 30절과 31절에서 연속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32절입니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헬라어로 “티(무엇을) 셀레테(원하느냐) 포이에소(해주기를) 휘민(너희에게)”입니다. 어디서 들은 말 같지 않습니까? 바로 두 제자의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21절 전반부입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헬라어로 “티(무엇을) 쎌레이스(당신은 원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은 눈 먼 두 사람의 원하는 것, 제자인 두 아들을 둔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두 제자는 눈 먼 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가시는 예루살렘의 길이 어떤 길인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두 제자와 눈 먼 두 사람은 원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두 제자는 두 높은 자리 예수님은 오른 쪽과 왼쪽의 자리, 우의정과 좌의정의 자리를 원했습니다. 그들 두 제자는, 그리고 자리를 청탁한 어머니는 쿠데타가 성공하면 두 자리를 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길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잘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공 출세의 길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구한 말 한 양반 부자 할아버지가 자기 손자를 유학 보내며 값비싼 회중 시계를 선물하며 하는 말입니다. “대국에 가서 식견도 넓히고 한 일 년 있다 돌아와서 혼인하거라. 내가 한 자리 마련해 놓을테니.” 이에 손자가 “저는 나랏일에 뜻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할아버지는 “누가 너보고 정사를 돌보라고 했느냐? 그 자리가 너를 돌볼 것이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말고 가질 수 있는 것에 한계를 두어서는 안된다. 무한한 시간처럼 말이다 알겠느냐”
성공 출세의 눈이 먼 할아버지입니다. 자리의 중요성, 두 제자의 어머니도 사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손자가 유학 갔다 와서 파혼하려는 주인공 정혼자 애기씨에게서 “사내로 태어나 대의가 없단 말이오?“라는 핀잔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꼭 있어야 하오? 아! 관직에 나가는 건 질색이오. 아침잠이 많아서. 항일을 하자니 몸이 고단할 것 같고. 친일을 하자니 마음이 고단할 것 같고.” 생각해보면 우리의 갈등입니다.
알면서도 가야될 길을 가지 못하고, 욕심에 눈이 어두어 그 길을 보지 못하는 오늘 우리 삶의 이야기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그 시각장애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가시는 예루살렘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눈도 자리에 꽂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어머니의 원하는 것과 눈 먼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 어머니는 자리를 원했고 두 시각장애인은 보기를 원했습니다. 눈 먼 두 사람은 예수님의 무엇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대답합니다. 33절입니다.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눈을 뜨는 것입니다."”
무슨 눈을 뜨는 것입니까? 예수의 길, 섬김의 길, 그 아픔의 길, 그 고난의 길, 그 죽음의 길 말입니다. 그들은 눈을 떴고 그 예수를 따라갑니다. 34절입니다.
“예수께서 가엾게 여기시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니, 그들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를 따라갔다.”
그들이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그 길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처럼 입으로 주절거리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목사처럼 입으로 설교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를 따라갔다.” 그처럼 사는 것입니다.
*눈을 뜬 두 제자
오늘 말씀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본문을 채택했는데 그 전 이야기에 긴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전이해가 없이는 예루살렘 입성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눈을 뜨지 않으면 예루살렘 입성은 혁명의 입성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뜨지 않고서는 성공 출세만의 입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 가까이 벳바게라는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이 ‘올리브 산’에 있다고 마태는 말합니다. 그 유명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처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 곳입니다. 겟세마네는 ‘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기름을 짜듯 죽을 정도의 괴로운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마태가 말하려는 의도는 올리브 열매의 기름을 짜는 데서 예루살렘의 입성, 그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1절입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 마을에 들어섰다. 그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제자 둘을 어딘가로 보냅니다. 이 두 제자는 누굴까요? 우리는 마태의 의도적인 편집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 입성 직전 마가복음은 10장 46절에서 시각장애인을 이름까지 말하면서 바디매오 한 사람 임을 말했습니다. 역시 누가복음도 18장 35절에서 ‘눈 먼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만이 눈 먼 두 사람입니다. 의도적인 마태의 편집입니다.
