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의 인문학
공자는 52세 때 노나라의 국법을 관장하는 대사구(大司寇)가 되어 7일 만에 백성을 미혹하는 죄를 물어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처단하였다.
이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순자>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꾸민 것으로 보기도 한다. 소정묘(少正卯)라는 이름도 뜻이 ‘바름이 적은 토끼’여서 작위적인 느낌이 든다.
역사는 한쪽 편만 들지 않아서 공자의 유학이 타격을 받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 때의 분서갱유(焚書坑儒)이다.
분서(焚書)는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하여 의약, 점복, 농업에 관한 것을 제외한 민간의 모든 서적을 불태운 것을 말한다. 이때 공자의 후세 제자들이 공자의 집 벽 속에 책을 숨겨두어 일부가 보존되었다.
이 벽을 노벽(魯壁)이라 한다. 노벽에서 나온 <논어> 원본을 (노논(魯論)>이라 한다. 갱유(坑儒)는 분서(焚書) 이듬해 진시황을 비판하는 유생들 460명을 붙잡아 산 채로 매장한 것을 말한다.
다음은 마오쩌둥 시절의 문화대혁명이다. 공자를 ‘공씨네 둘째 놈(孔老二)’으로 깎아내리고 반동의 근원이라며 관련 유적을 모두 파괴하였다.
1966년 11월 북경 사범 대학교 교직원과 학생들로 구성된 200여 명의 ‘문화혁명소조’가 곡부에 와서 6,000여 점 이상의 유물을 파괴하였다.
당시 주동자는 담후란이라는 여성이었다. 이들은 곡부에서 약 10만 명을 동원하여 토공대회(討孔大會)를 열었고, 29일간 공자묘와 공자 가문의 묘 2,000여 기를 파헤쳤으며 76대손 공령이의 시체를 효수하였다.
비석 1000개를 파괴하고, 관련 서적 10만 권을 불태웠다. 다만 1949년 공자의 신성한 혈맥으로 국가의 중요 보물로 대우받고 있던 77대손 공덕성(1920~2008)이 티벳 불교의 활불 짱가후투크투, 도교 지도자 장은부와 함께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넘어가면서 공자 관련 일부 유물을 반출하여 보존되었다.
이때 장개석은 미군에게 군함을 몇 척 빌려 피난민이 아닌 국보급유물 60만 8천여 점을 반출하였다. 피난민을 태우지 않아서 장개석에 대한 비판이 있으나 대신 어마어마한 가치의 유물을 구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이다.
공덕성은 생후 100일에 송나라 인종 때부터 800년간 공자 후손에게 세습된 마지막 ‘연성공(衍聖公)에 봉해졌다. 연성공이라는 작위는 마지막 황제 푸이가 1924년 쫓겨나면서 특임관 벼슬인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라는 관직으로 바뀌었다.
공덕성은 1980년 한국에 와서 안동 도산서원 원장직을 수행하면서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휘호를 남겼다. 이 휘호는 지금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토계천 옆 길가 소나무 밑 비석에 새겨져 있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1893-1976)이 졍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1966년부터 10년간 극단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벌인 것을 말한다. 홍위병이 중심이었는데 ‘마오를 지키는 붉은 군대’로 1,100만 명에 달했으며 이들에게는 살인, 폭력, 파괴의 정당성이 인정되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파괴된 중국의 문화재는 재앙 수준으로 공자 사상과 황제 정치, 문화 에술 등 과거사를 깡그리 부정하고 그 흔적조차 없애버리고자 하였다. 이때 파괴된 것은 공자묘뿐만 아니라 서원도 전폐 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서원 9곳이 2019년 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때 중국의 방해가 아니라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지주(地主) 분자로 비판받은 제갈량의 초려, 1,000년간 내려오던 오강변의 항우묘와 우희묘가 파헤쳐져 폐허가 되었다. 송나라 판관 포청천의 묘, 남송의 명장 악비의 사당을 부수고 묘를 파헤쳐 뼈를 태워 가루로 만들었다.
악비의 동상은 중학생이 깨부쉈다. 송나라 대문호 구양수의 비석 글을 소동파가 썼는데 글을 파내고 비석을 부쉈다.
서성 황희지의 묘도 평지화되었다. 명 태조 주원장의 황릉 석비 등도 파괴되었고 황성도 철거되었다. 서유기의 작가 오승은의 옛집도 폐허로 변했다. 명나라 유학자 왕수인의 문묘도 완파되었다.
왕수인의 호는 양명이고 주자학과 대립 되는 양명학을 창시한 대학자이다. 대만 정부를 수립한 장제스가 한평생 숭배하였다. 양명학은 지식과 실천의 합일을 중시한다. 예를 들어, 효도를 실제로 행하고 있을 때만 효도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주희가 “각각의 사물에는 그 이치가 있다.”라고 하여 객관적 인식을 강조했다면 왕양명은 “선악을 구분할 줄 아는 양지(良知)가 바로 세상의 올바른 이치인 천리(天理)이다.”라고 하여 지식의 주관적 인식을 강조했다.
이는 칸트(1724~1804)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Copernican Vendung)과 같은 맥락이다. 칸트는 인식은 대상에 따른다고 생각되어 왔던 기존 관념을 역전시켜 주관의 선천적 형식이 대상에 대한 인식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다.
칸트는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도는 것에서 지구가 도는 것으로 바꿨듯이 인식의 주체를 객관으로부터 주관으로 전환하였다.
이는 유발 하라리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인간에게서 느낌을 빼면 분자 덩어리만 남는다.”라고 한 것과 묘하게 같은 느낌이다.
문화대혁명의 광란은 정말 끔찍했다. 청나라 말에 제자 양계초와 변법자강운동을 벌인 강유위의 시신은 조리돌리고 머리가 잘려 청도시 전람회에 전시됐으며, 청나라 개혁가 장지동의 시체는 나무에 매달아 개가 뜯어 먹도록 하였다.
무형문화재도 피해를 보아서 100가지 이상의 요리를 3일에 걸쳐 먹는 만주족과 한족의 황실 요리비법인 만한전석(滿漢全席), 소림사의 궁푸, 경극 등도 소실 되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이성적인 논리보다 프로파간다(propaganda, 선동), 우격다짐, 억지 생떼, 진영논리가 우선되고 목소리가 큰 놈이 이기는 아수라장이었다. 그 결과 문화 선진국이었던 중국은 미개사회로 전락하고 모두가 못살고 모두가 무식하게 되었다.
사문난적과 분서갱유와 같은 극단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대에도 반달리즘(Vandalism)이 재현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