마태는 왜 그랬을까요? 마가와 누가는 다 한 사람의 시각장애인인데 왜 마태만이 두 눈 먼 사람이라고 보도하고 있는 것일까요? 상상이야 자유지만 아마도 마태는 높은 두 자리 얻으려는 두 제자가 예루살렘 입성의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을 눈 먼 두 사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눈 먼 두 제자가 눈이 떠져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율법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에는 장애인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장애인 출입금지입니다. 물론 육적인 장애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마태는 영적인 개념으로 바꾸어 그저 높은 두 자리, 탐욕에 눈이 먼 두 제자의 눈 뜨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리를 요구한 두 제자의 어머니, 그리고 두 시각장애인,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의 두 제자, 두 제자라는 연결고리에 마태가 주고자하는 메시지가 있지 않을까요? 이어지는 2절입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가서 보면,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있을 것이다. 풀어서,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여기서 두 제자에게 예수님은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맞은편’에 주목해야 합니다. 전치사입니다. 헬라어로는 ‘아페안티입니다. ’아페‘는 ~으로부터 떨어지다’는 말이고 ‘안티’는 반대라는 말입니다. 안티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반대’, ‘적대’라는 뜻입니다. 멀리 떨어져 반대의 편에 있는 마을로 갔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탐욕의 길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한 길 반대편 마을로 두 제자를 보냈다는 말입니다.
두 제자가 우의정, 좌우정 두 자리에 대한 탐욕에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눈이 떠서 그 반대의 길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귀 한 마리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이사야 62장 11절, 스가랴 9장 9절에 나타난 이사야, 스가랴 두 예언자의 예언이었습니다. 본문 5절은 이것을 보여 줍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사실 왕의 입성에는 언제나 말이 등장합니다. 보무도 당당하게 말을 타고 입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짐이나 싣는 초라한 나귀를 타고 입성합니다. 거기다가 약하디 약한 새끼 나귀도 함께 합니다. 본문 5절의 인용에서 ‘어린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라는 말은 명백한 오역입니다. 이렇게 번역하니 ‘한 마리’로 보입니다. 분명 2절에는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있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 두 마리입니다. 그리고 실제 5절의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라는 말도 오역입니다, ‘어린’이라는 말도 원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고’를 뜻하는 ‘카이’를 ‘곧’이라고 오역한 것입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나귀, 그리고 멍에 매는 짐승의 아들인 새끼’입니다. 분명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입니다. 나귀 새끼를 ‘나귀의 아들인 새끼’라고 한 것은 나귀가 야훼 하나님을 상징하고 나귀의 아들인 새끼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7절이 말하듯 나귀와 나귀 새끼 둘을 타고 간 것입니다.
사실은 말이 좀 안 됩니다.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를 한꺼번에 타고 간다는 말입니까? 그래 어떤 신학자는 서로 바꿔 타며 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분명 성서는 두 마리를 다 타고 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상징적 의미를 말한 것입니다. 나귀와 나귀의 아들인 새끼,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인 주님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눈 뜬 두 제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권력에 눈이 멀어 막강한 권력의 우의정과 좌의정을 원했던 것에서 겸손과 온유의 나귀와 그 나귀의 아들인 새끼, 즉 말하자면 야훼 하나님과 그 아들인 예수님을 찾는 길로 눈이 떠진 것을 말합니다.
특히 눈 먼 두 사람은 예수님을 처음 부를 때에 30절과 31절에서 연달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눈 먼 사람 둘이 길 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무리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눈이 먼 상태, 사실상 이것은 당시 힘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무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 입성에서 무리의 외침과 일치합니다. 9절입니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맞은편 마을로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어떤 구원을 기다리고 바라고 있었나요? ‘다윗의 자손’이란 이스라엘 기다려온 메시아, 정치적 군사적 힘의 메시아입니다. 다윗의 나라, 그 강력한 다윗 통치를 흠모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권력을 탐하는 메시아, 강력한 힘의 메시아를 숭상합니다. 권력을 숭상합니다. 좌의정 우의정의 힘 있는 권력을 원합니다. 아직도 권력에 눈 먼 대중이고 무리입니다.
바로 며칠 후 이들이 예수님을 배반한 그 무리입니다. 유월절 명절 때마다 죄수 하나를 사면해주는 관계가 있었습니다. 사실 그런 관례는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님을 이미 밝혔습니다. 결국 복음서 기자의 의도적인 편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오래 전 마가의 창작입니다. 그렇다면 왜 복음서 기자는 그런 편집을 한 것일까요?
마태복음 27장 15절 이하에서 이 관례에 따라 총독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이 사면의 대상에 대해 말합니다. 17절입니다.
“무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바라바 [예수]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요?"
대괄호로 된 예수는 어떤 사본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본의 의도적인 편집입니다. 사실상 두 예수입니다. 바라바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 줄 중 하나를 택하라는 말입니다.
원래 바라바는 게릴라단 지도자의 이름입니다. ‘바라바’라는 그 이름은 ‘아들’을 뜻하는 ‘바르’와 ‘하나님’을 뜻하는 ‘압바’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메시아 칭호입니다. 메시아는 메시아인데 힘의 메시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는 기름 부음을 받은 겸손과 온유, 섬김의 메시아입니다. 지배의 메시아와 섬김의 메시아 둘 중 하나의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수를 믿고 있나요? 힘의 예수를 믿고 있나요? 아니면 섬김의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를 원하나요? 예수님이 두 제자와 그들의 어머니, 그리고 눈 먼 두 사람에게 물었던 질문입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사실상 이 질문을 빌라도는 무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무리는 호산나 찬양하며 예루살렘 임성 시 예수님을 환영하며 영접했던 그 무리입니다. 여기에 비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21절 이하입니다.
“총독이 그들에게 물었다.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그들이 말하였다. "바라바요." 그 때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그들이 모두 말하였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그들은 힘의 메시아를 선택합니다. 불과 며칠 전에 예수님을 “호산나!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던 그들이 힘의 메시아 바라바를 놓아주고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엄청난 반전입니다. 사실 반전이 아닙니다. 무리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이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다윗 왕조의 회복, 정치적 군사적 힘의 왕국을 원한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권력에 눈 먼 자의 외침입니다. 두 제자의 바람입니다. 다행히 두 제자는 권력의 탐욕에 멀어버린 그 눈을 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고 나귀이신 야훼와 그 나귀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지만 호산나의 무리는 그 눈을 뜨지 못하고 여전히 “다윗의 자손께” 하며 힘의 메시아 권력의 메시아를 찾았던 것입니다. 정치적 군사적인 강력함으로 다윗 왕조를 회복하는 것이 그들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쉽게 체포되고 이렇다할 저항 없이 재판 받습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당합니다.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힘의 메시아, 바라바의 메시아를 추구하는 이들 무리에겐 예수님은 무용지물입니다. 반전은 그의 무기력함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 왕조의 힘을 회복하는, 오늘 나에게 세상의 힘을 갖게 하는 메시아로 보여집니까? 보무도 당당하게 말을 타고 행군하는 메시아입니까? 강력한 권력의 예루살렘, 웅장한 예루살렘을 향하겠습니까? 아니면 예루살렘 반대편 그 반대편 맞은편 그 이름 없는 마을로 야훼를 상징하는 나귀를 찾으시렵니까? 다윗의 나라, 그 정치적 군사적 힘의 메시아를 원하는 예루살렘 맞은편, 그 반대편 이름도 없는 마을 어딘 간에 매여있는 나귀, 그 야훼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나귀의 아들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주십시오. 그리고 그 예수처럼 사람들의 멍에,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지고가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쓰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힘의 메시아, 다윗이 통치하는 예루살렘입니까? 아니면 나귀와 나귀 새끼, 야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섬기는 나라, 낮아지는 나라, 십자가의 나라입니까? 거기 부활이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